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 예상치 못한 만남 (2)
야렐리를 소개해 달라는 제인.
부탁을 들은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맞은편에 앉은 야렐리를 봤다. 어떻게 소개한다······.
“······아는 사람입니다.”
고심 끝에 올리버가 대답했다. 지금은 마탑의 임무 중이라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 없으니 이게 딱 적당한 대답인 것 같았다.
뭐가 됐건, 야렐리와 올리버는 아는 사이였으니.
예상은 들어맞았는지 대답을 들은 제인과 머피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뭐라 따지지 못했다.
오히려 따지는 건 야렐리였다.
“아는 사람요?”
“어······. 아는 사람 맞지 않습니까?”
올리버는 야렐리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왜냐면 야렐리와 자신은 진짜 아는 사이였으니까.
허나, 그게 아닌지 야렐리는 이례적이라 할 정도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약간의 경멸감도 빛냈고.
평소 표정 변화가 없던 그녀라 더욱 눈에 띄었다.
그와 함께 찾아오는 어색한 기류와 침묵. 머피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 이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올리버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우연의 일치인지 올리버도 기시감을 느꼈다.
‘아, 맞다. 파티장.’
올리버는 제인과 함께 파티장을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올리버는 머피에게 제인을 아는 사람이라 소개했다. 그리고-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인이라고 합니다.”
어색한 공기를 뚫고 제인이 야렐리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했다.
인사를 받은 야렐리는 제인의 복장을 훑어보더니 기억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란다의 유명 투자자 제인 씨 맞으시죠?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제인을 알아본 야렐리는 예의를 갖춰 정중히 인사했다.
올리버는 그 모습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마탑의 야렐리도 알아볼 정도로 제인이 인정받은 게 참으로 대단하고 자랑스러워 말이다.
야렐리와 제인이 인사를 나누자 공기 중에 머금어 있던 어색함은 많이 희석됐고, 자연스럽게 머피도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작은 무역업을 하고 있는 머피 킴벨이라 합니다.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저도 사업가로 명성을 알리고 있는 머피 씨를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절 아시나요?”
머피가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그도 그럴 게, 머피는 크라임 펌에 소속된 갱이자, 주류왕(酒類王)으로 불릴 정도로 마법주를 많이 팔아 부를 축적한 법 테두리 바깥사람이었으니.
간간이 포레스트에게 듣는 근황에 따르면 이미 세력과 자금력은 웬만한 크라임 펌 이사 이상이라고 했다.
“예. 저도 갈로스에 아는 사람이 꽤 있어, 블러디 와인과 겨루는 멋진 술을 공급해주시는 분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소개가 늦었습니다. 마탑 스카디 소학파의 야렐리 아이스아이라 합니다. 볼일이 있어 잠시 갈로스에 왔는데, 이렇게 귀한 분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야렐리는 자신의 정체를 바로 까발렸다. 어떤 생각을 품은 채.
“괜찮으시다면, 합석하시겠습니까?”
***
갑작스레 합석을 제안한 야렐리.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무슨 생각이 있는 것 같아 올리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올리버만큼 당황한 머피와 제인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싫지 않은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야렐리의 제안을 수락했다.
“타지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기쁘게 앉겠습니다.”
머피가 너스레를 떨며 야렐의 제안대로 식탁에 앉았고, 제인 역시 뒤따라 앉았다.
“주문은 하셨습니까?”
“아뇨, 아직요.”
“잘 됐군요. 그럼, 일단 주문부터 할까요? 별건 아니지만, 합석을 제안해주신 감사의 의미로 제가 사도록 하겠습니다.”
머피는 그리 말하곤 종업원을 불러 능숙하게 갈로스어로 주문했다.
벼락치기로 배운 올리버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고, 발음도 자연스러웠다.
올리버는 감탄했다.
“대단하시군요. 머피 씨. 갈로스어를 정말 잘하시네요.”
“별거 아닙니다. 통역으로 거래하는 게 점점 번거로워져 익혀봤을 뿐입니다.”
“그래도 대단하네요. 갈로스어는 배우기 꽤 어려운데요.”
야렐리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머피를 칭찬했다. 올리버도 동의하는 바였다.
문법이라든가, 단어라든가, 발음이라든가 개인적으로 갈로스어는 왕국어보다 더 까다로워 익히기 어려웠다.
“필요가 생기니 빨리 익힐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요즘은 통역비를 아낄 수 있어 좋습니다.”
