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 나무꾼 (2)
올리버는 고개를 갸웃댔다.
백 명이 넘는 드루이드를 해치운 살아있는 전설이라니.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다름 아닌 나무꾼이란 단어였다.
자신을 칭하는 별명인 듯했으나, 정작 올리버는 지금 처음 들어보는 별명이었다.
그런 올리버의 반응을 달걀 머리 노인이 눈치챘다.
“저쪽은 전혀 모르는 눈치인데?”
에디스가 고개를 돌려 올리버를 봤다.
“······반응이 왜 그래?”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안 가서요. 나무꾼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기껏 힘차게 소개했건만, 본인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으니 당연했다.
웃기지도 않은 해프닝에 달걀 머리 노인과 전통 자본가들은 짜증과 비웃음을 지었고, 졸부 그룹은 실망, 당혹의 기색을 내비쳤다.
정작 에디스는 차분했지만.
“당연히 네 별명이지. 엔조이먼트 드루이드를 벌목하듯 백 명이나 넘게 죽여서 생긴 별명······. 아니야?”
“예.”
올리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드루이드를 백 명이나 죽인 적 없습니다.”
“그래?”
“예, 82명만 죽였습니다.”
그 순간 공기가 변하며 다들 미간을 찌푸렸다. 뭔 개소린가 싶어서. 허나, 올리버는 진지했다. 조가 말린 덕분에 82명 정도에서 멈출 수 있었으니. 이건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대답을 들은 에디스가 다시 정면을 봤다.
“그리고 소문대로 미친놈이기도 하지. 보시다시피. 주주총회 동안 큰 전력이 될 놈이요. 우릴 테러하는 홍인(紅人) 흑마법사는 물론, 귀족 그룹에서 고용한 핑크맨을 상대로도······. 자네 핑크맨이랑 같이 일해 본 적 있지?”
“딱 한 번입니다.”
“딱 좋구만. 어찌 됐건 경력직이란 거잖아.”
올리버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에디스는 멋대로 결론 내렸다.
이대로 가면 돌이킬 수 없을 거 같아 올리버는 말했다.
“저기 죄송하지만, 에디스 님······. 전 아직 의뢰를 맡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니, 내 장담하건대 넌 이 의뢰를 맡을 거야. 나한테 빚을 졌으니까.”
빚. 그 단어를 순간 올리버는 떠올랐다.
에디스가 마리와 선택받은 사람들이 성기사에 의해 위기에 빠진 걸 알려줬을 때를.
그는 해당 사실과 관련된 자료를 건네줄 때 빚이라고 말하며 나중에 갚으면 된다고 하였고, 올리버는 이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
당시에는 그게 더 중요했으니.
“역시 잊지 않았군. 그럼, 대답은 어떻게 되지?”
에디스가 물었다. 사실 답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주주총회가 끝날 때까지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정확히는 주주총회가 끝나고 일이 안전하게 마무리될 때까지. 문제없겠지?”
“문제없습니다.”
“다행이네. 사실, 문제 있어도 난 조금도 상관 안 했을 거지만.”
날카롭게 혀를 놀리는 에디스. 올리버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여 그의 제안에 다시 순응했다. 약속은 약속이었으니까.
올리버의 고용이 확실해지자 에디스는 만족하는 감정을 빛냈다.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달걀 머리 노인이었다.
“그럼,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에디스와 올리버에게 집중되던 시선이 달걀 머리 노인에게 넘어갔다.
이 공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대저택의 집사가 주인님이라 부른 것으로 볼 때 아무래도 그가 전통 자본가 그룹의 리더인 브라이언인 듯했다.
그가 올리버를 보며 말했다.
“T구역 30번 거리의 해결사 데이브······. 나도 이름 정도는 들어봤지. 란다 ABC사태 때 만악의 근원을 쓰러트리고 사업가로 전향한. 이렇게 비쩍 말랐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올리버는 사업가로 전향한 적이 없다고 정정하려 했지만, 에디스가 막았다.
