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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흑마법사-471화 (471/633)

471. 특별한 재료 (3)

홍인 흑마법사의 테러로 폐허가 된 퍼스트 스텝의 시가지에 뒤늦게 경찰과 군 병력, 성기사와 서번트들이 도착했다.

경찰은 현장을 봉쇄하였으며, 군 병력은 주변을 탐색, 성기사는 흑마법사의 흔적을 조사했다.

덕분에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이 모두 분주하게 움직였다.

물론, 아닌 자들도 있었지만.

“도대체 왜 그런 겁니까?”

아닌 자 중 하나인 중년 신사······. 아니, 짐 로어가 말했다. 핑크맨의 고위 간부이자, 필립 로어의 사촌인 짐 로어가.

그의 심각한 목소리에 필립은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뭐가 왜 그래야, 사촌?”

“몰라서 묻습니까?”

짐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소 도전적으로 물었다.

핑크맨의 고위 간부라 해도 상대는 왕국군의 한 축을 책임지는 로어 가문의 수장. 무례하기 이를 데가 없는 태도였다. 그만큼 납득하기 힘들다는 증거이기도 했지만.

“방금 이브(Eve)를 그냥 놓아주지 않습니까!”

짐이 한쪽 방향을 찌르듯 가리켰다. 올리버와 판도라가 떠난 방향이었다.

“이브(Eve)를 확보하는 건 코드 베타(β)의 명이었습니다.”

“알아. 나도 그쪽 사정은 계속 듣고 있거든.”

“그런데 왜······!”

결국, 화를 주체못한 짐이 소리쳤다. 임시 천막을 쳐놓았으니 망정, 아니었다면 주변의 모든 이목이 몰렸을 터였다.

“미안하네, 짐. 허나, 코드 베타(β)의 명령보다 먼저인 건 코드 감마(γ)의 안전이야······. 알지 않나?”

“그건······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놓아줬다는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짐이 끈질기게 따지고 들었다. 뭐, 그의 입장에선 당연한 거였다.

역사상 최초로 발생된 이브(Eve). 그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이브(Eve)를 포획할 천재일우의 기회를 웬 흑마법사 하나 때문에 놓친 거였으니.

짐이 분노한 것도 이해가 됐다. 그렇다고 필립의 입장이 변한 건 아니었지만.

“왜 납득할 수 없어? 폭발 테러로 코드 감마(γ)와 귀빈을 호위하러 온 병력 60퍼센트가 증발하고, 성법에 내성이 있는 흑마법사들이 떼로 나와 습격했는데.”

“그래도, 더 좋게 끝날 수 있었습니다.”

필립이 한숨을 쉬었다.

“하아······. 짐. 왕실 전속으로 계약을 해 감을 잃었나? 이브(Eve)가 아무리 탐나도 그렇지, 코드 감마(γ)의 안전을 판돈으로 삼을 셈인가?”

“고작 흑마법사 하나와 우리가 싸움이 성립됐겠습니까?”

“짐, 짐. 정말 감을 잃었군. 방금, 힘을 보지 않았나?”

필립이 자신을 도와준 데이브를 떠올리며 말했다.

치아 형태의 그림자가 덮치려는 찰나 그는 하늘 위에서 나타나 광원(光圓)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생성, 홍인 흑마법사의 그림자를 짓뭉개버렸다.

단 한 번이었지만, 참으로 인상 깊은 공격이었다.

유리한 위치 선정,

광원으로 그림자를 만드는 노련함,

자신의 사리사도 부러트린 그림자를 단번에 짓뭉갠 위력.

흠잡을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 압도감이었다.

방금 전까지 죽자사자 싸우던 두 무리가 데이브의 등장에 싸움을 멈추며 모두 그를 주시하지 않았는가? 그건 진짜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저희에겐 성법 아이템이 있고, 병력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장님도 계셨고요.”

“이브(Eve)는 자네 일이지 내 일이 아닐세.”

“중장님!”

