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 의식의 현장 (1)
‘이건······. 예상 밖인데.’
폐광산의 최하층부. 갱도 끝자락인 막장에 도착한 올리버가 생각했다.
폐광산 내부 지도에 따르면 분명 여기가 끝이라 하였는데, 이곳에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기이한 굴이 파여 있었다.
단단한 암벽을 손으로 직접 판듯한 거대한 굴이 말이다.
그 규모는 척 보기에도 상당해 이동에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누군가 의문을 빛냈다. 지하 깊숙이 자리 잡은 단단한 암벽을, 이 정도 규모로, 그것도 총독부 몰래 팠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뿌글뿌글이 판 거군.’
올리버는 암벽이 파인 부분을 살피며 추측했다. 뒤틀린 손자국. 필시, 뿌글뿌글이라 하는 살덩어리 크리처가 일일이 판 것일 터.
그 크리처의 힘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크리처가 판 것일 겁니다. 아까 전 우리가 상대한······. 여기 손자국을 보면 그것 외에 없습니다.”
핑크맨 팀장 리키가 마법 총기를 어깨에 짊어지며 암벽이 패인 부분을 가리켰다.
그는 흑마법사가 아님에도 뛰어난 관찰력으로 이를 한 번에 꿰뚫어 보았다. 거기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 굴을 어떻게 팠느냐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팠느냐는 겁니다.”
성기사가 대꾸했다.
“방향?”
“예······. 이 굴이 난 방향. 퍼스트 스텝이 있는 남쪽 방향입니다.”
굴을 가리킨 리키의 말에 다른 핑크맨과 성기사는 각자 지도와 나침반, 광산에 표식을 확인해 리키의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보았다. 리키의 말은 사실이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일에서는 우연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거대하고 끝을 알 수 없는 굴은 퍼스트 스텝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리키의 말에 올리버가 동의하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젊은 나이에 팀장이 된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였다.
허나,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리키가 대단한 것과 별개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으니.
홍인 흑마법사와 팬이 의식을 진행하고, 물은 붉게 변하며, 몰래 판 거대한 굴이 도시 쪽 방향으로 나 있다는 건, 도시 밑에서 의식이 진행된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의식에 필요한 제물로 바치기 위해, 혹은 도시 한복판에 악마를 강림시키기 위해,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이거나.
뭐든 그 끝은 끔찍한 대재앙(大災殃)으로 귀결되었다.
“후우······. 이거 큰일이구만, 도시까지 뻗은 거라면 거리가 상당할 텐데.”
안셀름이 상처 부위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곳 폐광산과 퍼스트 스텝의 거리는 꽤 있었다.
당장 여기 사람들도 차를 타고 이곳으로 왔으니.
물론, 뛰어서 못 갈 거리는 아니었으나, 문제는 시간과 체력.
모두 초인과 같은 육체를 가졌다 해도 두 발로 뛰어가도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며, 그 상태로 팬과 홍인 흑마법사를 상대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굴속의 짙은 어둠에선 강렬한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져 섣불리 들어가기 꺼려졌다.
그렇게 모두가 머뭇거리는 그때, 올리버가 손을 살짝 들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잠시 맡겨주시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올리버에게 꽂혔다.
“무슨 방법이 있는 거요?”
“예, 확실하진 않지만요.”
프로답지 못한 대답이었지만, 안셀름은 기꺼이 해보라고 했다.
선택지가 마땅치 않았고, 뭣보다 올리버의 실력을 봤기에.
허락을 얻은 올리버는 딱. 딱. 쿼터스태프로 바닥을 짚으며 앞으로 나아가 대뜸 굴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을 집어넣자 예상대로 굴속의 어둠이 올리버의 손을 휘감아 물감처럼 뒤덮어 삼키려 했다.
미세하게 느껴지는 인력(引力). 팬의 그림자였다. 참으로 대단했다.
