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출진 준비 (2)
“농담이 아니라 정말 오랜만인 거 같군.”
올리버와 함께 건물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멀린이 말했다. 올리버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을 텐데요.”
올리버의 말은 맞았다. 실제로 멀린과 올리버가 헤어진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 건, 그 사이 둘 모두 바쁘게 보냈기 때문이었다.
멀린은 올리버와 헤어진 후, 생명학파를 철저히 조사했고, 올리버의 논문을 대신 제출하며, 아카이브로서 여러 세력을 방문해 피해 축소에 힘썼다.
올리버 역시 논문 작성을 마치자마자 와인햄으로 가 성기사들과 싸우고, X구역에 건물을 사며, Z구역 개발 반대 위원회와 인사, 바토리 패밀리와 이야기를 나누다 대뜸 인육 요리사의 전언을 전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다.
정말로 말이다.
그래서인지 실제보다 더 오랜만에 만난 느낌이었다······. 마지막에 나눈 대화 탓도 있고.
“······옷이 멋있으시군요.”
올리버가 멀린의 옷차림을 보며 말했다. 평소와 같은 편안한 차림이 아닌, 격식에 걸맞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백수로 있을 때는 몰라도, 일하면 그에 걸맞게 입어야 하는 법이니까······. 오랜만에 입었는데 어색하진 않나?”
멀린이 자신이 입은 정장을 보이며 물었다. 마탑의 여느 마법사들처럼 대놓고 화려하거나 비싸 보이진 않았으나, 그와 별개로 기품이 느껴졌다.
원래 옷을 입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스러운 기품이.
올리버는 솔직히 대답했다.
“전혀요.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어르신.”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어르신이라 불러줘서 고맙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번에 헤어질 때 내 제자를 그만둔다고 한 것 같아서. 임시로나마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말이야.”
뭔 말인가 싶었지만, 올리버는 곧바로 기억해냈다.
“아······. 아아.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저 못 돌아올 때를 대비해······. 오해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자넨 아직 내 제자인가?”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해주신다면 물론입니다.”
“잘 됐군······. 그럼, 와인햄 일은 잘 끝났는지 물어봐도 되겠구만?”
멀린의 질문에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해당 사건에 대해 설명했다.
와인햄에 가고 어떻게 마리 일행을 찾아 데려오고, 성기사와 어찌 싸웠는지 말이다.
이야기를 다 들은 멀린이 입을 열었다.
“내 부탁대로 사람을 죽이지 않아줘서 고맙군.”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솔직히 위험했다는 생각은 했다.
마지막 전투에서 죽일 생각은 없었으나, 죽여도 상관없다는 생각은 했기에.
죽어도 그만, 안 죽어도 그만.
멀린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던 건, 마지막에 우연히 마주친 빈민 가족 때문이었다.
올리버는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그때, 느꼈던 감정도······. 참으로 창피했다.
“무사하나?”
“예?”
“칼에 찔린 아가씨. 이름이 마리라 했던가?”
“아······. 예, 무사합니다.”
올리버 그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상하게 그 순간 기억은 흐릿했다.
“운이 정말 좋구만. 성기사의 칼에 찔리고도 살아남다니. 신이 도왔어.”
올리버는 침묵했다. 그때, 어떻게 마리를 치료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기에. 분명, 자신이 치료한 거 같기는 한데······. 조금 혼란스러웠다.
멀린은 그런 올리버의 모습을 보더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런데, 정체를 들켰을까 걱정이라고?”
“예? 아, 예, 그렇습니다. 어르신······. 드루이드로 신분을 숨겨 성기사님들을 상대하려 했는데, 성기사님들이 강하고 촉도 좋아서······. 왠지 들켰을 거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그래서 시(市)에 도움까지 청한 거고?”
“그렇습니다.”
“들킨 거면 한심하지만, 그래도 대단하구만. 혼자서 거기까지 생각하고, 대비하다니.”