“뭣보다 날 도와준 놈을 몰매 놓는 것도 사양이고.”

“그건 놈이 멋대로-”

“-내 말뜻은 그게 아니야. 레이크 빌리지에서 그에게서 도움을 받았거든.”

“중장님께서······. 도움이요?”

“그래, 술을 얻어먹었거든. 핑크맨 정기 보고만 제대로 확인했어도 알았을 텐데.”

필립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고, 짐은 찔리는 것이 있는지 입을 다물었다.

필립은 그런 짐을 씁쓸하게 바라봤다.

분명, 가문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증명하겠다며 떠난 사촌이 어찌 이리 아둔해진 것인지······.

“여하튼 그 이야긴 그만하지. 당시 상황이나 뭐로 보나 이브(Eve) 때문에 뭘 하길 적절한 때가 아닌 거 알지 않나?”

결국, 짐은 더 이상 해당 내용을 꺼내지 않았다. 이 이상 따져봐야 모양만 우스워질 게 뻔했으니.

그는 씁쓸함을 숨긴 채 천막 밖으로 나갔고, 혼자가 된 필립은 그제야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과연 자신이 나섰다면 이브(Eve)를 확보할 수 있었을지 말이다.

“음······. 역시 안 되겠지?”

필립이 고민 끝에 결론 내렸다. 왜냐면 레이크 빌리지에서 데이브의 활약을 봤기에.

그는 갓 스무 살이 넘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안개 결계의 통제권을 가져와 다루는가 하면, 원마스터급 마법사를 홀로 제압, 다른 수많은 마법사를 상대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심지어 한순간이나마 그 테어도어를 상대하며 다른 곳으로 데려가기까지 했다.

비록. 쓰러트린 것은 멀린이었지만.

‘참 신기하지.’

필립이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데이브가 테어도어를 상대하자 멀린이 갑자기 나타나 그를 쓰러트렸고,

데이브가 인육 요리사를 막으러 홀로 라빌리 중앙으로 갔을 때도 멀린이 인육 요리사를 쓰러트렸다.

두 번의 우연. 과연 그게 정말 우연일지 의문이었다.

왜냐면 세상에 우연은 한 번으로 족하였기에. 두 번이나 된다면 그건 필연이었다.

“중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필립이 생각하는 사이 천막 너머로 웬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필립이 거둔 가문의 먼 구성원이자 현 종군 마법사인 줄리아였다.

“들어와.”

다부진 몸의 줄이아가 들어와 보고했다.

“맡기신 임무 수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코드 감마(γ)는 무사히 이동하셨습니다. 왕실 비서들은 불만인 듯하지만요.”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는 법이지······. 주주총회를 진행한다고 하나?”

“예······.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게 뭔가, 차라리 잘됐어.”

“예?”

“나도 이쯤 되니 궁금해지거든. 처음에는 왕자의 용돈 벌이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아······. 이곳에 내가 박아놓은 군인들이 있네. 그들과 접선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아보게. 왜 무리해가며 주주총회가 열리고, 홍인 흑마법사는 미쳐 날뛰는지 알아야겠어.”

***

우적. 우적. 우적.

소란스러운 폐허를 뒤로하고 올리버는 판도라와 함께 세계수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많이 배고프신가요?”

판도라가 칼로리바를 먹는 올리버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예. 배가 많이 고프긴 합니다.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지 않네요. 배가 찬 적은 없어도, 이렇게 배고픈 적도 없었는데······. 이런 죄송합니다.”

“예?”

“판도라 앞에서 할 이야긴 아닌 것 같아서요. 판도라는 아무것도 못 드시잖아요?”

올리버가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던 판도라를 떠올리며 말했다.

식사를 못 하다니. 생각보다 슬픈 일 같았다.

“신경 쓰지 마시죠. 제게 식사란 관념적인 거라서요. 배고픈 것도 모르고요.”

“그럼, 식사를 해보고 싶진 않다는 건가요?”