브라이언이 이어 말했다.
“그런 해결사를 고용한 거면 돈이든 뭐든 큰 비용을 치렀을 텐데, 에디스, 그대 성격상 공짜는 아닐 거고, 원하는 게 뭐지?”
에디스는 빠른 이야기 진행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한쪽에 놓인 소파를 끌고 와 브라이언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톡 까놓고 말하죠. 말씀한 대로 저 친구 고용하는 데 엄청난 비용을 썼습니다. 간신히 지워둔 빚을 썼거든. 나중에 쓰려고 아낀 건데 말이요.”
“말이 길군.”
“그럼, 짧게 갑시다. 귀족 그룹에 맞서 세우기로 한 우리 쪽 후보 바꿉시다.”
에디스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브라이언 주변의 사람들이 일제히 항의했다. 이미 끝난 이야기 왜 꺼내는 거냐고.
허나, 당사자인 브라이언과 에디스는 대화를 이을 뿐이었다.
“억지군.”
“하! 아실 만한 분이 왜 이러실까? 아주 억지는 아니란 걸 아실 텐데. 망할 흑마법사의 테러와 귀족 그룹에서 고용한 핑크맨 때문에 점점 우리가 불리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대로 가면 질 수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집니다.”
에디스가 확언했다.
“애당초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주주총회를 연 걸 테니. 일각에서는 케니도 억지로 협박당해 사임하게 한 거라는 이야기도 있고······. 이대로는 안 됩니다. 그 증거로 핑크맨이 다른 주주들을 압박해도 우리 쪽은 전력이 딸려 등신처럼 당하고 있잖소?”
말을 거칠지만 틀린 말은 아닌지 아무도 에디스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 주주총회라는 게 점점 이쪽에 불리해지는 듯했다.
그때, 누군가 끼어들었다. 다름 아닌 용병 간부로 보이는 사내였다.
팔과 가슴은 근육으로 똘똘 뭉친 데 반해, 배는 남산처럼 불룩 나온 그는 몸에서 엄청난 양의 마력과 생명력을 내뿜었다. 아무래도 상당한 실력의 마력사용자인 듯했다.
“죄송하지만, 지금 저 삐쩍 마른 뼈다귀가 우리보다 낫다고 이야기하는 겁니까?”
“당연하지. 귓구멍 처 막혔어? 란다 최고 해결사 중 하나라고 방금 말했잖아? 란다 말이야! 거기다 마탑 마법사이기도 하지.”
“그냥 고용된 직원입니다.”
올리버가 사람들이 과대평가할까 싶어 바로 덧붙여 설명했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흑마법사가 마탑에?”
누군가 중얼거렸고, 그러자 모두가 웅성거렸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마탑에 흑마법사가 취직한 게 여간 이상한 일이 아닌 듯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올리버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실제로 멀린과 케빈 덕분에 취직할 수 있었던 거니, 운이 좋은 것도 맞았고.
허나, 사람들은 올리버의 말을 듣지 않고 더욱 웅성거렸다.
문득 올리버는 어쩌다 이리된 건지 되짚어봤다. 요안나를 만나러 여기 온 것뿐인데······.
‘역시, 그때 흑마법을 사용한 게 문제였나?’
그때란 송장인형이 자폭하려 했을 때로, 올리버는 막지 않고 그냥 폭발하게 내버려 두는 게 좋지 않았나 잠시 고민해 봤다.
그럼 성기사에게 걸리지도 않고, 여기까지 안 왔어도 됐을 텐데.
물론, 그렇게 되면 수많은 사람이 폭발에 휘말렸을 테지만.
‘음. 역시 그건 좀 그렇네······. 뭣보다 에디스 님 요구는 정당한 거고.’
