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 상황 정리 (3)
천사의 집 종업원, 차일드와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올리버는 임시 사무실로 향했다.
재개발로 북적이는 거리와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자 곧 사무실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끼익.
올리버가 문을 두드리려 다가가던 중 낡은 문이 열렸다. 제임스였다.
“제임스 씨, 벌써 이야기 다 나누셨습니까?”
“아, 예······. 포레스트 씨께서 잘 설명해주셔서요. 아직 확실하게 결정 난 건 없지만, 사장님께 보고할 건 생겼습니다.”
대답하는 제임스의 감정은 아까 전보다 더 만족하는 빛을 띠었다. 포레스트의 제안이 제법 매력적인 듯했다.
다행이었다. 약속을 계속해 어겨 미안했는데.
“데이브 씨. 볼일이 없으시다면 전 와인햄으로 돌아가 봐도 되겠습니까? 포레스트 씨와 나눈 이야기를 사장님께 전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아, 물론입니다······. 전 일주일 정도 더 있을 거 같은데, 만약 제안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말씀해주십시오. 그럼, 약사님과의 약속부터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친절한 말씀 감사합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마탑이나 재개발만큼 중요한 일입니까? 그냥 궁금해서요.”
진심이었다. 제임스는 수작을 부리려는 게 아닌 순수한 호기심을 빛냈다.
당연한 반응이기도 했다. 과거 갑자기 사라진 전적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올리버는 다소 바보 같을 정도로 약속을 잘 지키고, 손익을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흑마법사치고는 이례적.
덕분에 약속을 세 차례나 미루는 행보를 보였음에도 개수작을 부린다기보다는 뭔 일 때문에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올리버가 답했다.
“만나고 싶은 분이 계셔서요. 조금 멀리 계십니다.”
“헤······. 여잡니까?”
제임스가 반 농담 삼아 질문했다. 그러나 올리버는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고 답했다.
“음······. 아, 여성분 맞습니다.”
***
“참 안 어울리는군.”
제임스와의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온 올리버에게 포레스트가 대뜸 말했다.
제임스와의 대화를 의도치 않게 엿들은 것.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자네가 여자 만나러 간다는 게. 남자는 보통 그게 정상이긴 하지만, 자네가 말하니까 진짜 이상해.”
올리버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 제임스의 반응과 비슷했다. 심지어 포레스트 옆에 있는 조와 알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도대체 왜?
“그렇게······. 이상한가요?”
“욕하는 건 아니고. 그냥 이상하다는 거뿐이지. 예쁘신가? 그 아가씨?”
포레스트가 분위기를 전환시킬 겸 농담 삼아 물었다.
그러나 올리버는 아까 전과 똑같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성별이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 떠올릴 때처럼.
“음······. 예뻤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요.”
“허······. 그런가? 그 아가씨가 누군지 점점 궁금해지는구만. 바쁜 와중 자네가 만나러 갈 정도면 말이야.”
“저도 궁금하네요.”
의미심장한 대답. 포레스트는 이야기를 바꿨다.
“······뭐, 좋아.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일 이야기나 나눌까? 여기까지 온 이유가 그거 때문이니. 데이브 자넨 거기 좀 앉고, 조와 알 자네 둘은 잠시 나가주게.”
대표이사들끼리 중요한 사업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
조와 알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히 방 밖으로 나갔고, 올리버는 포레스트가 시킨 대로 의자에 앉았다.
포레스트는 미리 준비한 술을 잔에 따르며 올리버에게 한잔 내밀었다.
올리버는 술을 마시며 질문했다.
“시(市)와의 이야기는 잘 풀렸습니까?”
“딱 예상한 수준이었네.”
“잘 풀렸다는 뜻이군요.”
포레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포레스트는 시(市) 내무부 장관 카버를 찾아가 올리버가 엔조이먼트를 습격하러 간 사실을 이야기했다.
카버는 그 사실에 어찌 된 건지 물었고, 이를 설명하던 과정에서 올리버가 기어코 엔조이먼트를 쓰러트렸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었다.
올리버가 하겠다고 했고, 포레스트도 믿고 있었지만, 막상 실현되니 그 충격이 남달랐다. 내무부 장관 카버는 말할 것도 없었고.
그래서 포레스트는 바로 승부수를 띄웠다.
올리버가 드루이드의 지식을 어떻게든 확보해 시(市)에 제공해 줄 거라고 말이다.
시간과 분위기 탓에 그 자세한 방법은 듣지 못했지만, 포레스트는 올리버에 대한 믿음 하나만으로 카버를 설득했고,
올리버와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한 카버는 일단 포레스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물이 이미 엎질러진 것도 한몫하였고.