질병-약화계열 흑마법이 깃든 핏빛 단검에 여섯 번이나 베이고 찔렸음에도 아직까지 이런 힘을 낸다니. 허나, 그 이상으로 대단한 것은 그림자의 충성심 그 자체였다.
크리처란 불안정하고, 인공적이긴 했지만, 뭐가 됐건 생명체의 성질을 가져 경우에 따라 멋대로 행동하고, 더 나아가 주인을 공격하기도 했건만, 팬의 그림자는 몸 상태가 나빠졌음에도 주인인 팬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어둠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책에 의하면 이런 경우는 둘밖에 없다고 했다.
주인의 힘이 크리처보다 압도적으로 강해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가, 아니면 크리처를 잘 길들였던가.
뭐가 됐건 술사의 실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올리버는 악마 소환 의식과 별개로 이 모든 일을 벌인 팬의 얼굴이 점점 보고 싶어졌다.
도대체 누구기에 이런 실력을 갖췄고, 불안정한 악마 소환 의식을 성공시키며, 왜 악마를 소환하려는 건지 모든 게 궁금했다.
올리버는 자신의 호기심을 위해 손에 힘을 줬다.
“어둠을······. 잡았어?”
올리버를 살펴보던 핑크맨 중 하나가 놀라 말했다. 그의 말처럼 올리버는 형태가 없는 어둠을 붙잡아 쥐었다. 흡사 멱살 잡듯.
심지어 그 상태로 자신의 의지를 투여해 어둠에 통제권을 행사, 그림자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어둠을 매개로 내부를 탐색해 그중 가장 끝자락을 찾아 좌표까지 찍었다.
어둠을 지배하던 팬의 그림자는 이를 필사적으로 막았으나, 올리버는 특유의 장악력으로 이를 무시하곤 앙상히 마른 팔을 홱 하고 잡아당겨 어둠 속 공간을 찢어버렸다.
부욱······!
어둠이 찢어지며 허공에 틈새가 생겼고, 그 틈새 사이로 굴속의 어둠과 결이 다른 또 다른 어둠이 나왔다.
올리버는 태연하게 그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아, 다들 들어오셔도 됩니다.”
혼자 들어간 올리버가 뒤늦게 다시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며 말했고, 일행 모두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
“여기는······?”
“굴 가장 안쪽입니다.”
먼저 어둠 틈새로 들어온 올리버가 마력과 감정을 뒤섞은 검은빛 광원(光源)을 만들며 답했다.
검은빛 광원은 모순적이게도 검은색 빛으로 어둠을 물리치며 주변을 밝혔다.
그렇다 해도 반경 10미터 정도로 한정적이었지만.
10미터 이상부터는 장막처럼 어둠에 가려져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사람의 영혼을 사용했기에 올리버의 눈으로도 한계가 있을 정도였다.
“사방이 시커멓구만. 어디로 가야 할지.”
짙은 어둠으로 인해 방향 감각을 잃은 핑크맨들이 말했다. 개중 몇몇은 투덜거리는 대신 나침반을 꺼내 방향을 확인하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나침반이 전부 먹통이 되었다.
하나 같이 자기 꼬리를 쫓는 개처럼 어지러이 빙글빙글 돌뿐이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올리버의 수통 안쪽에서 무엇인가가 통통 두들겼다.
올리버는 호기심에 반사적으로 수통을 열어보았고, 수통에서 개구리들이 튀어나왔다.
개굴. 개굴. 개굴.
수통, 그것도 뚜껑이 닫혀 안과 밖이 완전히 분리된 수통에서 개구리가 튀어나오자 주변의 사람들은 흠칫 놀랐다.
유일하게 올리버만이 수통에서 쏟아져 나오는 개구리들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2번째 징조(徵兆). 개구리 떼가 창궐한다.’
올리버가 악마의 서적에 적힌 내용을 되새길 때, 수통 입구를 앞발로 잡아 올라온 개구리와 두 눈을 마주쳤다.