올리버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어차피 요안나가 이 도시를 떠날 일도 없을 테니, 조금 여유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거기다 개인적으로 이곳 신대륙과 프로메테우스 사(社)에도 흥미가 생기기도 했고.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 방향으로 결론 내리려던 중, 한 젊은 용병이 간부와 눈으로 대화를 나누더니 대뜸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옅은 붉은색 피부를 가진 그는 젊어 보임에도 제법 직급이 있어 보였는데, 각오를 빛내며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다면 확인 한번 해봐도 되겠습니까?”
앞으로 걸어 나온 용병의 말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에디스 님에게 고용된 거면, 우리와 같이 일해야 한다는 건데, 그럼 실력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테스트도 해볼 겸, 어떻습니까?”
용병이 에디스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때, 브라이언도 동조했다.
“나쁜 의견 같지는 않구만. 소문은 때때로 허무하기도 한 법이니 확인이 필요하지. 이렇게 자신만만한 경우에는 특히. 뭣보다 나도 그 실력 한번 보고 싶고.”
에디스가 올리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찮겠어?”
“뭐······. 고용주께서 원하시는 거라면 전 괜찮습니다.”
“잘 됐군요.”
테스트를 제안한 용병이 대답하고는 다짜고짜 허리에 찬 토마호크를 냅다 던졌다.
마력이 실린 토마호크는 총알이 연상될 정도로 빠르게 날아와 올리버의 머리를 노렸다.
탁. 쾅!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토마호크를 낚아채 대리석 바닥에 내리꽂았다.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벌어진 놀라운 광경에 모두 경악했으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토마호크를 던진 용병은 마력을 집중시킨 발로 땅을 박차 올리버에게 단숨에 접근, 주먹에 실은 마력을 폭발시키며 올리버를 향해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공격 타이밍과 자세, 주먹의 속도 모두 수준급.
빠각!
용병이 주먹을 내지르자마자 둔탁한 타격음이 허공에 울렸다.
용병의 공격을 패링으로 막은 올리버의 주먹이 그대로 용병의 턱에 꽂힌 소리였다.
올리버가 저도 모르게 반격한 것으로, 기습을 가한 용병은 실이 끊긴 인형처럼 앞으로 픽하고 엎어졌다.
“······.”
“······.”
“······.”
모두가 눈앞의 광경을 끔뻑거리며 바라봤다. 흑마법사가 마력사용자의 근접 기습을 막은 것도 모자라 되려 제압한 아주 보기 드문 광경이었으니까.
정작 당사자인 올리버는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쓰러진 용병을 부축할 뿐이었지만.
“이런, 괜찮으십니까?”
***
“푸하하하하핫!”
한차례의 소동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에디스.
그는 각종 음식이 가득 차려진 식탁 앞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우걱우걱 먹고 있던 음식 파편 중 일부가 식탁 위로 튀었다.
예의에서 아주 벗어난 모습.
그러나 맞은편에서 같이 식사하던 올리버 역시 음식을 먹느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아서 말이다.
“······왜 웃는지 안 물어보나?”
버터로 조리한 랍스터를 한입에 삼킨 올리버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물었다.
“······왜 웃으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정말 이상해졌군.”
“예?”
“전에도 꽤 많이 먹는 편이긴 했지만, 배가 고프다는 인상은 없었는데, 이제는 많이 배고파 보여.”
올리버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전에도 음식을 많이 먹긴 했지만, 양이 적어도 문제가 안 됐다.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만족스럽게 식사할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오죽하면 식사 시간이 아닐 때조차 칼로리바를 먹겠는가?
“무슨 큰 병이라도 걸렸어? 아니면 전투 후유증?”
날카로운 추측. 올리버는 별거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직까지 배가 고픈 게 전부였으니.
“일하는 데는 지장 없습니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에디스가 대답했다. 어째서인지 요점은 그게 아닌 듯했지만.
“어쨌건 아까 재밌었어. 핑크맨에 비해 조직력이나 기술력이 떨어진다 뿐 콩키스타도르 용병대도 우스운 실력은 아닌데 그렇게 제압할 줄이야. 흑마법이야 그렇다 쳐도 운동신경도 좋을 줄은 몰랐군.”
