486. 존귀한 존재 (1)
선택받았다.
팬은 한 번도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그리 말했기에. 누구보다 젊고 아름다웠던 어머니가.
또한, 어머니는 말했다.
사실 자신은 잊혀진 왕가의 후손이며, 팬 역시 왕족. 즉, 왕자라고 말이다.
명백한 사실일 터였다. 그게 아니면 어머니께서 아침 밤낮, 매일매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말할 리 없지 않은가?
나는 왕족, 너는 왕자, 나는 왕족, 너는 왕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이를 비웃으며 돌을 던질 뿐이었지만,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세상이 죄악으로 물들고, 잘못돼 잠시 이상하게 변한 것뿐이라 말했다.
째깍째깍 때가 온다면 필시 왕자가 나타나 잘못된 세상을 벌하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꿈에서 그 광경을 봤다며 말이다······. 그 누구보다 환하게 빛나는 왕자와 그를 따르는 36명의 위대한 존재, 수많은 사도(使徒), 위대한 전쟁. 그로 인해 시작될 새로운 시대를 말이다.
‘그만해 미친년아! 왕자는 무슨 왕자야!! 헛소리 그만해!’
팬은 그 말을 믿었다.
그게 아니면 어찌 자신이 굶주림과 추위, 폭력, 가혹한 노동, 그보다 더 가혹한 세상에서 살아남았단 말인가?
어찌해 아무런 흑마법도 배우지 않고 가장 위대한 계열. 창조계열을 자유로이 다뤄 손가락이 될 수 있겠냔 말이다.
어머니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왕자였다. 왕자!
다른 손가락도 쉽사리 하지 못하는 악마를 소환하고, 지금 제압하고 있지 않은가?
수십 년 동안 준비하고 준비한 대못과 갈고리로 말이다.
악마의 붕 뜬 다리와 양옆으로 쫙 벌어진 팔, 갈고리에 의해 찢기기 일보 직전인 살가죽이 그 증거!
이건 벌이였다. 벌!
자신이 소환한 악마인 주제에, 자신의 신하인 주제에 다른 놈에게 먼저 인사하고, 예의 바르게 말한 벌!
이상하잖아?! 분명 자신이 왕자인데! 위대한 왕자! 세상을 벌할 왕자! 엄마가 말한 왕자! 씨발! 씨발!! 근데, 자신이 아니라 저 같잖은 해결사에게 인사하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마치-
-빙글!
팬은 만든 어둠의 구속구와 고문 기구에 속박된 악마가 고개를 180도 돌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꿰뚫리고 붙잡히기만 할 뿐이었는데.
당연한 결과였다. 팬이 수십 년 동안 모은 아이들의 영혼을 거의 다 사용한 거였으니.
이 정도 재료라면 무식한 인육 요리사는 물론, 교활한 퍼펫 영감탱이, 어쩌면 피리 부는 사나이도 제압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 괴물마저도.
술식을 위한 조건이 까다롭긴 하지만 그만큼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철저하게 준비하였는데, 악마의 지혜를 받으면서까지 준비했는데, 막상 눈앞의 악마는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180도 고개를 돌린 상태에서 성기사를 불태워 해결사를 구해줄 만큼. 용서할 수 없었다.
“내가 왕자야······. 내가 왕자라고······!”
팬이 나직이 웅얼거렸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어떠한 외침에 뒤지지 않는 악이 받쳐 있었다. 왜냐면 자신이 왕자였으니까. 만약, 아주 만약 자신이 왕자가 아니라면-
“-으아아아아악!! 날 무시하지 마!!”
팬이 눈, 코, 입, 귀에서 피를 흘리며 소리쳤다. 어른조차 감당하기 힘든 고통임에도 그의 집착이 이를 무시하게 해주었다.
“내가 너의 왕자다! 내게 복종해! 내가 무릎 꿇으라고!!”
촤르르르륵······텅!!
빈틈없이 꿰어진 쇠사슬 갈고리가 사방에서 당겨지며 한눈을 판 악마를 잡아당겼다.
장작처럼 타버린 악마의 육신은 당장이라도 갈가리 찢어질 것 같았다.
제아무리 악마라도 현세에 강림했다면 현세의 법칙에 구속됐으니. 거기다 소환된 것도 실체는 있으나, 본체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소환했으니 확실했다. 능히 제압할 수 있었다.
[왕자께 사과하지.]
사방에서 소리가 메아리치며 팬에게 말했다. 뇌를 직접 때리는 듯했다.
소리가 울리자 악마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돌렸던 방향을 따라.
뚜두둑.
360도 돌아버린 목. 상당히 기분 나쁜 장면이었지만, 팬의 입꼬리는 올라갔다.