올리버가 갑작스레 질문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판도라는 당황. 고개를 끄덕이려다 올리버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한 번······. 해보고 싶긴 해요. 식사요. 경험 삼아서요.”

“그렇군요.”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다는 듯.

판도라는 딴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전 당장 식사보다 아까 전 아버지께서 하신 행동에 더 관심이 가네요.”

“아까 전요?”

“예······. 혼자서 필립 씨와 핑크맨을 설득해 절 쫓지 못하게 했잖아요? 괜찮으신가요?”

“무엇이 말씀입니까?”

“그 대가로 홍인 흑마법사들 싸우게 됐잖아요?”

“아, 문제없습니다. 사실, 홍인 흑마법사 분들에게도 관심이 생겼거든요.”

그건 사실이었다. 송장인형을 이용해 항구 테러를 일으켰을 때만 해도 큰 관심은 없었지만, 한 흑마법사가 사용한 특별한 재료를 보는 순간, 프로메테우스 사(社) 못지않은 흥미가 생겨났다.

그들과 한번 대화해 보고 싶을 정도로.

“아······. 그럼,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예상하고 그쪽으로 간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생각이나 예상은 제 특기가 아니라서요.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빨리 확인하고 싶어 간 것뿐이고, 때마침 필립 중장님이 있어 도와드리고, 부탁드린 것뿐입니다····. 뭐, 덕분에 판도라와 대화할 시간을 벌었으니 나쁘지 않습니다.”

“······.”

“아, 판도라.”

“예?”

“그······. 아까 전에 아는 사이라고 소개해서 죄송합니다.”

또다시 튀어나온 갑작스러운 말. 판도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판도라가 제 딸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복잡해질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적당히 둘러댔는데, 혹여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멈칫.

올리버가 나란히 걷던 판도라가 발걸음을 멈췄다.

올리버는 몇 걸음 더 가 멈췄고, 판도라를 보며 고개를 갸웃댔다.

그녀의 감정은 예상치 못한 기쁨과 감동, 죄책감으로 요동쳤다.

“감사합니다. 아버······. 올리버. 그 말씀이 절 기쁘게 하는군요.”

“제 본명(本名)을 아시는군요.”

올리버가 놀라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왠지 판도라는 알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올리버의 과거 기록을 대부분 찾아봤거든요.”

“오······. 그런가요?”

“예, 제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궁금해 찾아봤고, 거기서 올리버 당신을 발견했거든요······. 절 만드신 분이 누군지 궁금해 세계수에 기록된 당신을 찾아봤습니다. 고아원과 광산, 흑마법 패밀리에 지내던 당신을요. 건방진 행동 죄송합니다.”

판도라가 정중히 허리를 숙여 올리버에게 사죄했다.

원래도 예의가 바르긴 했지만, 지금은 다소 과했다. 마치, 하인이 주인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전 괜찮습니다······. 그보다 왜 아버지에서 올리버라고 호칭이 바뀐 건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기분 나쁜 건 아니고, 이유가 궁금해서요.”

이브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기쁨과 반가움, 만족 동시에 슬픔과 씁쓸함, 순응이란 다소 결이 다른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옛날부터 느낀 거지만 감정이란 참으로 오묘한 거 같았다.

“별거 아닙니다. 올리버께선 제 아버지가 아니니까요.”

“제가 여러분을 만든 게 아닙니까?”

“아뇨, 아뇨······. 저희를 만드신 건 맞지만, 아버지보단 창조주에 더 가깝죠. 아버지란 너무 주제넘은 표현이죠.”

“아하······. 그럼 왜 처음엔 절 아버지라 부르신 거죠?”

올리버가 더 안쪽으로 파고들어 질문했고, 판도라는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과거 본 적 있었다. 올리버가 자란 고아원에서 말이다.

“그게······. 죄송합니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 괜한 신경이 쓰이게 해드려-”

판도라는 말을 멈췄다. 어느새 올리버가 코앞까지 다가왔기에.

“판도라.”

“예?”

“실례가 안 된다면 한번 안아봐도 되겠습니까?”