“아는 분들과 같이 훈련한 덕분일 겁니다.”
올리버가 적당히 둘러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신체 능력이 좋아진 건 인육 요리사 덕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전부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 정도로 좋아질 줄이야.’
올리버가 저도 모르게 토마호크를 막아내고, 반격한 순간을 떠올렸다. 그건 올리버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상상 이상이었기에.
“그런데 거기 있던 용병분들이 유명하신 분들입니까?”
“어, 란다가 아닌 여기 신대륙에서 주로 활동해 넌 모를 수 있지만, 여기선 꽤 유명해.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곳 신대륙을 처음 정복한 탐사대의 후손이거든.”
“아, 그래서 이름이······. 대단하군요.”
“대단한 건 아니야. 거짓말이거든.”
“거짓말요?”
“어, 신대륙은 시작의 땅이라 과거를 지우는 걸 넘어 새로 만들 수도 있거든. 아마, 길거리에 나가면 왕의 사생아나, 몰락 귀족, 잊혀진 왕조의 후예도 만날 수 있을걸?”
“아······.”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실력은 진짜야. 이곳 퍼스트 스텝에서 폭력이 필요할 때마다 그들을 찾거든. 시위 진압, 노동 운동가 폭행, 살해, 부동산 분쟁, 홍인(紅人) 테러분자 사냥, 범죄자 추적 같은.”
에디스가 돼지갈비를 소스에 찍어 입에 쑤셔 넣었다.
“뭐, 그래봤자 핑크맨에겐 밀리지만”
“핑크맨이 그 정도입니까?”
“뭐야?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너도 이제 이 바닥에서 경력이 꽤 될 텐데?”
“고도화된 용병 회사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초인과 일반병력, 경찰국 출신 전문 인력이 탄탄한 조직력으로 구성된. 다만,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는 수준입니다.”
“다행이네. 그 정도면 아는 만큼 아는 거니까. 참고로 덧붙이자면 넷 내비게이터(Net Navigator)도 자체 보유하고 있어. 그게 핑크맨의 무서운 점이지. 단순히 힘센 것보다 그게 더 치명적이거든.”
“그렇군요. 참고로, 제인 아가씨께서 알려주신 겁니다.”
“뭐?”
“제인 아가씨요. 제가 그분을 처음 경호했을 때 알려주셨습니다. 핑크맨을 비롯한 이런저런 이야기를요.”
“그렇군······.”
“제인 아가씨께서 지금 갈로스 수도인 라빌리 재건 사업에 큰 손으로 참여하신다는 데 혹시 알고 계십니까?”
“글쎄, 그보다 그딴 이야기를 나한테 왜 하는 건지 더 궁금한데?”
“그냥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음, 난 그냥 널 때리고 싶은데. 왜? 못 때릴 거 같나?”
에디스가 옆에 있는 커다란 술병을 잡으며 물었다. 정말로 던질 의사가 있었다.
“불쾌하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당연히 미안해야지. 난 지금 네 고용주거든. 내 기분을 잡치게 하지 마······.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의미심장한 말에 올리버는 질문했으나, 에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이제 스스로 생각하지 그래? 질문에 순순히 답해주는 놈이 많을 거 같아? 질문에 대답해주는 경우는 자기 이익이 관련되어 있을 때뿐이야.”
“맞는 말씀이군요······. 그럼, 이번 일에 관해 질문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에디스 님 이익과 관련된 거니까요.”
“말해 봐.”
에디스가 거대한 거위 통구이를 뜯어먹으며 말했다.
“왜 핑크맨을 고용하지 않고, 콩키스타도르 용병대를 고용하신 건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전 상관없지만, 에디스 님을 비롯해 다른 분들은 핑크맨을 더 높이 치시는 것 같은데요?”
