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 격(格) (1)
“어머, 싫다······! 왜 제가 나타날 때마다 등장하시는 거죠? 혹시, 저한테 관심 있나요? 다 늙어서.”
갈로스의 수도 라빌리.
그 중심인 1번 구역을 벗어난 11번 구역에서 그레텔이 말했다.
몸에 검붉은 기운을 뿜는 그녀는 겉으로 웃고 있었으나, 어색한 표정, 이마에 맺힌 식은땀 등을 볼 때 썩 좋은 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방해받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휘이이이이이············탁.
마력을 이용해 비행하던 멀린이 그레텔과 좀 떨어진 건물 위에 안착하며 대답했다.
“불쾌했다면 사과하겠소. 다만, 오해하지 마시오. 난 여자한테 그렇게 관심이 없으니.”
“헤······. 그래요?”
“그렇소. 젊은 시절에도 마법에 더 관심이 많았거든.”
그 말은 사실이었다. 멀린의 머리가 아직 풍성하며, 피부가 탱탱하던 시절, 멀린은 혈기가 넘침에도 이성보다 마법에 더 관심이 많아 자신의 모든 시간을 공부와 수행, 학문적 교류에 쏟아부었다.
일정한 경지에 들어서서는 이성에게 관심을 가질 뻔한 적도 있었지만, 얄궂게도 꿈꾸던 아카이브로 선택되었고, 이후로는······.
“못 믿겠는데요? 늙은이들은 누구보다 돈과 삶에 관심 없는 척, 초연한 척, 지혜로운 척하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탐욕스럽잖아요?”
“부정하지 않겠소. 늙으면 지혜로워지고, 욕망에 초연해진다는 건 그저 늙은 인간의 망상에 불과하니. 인간은 늙을수록 추해지는 생물이오. 나 역시 늙고 나서 깨달았소. 하지만, 그대에게 관심이 없는 건 진심이니 믿어주시오.”
“그 말을 증명할 수 있나요?”
“물론······. 난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에게 관심 없기 때문이오. 그것도 자그마치 수백 년이나.”
멀린이 대답하자마자 짐짓 여유로운 척하던 그레텔의 표정은 일순간 일그러지며, 몸을 가득 채우다 못해 흘러넘치는 지옥의 기운을 이용해 마법을 발동했다.
지옥의 기운으로 검게 물든 그레텔의 마력은 아주 소량만 허공에 퍼져 땅에 도착. 대지를 타고 빠르게 이동해 멀린이 서 있는 건물까지 단숨에 도달했다.
건물에 마력이 도달하자마자 마력에 깃든 술사의 의지가 발동하며, 검은색 벼락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올랐다.
쾅━━콰라라랑!!
검고 거대한 섬광이 건물 가장 아래층에서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지진이 일어난 듯 땅이 뒤흔들렸으며,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집채만 한 콘크리트 파편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충격의 여파로 산산이 부서진 건물 파편은 하늘 높이 날아가다 이내 비처럼 쏟아졌고, 그레텔은 흑마법사의 눈을 떠 모습을 감춘 멀린의 행방을 뒤쫓았다.
‘사라졌다? 공간마법으로 도망쳤나?’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공간마법을 사용하는 건 몹시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불가능한 것은 또 아니었다.
특히, 천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지식을 전수받은 아카이브라면.
그레텔은 한순간 아쉬움을 느꼈다.
잘하면 아카이브도 맛볼 수 있었을 텐데. 그가 가진 천년의 지식과 전설과도 같은 막대한 재산의 행방도.
불과 며칠 전이었다면 확신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비록 불안정하긴 하지만 자신에겐 그만한 힘이 생겼으니.
부들부들.
그레텔은 떨리는 자기 손을 봤다. 혈관 사이로 엄청난 기운이 요동치는 탓이었는데, 이 압도적인 힘에 그레텔은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용기를 얻고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
꽉······.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그레텔은 스스로에게 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다음 다시 흑마법사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멀린이 없다는 걸 확인하곤, 오빠에게 가기로 했다.