개, 고양이, 말 심지어 키메라조차 올리버와 마주할 때면 모두 경기를 일으켰건만, 개구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한쪽 앞발을 자신의 가슴에 대곤 고개를 숙였다. 마치 인사하듯이.
콱!
그 모습을 보자마자 올리버는 흥미가 동해 수통을 빠르게 닫으며 개구리가 도망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나중에 연구해보기 위해.
“아무래도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올리버가 수통을 챙기며 성기사들에게 말했다.
성기사들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성법을 사용해 주변을 완전히 밝혀 방향을 확인하려는 찰나, 주변을 뒤덮은 어둠 한쪽이 커튼처럼 벌리며 길을 열어줬다.
그 끝에는 미세하지만, 불빛이 보였다.
불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올리버와 일행들은 본능적으로 저곳이 자신들의 목적지임을 확신하곤, 말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오, 신이시여······.”
불빛 앞에 도착하자 누군가 경악하며 말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 정도로 기괴하고 불경하였기에.
백 명은 족히 될법한 사람들이 거대한 모닥불에 장작처럼 불타고 있었으며, 그 주위로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듯한 사람들이 빙글빙글 돌며 북을 치고, 춤을 추고 있었다.
너무나도 기괴하고 일정해 사람이 추는 게 아닌 것 같았는데, 실제로 그러하기도 했다.
춤추는 사람들 머리 위로 뭐라 정의할 수 없는 흐릿한 존재들이 머리끄덩이와 팔을 붙잡아 억지로 춤추게 하고 있었으니.
핑크맨과 성기사는 이들을 보진 못했지만, 올리버만은 희미하게나마 그 존재들을 볼 수 있었다.
평소였다면 저게 무엇인지 관심을 가졌겠지만, 그보다 더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가 있어 올리버는 곧바로 관심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존재란 다름 아닌 의식(儀式)의 한가운데 있는 소녀였다.
얼굴과 팔다리는 삐쩍 마르고, 배만 비정상적으로 부푼 홍인(紅人) 소녀.
“아름답지?”
악몽과도 같은 풍경 속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 소년을 볼 수 있었다.
주황빛 머리 위에 워보넷(Warbonnet)을 쓰고 자신의 몸에 맞지 않은 크고 화려한 왕좌에 앉은 소년이 말이다.
짝. 짝. 짝.
“여기까지 온 거 축하해. 솔직히 한참은 지난 후에야 올 줄 알았는데, 칭찬해 줄게.”
***
소년이 손뼉 치며 말했다.
어른이 아이에게 칭찬하듯, 거만한 아이가 어른을 칭찬하듯.
모두 갑작스러운 소년의 등장에 웅성대는 그때 핑크맨 팀장 리키가 소년이 앉아 있는 왕좌를 보며 중얼거렸다.
“저건······. 프라겐 왕국의 왕좌?”
“뭔가 아시나요?”
“40여 년쯤 멸망한 대륙 중앙 소왕국입니다. 왕국이 멸망하며 왕좌도 같이 사라져 암시장을 떠돌고 있다는 소문만 들었는데······.”
“오오······. 역시 핑크맨! 하는 일이 구리니까. 구린 일도 잘 아네? 내가 다시 박수 쳐줄게.”
짝. 짝. 짝.
소년은 비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거만한 말투로 손뼉 쳤다.
소년이 손뼉 치자 주변 어둠 속에 숨어있던 심벌즈를 든 원숭이 인형들이 끼익 끼익 울며 밖으로 나와 팬을 따라 심벌즈를 치기 시작했다.
채앵. 채챙. 채앵. 채앵······!
심벌즈는 그 거대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딱히 귀에 거슬리진 않았다.
“네가 팬인가?”
크리처를 본 성기사 안셀름이 검을 겨누며 소년에게 물었다.
“그래, 늙은이. 내가 팬이야. 영원한 아이 팬. 그 외에도 검은손의 손가락이며, 네버랜드의 주인, 무엇보다 왕자기도 하지. 절하고 싶으면 하라고.”