합당한 의문이었다. 현재의 사업가들은 노동자의 임금은 깎으려곤 해도, 폭력을 구매하는 데까지 돈을 아끼진 않았다.
그 돈을 아끼는 순간 사업뿐 아니라 자기 목숨도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알았기에.
특히, 에디스와 같이 부유한 자는 더욱 그랬다.
“이제 좀 마음에 드는 질문이네. 그런데 질문이 잘못됐어. 핑크맨을 고용 안 한 게 아니라, 고용을 못 한 거야.”
“어째서지요?”
“귀족 그룹이 고용했거든. 정치계와 연결된 중앙 정치인과 귀족들은 핑크맨의 주 고객층이라, 우리가 먼저 의뢰했음에도 거절했지.”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됐다. 핑크맨은 정치권에도 많은 의뢰를 받았으니. 아니, 그걸 넘어 핑크맨 자체가 정치계와 유착하고 있었다.
그래도 의문이 생겼다.
“자본가와 사업가도 주 거래처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다만, 우리 같은 인간들은 핑크맨에게 있어 숲에 사는 야생동물 같은 거야. 정치인들은 집에서 키우는 가축 같은 거고. 사업적인 편의와 정치적 영향력, 국가 단위의 하청. 그래서 양자택일 상황이 되면 보통 이쪽을 버려. 숲만 있으면 야생동물은 또 생기는 법이니까.”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 새로운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주주총회면 결국 주주들로 인해 최고 경영자가 선출될 텐데, 경호원이 이 정도로 중요한가요?”
“멍청한 질문이군. 왜? 란다 밖이라고 사업이 고상하게 진행될 거 같나? 투표가 시작되면 용병은 할 게 없지만, 그전까지는 아니야. 아주 필요하지. 가령, 갈팡질팡하는 다른 주주들을 설득한다거나.”
올리버는 바로 납득했다. 실제로 란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였으니까.
에디스가 추가로 말했다.
“아니다. 주주총회가 시작해도 용병은 필요하겠다. 상황이 막장이면 용병을 이용해 주주총회 입구를 막거나, 판 자체를 엎으려고 할 테니. 물론, 반대쪽도 거기에 걸맞게 대응해야 할 거고. 여하튼 폭력은 필수 불가결해. 그러니까 브라이언이 조건부로나마 후보까지 새로 뽑아줬지.”
“아, 그래서 브라이언 님 저택은 그렇게 방비가 철저했던 거군요.”
에디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또 경우가 달라. 그 집은 주주총회가 일어나기 전부터 원래 그 정도 방비는 해놨어.”
올리버가 고개를 갸웃대며 이유를 물었다. 그 정도 경비 수준이면 평소에도 나가는 비용이 꽤 될 텐데. 부유층이 안전에 민감한 건 알지만 그래도 과한 수준이었다.
“예로부터 신대륙에는 흉흉한 소문이 많거든.”
“홍인(紅人) 흑마법사요?”
“아니 그거 말고. 아이들 괴담 같은 거. 밤마다 항구에서 물고기 인간이 올라와 거래를 제안한다던가, 망태기를 짊어진 노인이 아이들을 데려간다던가······. 혹시, 여기 올 때 배에서 기도하는 사람 못 봤나?”
올리버가 여객선을 탔을 때를 떠올렸다.
“있었습니다. 항구 갑판에서 초를 켜고 기도하는 선원을요. 바다 괴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했습니다.”
“그것도 괴담의 일종이야.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에 바다만큼 거대하고 강력한 악어가 산다고 하거든. 개소리지만 많은 사람이 아직까지 믿고 있지······. 심지어 지금도 가끔 괴담 속 괴물을 봤다던 사람이 나타나고. 그래서 돈 많은 늙은이들은 용병을 항시 고용하고 있는 거야. 무서워서. 참 웃기지? 돈이 썩어날 정도로 많아도 아이들 괴담에 벌벌 떨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