“······아. 농담이군요.”
머피의 말을 들은 올리버가 날카롭게 맞장구쳤다.
돈이 넘치는 란다에서 주류왕(酒類王)이란 별명까지 얻은 머피에게 통역비는 큰돈이 아닐 테니, 농담일 게 분명했다.
“······예, 농담 맞습니다.”
어이없음과 익숙한 감정을 빛내는 머피.
왜 그런 감정을 빛낸 건진 알 수 없었으나, 올리버는 만족스러웠다.
매일 잠자기 전 30분 동안 유머 공부를 한 게 헛수고 같지 않았기에.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뿌듯했다.
“머피 씨께서 사업차 방문하셨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뭐 때문에 방문하신 건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괜찮으시다면 말이죠.”
야렐리가 훅치고 들어가듯 갑작스레 질문했고, 놀랍게도 머피는 당황하긴커녕 담담히 대답해줬다.
“마법주 판매가를 협상하러 왔습니다. 원래는 해가 넘어갈 때마다 협상하지만, 갑자기 갈로스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생겨서요.”
그 심상치 않은 기류가 뭔지 올리버는 알 것 같았다. 오히려 의문은 다른 곳에서 생겼다.
질문할까 말까 고민하던 중 눈치 빠른 머피가 먼저 대답해줬다.
“아,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데이브 씨······. 제 사업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마탑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그렇게 비밀은 아닙니다.”
의외의 사실에 올리버는 놀랐으나, 곧 납득했다.
애당초 머피의 핵심 사업 아이템인 마법주는 포션을 원료로 하는 거였고, 포션의 공급처는 결국 마탑이었으니.
새삼 느끼는 거지만 란다는 음지와 양지의 경계가 흐릿한 것 같았다.
머피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야렐리는 제인에게 관심을 돌렸다.
“제인 씨께서도 마법주 사업에 투자하기 위해 갈로스를 방문하신 건가요?”
충분히 가능할지도. 밀리유(갈로스의 연합 범죄 조직)는 조직원 개개인의 전투력은 뛰어나지만, 그 대신 경영 능력이 부족해 상대적으로 자본 수준이 낮다고 했으니.
허나, 예상이 틀렸는지 제인은 고개를 저었다.
“사업차 방문한 건 맞지만, 그건 아니에요. 전 부동산을 좀 알아보러 왔어요.”
“부동산요?”
“예, 갈로스 왕실에서 추진 중인 도시 개발 사업에 관심이 있어서요. 머피 씨와는 우연히 만났을 뿐이에요. 뭐, 큰 도움을 받고 있지만요.”
“저번에 호텔에서 말씀하신 일이라는 게 이거였군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올리버가 대뜸 말했다.
마리와 대화 중 제인이 갑자기 나타나 합석했을 때 말이다.
올리버와 마리, 제인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그러던 중 제인은 잠시 일 때문에 란다를 떠날 것 같다고 올리버에게 말했다.
그곳이 어딘지 물었지만, 이상하게도 당시 제인은 비밀이라고 했다.
“그때는 그냥 비밀로 하고 싶었거든요. 심술을 부리고 싶어서······. 그런데, 이런 식으로 만날 줄은 정말 예상도 못 했네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래도 나쁘지 않네요. 좀 신기하기도 하고요.”
“뭐가 신기하다는 거죠?”
야렐리가 물었다. 올리버가 대답하려는 찰나, 제인이 대신 대답했다.
“지금이랑 호텔에서 만났을 때랑 꽤 비슷하거든요. 상황이·····. 데이브 씨가 아름다운 여성 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전 뒤이어 나타나 합석한 게요······. 누가 꼭 장난치는 거 같네요.”
“아름다운 여성요?”
머피가 관심을 보이며 반사적으로 물었다.
여성과 관련된 해결사 데이브에 관한 소문은 많았지만, 개인적으로 해결사 데이브를 아는 머피로서는 하나 같이 믿을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런데 아름다운 여성이라니.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관심을 보인 건 비단 머피뿐만이 아니었다. 야렐리 역시 한쪽 눈썹을 올리며 관심을 빛냈다.
“마리라고······. 그냥 아는 사람입니다.”
올리버가 호텔에서 제인에게 소개했듯이 똑같이 마리에 관해 설명했다. 뭔가 부족한 설명 같긴 하지만, 틀린 설명도 아니었으니.