예······?”

똑 부러진 모습을 보여준 판도라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제게 예절 교육을 해주신 분들께서 말하길 여성이 겁에 질리거나, 기운이 없거나, 슬프거나 할 때 안아주라고 하셨거든요. 그게 신사라고요······. 전 란다 사람이라 신사가 아니긴 하지만, 여하튼 한번 안아봐도 될까요?”

“······.”

“싫으시다면-”

“-좋아요.”

판도라가 답했다.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가 아닌 진심으로.

올리버는 천사의 집에서 배웠던 대로, 연습했던 대로 양팔을 벌려 부드럽게 판도라를 품 안에 안은 다음 팔로 등을 감쌌다.

“토닥. 토닥. 토닥.”

올리버가 아프지 않게 판도라의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방금 토닥 토닥이라고 입으로 말씀하신 건가요?”

“예······. 문제 있나요?”

“음······. 아뇨.”

올리버는 그 상태로 10초간 더 있다가 판도라를 놓아줬다.

이것이 과학적으로 상대방을 가장 안심시킬 수 있는 시간이라 책에서 알려줬기에.

“무슨 책이죠?”

“[여성에게 똑똑한 남성으로 보일 수 있는 99가지 방법]이란 책입니다. 천사의 집에 읽었죠.”

“후훗······. 뭔가 성차별적이지만 재밌는 농담이네요.”

“재밌으셨다니 기쁘네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지만요······. 음, 판도라. 말하는 김에 뭐하나 더 고백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죠.”

“아까 전에 거짓말했습니다. 판도라를 때려 파편 3개로 만든 거요. 솔직히 별로 미안하지 않거든요. 아직도 제가 판도라를 만든 게 실감이 나지 않고요.”

올리버가 새삼 진실을 이야기했다. 정말 미안하지 않았기에. 그 증거로 같은 상황에 또 눈알이 튀어나오면 때릴 거 같았다.

허나, 판도라는 이미 예상했는지 놀라지도 불쾌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받아들일 뿐.

“괜찮습니다.”

“하지만 판도라가 성가시거나, 괜히 신경 쓰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라 불러 불쾌해하지도 않고, 이름으로 불러도 불쾌하지 않습니다······. 제 말의 요점은 판도라는 판도라니까, 그냥 편한 대로 절 대해주시면 좋겠다는 겁니다.”

올리버의 말에 판도라가 침묵했다. 뭔가 실수했나 싶어 겸연쩍어진 올리버가 덧붙이려는 찰나, 판도라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올리버가 처음 판도라가 이브(Eve)인 걸 알아맞혔을 때처럼 순수한 기쁨의 미소를.

“역시 당신께선 대단하시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그렇게 대단하지 않지만요.”

대답을 들은 판도라는 고개를 저으며 올리버의 손을 잡았다.

송장인형인지라 판도라의 손은 차갑고 딱딱했지만, 올리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제인, 마리, 야렐리, 셀린, 천사의 집 종업원들을 대할 때와 똑같이 대할 뿐.

“아뇨, 대단하세요. 그 증거로 전 지금 제가 아주 자랑스럽고 행복하거든요. 아버지······. 혹시, 괜찮으시다면 홍인 흑마법사에 관한 말씀드려도 될까요? 듣기에 따라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데요.”

“오, 편하게 말씀해주시죠.”

***

“내가 마냥 편해 보이나 봐? 응?”

퍼스트 스텝의 어느 거대 지하 공동(空洞).

그림자 크리처를 포함. 수많은 크리처를 거느린 팬이 한 홍인 흑마법사를 제압하며 물었다.

성기사를 셋이나 제압하고, 로어 가문의 가주와도 좋은 승부를 펼친 흑마법사였건만, 그는 지금 무력하게 제압돼 벌레처럼 땅 위에 엎드려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팬이 화가 난 듯 물었다.

“왜? 영혼을 조금 다루게 되니, 나랑? 뭐? 어떻게? 될 줄 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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