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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흑마법사-472화 (472/633)

472. 어색한 동행 (1)

“왜? 영혼을 조금 다루게 되니, 나랑? 뭐? 어떻게? 될 줄 안 거야?”

영원한 아이의 팬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겉보기엔 촌스러운 주황 머리를 한 열 살짜리 소년에 불과했지만, 거대 지하 공동(空洞) 안의 수많은 홍인 흑마법사는 감히 그 말에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검은손의 손가락이란 위명(威名)과 자신들을 지원해 준다는 갑의 위치, 무엇보다 팬이 거느린 수많은 크리처 때문에 말이다.

홍인 흑마법사들은 저들끼리 뭉쳐 지하 공동(空洞)에 널린 크리처를 둘러봤다.

장난감 총을 든 장난감 병정, 보자기와 길쭉한 팔을 가진 부기맨, 망태기와 갈고리를 든 망태기 할아버지, 멋들어진 칼을 찬 호두까기 인형, 병아리 머리의 병정, 풍선과 낫을 든 광대, 기분 나쁜 노파 등. 수많은 크리처가 있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눈에 띄는 크리처는 다름 아닌 지금 ‘굽히지 않는 무릎’을 제압한 부글부글이었다.

“오, 대답 안 하네? 부글부글. 더 세게 눌러.”

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중장비를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한 부정형 몸체가 형용하기 힘든 소리를 내며 굽히지 않는 무릎의 머리에 압력을 가했다.

맨몸으로 폐광산에서 이곳 퍼스트 스텝 지하까지 굴을 판 부글부글은 힘이 엄청났기에 굽히지 않는 무릎의 머리는 당장이라도 으스러질 것 같았다.

적잖은 수의 홍인 흑마법사들이 이를 막으려 했으나, 지하 어둠 속에서 또 다른 부글부글들이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튀어나와 홍인 흑마법사들을 가로막았다.

“······헤ㅑㅐㅑㅝ야ㅔㅓ랴ᅟᅦᆯ더ㅑㅔㅓㅜㅡ야메ㅜ얄풎두ㅑㅜㅐ주!!!”

홍인 흑마법사들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허나, 그들을 비난할 순 없었다.

썩은 살덩어리를 수십 개 뭉친 듯한 부정형의 덩어리를 마주한다면 모두 같은 반응일 테니.

물컹물컹 형태가 없는 그 몸과 썩은 고기를 연상케 하는 악취, 표면을 두른 셀 수 없이 많은 얼굴과 그 일그러진 얼굴에서 내는 신음을 들으면, 그 어떠한 용사(勇士)도 흠칫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용기 이전에 생물의 본능에 관한 문제.

홍인 흑마법사들의 작은 반항에 팬이 충동적으로 움직이려는 찰나, 굽히지 않는 무릎이 입을 열었다.

“······왜 멋대로 우리 애들을 데리고 나간 겁니까?”

당장 머리가 으깨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굽히지 않는 무릎은 특유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차분하고 딱딱하게 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팬은 ‘킥!’하고 웃더니, 곁으로 다가와 옆에 쪼그려 앉았다.

“왜긴 왜야. 왕의 피를 가진 최고의 제물이 이 땅으로 왔는데, 아무것도 안 해서 답답해 그러지. 의식 안 할 거야? 복수 안 할 거야? 고향 땅 안 되찾을 거야?”

“이건 저희 부족의-”

“-오호! 이제는 아니지! 아니라고.”

팬이 인상을 쓰며 말을 끊었다.

“왜냐면 너희는 내게 흑마법을 배웠으니까. 너희 일만이 아니지! 기억 안 나?! 어른인 너희에게 내 뛰어난 지식을 전수해주는 조건으로 뭘 걸었는지? 응?!!”

꾸구구구구······.

신경질적인 팬의 고함에 맞춰, 부글부글은 굽히지 않는 무릎의 머리에 더더욱 압력을 가했다. 덕분에 굽히지 않는 무릎의 머리는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팬은 소리쳤다.

“악마를 소환시키기 위해서지! 근데, 지금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잖아?! 주주총회가 끝나면 프로메테우스 사(社)의 본사는 셀랜드로 옮길 테고. 그럼, 실낱같은 가능성도 완전히 사라질 텐데! 응?! 내가 나만 좋자고 이런 것 같아?!!”

아무도 팬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홍인 흑마법사들이 팬에게 가르침을 받는 조건이 악마를 소환하는 게 맞긴 맞았으니.

바로 그것 때문에 연합 왕국의 둘째 왕자를 노린 거기도 했다.

여태까지 문헌에 적힌 대로 의식을 행했음에도 모든 소환에 실패했기에. 왕의 혈통을 가진 제물을 쓰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다.

