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 나는? (1)
“피어스. 어떻던가?”
녹색 면직물 망토를 두른 빼빼 마른 드루이드가 입을 열었다.
머리카락뿐 아니라 수염까지 녹색으로 물들인 그는 몹시도 현명해 보였다.
“셰이머스······. 그 꼬맹이가 당한 거 맞아.”
한 걸음 앞장서서 걷고 있던 피어스가 멈춰 서며 답했다.
곰과 맞먹는 덩치에 인상은 험했으나, 눈에는 드루이드 특유의 지성이 빛났다.
“조사한 것과 다르긴 하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진짜였어.”
피어스의 동료인 긴 수염을 기른 드루이드와 나뭇잎 망토를 두른 여성 드루이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어스는 근접 전투에 관해서는 드루이드 중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
심지어 단순히 강한 것을 넘어 남을 가르칠 정도의 실력과 지성, 경험을 가진 이였다. 셰이머스를 가르친 것도 다름 아닌 그.
그런 그가 인정했다면 나머지 두 사람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가볍게 공격한 거라지만 자네 공격을 막았으니.”
“배려해줄 필요 없어.”
피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은 몹시도 냉정하고 차분했다.
“봐주고 안 봐주고를 떠나 보통 놈이 아니야.”
“······그런가?”
피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처음 공격이 막혔을 때를 떠올렸다.
쿼터스태프에.
그때 피어스는 살짝 놀라긴 했으나, 그래도 상정한 범위 내였다. 그렇기에 추가로 공격을 더 하려 했다.
셰이머스를 이긴 놈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허나, 곧 그만두고 말았다.
놈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하는 그때, 드루이드 특유의 감이 발동했기에.
‘······그냥 운이 좋았던 것뿐입니다.’
피어스는 그 순간 어떠한 불길함을 느꼈다. 정확히 어떤 불길함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최소한 이런 식으로 싸워서는 안 됐다.
“······확실한 건 놈이 셰이머스를 쓰러트린 실력자란 거지.”
“여기로 도망친 다른 녀석들 위험할까?”
긴 수염 드루이드가 물었다. 다소 의외일 수 있었으나, 실로 합당한 반응이었다. 자신들의 목표는 탈주한 엔조이먼트를 붙잡아가는 거였지 죽이는 게 아니었다.
“셰이머스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놈은 있어도, 더 강한 녀석은 없으니 위험할 거야. 아니, 오히려 더 안 좋아. 잠재력만큼은 셰이머스가 가장 좋았으니.”
가만히 듣고 있던 여성 드루이드가 한마디 보탰다.
“그거 큰일이네요. 추포(追捕) 외에도 이브(Eve)의 행방도 찾아야 하는데요. 이미, 다른 하나는 헤임달에게 빼앗겼잖아요?”
“일단, 지켜보면서 시(市)와 이야기부터 나눠보자고. 때마침 협상할 거리도 가져왔으니. 정 안 되면 억지로라도 움직여야겠지만.”
긴 수염 드루이드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가던 길을 갔다.
그리고 세계수를 통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드루이드 엔조이먼트들이 일제히 접속을 끊어 현실로 돌아와 대화를 나눴다.
“헤······. 저 늙은이들 뭘 가져왔길래 저리 자신감에 차 있는 거지?”
“신경 쓰지 마. 숲에서만 처박혀 있던 인간들이 가져와봤자 뭘 가져올 수 있겠어? 기껏해야 숲에서 기른 열매나 약초? 우리도 시(市)와 거래할 게 있잖아? 더 대단한 거로?”
한 엔조이먼트 드루이드의 말에 다른 드루이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시간 토론을 통해 정한 협상 카드는 새로운 기술을 탐하는 란다로서는 절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보다 피어스······. 저 말 어떻게 생각해?”
다들 침묵했다. 지금 대화를 나누는 이들 모두 가난하고, 척박한 그린랜드라면 치가 떨리고, 가혹한 수련을 강행한 다른 전통파, 개혁파 드루이드라면 증오했지만, 또 한편으로 그들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들보다 더한 수련을 통해 높은 경지에 이른 자들이었으니.
거기에 피어스도 당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해결사 데이브의 실력을 인정한다는 건 꽤 위험하다는 거였다.