원래 계획대로 지옥의 힘을 흡수한 다음, 데이브란 놈을 먹기 위해.
“늙었다고 무시하면 슬프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한쪽에서 들린 목소리.
그레텔이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고, 거대한 콘크리트 파편 뒤에 숨어있는 멀린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감정은 물론 생명력과 마력까지 완전히 숨긴 채 파편 뒤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찢은 종이를 그레텔을 향해 날렸고, 그레텔은 지옥의 기운이 뒤섞인 검은 마력을 이용해 실드를 다중 전개. 종이를 막아내려 했다.
겉모습과 달리 종이는 쇳덩어리처럼 묵직하면서도 칼처럼 예리했고, 그 탓에 그레텔이 전개한 실드 다섯 겹 중 세 개를 단숨에 꿰뚫었다.
하지만 그뿐. 그레텔이 재빠르게 반응해 종이의 위력에 맞춰 마력을 집중, 타격 부위에 회전을 추가하며, 실드의 형태와 각도를 변경하자,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는 종이도 속절없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쏴앙!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면을 따라 실드 위를 훑고 지나간 종이는 저 멀리 날아가 지상의 건물과 충돌.
포격이라도 떨어진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건물을 폭삭 주저앉게 했다. 그렇다 할 술식을 부여하지 않은 단순한 공격이었음에도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것이 마법사들의 정점. 세상의 비밀을 짊어진 아카이브······!’
아카이브의 힘을 새삼 실감한 그레텔은 경악하면서도 한편 호승심을 불태웠다.
방금 자신이 얻은 힘을 시험해보고 싶었기에. 자신은 물론 오빠의 노력까지 모조리 갈아 넣은 힘을.
결심한 그레텔은 지체없이 검은색 마력을 대량으로 뭉치고 압축해 화살 형태로 가공한 다음 그 촉에 각종 질병계열 흑마법을 묻혔다.
돌조차 감염시킬 수준. 그레텔은 콘크리트 파편 뒤에 숨어있는 멀린을 향해 화살을 투척했다.
“명색이 아카이브가 쥐새끼처럼 숨어있다니 창피하지 않나요?!”
질문과 동시에 화살은 멀린을 꿰뚫었다. 상체와 하체를 나눌 정도로 큰 구멍을 내며.
분명 실드를 전개해 막을 줄 알았건만······. 그때, 상·하체가 나뉜 멀린의 모습이 변화했다.
안개가 걷히듯 멀린의 모습은 흐릿해지며, 그 아래 사람 형태로 뭉친 돌덩어리들이 모습을 드러났다.
수순마력마법을 이용한 위장.
그레텔이 이 사실을 깨닫자마자 머리 위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 같은 상대를 완전히 속일 수 있다면 창피하지 않소.”
추락 중인 콘크리트 파편 위에 멀린이 서 있었다. 그는 그레텔을 완전히 내려다보았고, 그것은 몹시도 그레텔의 마음에 들지 않는 구도였다.
그레텔은 아까 전 날린 화살을 조작해 멀린을 노리려 했지만, 이번에는 멀린이 한 발짝 더 빨랐다.
[스톤 샤워(Stone Shower)]
멀린은 어느새 자신의 마력을 주입한 돌파편에 영향력을 행사해 허공에 뜬 수십,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콘크리트 파편을 그레텔에게 날려 보냈다.
거대한 질량의 콘크리트 파편들은 마력으로 강도와 무게를 증폭시킨 채 사방에서 날라왔으나,
그레텔은 당황하지 않고 몸 안의 마력을 응축. 감정을 폭발시켜, 거대한 마력 칼날을 사방으로 날려 보냈다.
그러자 아카이브의 마력이 담긴 콘크리트 파편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산산조각이 났다.
“가라.”
검은색 마력 칼날은 주인을 위협하는 돌덩어리를 모조리 파괴한 뒤, 주인의 명에 따라 허공을 헤엄치듯 방향을 틀어 멀린을 향해 날아갔다.
멀린은 당연히 방어할 터였고, 이 정도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큰 마법을 써야 할 터.