그러나 제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비꼬는 감정을 빛내며 말했다.
“데이브 씨가 아는 사람 중엔 예쁜 사람이 참 많은 거 같네요.”
호텔에서 보인 것과 비슷한 태도.
문제는 적잖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올리버는 제인이 왜 이러는지 모른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냥 성실히 그녀의 말에 대답하기로 했다. 그것이 예의였으니까.
“저도 동의합니다. 전 예쁜 사람들을 많이 아는 것 같습니다. 운이 좋게도요.”
“······.”
“······.”
“······.”
침묵한 채 올리버를 빤히 바라보는 머피와 야렐리, 제인. 올리버는 뭔가 실수했나 싶어 보충 설명했다.
“제가 느끼기로는요······. 천사의 집 종업원분들이나, 엘리자베스 씨, 코코 씨라든가, 모두 예쁘거든요······. 물론, 야렐리 씨도 예쁘고요,”
야렐리가 흠칫거렸다. 과거, 비행선을 타고 란다로 돌아온 뒤, 헤어졌을 때와 비슷한 반응.
야렐리는 당황한 감정을 빛내며 올리버를 빤히 노려봤고, 올리버는 왜 저러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채 머피에게 몰래 질문했다.
“제가 뭐 실수한 건가요?”
“저번에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 제발 거기 절 끼워 넣지 말아 주십시오.”
머피가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극명한 거부 의사를 내비쳤다. 제인의 감정은 아까 전보다 더 안 좋아 보였다.
“아····. 물론, 제인 아가씨도 예쁘십니다.”
“오, 세상에 맙소사.”
올리버의 말을 듣고는 머피가 경악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설마설마했지만 역시나 라는 반응.
야렐리의 감정은 당황을 넘어 짜증과 노기를 띠기 시작했고, 제인 역시 비슷한 감정을 빛내며 턱을 괸 채 올리버를 빤히 바라봤다.
눈으로 올리버의 머리를 열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빛내며.
참으로 답답하고 억울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왜 이러는 건지 알려만 줘도 이렇지는 않을 텐데.
그래서 올리버는 하려던 이야기를 마저 했다.
“그리고 머피 씨도 예쁘십니다.”
풉━!!
올리버를 노려보며 물을 마시던 야렐리와 제인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시던 물을 뿜었다.
놀란 것인데, 놀란 것은 그들뿐 아니라 머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용히 경악하며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이제 대화는 그만 나누고 조용히 식사나 하죠. 식사만. 때마침 음식도 가져오고 있네요.”
***
머피의 제안에 야렐리와 제인은 묵시적으로 동의했고, 올리버 역시 따르기로 했다.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그것을 원했기에.
올리버는 모두의 뜻에 따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늦은 점심을 먹었다.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달그락. 달그락. 식기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사람이 네 명이나 모이고도 아무런 대화도 없이 헤어지려나 싶어 안타까운 그때, 먼저 식사를 마친 머피가 입을 열었다.
“데이브 씨.”
“아, 이제 이야기해도 되는 겁니까?”
머피는 아까 전 기억이 떠올랐다는 듯이 극렬한 거부감을 빛내며 못을 박았다.
“예, 물론요······. 단, 누가 예쁘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말아 주십시오. 최소한 제가 있을 때는요,”
“알겠습니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기에 올리버는 바로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머피는 안도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후······. 사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합석도 그것 때문에 한 거고요.”
올리버는 놀라지 않았다. 합석하기 전 제인과 나눈 대화를 나눌 때 그런 기색을 읽었기에.
“원래는 저 혼자 알아서 해보려고 했는데, 여기서 데이브 씨를 만나니 도움을 좀 받고 싶어서요······. 부탁드릴 수 있겠습니까?”
“무슨 부탁인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이미 이야기한 거거든요.”
“이야기한 거요?”
“예. 제 거래처인 밀리유 조직과 마법주 거래에 관해 협상하려 하는데, 잠시라도 좋으니 제 경호원으로 협상 자리에 나와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름대로 준비해 왔지만, 거래처 앞마당에서 하려니 불안해서요.”
예상치는 못했지만, 또 그렇게 놀랍지는 않은 제안. 올리버는 잠시 고민하다 거절하려 했다. 지금 맡은 일이 있기에.
“죄송하지만-”
“-만약 도와주신다면 저도 여러분이 하시는 일을 좀 도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