물론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ABC사기 연쇄로 집중 견제당해 X구역으로 모인 엔조이먼트는 그 수가 대략 백여 명.
이 숫자가 한 번에 몰아치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그 셰이머스를 쓰러트린 놈이라도.
허나, 그러면 이 도시에 둥지를 트려는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이 빚을 수 있었다. 싸움의 규모를 너무 키워 시(市)에 이목을 끌면 앞으로의 관계를 망칠 수 있을 테니.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라면 깔끔하게 멱을 따거나, 외진 곳에서 해치워야 하는데 그 역시 쉽지 않았다.
깔끔하게 멱을 따기에는 놈의 실력이 뛰어났고, 외진 곳에 끌어들이기도 놈에게 조직이 생긴 지금은 쉽지 않았다.
그때, 한 여성이 손을 들었다. T구역 주점 가수로 잠입한 여성 드루이드였다.
“바쁜 시간 쪼개서 여기로 나온 내가 한 가지 의견을 내도 될까?”
“······뭔데?”
“요컨대, 놈과 정면 대결하기 까다로워 골치가 아프다는 거지?”
“······뭐, 그렇지? 정면으로 붙는다면 피해는 다소 입겠지만, 이길 수 있지. 드루이드가 백 명이 넘는데.”
“거기다 여기 비소속 갱들도 포섭할 수 있고. 이미 몇몇 군데와 접선을 마쳤어.”
“그럼, 정면 대결을 할 수 있는 명분만 만들면 되겠네.”
“명분?”
“그래. 잘 하면 안 싸우고도 이길 수 있고. 여하튼 일단, 시와 접선하자.”
***
“일은 다 끝나셨습니까?”
한 손에 칼로리바를 든 올리버가 멀리에게 질문했다.
멀린은 자신의 나무인형-골렘에게 지시해 대량의 서류를 개인 집무실 안으로 옮기게 했고, 또, 대량의 서적을 밖으로 가져오게 했다.
참고로, 밖으로 가져온 서적은 인육 요리사가 개인연구 일지나, 수집한 흑마법 서적으로, 그 양은 수백여 권에 달하며, 대부분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마법이나 흑마법 서적은 오래된 것일수록 가치 있을 때가 있었으니. 더욱이 그 소유주가 손가락과 같은 거물이면 더욱 그러했다.
멀린이 벽처럼 쌓이고 있는 책 옆에 서며 대답했다.
“이제 시작이지. 영웅 대접받았으니, 이젠 영웅 노릇을 해야 하니까. 일이란 게 벌이는 것보다 수습하는 게 더 힘든 법이거든······. 근데, 뭐 먹고 있나?”
“아, 죄송합니다. 군용 칼로리바입니다. 배가 고파서요.”
“배고프면 어쩔 수 없지······. 어쨌건 바빠. 이것 외에도 생명학파 일도 마무리해야 하는데, 이 나이 먹고 이렇게 바쁠 줄이야······. 뭐, 자네도 비슷한가? 나랑은 다른 의미지만. 사업은 할 만한가?”
“저는 하는 게 없습니다.”
“그래?”
“예.”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겸손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올리버는 하는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굵직한 대내외적 업무는 포레스트가 맡고, 기타 자잘한 업무는 파이터 크루와 선택하는 사람들, 포레스트가 영입한 용병, 및 해결사들이 해줬기에.
사업이 시작된 지난 2주 동안 올리버가 한 것이라고는 비소속 갱단 연합과의 협상 때 딱 한 번 움직인 게 전부였다.
그것도 협상이 결렬돼 초반 화력을 퍼부은 게 끝.
예상치 못한 화력에 비소속 갱단은 주춤했고, 나머지는 마리와 조가 해줬다. 그 둘은 X구역에서도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강해졌기에.
“그런 것 치고는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구만. 돈 버는 게 싫나?”
올리버는 한순간 ‘생각 이상으로 할 게 없어서요.’라고 답할 뻔했다.
뭐가 됐건, 잡생각이 넘치는 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맡은 거였으니. 허나, 그걸 입 밖에 낼 순 없었다.
