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 반가운 반란 (1)
“음, 뭐랄까······. 어이없고 놀라우면서도 왠지 또 그렇게 놀랍지는 않네.”
테렌스가 앞에 앉은 올리버에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밀리유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기에. 일이란 게 원래 꼬일 수 있는 법이긴 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꼬일 줄이야······.
사건의 원흉인 올리버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테렌스 님. 케빈 교수님.”
“아냐, 아냐. 화내는 거 아니야. 밀리유의 도움이 특히 필요한 상황이긴 했지만······. 다만, 이해가 안 돼. 네가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게.”
테렌스는 진심으로 말했다.
경호원으로 참석한 자리에서 상대편 대장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그 딸내미에게 망신을 주며, 협상 자리를 뒤엎어버리다니.
물론, 이런 경우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개인의 힘이 일정 수준을 초월하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현상이긴 했다.
사회 현상, 심리학 분야가 따로 있을 정도.
다만, 올리버까지 그런 일을 벌일 줄은 몰랐다.
테렌스가 올리버를 잘 안다고 자부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힘이 있다고 예의 없이 굴거나, 자기 멋대로 날뛰는 머저리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좀 기괴한 구석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렇기에 일이 꼬인 것과 별개로 호기심이 일었다.
가진 힘에 비해 지나치게 예의 바르고 조심스러운 올리버가 그런 일을 벌인 이유를 말이다.
“정말, 그 제인이란 아가씨 때문이야?”
테렌스가 확인차 질문했고, 올리버는 대답했다.
“예.”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될까?”
“친구거든요.”
지나치게 심플한 대답에 테렌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런 테렌스를 보며 야렐리가 끼어들었다.
“저도 사과드립니다. 테렌스 중령님. 케빈 교수님.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제 잘못이기도 합니다.”
야렐리는 임무 실패에 책임을 느끼며 사과했다. 야렐리가 나선다고 달라질 게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올리버의 분위기에 압도돼 손 놓고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이었으니까.
“아냐, 괜찮아. 그래도 긍정적으로 볼 부분이 있네.”
“긍정적인 부분요?”
“그래. 밀리유의 도움을 받지 못할 테지만, 그놈들 본거지에서 사과를 요구하고, 또 받아냈잖아? 최소한 마탑으로 돌아갔을 때 할 이야깃거리는 하나 생겼네.”
테렌스가 농담했다. 자칫 가벼워 보일 수 있는 발언이었으나, 사실 꽤 현명한 행동이었다.
일이 틀어지긴 했지만, 화를 낸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으니.
차라리 지금 상황을 인정. 사기를 떨어트리지 않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몰랐다.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호텔 방 한쪽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케빈이 대뜸 말했다.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 케빈의 알 수 없는 발언에 테렌스와 야렐리가 고개를 갸웃댔다.
케빈은 대답으로 호텔 방문을 가리켰고, 테렌스와 야렐리가 고개를 돌리자 문 너머에서 똑. 똑.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호텔 종업원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손님······. 루시앙 뮈라 님께서 손님들을 만나 뵙길 청하십니다.”
***
케빈과 테렌스, 야렐리와 올리버는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호텔 홀로 갔다.
그곳에는 두 명의 경호원을 거느린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두꺼운 입술, 사각 턱, 올백 머리. 루시앙 뮈라였다.
밀리유 뮈라 패밀리의 보스.
그를 확인하자마자 케빈을 필두로 테렌스, 야렐리, 올리버가 걸어갔다.
“루시앙 뮈라입니까?”
다짜고짜 이름부터 묻는 케빈. 루시앙은 홍인(紅人)인 케빈을 보고도 놀라긴커녕 능글맞으면서도 묵직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소. 뮈라 패밀리의 보스 루시앙 뮈라요. 그리고 선생은 로큘리 대학을 돕기 위해 마탑에서 온 사람일 거고······. 대장이시오?”
“일단은 그렇습니다. 케빈이라고 합니다.”
“만나 반갑습니다. 케빈 씨.”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케빈과 루시앙의 대화는 막힘 없이 이뤄졌다.
서로가 서로의 속을 꿰뚫고 있기에 가능한 일.
케빈이 물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케빈의 물음에 루시앙이 얼마든지라는 듯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케빈이 자리에 앉자, 루시앙이 물었다.
“내가 찾아온 게 딱히 놀랍지 않나 보오.”