그렇기에 한쪽 발은 이쪽에 걸치게 된 카버는 포레스트에게 곧바로 조언했다.
시의원의 반응과 도시에 미칠 파급력에 관해 말이다.
카버는 생각 이상으로 큰 사건이라 시의원들은 올리버를 경계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엔조이먼트에 대한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부를 축적한 초인인 신(新)계급 역시 란다의 변수로 떠오르고 있기에.
그러니 자리를 마련해줄 테니, 시의원들을 직접 설득해보라고 했다.
데이브와 친분이 있는 시(市) 관계자인 자신은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말이다.
다행히, 그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우선 이쪽에는 시의원들의 관심을 끌만 한 확실한 카드가 있었으니까.
“드루이드 지식은 통했습니까?”
“아주.”
포레스트가 짧고 굵게 대답했다.
포레스트는 카버의 도움으로 시의원들이 회의 중인 들어가 인사하곤, 곧바로 승부수를 띄웠다.
올리버가 확보한 드루이드의 지식 사본을 제공한 것.
협상이란 보통 자연스러운 흐름을 통해 서로의 필요를 확인하며 천천히 이루는 거였지만, 때때로 공습을 가하듯 충격을 선사해줘야 했을 때가 있었고. 바로 그때가 그러했다.
포레스트는 떠올렸다.
당시 시의원의 반응을. 그들은 눈에 띄게 동요했다.
이는 꽤 놀라운 일이었다.
음지와 양지의 경계가 모호하고, 초인이 날뛰는 이 도시에서 살아남은 시의원들은 웬만한 일에서도 동요하는 법이 없었기에.
그만큼 제대로 된 협상 카드를 내놓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한 시의원이 물었다.
‘이걸 어떻게 확보한 거지?’
‘전 잘 모릅니다. 확보한 건 데이브가 한 것이라서요.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이것의 몇 배나 될 지식을 데이브가 곧 확보할 수 있다는 것과 시(市)에 해당 지식을 공유할 거란 겁니다.’
‘어째서지? 그런 황금 덩어리를?’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요.’
모두 침묵했다. 약속했으니까 지킨다. 손익계산에 예민한 란다에서 보기 드문 일.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말하니 무게가 남다르게 다가왔다.
시의원들은 그 순간만큼은 올리버에게 압도되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만큼 무서운 것도 없었으니.
이후로는 어렵지 않았다.
올리버에 대한 경계심을 낮추고, 받아들이게 설득하는 건.
“어떻게 설득하셨는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궁금해서요.”
“우선 란다 초기의 정신과 란다의 발전 원동력을 설명했지. 란다의 발전에는 배척이 아닌 수용에 있다고.”
“그걸로 설득된 거로군요.”
“아니, 그건 포장지고 실질적인 내용은 이후지. 자넬 배척하면 X구역 재개발은 물론, 드루이드 지식도 물 건너가고, 더 나아가 란다에 정착한 수많은 인재가 시(市)를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할 거라고 경고했어. 그건 도시의 약화를 의미하지.”
“아······.”
“거기다 뛰어난 인재가 부담스러워 쫓아내 봤자, 외부 세력에 합류할 뿐이라 했지.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지금 정세에 관해서도 설명했어.”
“정세라면······. 드루이드 말씀입니까??”
“그래. 그린랜드에 처박혀 수행만 하던 드루이드가 기어코 왕실 쪽에 붙었지 않나? 결국, 그들도 속세에 욕심이 생긴 거지. 왕실과 중앙의회는 그만큼 강해지는 거고.”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그 후원을 하는 게 악마와 관련 있는 에드워드 10세였으니. 올리버가 봐도 뭔가 심상치 않았다.
“거기다 마법사 학파에서도 제각기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학파라면······. 마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 마탑의 학파 말고, 그들의 뿌리가 되는 오리지널 학파. 그들은 전부 란다 밖에 있지.”
아, 올리버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마탑의 시발점은 그 오리지널 학파들의 지점(支店)이었으니.
멀린의 서재에서 마탑 역사를 공부하며 알게 된 사실.
현 마탑은 그 학파의 지점들이 제각기 독립하고 연합해 생긴 것이었다.
그 말은 즉, 마탑의 묠니르, 스카디, 아그니 외 기타 학파가 란다 밖 묠니르, 스카디, 아그니 외 기타 학파에 뿌리는 뒀지만, 별개라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상당히 기형적인 구조였다.
“그분들도 왕실과 교류하고 있습니까?”
“왕실, 중앙의회, 귀족 혹은 다른 외국 정부 등 여러 세력과 질척이고 있어. 전에도 교류는 했지만, 더 적극적으로. 뭐가 됐건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포레스트는 술을 마신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재밌게도 우리가 득을 보기도 했어. 덕분에 자네와 같은 전력을 함부로 해선 안 된다고 설득할 수 있었거든.”