‘그리고 큰 마법을 쓸 때, 빈틈이 생기지.’
멀린이 어떤 대응을 할지 기다리며 반격을 가하려는 그때 드디어 멀린이 마법을 썼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마법을.
[볼트(Volt)]
멀린이 쓴 것은 묠니르 소학파의 전격 마법 중 가장 기본 중의 기본 마법이었다.
마력을 전기에너지로 전환하는 기본 마법.
기껏해야 전기 충격용으로나 쓸법한 장난에 불과했지만, 멀린은 한쪽 손을 활짝 펼친 채 그 마법을 사용했다.
손끝에 모인 마력은 파치칙 빛을 발산하더니 제각기 전기를 내뿜었고, 그 전기는 나뭇가지처럼 여러 갈래로 길게 늘어져 그레텔이 쏜 마력의 칼날을 하나하나 영격했다.
‘설마 파괴할 속셈?’
그레텔은 의문을 빛냈다. 아무리 대마법사인 아카이브라 해도 마법에는 격(格)이 있었다.
저런 저급한 마법으로 자신의 마법을 막는 건 말이 안 됐다.
들어간 마력의 양은 물론 술식, 의지까지. 그것은 너무 불합리한 일이었다.
다행히 세상은 그렇게 불합리하지 않은지, 멀린이 쏜 전격은 그레텔의 마력 칼날을 막긴커녕 속도도 늦추지 못했다.
이대로 멀린을 베려는 찰나 갑자기 칼날들이 방향을 틀어 서로 충돌, 허공에서 소멸했다.
“······칼날에 전격 성질을 부여해 서로 부딪히게 했군요?”
그레텔이 뒤늦게 눈치채며 물었고, 멀린이 대답해줬다.
“그렇소. 기본 마법이라 위력은 부족해도 이런 식으로 쓸 수 있거든. 이게 마법의 묘미요. 위력이 전부가 아니지. 당연하지만 모두 잊은 사실이오.”
“하!”
그레텔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면서도 이를 부정하기 위해 소리 내 웃었다.
아무리 천년의 역사를 짊어진 아카이브라 할지언정 지옥의 힘을 획득한 자신을 이토록 밀어붙인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렇다면 바닥을 뒹굴면서까지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 오빠의 노력은 무엇이 된단 말인가?!
용납할 수 없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레인 오브 디재스터(Rain of Disaster)]
[어스 티스(Earth teeth)]
그레텔은 분노와 의지를 폭발시켜, 몸에 내재 된 방대한 마력을 사방으로 퍼트렸다.
수백 년간 식인(食人)을 통해 축적한 고밀도의 마력은 반투명한 막을 형성하며 구(球) 형태를 이룬 채 땅과 하늘을 향해 퍼져나가 공간을 장악했다.
그때 그레텔은 마법을 발동했다.
마법을 사용하자마자 하늘에서는 질병-약화계열 흑마법이 묻은 고밀도 마력 화살이 수천 개씩 소나기처럼 쏟아졌으며,
대지는 해일이 일어난 듯 파도치더니, 지상 위에 세워진 건물을 무너트리며 사각형 형태로 제각기 솟아나 네모난 이빨처럼 하늘 위로 돌진했다.
수많은 이빨을 가진 거대한 아가리가 닫히듯 멀린을 위아래로 노렸고, 피할 곳 따위는 전혀 없었다.
11번 구역 전체가 거대한 아가리였기에.
이 거대한 공격에서 벗어날 방법은 공간마법을 통한 전이. 허나, 멀린은 그러는 대신 그 자리에 서서 책을 펼쳤다.
[공조념작(空操捻作)]
멀린이 조용히 영창하자 책에 깃든 무한한 마력이 퍼져, 그레텔이 장악한 공간을 역으로 장악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멀린은 공간 장악을 넘어 비틀어버렸다. 아무리 방대하고 기발한 술식을 이용한다고 해도 세상에는 법칙과 한계라는 것이 분명할 진데, 멀린은 그 법칙과 한계를 초월하며 공간에 말도 안 되는 권한을 발휘. 비틀고 축소해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공간 그 자체를 지배하는 권능.
