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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흑마법사-476화 (476/633)

476. 발동(發動) (2)

촤좌자자자작······! 

폐광산 아래 지하 깊은 곳에서 축축하고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울리자 창자로 변한 통로가 열리며 새로운 길이 생겼고, 그 길 사이로 올리버와 요안나, 성기사와 핑크맨이 나왔다. 

“믿기지가 않는군······.”

핑크맨 중 하나가 앞장서서 가고 있는 올리버를 보며 중얼거렸다. 

핏빛 단검을 들고 부탁하는 것만으로, 성법도, 마법도, 화기도, 냉병기도 통하지 않는 창자를 제 뜻대로 움직이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 끔찍한 창자가 성기사와 동료 핑크맨을 살해한 것을 봤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아마, 나무꾼이란 별명을 가진 란다의 해결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신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이했을 터였다. 

‘짐 실장님을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고, 필립 중장과도 거래했다더니······. 란다에서 자수성가한 해결사는 다르긴 다르네.’ 

핑크맨은 강자를 봤을 때 느끼는 압도감과 동경, 이유를 알 수 없는 호감을 느꼈다. 

하인이 같은 하인보다 고용주에게 더 큰 호감을 품는 것과 비슷한 이치로,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재력과 권력, 힘은 공포와 위압감을 주는 동시에 호감도 유발했으니. 

그 증거로 다른 핑크맨 역시 다들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정작 올리버는 왜 그런 감정을 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자기 할 일을 할 뿐이었지만. 

“문 좀 열어주겠어요?” 

올리버가 가로막힌 창자 벽에 대고 정중하게 부탁했다. 

붉은색과 분홍빛이 뒤섞인 매끈한 창자 표면은 잠시 침묵했으나, 곧 작게 요동치며 스스로 길을 열어줬다. 

길을 열어주지 않으면 저 끔찍한 핏빛 단검으로 찌를 것을 알았기에. 

‘이 창자······. 크리처라고 하지 않았어?’ 

‘어, 분명 크리처라고 했어. 심지어 손가락 팬이 만든.’ 

‘팬인 건 아직 확실한 게 아니잖아?’ 

‘그렇게 큰 데다, 성법마저 통하지 않는 크리처를 그럼 누가 만들 수 있겠어?’ 

핑크맨들이 새로 생긴 통로를 지나며 눈빛과 수화로 의견을 나눴다. 

감탄 반, 정보 파악 반을 목적으로. 

무음의 대화였으나, 성기사는 그마저도 거슬리는지 핑크맨을 노려봤고, 핑크맨은 서둘러 대화를 종결했다. 

흑마법사에게 도움을 받는 성기사의 성질은 긁고 싶진 않아. 

“아직인가요?” 

“도착했습니다. 기사님.” 

올리버가 대답하자마자 일행은 또 다른 생존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성기사 한 명과 핑크맨 셋으로, 다들 상태는 좋지 못했다. 

바닥에 흐르는 소화액과 사방에서 산발적으로 나오는 크리처, 끈적이는 어둠, 악의를 가진 창자의 움직임에 의해 다들 적잖게 다친 상태였다. 

성기사들은 생존자를 발견하자마자 움직여 치료 성법으로 도와줬다. 

놀랍게도 흑마법과 마력에 강력한 카운터 속성이 있는 성법은 치료에도 엄청난 힘을 발휘해 골절과 소화액에 의한 상처뿐 아니라 절단까지 완벽하게 치료했다. 

테어도어의 의학지식을 얻은 올리버도 프타스 어시스턴트(Ptah's Assistant)를 사용하면 할 수 있는 했지만, 그렇다 해도 성법의 대단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확한 중간 과정을 거쳐야 하는 올리버에 비해, 성법은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바로 회복시켰기 때문이었다. 마치, 기적처럼 말이다. 

“역시, 신의 힘이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올리버가 새삼 성법에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었는지 요안나가 이쪽을 봤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듯. 

“이걸로 생존자는 끝이오?” 

성기사 중 가장 연배가 높아 보이는 이가 물었다.

그의 이름은 안셀름. 귀티 나는 곱슬머리와 수염이 인상적인 중년 사내였다. 

“예.” 

“······마할라.” 

안셀름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읊조렸다. 

아무리 선발된 소수의 인원으로 운영된 작전이라 해도, 이번 임무에 투입된 인원은 자그마치 72명. 그런데 현재 생존자는 25명에 불과했다. 

즉, 대략 65퍼센트 인원이 사망했다는 거였다. 초반의 가벼운 교전을 제외하면 싸움 한번 하지 못한 채. 

허나, 이것도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올리버가 핏빛 단검을 내세워 창자를 견제하는 동시에 일직선으로 빠르게 이동해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했다면 다들 저항다운 저항도 한 번 못 한 채 죽을 게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성기사와 핑크맨이 이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드시겠습니까?” 