자신을 왕자라 불렀으니까. 악마가 말이다. 역시, 자신은 왕자였다. 왕자. 왕자. 왕자······.
[덕분에 만날 수 있었어. 인사하지 숯검댕이 왕자.]
팬은 굳었다. 방금 저 악마가 뭐라 지껄였냐 말인가?
[다른 이름이 좋나? 빗자루 왕자? 쪼그린 왕자? 고환암 아니면 피부암에 걸린 왕자?]
팬의 두 눈은 흔들리고 호흡은 거칠어졌다.
악마가 특별한 마법을 건 것은 아니었다. 그저 특기인 혀를 움직여 과거의 기억을 살짝 들춰준 것뿐.
떠올리기 싫은 끔찍한 기억을 말이다.
어둠을 이용해 약간의 도움을 주자 효과는 배가 됐다.
[자, 자, 경배해라! 여기 왕자님이다! 빗자루 든 숯검댕이 왕자님!]
[킥킥킥킥!!]
[왕자래? 지가? 킥킥킥킥!]
[킥킥킥! 배꼽 빠지겠다!]
[아냐! 아냐! 여기 못 쓰는 빗자루로 왕관을 만들어 씌워보자! 왕자 같을 거야!!]
[어울리네! 어울려!! 진짜 왕자님이다야!]
[킥킥킥킥킥킥킥킥! 아, 진짜 죽겠다!]
[야! 왕자님 바지 벗겨봐. 저 새끼 불알 밑에 사마귀 났거든! 보고 싶은 사람 없어?! 보고 싶은 사람!]
[보자! 보자!]
[바지 벗기자! 팔 붙잡아!]
[운다! 울어!]
분명 어둠은 팬의 통제 아래일 텐데, 일부의 어둠이 멋대로 튀어나와 어린애 형상으로 변해 팬 주변을 에워싸며 소리쳤다.
그림자는 아이를 형상해 그런지 몹시도 작고, 잔혹했다.
요동치는 팬의 감정이 이를 간접적으로 말해주었다. 마치, 칼로 수천 번 심장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팬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우리의 왕자님에게 경배를! 불알 밑에 사마귀가 난 폐병쟁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팬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둘러싼 아이 형상을 한 그림자를 산산이 부숴버렸다.
원초적인 분노와 굴욕, 슬픔, 고통, 증오, 자기혐오.
올리버가 인육 요리사 바로 앞에서 그레텔의 심장을 꿰뚫었을 때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팬은 눈에서는 피눈물을, 입에서는 피가 섞인 침을 흘리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림자-!! 흡수해버려!! 경배 따윈 필요 없으니까! 인정 따윈 필요 없으니까! 흡수해버려!!]
팬은 그리 말하며 양손으로 대량의 영혼을 추출해 자신의 크리처를 지원했고,
어둠과 하나가 된 팬의 그림자는 지옥의 기운을 머금은 어둠을 이용해 악마를 구속한 대못과 쇠사슬 갈고리를 잡아당겨 악마의 육체를 갈가리 찢어 먹어치우려 했다.
이것이 팬의 목적이었다.
재료에 따라 흑마법의 위력 역시 무한히 커질 수 있으니, 인간의 영혼을 넘어 악마의 영혼과 육체를 사용한다면 절대 무적의 크리처를 만들 수 있을 테니.
그전에 자신이 왕자임을 증명하고, 자신의 재료가 되는 게 얼마나 영광인지 알려 주려 했으나, 이젠 필요 없었다. 이젠 다 필요 없었다.
“찢겨져라!!!”
촤하하하하학━━!!
분노한 팬이 외쳤고, 악마를 구속한 어둠이 갈가리 찢어졌다.
너무나도 쉽게 찢어져 어떠한 절망도 고양감도 느낄 수 없었다. 느낄 수 있는 거라고는 허무함, 압도적인 격(格)의 차이일 뿐이었다.
“어······?”
팬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런 소리를 내본 게 실로 얼마 만인지.
그러나 이건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악마의 수많은 이명 중 하나가 바로 불과 어둠의 왕.
팬이 자신의 그림자를 이용해 주변의 어둠을 장악한 건 애당초 악마의 허락이 있었기 가능한 거였다.
이를 증명하듯 팬의 손아귀에 있던 어둠은 언제 그랬냐는 듯 통제에서 벗어나 팬의 그림자를 뱉어버렸다.
“······!”
씹던 껌처럼 뱉어진 그림자는 악마 때문인지 온몸이 찢어지고, 불탄 듯한 흔적으로 너덜너덜했다.
그럼에도 불구 악마에게 소리 없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뛰어난 크리처일수록 힘의 우열과 생존을 중시하는 법인데 이례적인 경우라 할 수 있었다.