이 일에 사활을 건 포레스트와 조, 마리를 생각해서라도. 그건 예의가 아니었다.
올리버는 허리춤에서 빅마우스를 꺼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빵 반죽처럼 부푸는 빅마우스.
올리버는 그런 빅마우스에게 부탁했다.
“빅마우스. 저기 책 좀 삼켜주시겠어요?”
올리버가 성벽처럼 높고, 두껍게 쌓인 서적과 연구일지 등을 가리키며 부탁했다.
멀린의 나무인형-골렘 덕분에 성벽은 더 거대해지는 중이었다.
척 봐도 과중한 양. 빅마우스가 경멸 섞인 눈으로 올리버를 노려봤고, 그 모습을 멀린이 봤다.
“무리인 거 같아 보이는데? 눈으로 자넬 경멸하고 있어. 나도 같은 생각이고. 혼자서 이걸 어떻게 다 먹어?”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어째서?”
“어제 다른 먹보주머니 두 마리와 싸우게 했거든요. 빅마우스가 이겼고, 두 마리 모두 삼켜서 기능이 향상됐습니다. 덩치는 변화가 없지만요. 어쨌건 빅마우스는 다 삼킬 수 있다는 거죠.”
“세상에 맙소사······. 내가 없는 사이 많은 일을 했구만.”
올리버는 칭찬인 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많은 일을 하긴 했다.
그중 가장 큰 성과는 내장부품을 만들어 송장인형에 장착시킨 것이었다.
빅마우스는 결국 올리버가 부탁한 대로 성벽처럼 쌓인 책을 뭉텅이로 잡아 삼키기 시작했고, 올리버는 돌아온 멀린과 다시 대화를 나눴다.
가령, 케빈과 야렐리, 테렌스는 마탑으로 돌아와 어떻게 됐는지 말이다.
“다들 무사히 잘 돌아왔고 잘 지내고 있지. 선발대로 가 영웅으로 돌아왔으니. 자네도 영웅 대접받을 수 있을 텐데······. 참가하지 그러나?”
“아······. 저는 괜찮습니다.”
올리버가 인육 요리사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올리버를 괴롭히는 허기처럼 그가 한 말은 올리버를 괴롭혔기에.
올리버가 다시 꼬르륵대는 배를 달래기 위해 칼로리바를 먹자, 멀린이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상관없고. 그럼, 이만 본론으로 넘어갈 수 있겠나?”
“예?”
“자네가 계속 시간을 끄니 내가 겁이 나서.”
“······.”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만, 이야기해주게. 악마의 서적도 가지고 싶으니 내게 챙겨달라 한 자네가 뭐 때문에 그리 뜸을 들이나?”
“티가······. 났습니까?”
“자네는 대부분 속을 알 수 없지만, 가끔 아이만큼 티 날 때가 있거든. 지금이 바로 그때고. 혹시, 무슨 사고라도 쳤나?”
“그건······.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에 그러나? 말해줘. 겁나니까.”
“다소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일지도 몰라서요.”
“찜찜한 것보다는 실례인 게 낫지.”
멀린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올리버는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선 케빈 교수님 가족을 인체 실험하긴 적 있으시죠? 마텔에서 하는 거처럼 말입니다.”
멀린의 감정은 한순간 동요했다. 감정은 볼 수 없었으나,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기에 알 수 있었다.
“······그렇지.”
“······그리고 아카이브가 되신 후 그만두고, 케빈 교수님을 제자로 거둬들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신 건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음······. 어째 기시감이 드는군. 자네가 와인햄으로 떠날 때 말이야······. 그때, 자네가 말했지. 중요한 건 지금이 아니라고.”
올리버 역시 그 말을 기억했다. 그때, 당당하게 그리 지껄였건만, 지금 다시 묻다니. 참으로 민망했다. 허나, 그럼에도 질문했다.
“아, 물론 탓하는 건 아니야. 다만, 알고 싶군. 갑자기 왜 다시 궁금해졌는지······. 그냥은 아닐 거 같은데?”
그 말은 정답이었다. 너무나도 정확한 정답. 올리버는 눈을 잠시 감아 고민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때는 알겠는데, 지금은 알 수 없어서요.”
“무엇을?”
“저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