성법으로 치료를 받은 뒤, 동료들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생존자들에게 올리버가 칼로리바를 내밀었다. 

다들 짧지만 굵게 난리를 겪어 배고플 게 자명해. 

“난 내 걸 먹지.” 

성기사만이 정중히 거절하며 자기 짐에서 전투식량을 꺼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색하게 그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그가 챙겨 온 전투식량은 창자가 내뿜는 점액질과 소화액, 더러운 냄새에 오염돼 진즉에 부패하였기에. 

“······.” 

성기사는 썩어버린 자신의 전투식량을 말없이 바라봤고, 올리버는 다시 칼로리바를 내밀었다. 

“당분이 많이 들어간 초콜릿 맛입니다.” 

결국, 성기사는 마지못해 칼로리바를 받았고, 올리버는 수통을 꺼내 먼저 맛본 뒤 물도 나눠줬다. 

물은 아직까지 투명하고 시원했다. 

“괜찮은 겁니까?” 

물을 건네주는 올리버의 뒤로 핑크맨 6번 팀장 리키가 다가왔다. 팬의 그림자로 중간에 헤어졌지만, 죽지 않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예, 칼로리바는 이백 개 정도 사둬서 닷새 정도는 괜찮습니다.” 

“다행이긴 하지만 제가 물어본 건 그게 아닙니다. 창자를 여쭤본 겁니다.” 

리키가 점액질로 번들거리는 창자 통로를 엄지로 가리켰다. 

“제가 알기로 크리처란 게 얌전한 건 아닌 거로 알고 있어서요,” 

“오, 똑똑하시군요.” 

올리버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역시 핑크맨. 그것도 팀장이라 그런지 꽤 박식했다. 

지금 리키가 겁내는 것은, 크리처가 갑자기 발광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는 거였다. 

불가능한 이야긴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창조계열 흑마법 서적에 따르면 크리처는 몹시도 사악하고, 교활한 데다 불안정해 언제 어떤 사고를 칠지 알 수 없다고 경고했으니. 

‘흑마법으로 만든 인위적인 생명이라 그렇다 했지.’ 

올리버가 답했다. 

“저도 확답할 수는 없지만, 아직은 괜찮을 거라 생각됩니다.” 

올리버가 자신의 핏빛 단검을 봤다. 

윌레스에게 받은 단검에 자신의 피를 부여한 다음, 질병 계열 흑마법을 덮어씌운 물건으로, 어찌 된 영문인지 아직까지 흑마법이 유지되고 있었다. 

유용한 동시에 꽤 흥미로운 현상. 연구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럼, 저쪽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가 관건이군요.” 

리키가 성기사를 봤다. 그 시선을 따라 올리버 역시 성기사를 봤는데, 때마침 그들은 결정을 내린 듯했다. 

“데이브 씨.” 

“예, 안셀름 기사님.” 

“최하층부까지 우리가 갈 수 있게 도와주시오.” 

“예, 알겠습니다.” 

“······!!” 

요청하는 성기사. 대답하는 올리버. 놀라는 핑크맨. 셋의 반응이 묘한 조화를 이뤘다. 

“죄송하지만, 성기사님. 어딜 간다고 하셨죠?” 

“최하층부로 간다고 했소. 그곳에 흑마법사들이 있는 게 포착됐거든.” 

아까 전 성력을 눈에 집중하더니, 실력이 상당히 좋은 사람인 거 같았다. 

폐광산 전체를 뒤덮은 이 창자-크리처를 상대로 시야를 확보하기 꽤 어려웠을 텐데. 

“지금 전력의 65퍼센트가 날아간 상황에 계속 임무를 속행하겠다는 겁니까?” 

“그렇소. 우린 성기사니까.” 

심플한 대답. 그는 진심이었다. 

“죄송하지만 성기사님. 분명 저희는 성기사님들을 보조하러 온 건 맞지만, 죽으러 온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후퇴해야 할 때입니다.” 

미소와 예의, 젊은이의 매력으로 부드럽게 대화를 하던 리키가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이해를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리키의 말마따나 현재 싸우기 적당한 상태는 아니었다. 잃은 인원도 많고, 체력도 빠졌으며, 장비 손실 역시 상당했다.

뭣보다 영원한 아이 팬까지 있다는 게 확실시된 상황. 

객관적으로 본다면 이대로 임무를 강행하는 건 무리수였다. 

이를 증명하듯 리키의 감정 역시 단순한 두려움만 있는 게 아닌 냉철한 판단이 섞여 있었다. 

허나, 그와 별개로 성기사는 리키의 의견을 조금도 수용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성기사로서의 임무가 가장 중요했기에. 

리키도 지지 않고 단순히 도망치자는 게 아닌 통신 장치가 작동하는 바깥으로 가 포위를 유지. 지원군을 더 받아 침투하자고 설득했으나 소용없었다. 