“당장 의식을 멈춰라.”
팬의 장황한 설명을 무시한 안셀름이 바로 본론을 말했다. 팬은 투덜거릴 뿐이었다.
“내가 이래서 늙은이들이 싫다니까······. 사람 말을 제대로 안 듣고, 제 할 말만 하지. 심지어 그마저도 무리한 거고. 그 낡아빠진 뇌로 생각이란 걸 해봐. 그만두라고 그만할 생각이었으면, 내가 이런 일을 벌였겠어?”
일리 있는 말. 허나, 그다음 말은 다소 동의하기 힘들었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 하지 말고, 저 의식이나 구경하는 건 어때? 여기까지 온 상으로 나랑 같이 악마가 소환되는 걸 보게 허락해 줄 테니.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잖아?”
올리버는 거대한 모닥불과 춤, 삐쩍 마른 소녀 등 의식의 현장을 다시 살펴봤다.
흥미로운 광경이긴 했지만, 아름답냐면 그건 좀 아닌 거 같았다.
뭐, 가치란 상대적인 것이긴 했지만.
‘홍인들을 제물로 쓴 건가?’
올리버가 담담히 생각했다. 악마를 소환하려 했으면 당연히 이런 리스크도 예상했었어야 했으니.
그럼에도 의문이었다. 악마 소환이라는 게 조건만 맞춘다고 이렇게 성공하는 게 아닌데 말이다.
“리암!”
안셀름이 냅다 동료의 이름을 불렀다. 그 말에 붉은 머리 성기사가 도끼를 뽑아 들더니 의식이 행해지는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저 도끼로 의식 자체를 파괴해 물리적으로 멈추려는 것.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으나, 팬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쉬이이이이······!!
성법이 깃든 도끼로 의식 자체를 파괴하려 하자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검은 연기가 나와 바람 소리를 내며 도끼를 멈춰 세웠다.
성기사는 성법을 발동해 저항했으나, 허공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가 이를 무시하더니 그를 가볍게 튕겨냈다. 마치, 귀찮은 날파리를 내쫓듯.
그 모습에 모두 힘으로 의식을 멈출 수 없음을 직감했다.
성기사들은 바로 팬을 치기 위해 발을 뗐고, 그때, 팬의 등 뒤에서 원숭이들이 우끼끽 울며 요란하게 심벌즈를 치기 시작했다.
채앵······!!
거대한 심벌즈는 서로의 소리에 공명했고, 그 요란한 소리에 성기사와 핑크맨은 일제히 멈추며 양쪽 귀를 틀어막았다.
채앵······!!!
두 번째 심벌즈가 울리자 몇몇은 균형감각을 상실. 비틀거리다 넘어졌다.
채앵············!!!!
세 번째에는 뼈와 살, 혈관이 울렸으며, 마지막 네 번째 심벌즈가 울리려는 찰나, 올리버가 그림자를 조작해 거대한 입을 만들더니 괴성을 지르게 했다.
원숭이가 치는 심벌즈의 소리에 맞춰.
············!!
보이지 않는 음파가 공기를 뒤흔들며 심벌즈의 소리를 상쇄시켰다.
올리버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그림자를 조작해 팬의 후방에 있는 원숭이 인형을 거대한 그림자 입으로 집어삼키게 했다.
“헤······. 왜 날 바로 안 노린 거야? 해결사 나부랭이인 주제에 정말 아이는 안 죽이자는 주의야?”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때는 반사적인 거라서요······. 어차피 안 통했을 거고요.”
“오, 아네?”
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하자, 올리버의 그림자 입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거대한 고릴라가 튀어나왔다.
화가 난 얼굴에 목에는 원숭이의 모가지를 줄줄이 걸고, 팔은 여덟 개가 달린 고릴라.
심벌즈를 든 원숭이가 하나로 합쳐진 거였다.
“왜? 고작 즉석에서 만든 크리처로 날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았어?”
“아뇨.”
올리버가 팬의 도발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