[상당히 많은 축복을 내려줬군.]
그림자가 내지른 단검에 명치를 찔린 악마가 말했다. 분명, 치명상. 그러나 당황한 건 그림자였다. 꼼짝없이 붙잡혔기 때문.
팬의 그림자는 도망치기 위해 손을 빼려 했으나 뺄 수 없었고, 발버둥 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 주인인 팬 역시 멍하니 주저앉고 말았다.
전의를 상실한 주인과 그런 주인을 버리지 않고 지키려는 크리처.
창조계열 흑마법에 조금이라도 조예가 있는 자라면 놀라 까무러칠 광경이었다. 실로, 악마의 축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나도 축복을 주지.]
악마가 명치를 꿰뚫린 상태로 말하더니 탄화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나뭇가지처럼 말라비틀어진 손가락 끝에는 성냥의 불씨와 같은 미약하지만 선명한 붉은빛이 깃들며, 작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없는 입으로 소리를 지르는 팬의 그림자. 도망치려고 했으나 도망칠 수 없었고 결국, 연기를 내뿜는 손가락이 이마에 닿고 말았다.
치이이이······.
들릴 듯 말 듯 한 아주 작은 소리. 팬의 그림자는 경련을 일으키며 그제야 자기 주인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혼자가 돼버린 팬이 반쯤 텅 빈 눈으로 중얼거렸다.
“나, 나는······. 나는······왕자야. 왕자······. 그, 그, 그게 아니면 왜······. 악마가 날 살려주고······힘을······.”
충격으로 공황상태에 빠진 팬이 웅얼거렸다. 텅 빈 눈과 요동치는 감정 탓에 저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악마에게 하는 말인지, 말인지조차 헷갈렸다.
악마는 그런 팬을 내려다보며 뭐라 말했다. 아니, 말하는 것 같았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악마를 보는 팬의 시선과 잠깐 올리버를 본 눈을 통해 팬이 악마와 대화를 나누는 거라 추측할 뿐이었다.
탐욕으로 다시 빛나는 팬의 눈빛. 악마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팬은 어둠에 삼켜져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앞의 성기사와 달리 무사할 것 같았다.
팬이 사라지자 다시 적막이 내려앉으며, 사방에 어둠이 옥죄여 왔다.
올리버는 혹시 몰라 주변을 둘러봤지만 역시나 출구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이곳이 폐광산과 연결된 굴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왠지 그냥 아닌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벅. 저벅. 저벅.
악마가 몸을 돌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 어둠을 밝히는 유일한 빛인 그가 다가오자 주변이 점점 밝아왔지만, 동시에 압박감 역시 높아졌다.
거대한 납이 하나하나 추가되는 느낌.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악마와 적정 거리가 됐을 때 올리버가 대뜸 이름을 물었다.
“대화에 앞서 성함을 여쭤보는 게 예의라고 배워서요.”
[······그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올리버입니다. 란다 해결사로는 데이브 라이트란 이름을 쓰고, 마탑에서는 제논 브라이트란 이름을 씁니다. 상대의 이름을 묻기 전 본인 이름부터 밝히는 게 맞는데, 실례했습니다.”
오른팔에서 극심한 작열통을 느끼는 올리버가 재주 좋게 말했다.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을 듯 아프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지만, 본능이 정신 차리라고 말했다. 아니면 후회할 거라고.
“그대의 성함이 어찌 되십니까?”
[······.]
“······불평등, 파괴, 쓸모없는, 불과 암흑의 왕, 문란한 전도사라 들었습니다. 이렇게 불러도 되겠습니까?”
[······대부분 절 가리키는 명칭이 맞습니다.]
“······?”
[불평등, 파괴, 쓸모없는, 불과 암흑의 왕, 어둠을 밝히는 자. 모두 절 가리키는 이명이지요. 다만, 문란한 전도사라는 이명은 불쾌합니다.]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흑마법사의 눈을 발동하고, 곧바로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거뒀다. 역시나 맨눈으로 태양을 보는 것 같았다.
“실례했습니다. 반사적인 거라······. 근데, 왜 싫으신 거죠?”
올리버가 호기심 반, 시간 끌기 목적 반으로 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시간을 끌어야 했다.
[문란하다는 말을 듣고 왜 좋아해야 할까요?]
“······아.”
올리버가 곰곰이 생각하다 납득해 버렸다. 너무 당연한 거라 왜 자신이 이 질문을 했는지조차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악마라 그런 것일까? 너무 차별적인 생각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럼, 성함은?”
올리버가 사과하며 재차 물었다. 악마는 잠시 침묵하더니 대답했다.
[······지금은 불타버린 자라고 불립니다. 존귀한 존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