“온 이유가 어느 정도 예상이 돼서요.”
“그렇소?”
“방금 제논과 루시앙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찾아왔다고 하면, 이유는 두 가지밖에 없죠. 보복하러 왔든가, 거래하러 왔든가.”
루시앙은 일부러 눈을 크게 뜨며 케빈의 영민함에 찬사를 보냈다.
“거래처에서 마탑 사람이 얼마나 똑똑한지 듣곤 하는데, 아무래도 과장이 아닌 것 같구려.”
“그 거래처가 저희 위치도 알려줬습니까?”
케빈이 추궁했으나, 루시앙은 고개를 저었다. 진심이었다.
“내 자력으로 알아냈소. 내 거래처는 여러분 위치를 모르고, 내 능력도 보여줄 겸 해서.”
“능력?”
“그렇소. 들었거든. 여러분이 인육 요리사를 상대할 수 있게 도와줄 현지 세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가 상당히 빠르게 흐르는군요.”
“그걸 선호하시는 것 같아서. 아니면 빙빙 돌리는 게 더 좋소? 그럼, 어떻게 여러분을 찾아냈는지부터 가르쳐 드리겠소. 입국 관리국에 매수해 놓은 사람을 통해 마탑 소속인 사람을 추리고, 입국 날짜를 비교해-”
“-아무래도 전 빠른 이야기를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케빈의 말에 루시앙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소. 그런 의미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소. 여러분이 원한다면 인육 요리사를 상대할 수 있게 도와드리겠소.”
전혀 뜻하지 않은 제안에 모두가 놀라는 와중 케빈은 하나의 감정을 더 빛냈다. 다름 아닌, 의심이었다.
“인육 요리사를 상대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고요?”
“인육 요리사와 우리 밀리유는 원래부터 다투던 사이니, 그리 이상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하오만?”
맞는 말이었다. 갈로스의 뒷세계를 양분하는 것은 크게 밀리유와 인육 요리사 이 둘.
그런 밀리유가 자신의 적을 엿 먹이기 위해 마법사를 돕는다 해도 이상할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문입니다. 왜 이제야 돕는 건지요.”
케빈이 말했고, 테렌스와 야렐리가 뒤늦게 아차하며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돕는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여태까지는 돕지 않았다는 것이니.
로큘리 대학과 갈로스 정부가 합심해 인육 요리사를 공격하는 이 호기(好機)에도 말이다.
이치에 맞지 않았다.
“저도 놀랐습니다. 인육 요리사가 사방에서 공격당하는 이 좋은 타이밍에 정작 밀리유는 소극적인 게······. 기껏해야 별거 아닌 정보를 대학이나 경찰 측에 넘겨주고, 인육 요리사의 부하들이 버린 구역에 조무래기를 보내 차지하는 것뿐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직접 찾아와 돕겠다? 뭔가 석연치 않습니다.”
“사업이 바빠 그랬다고 한다면 믿으실 거요?”
“아뇨.”
“젠장.”
케빈의 단호한 대답에 루시앙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래서 너무 똑똑한 사람은 거북하다니까. 사람은 적당히 똑똑한 게 좋은데.”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군요.”
루시앙의 너스레에도 케빈은 철벽과 같은 태도로 대답을 촉구했다.
그 모습에서 루시앙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납득이 되는 대답을 내놓지 못하면 이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걸.
물론, 도움이 필요한 건 케빈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그럴듯한 대답을 못 들으면 단호히 자리를 파할 생각이기도 했다.
아무리 급해도 확인되지 않은 찜찜한 길을 갈 수 없었으니.
그건 도전이라기보다는 죽으러 가는 미친 짓에 더 가까웠다.
서로의 생각을 어느 정도 밝힌 후, 루시앙이 입을 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대 재능이 뭔지 아시오? 뒷세계에서 말이오.”
느닷없는 질문. 허나, 단순한 너스레가 아니었다. 목소리에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강력한 무력? 끈질긴 생명력? 돈? 영향력? 전부 아니오. 그것들은 뒷세계에서 출세를 시켜줄지언정 살아남는 데는 크게 도움이 안 되오.”
“그렇소?”
가만히 듣던 테렌스가 물었다. 납득되지 않았기에. 허나, 루시앙은 단호했다.