“아······. 역시 대단하시군요. 포레스트 님은.”
“엄밀히 말하면 시의원들이 대단한 거지.”
포레스트가 자신의 공을 상대측인 시의원들에게 돌렸다. 겸손이 아닌 진심이었다.
“이쪽에서 아무리 말해도 결국 당사자들이 듣지 않으면 소용없거든. 보통, 그 정도 자리까지 가면 다들 총기(聰氣)가 흐려지는데, 시의원들은 냉정하게 이를 인정했어. 부패했지만, 타락하진 않았다는 증거지.”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했을 때쯤. 마지막 결정적 한 방을 주니 이야기가 잘 끝났어······. 그런데, 정말 X구역 중부의 숲을 란다의 자원으로 만들 수 있겠나?”
***
그랬다.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경계심이 올라간 시의원들을 설득한 결정적 요소는 드루이드의 지식과 엔조이먼트와의 전투 도중 생긴 X구역 숲을 자원으로 개발하겠다는 거였다.
“확실히 된다고 말씀드릴 수 없지만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올리버가 평소처럼 담담히 말했다. 경쟁이 치열한 란다에서 이런 식으로 대답하면 뺨 맞기 딱 좋았지만, 놀랍게도 포레스트는 오히려 믿음이 생겼다.
저렇게 말을 했던 것 치고 실패한 적이 없었으니.
“써드를 통해 드루이드의 지식을 확보하고 있고, 또 전투 중 송장인형이 챙긴 드루이드의 약초와 씨앗이 있으니 차분히 연구하고 분석한다면 저기 저 숲을 드루이드의 숲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무엇보다 제겐 셰이머스 님도 있고요.”
그랬다. 올리버는 송장인형-셰이머스를 이용해 중부에 생긴 숲을 그린랜드 드루이드의 성소처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기껏 생긴 숲 사라지면 아까웠으니까.
차일드의 교육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송장인형-셰이머스와 바토리 등을 이용해 숲을 개발하려면 사람과 최소한의 회화는 가능해야 했으니.
“그래서 여쭙는 건데 블랙마켓에서 드루이드를 시체 찾았습니까?”
포레스트가 민망하게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네. 생각보다 쉽지 않아. 블랙마켓뿐 아니라 해외 암시장도 찾아보고 있지만, 누군가 다 채가고 있거든. 아마, 개혁파 드루이드겠지.”
올리버는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있는 엔조이먼트뿐 아니라 시체까지 다 챙겼으니. 드루이드는 죽어서도 드루이드라고.
“뭐, 그럼 어쩔 수 없죠.”
“괜찮나?”
“예. 일손이 더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이미 살점을 조금씩 채취해서요.”
올리버가 말한 살점이란 지금 냉동 창고에 누워 있는 82구의 드루이드를 칭했다.
올리버는 써드가 드루이드의 지식 혹은 기억을 읽는 사이 살점을 조금씩 조금씩 떼서 채취했다.
“그걸로 셰이머스 님을 강화하면 혼자서도 숲을 다 관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어디까지나 추정이었지만, 포레스트는 그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올리버가 했던 말 중 이뤄지지 않은 게 없었으니. 그러자 문득 포레스트는 자신의 인생이 참 드라마틱하게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상 소일거리만 하며 남은 삶을 보내려 했건만, 갑자기 찾아온 올리버에 의해 여러 큰 건을 맡는 것도 모자라, 구역 단위 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시의원과도 협상을 진행하고 있지 않은가?
모두 가난한 종업원 시절 꿈꿨던 일. 포레스트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드루이드 시체는 더 열심히 찾아보지. 개혁파 덕분에 시체 가격이 많이 올랐을 테니, 어떻게든 공급하려는 사람도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아, 그런데 약사님 조수분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만족스러워하시는 것 같던데요.”
“별거 아니야. 약사란 분이 드루이드 약초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 협업을 제안해 봤어. 이쪽 사업을 설명해 준 뒤······. 자세한 건 좀 더 이야기 나눠야 알 수 있겠지만, 아마 받아들일 거야. 드루이드 약초에 관해 연구하고 싶다고 했으니, 거절하기 힘들 테지.”
“다행이군요.”
올리버는 안도했다. 필요하다면 약사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었지만, 가급적이면 빨리 움직이고 싶었기에.
그러한 마음을 눈치챈 걸까? 포레스트가 질문했다.
“아, 그런데 자네 만나려는 그 여성분이 누군가? 개인적으로 궁금한데.”
“요안나 씨라고 성기사입니다.”
“······.”
“지금 신대륙에 계시죠.”
올리버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