된다고만 한다면 팬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고, 악마와 거래해 옛 선조의 땅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

“아······. 말하다 보니 빡치네?”

팬이 갑자기 정색했다.

“난 분명 어른인 너희에게 내 흑마법을 가르쳐줬는데, 어째서 너희는 약속을 안 지키는 거지? 아하! 어른이라 원래 그런 거지! 어른은 거짓말쟁이니까! 난 알지.”

그 순간 지하 공동에 있는 홍인 흑마법사들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평소처럼 장난으로 화내는 것도, 히스테릭한 신경질도 아니었다.

정말 화가 난 거였다.

주변의 모든 크리처들이 팬의 감정에 영향을 받아 그 외형이 흉악하게 변한 것이 그 증거.

팬은 더더욱 분노를 표출했다.

“말해봐! 주주총회를 막지 못해 프로메테우스 사(社)가 보유한 아이템이 이 땅을 떠나면 더 이상 악마를 소환할 기회조차 안 올 텐데, 제물도 확보하지 못했어! 나와의 약속은 어떡할 거지? 악마는 어떻게 할 거냐고?! 응?!! 차라리 여기서 개값을 치르는 게 맞-”

“-제가 책임질게요.”

당장이라도 악몽이 태동할 것 같은 어두운 지하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결이 다른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 시선이 한 점으로 모였다.

그 점에는 검은 머리를 양쪽으로 땋은 붉은 피부의 소녀가 서 있었다.

“릴리!”

방금까지 화내던 팬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지으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름 끼치는 변덕. 팬이 되물었다.

“뭐라고?”

“제가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팬과의 약속을요. 그러니, 이만 용서해 주시죠······. 친구로서의 부탁입니다.”

릴리란 홍인 소녀가 말했다.

그 말에 팬은 얼빠진 표정을 짓더니, 이내 킥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의 웃음치곤 너무나도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킥킥킥킥킥킥- 정말 책임질 수 있어?”

팬이 뚝 하고 웃음을 멈추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으르렁대는 팬의 크리처들.

맹수 그 이상의 것들에 둘러싸인 홍인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다면······. 좋아! 친구이자, 추장의 딸인 너라면 믿어도 되겠지! 그림자! 부글부글!”

팬의 말과 동시에 부정형의 괴물과 그림자가 굽히지 않는 무릎을 놓아줬다.

팬에게 릴리라 불린 홍인 소녀의 대화로 끝난 일촉즉발의 상황. 팬이 기쁘게 소리쳤다.

“부글부글. 너희는 파던 굴을 마저 파도록 하고 나머진 나랑 같이 네버랜드로 돌아간다. 그림자! 야?! 뭐야, 어디 아파?”

팬이 자신의 그림자에게 물었다. 실제로 팬의 그림자는 평소와 달리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한쪽 팔 부근이 특히.

팬의 질문에 그림자는 자세를 고치더니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무언의 대답을 들은 팬은 의심스럽게 고개를 갸웃댔지만, 이내 신경을 껐다.

“괜찮으면 다행이고. 아무렴 어때. 포털이나 열어, 돌아갈 테니까······. 릴리.”

팬이 홍인 소녀에게 다가가 얼굴을 마주하더니, 자기 코와 릴리의 코를 비볐다.

“약속 꼭 지켜! 안 지키면 혼내 줄 거야.”

팬은 아이의 미소를 지으며 경고했다. 잠시 후, 그림자가 연 포털을 열었고, 팬을 비롯한 다른 크리처들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팬의 그림자 역시 그림자 속으로 돌아가자, 굽히지 않는 무릎은 일어났다.

“형!”

한 소년이 굽히지 않는 무릎을 향해 달려왔다. 그의 동생 환한 웃음이었다.

“형! 괜찮-”

형이 걱정돼 다가오는 동생을 살짝 밀어내며 굽히지 않는 무릎이 릴리라 불린 홍인 소녀에게 다가갔다.

“강인한 백합. 도대체 무슨-”

“-굽히지 않는 무릎. 이제 저희에게 시간이 없어요.”

팬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녀가 누구보다 앳되지만 어른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멸망해가는 부족 추장의 딸답다고 할 수 있었다.

“왕자를 습격한 것 때문에 군이 움직임이기 시작했어요. 벌써 빈민가를 마구 들쑤시며,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고문하고 있죠. 곧 저희를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낼 거예요. 이젠 시간이 없어요.”

굽히지 않는 무릎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는 팬의 꼬임에 넘어가 멋대로 움직인 동료들을 봤다.

그들 모두 죄책감에 눈을 내리깔았다.

허나, 그들만 탓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팬의 말대로 시간은 없었으니.

강인한 백합이 굽히지 않는 무릎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잘잘못 따지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어요.”

릴리가 그리 말하며, 지하 한쪽의 흑마법사들을 가리켰다.