“그렇소! 아무리 강하다 해도 더 강한 자는 어디든 있는 법이고, 끈질긴 생명력도 지르밟으면 끊어지는 법이니까!! 돈과 영향력은 때때로 똥보다도 가치 없소. 억만장자도 배때기에 칼이 박히면 똥을 싸면서 죽거든. 찔러봐서 아니 믿으시오.”
“그럼, 뭡니까? 살아남기 위한 재능 말입니다.”
케빈이 물었다.
“좀 더 순수한 거요. 강한 자를 알아보는 본능. 피식자의 본능이지.”
“피식자의 본능?”
“그렇소. 오래 살아남으려면 자기보다 강한 포식자에겐 덤비지 말아야 하는 법이니까.”
“······인육 요리사를 본 적 있습니까?”
“봤다 뿐이겠소? 싸우는 것도 봤는데.”
올리버는 흥미를 보였다. 왜냐면 그만큼 귀중한 정보였기에.
로큘리 대학은 물론, 언너가 제공한 자료에서도 인육 요리사의 힘에 관한 직접적인 정보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있는 정보라고는 사람을 잡아먹어 상식을 초월한 감정과 마력, 생명력을 축적하고, 식칼을 사용하며, 질병 계열 흑마법을 주특기로 사용한다는 것뿐.
얼핏 보면 충분한 정보 같지만, 사실, 한없이 모자란 정보였다.
그 정도 특성은 인육 요리사의 제자들만 봐도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물론, 그게 전부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어땠습니까?”
“포식자였소.”
“예?”
“포식자라고 했소. 사람이라면 이길 수 없는 포식자.”
포식자.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발언이었으나, 그와 별개로 루시앙이 얼마나 인육 요리사를 두려워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과거, 언너가 인육 요리사가 갈로스 뒷세계의 반을 지배하는 건 힘이 부족해서가 아닌 그걸 원했기에 그런 것이라 했는데, 사실인 듯했다.
“참고로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은 나를 포함해 밀리유 내에 여럿 있소. 그렇기에 갈로스 뒷세계의 인위적인 질서가 자리 잡은 거지.”
루시앙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상당히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시는군요.”
“자랑스럽지 않은 건 또 뭐겠소? 살아남는 데 수치와 비겁이 있소? 명예와 정정당당이란 건 강자들이 저들 편하려고 만든 개념인데.”
루시앙이 뻔뻔히 말했다. 너무 뻔뻔해 어떠한 신념마저 엿보였다.
“그런데, 왜 우리를 돕겠다는 겁니까? 인육 요리사를 그렇게 두려워하는데 말입니다.”
“지금이라면 용기를 내도 될 것 같기 때문이오.”
질문을 들은 루시앙은 반사적으로 올리버를 봤고, 케빈은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머리가 아닌 직감으로 이 상황을 이해했다. 과거 자신도 올리버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 있었기에.
“대가로 원하는 게 뭡니까?”
“좀 많아서 그건 나중에 따로 말하겠소. 로큘리 대학, 정부와 협상 때 말이오.”
“글쎄요. 그들이 협상에 응할지 의문입니다.”
“설마, 그들이 범죄 집단과 거래하지 않는 숭고한 이들이라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이오?”
“그건 아닙니다. 란다도 많이 더러워서요. 그저 인육 요리사의 내분을 이용해 그를 잡을 계획을 세우고 있어 그리 말한 것뿐입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그럴 일 없을 테니.”
“······?”
“인육 요리사의 조직원 모두가 덤벼도 인육 요리사를 잡을 수 없을 거요. 옛날에 내가 봤거든.”
***
갈로스의 수도 라빌리 8번 구역.
라빌리의 대표적 부촌 중 하나인 이곳에는 왕이 사는 궁전과 개선문이 있었다.
그 외에도 갈로스의 자랑인 명품 백화점과 박물관, 아름다운 산책로, 왕을 지지하는 무수한 복권(復權) 귀족들이 거주했다.
즉, 수도의 수도.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어떠한 소란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소란을 일어날 경우 과민하게 반응해 그 원인을 철저히 조사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인육 요리사는 이곳에 레스토랑을 냈다.
이 나라의 관료와 귀족, 자본가들이 안심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말이다.
“그런데 지금 뭐 하는 걸까?”
인육 요리사가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제자(弟子)와 손제자(孫弟子)들을 보며 물었다.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 식칼이 들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