“그럴 수는 없소. 손가락인 팬이 여기 있다는 건 무슨 속셈이 있다는 것. 뭔지는 알 수 없으나 한시라도 빨리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물론, 핑크맨인 그대들은 이런 무모한 작전에 따르기 힘들겠지만, 이번만큼은 힘든 선택을 해주셔야겠소. 아시다시피 우리 쪽 서번트들을 왕실 호위에 투입하는 조건으로 그대들의 지휘권을 넘겨받았소. 거절한다면 문제 삼을 거요.” 

“······.” 

리키는 입을 다물었다. 

핑크맨의 최대 장점은 거대한 규모도, 탄탄한 조직력도, 무수한 인재도, 방대한 네트워크도 아닌 계약을 반드시 준수한다는 신용. 

그런데 성기사의 말은 그 신용에 흠집 내겠다는 거였다. 

나름의 야심이 있는 핑크맨 팀장급에겐 죽음만큼이나 두려운 거였다. 결국, 리키는 침묵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운이 참 나빴다. 

이동이 자유로운 상태였으면, 일부는 바깥에 지원을 보내자는 의견을 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으니. 

올리버를 반으로 쪼개면 모를까. 

리키를 필두로 다른 핑크맨들은 그나마 건진 장비를 재정비하기 시작했으며, 성기사들 역시 철 코트와 무기를 확인했다. 

준비를 마친 성기사 안셀름이 올리버에게 다가왔다. 

“바로 이동할 수 있겠소?” 

“지금 이동할 것 같습니다.” 

“······?” 

올리버의 알 수 없는 대답에 성기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올리버는 설명 대신 핏빛 단검을 뽑아 창자 벽면에 가져다 댔다. 

“죄송하지만, 창자 씨. 바닥을 열지 말아 주시겠어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다들 고개를 갸웃대면서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태세를 잡은 그때, 요안나가 눈에 성력을 집중하더니 소리쳤다. 

“아래 흑마법사들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크리처도요!” 

요안나의 말대로였다. 팬의 그림자가 어둠을 매개로 나타나 그림자 포털을 열어 다수의 흑마법사와 크리처를 단숨에 이동시켰다. 

대단했다. 아직 단검에 의해 감염된 질병-흑마법을 치료하지 못한 상태인 듯했는데, 저런 힘을 내다니. 

심지어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적잖은 수의 흑마법사와 크리처를 이동시킨 팬의 그림자는 창자-크리처의 몸에 자신의 손을 쑤셔 넣어 창자-크리처의 통제권을 빼앗아 억지로 움직이려 했다. 

저번엔 크리처도 잡아먹더니, 이번에 직접 조종이라······. 

올리버는 창자-크리처에 핏빛 단검을 찔러 넣으며 버텨달라 정중히 부탁했으나, 창자-크리처는 종양과 고름, 염증과 물집, 심지어 곰팡이까지 생기는 극심한 통증을 느낌에도 팬의 그림자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여 올리버와 그 일행을 떠받치는 바닥을 그냥 열어버렸다. 

촤악! 

축축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사라지며, 올리버와 일행들은 한순간 허공에 붕 떴다. 

아래에 보이는 것은 사람의 치아 형상을 한 거대한 그림자. 

기시감을 느낀 올리버는 요안나를 불렀다. 

“기사님.” 

[홀리 라이트(Holy Light)] 

요안나는 바로 성법을 발동해 주변을 빛으로 가득 채웠다. 

“성법이 안 통합니다!” 

리키가 소리쳤다. 당연했다. 특별한 재료······. 인간의 영혼을 사용한 그림자였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없었다. 애당초 성법으로 저 그림자를 없앨 생각이 아니었으니. 올리버가 원한 건 역광을 만들 수 있는 강렬한 빛이었다. 

올리버는 필립을 도와줬을 때처럼 성법의 역광을 이용해 자신의 그림자를 만든 다음 위에서 아래로 그림자를 내리찍어 치아 형태의 그림자를 짓눌러 으깨버렸다. 

콰좌좌좌좍!! 

압도적인 힘 차이에 그림자는 산산조각이 나 내장 조각과 같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 광경에 모두 충격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게 성법을 극복······. 아니 한술 더 떠 성법을 이용해 흑마법을 사용했으니. 

그러나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인육 요리사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올리버의 그림자에 인육 요리사의 감정과 생명력, 마력이 흡수돼, 일종의 인공영혼을 구축한 상태였으니까. 

탁. 

바닥 위에 착지한 올리버는 한 남자를 마주 봤다. 

이로써 두 번째 만남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름이 굽히지 않는 무릎 씨 맞으시죠?” 

“죽여.” 

굽히지 않는 무릎이 대꾸도 하지 않고 명령했다. 그에 맞춰 전투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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