팬을 따라 왕자를 포획하러 간 이들로, 모두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치료할 수 없을 정도로.

굽히지 않는 무릎은 그들을 보고 잠시 멈칫했으나, 이내 결심하며 품 안에서 시험관을 꺼내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전사들이여······. 적의 심장을 꿰뚫는 화살촉이 되겠는가?”

부상을 입은 홍인 흑마법사들이 대답했다. 온 진심을 담아.

“기꺼이. 형제여.”

***

우적. 우적. 우적. 우적.

판도라를 세계수에 접속시켜 돌려보낸 후 약간의 시간이 흘렀고, 동시에 많은 일이 일어났다.

연합 왕국 신대륙 식민 도시인 퍼스트 스텝(First Step)은 폭발 테러와 코드 감마(γ) 습격 건으로 비상 체제에 돌입해 치안이 안정된 곳을 제외하곤 군인들이 치안을 담당하기 시작했으며,

그뿐 아니라 홍인들이 거주하는 빈민가를 중심으로 성기사, 군인, 경찰 심지어 핑크맨까지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다.

그들은 수상해 보이는 이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체포해 심문하였으며, 덕분에 하루에만 수십 명이나 되는 홍인 흑마법사와 그 협력자를 체포하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

올리버 역시 동원됐기에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 배고파.”

수색하던 기억이 떠오른 올리버는 다시 허기를 느끼며 칼로리바를 하나 더 꺼내 입에 쑤셔 넣었다.

책상 위에 널브러진 포장지만 봐도 열댓 개는 넘게 먹은 것 같았지만, 올리버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 입에 쑤셔 넣었다.

배가 고팠으니까.

‘일을 많이 해서 그런 거려나?’

올리버가 비정상적인 허기를 느끼며 생각했다. 먹을수록 배가 고프다니, 올리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뭐, 일은 곧 있으면 끝나니까.’

올리버가 신문의 한 내용을 보며 생각했다.

그 내용이란 다름 아닌 주주총회가 오늘 저녁에 시작한다는 것으로, 좀 의외긴 했다. 폭발 테러와 홍인 흑마법사가 왕자를 위협했음에도 강행할 줄이야.

덕분에 혹시나 한 전통 자본가 그룹과 졸부 그룹의 희망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에디스까지 빠진 마당이라 그들은 절대 이길 수 없었으니.

‘혹시 강행하는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건가?’

올리버는 추측했다. 자신 있는 분야는 아니지만, 프로메테우스 사(社)가 아무리 탐나도 왕자의 안전까지 도외시하는 건 뭔가 이상해.

허나, 고개를 저으며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이나 추측은 자신의 특기가 아니었으니. 그냥 일이나 하기로 했다.

***

“제시간에 딱 왔군요.”

핑크맨의 고위 간부 중년 신사······. 아니, 짐 로어가 약속 장소에서 올리버를 맞이했다.

판도라 건 때문에 아주 약간 다퉜지만, 홍인 흑마법사와 엮이며 같이 일하게 됐다.

그는 아직 올리버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듯했으나, 겉으로 내색지 않으며 예의로 대해 줬다.

“이번 임무, 제대로 숙지하셨지요?”

“예, 짐 실장님. 홍인 흑마법사들의 비밀 아지트인 폐광산을 습격해 소탕하는 것요. 저번에 제대로 설명해주셔서 알고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컨디션이 안 좋아 보여 걱정했는데.”

“배가 고파서요.”

올리버가 자연스럽게 둘러댔다.

컨디션에 영향이 갈 정도로 배가 고픈 건 사실이었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여태까지 했던 대로, 6번 팀에 합류해 주십시오. 이번 작전에는 성기사와 함께 할 건데, 숙지하시고요.”

“짐 실장님.”

“물론, 성기사와 같이 일하는 게 어려울 순 있지만, 데이브 씨는 마탑 직원이기도 하니 크게-”

“-아뇨. 그거 때문이 아닙니다.”

올리버가 성기사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식으로 물었다. 왜냐면 진짜 상관없었으니까.

“그럼, 뭐 때문에······?”

“신문이나 주변에 하는 이야기 들어보니 홍인들을 모두 보호 거주지로 이동시킨다는데 사실입니까.”

“······그건 왜 물어보는 겁니까?”

“궁금해서요?”

올리버가 답했다. 수상쩍기 그지없는 대답이었건만, 올리버가 말하니 제법 자연스럽게 들렸다.

“글쎄요 난 이쪽 소속이 아니라 정책까지는······. 다만, 여기 군인들 말에 따르면 홍인들을 아마 보호 거주지로 옮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노리면 안 되는 사람을 노렸으니까······. 뭐, 이전부터 계획한 거 같긴 하지만. 대답이 됐소?”

“예······, 대답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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