그 순간 그레텔은 아카이브와 자신의 격차를 인지하며 목덜미가 오싹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서먼스-헤카톤케이레스(Summons-Hecatoncheires)]
쩌저적······!
그레텔이 영창하자 그녀의 몸 안에 있던 방대한 생명력이 휘발됐고, 그와 동시에 허공이 벽처럼 이질적으로 갈라져 그 틈새 사이로 거대한 사람의 머리가 뚫고 나왔다.
머리 하나 크기만 해도 보통 거인은 가뿐히 넘는 거신(巨神)의 머리가.
“크윽······! 이 녀석은 소환하기 싫었는데요!”
거대한 눈, 내려앉은 코, 바위 같은 피부, 입술이 뜯겨 치아가 바로 보이는 거신(巨神)의 머리를 배경으로, 그레텔이 각혈(咯血)했다.
공간마법의 효과와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인신 공양을 접목한 대가였는데,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았다.
다음에 멀린이 사용한 마법을 보았기에.
그는 마법을 뛰어넘어 권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공간마법으로 한 손에 넣은 그레텔의 마법과 공간을 손안에서 재구축해 그대로 투척했다.
수천 개의 독화살과 대지의 이빨, 그 마법을 품고 있던 공간을 말이다.
그것은 농담과 같은 광경이었다. 질 나쁜 농담.
그레텔이 수백 년에 걸쳐 축적한 마력을 사용해 일으킨 대규모 마법과 인간의 권한이 닿을 수 없는 공간을 한 손에 넣어 다시 되돌려 준다니······.
허나, 지금 그것은 분명 그레텔의 눈앞에서 일어났고, 수천 개의 화살과 거대한 대지의 이빨, 공간은 한데 뒤섞여 지상을 붕괴시킬 공성추가 되어 그레텔에게 날아왔다.
“막아━!!”
그레텔이 소리쳤다.
그녀의 명이 떨어지자 허공과 차원을 뚫고 나온 거신(巨神)은 도시를 무너트릴 괴성을 지르며, 하늘을 뒤덮을 여덟 개의 거대한 팔을 꺼내 겹겹이 그레텔을 둘러 멀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했다.
끔찍한 공성추는 거대한 팔과 충돌.
축축하고 기분 나쁜 파열음을 내며 팔을 절단하는 동시에 질병에 감염시켜 산 채로 썩게 했다.
허공에 머리와 팔만 내민 거신은 괴로운 듯 공간을 찢는 비명을 질렀으나, 그레텔은 그마저도 낭비라 생각했는지 날아올라 거신의 머리 위에 올라타곤 자신의 두 손을 망설임 없이 박아넣었다.
푹━!
뇌를 직접 조종하려는 속셈.
자신을 부른 소환사에게 뇌를 장악당한 거신은 잠깐 끔찍한 비명을 질렀으나, 곧 소환사의 의지대로 움직여 멀린의 주변 허공을 깨고 새로운 팔들을 꺼냈다.
움직이는 것만으로 태풍을 일으키는 거대한 팔들을.
그 거대한 팔들은 하늘을 가리고, 지상에 땅거미를 드리우며 멀린을 으깨기 위해 날아왔고,
멀린은 피하지 않은 채 공간 마법을 다시 사용, 주변의 공간과 거인의 팔을 동시에 비틀었다.
놀랍게도 거인보다도 거대한 거신의 팔들은 멀린의 의지대로 공간과 함께 엿가락처럼 휘었다.
저 압도적인 크기와 질량이라면 마법조차 통하지 않아야 했건만.
‘정말······권능?’
현실에서 아득히 벗어난 모습에 지옥의 기운까지 집어삼킨 그레텔조차 감탄하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고, 그 사이 멀린이 조작하는 공간은 아이의 낙서처럼 휘고 또 휘어 그레텔과 거신의 머리 위에 도착했다.
바로 그 순간 멀린을 모기처럼 으깨기 위해 소환한 거신의 손바닥이 그레텔과 거신의 머리 위로 있는 힘껏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