“제가 벌인 일이니, 제가 해결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도와주신 분들이 많았습니다.”
올리버의 대답을 들은 멀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 고심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파테르교에서 아직 무슨 움직임은 없지?”
“예. 카버 씨에게 듣기로는 조용하다고 합니다.”
“그럼, 아마 괜찮을 거야······. 그곳도 집안싸움이 심한 곳이니.”
“집안싸움요?”
“그래, 집안싸움이 없는 집안은 없는 법이거든. 거기다 파테르교는 집안이 아주 크고, 특별하지······. 일단, 지켜봐. 고생을 사서 하면 머리털이 남아나질 않으니. 나처럼.”
멀린이 자기 머리를 가리켰고,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미 결정된 마당. 걱정만 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었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터.
“남의 집안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 이제 이쪽 집안 이야기를 하지······. 자네가 데려온 바토리 패밀리 잔당.”
“예, 어르신······. 어떻게 결정됐는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마탑에서 받아들이기로 했어.”
“다행이군요.”
올리버가 담백하지만. 진심을 담아 말했다.
만약, 마탑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녀들은 란다를 떠나 인육 요리사를 피해 세상 가장 구석진 곳까지 도망쳐야 했다.
어쩔 수 없는 거긴 했지만, 안타까운 것은 안타까운 것.
그런데 마탑이 그녀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러한 운명에서 벗어나게 됐다. 다행이었다.
“운이 좋았어. 만약, 레이크 빌리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다면 듣지도 않았을 이야기거든······. 마탑의 질서는 과할 정도로 잡혀 있고, 명성에 흠집도 없는 상태라, 괜한 리스크를 감수하려 하지 않았을 테니.”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는 분야는 아니지만, 올리버도 그러한 기조를 느끼긴 했다. 그렇기에 여기로 데려온 거였고.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방심했든 아니든, 흑마법사에게 데인 덕분에 타성에서 깨어났거든.”
“레이크 빌리지 덕분이란 말씀입니까?”
“들으면 화낼 사람도 있겠지만, 솔직히 맞아. 아픈 꼴을 당했기에 정신을 차린 거지······. 슬픈 일이야. 아프기 전에 깨달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정말 슬퍼.”
올리버는 멀린을 봤다. 여전히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아주 잠깐 그는 진심으로 슬퍼 보였다.
그렇기에 올리버는 섣불리 위로도 동의도 하지 못했다.
제대로 공감하지도 못하면서 동의나 위로를 한다는 게 약간 실례되는 행동인 거 같기에.
멀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가씨들은 혈마법 소학파 소속으로 배정받을 거야. 또, 내가 감시할 거고. 혈마법 소학파는 생명학파에 소속되어 있으니까.”
재밌는 우연의 일치. 허나,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멀린이라면 언너 일행을 잘 감시할 수 있을 테고, 또, 차별할 것 같지도 않을 것 같았기에.
올리버는 품 안에서 빨간색 버튼이 달린 손잡이를 내밀었다.
“이거 받아주십시오. 기폭장치입니다.”
“기폭장치?”
“예, 폭탄을 터트리려면 기폭장치가 있어야 하니까요.”
“아, 진짜 폭탄을 심었나?”
“예. 당연히요······.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요?”
“음······. 아냐, 익숙해지지 못한 내 잘못이지······. 참고로, 그 아가씨들은 난민 신분으로 란다 시(市)에 정식으로 들어올 거야. 마법사 난민으로.”
“난민요?”
“그래, 대륙 중앙의 난민. 그쪽은 행정체계도 엉망이고, 매해 적잖은 난민이 발생하고 있어, 섞여들기가 쉽거든. 실제로 브로커들이 주로 사용하는 루트기도 하고. 난민 신분으로 들어오면 완전 새로운 신분을 받을 수 있으니 여러모로 나쁘지 않아.”
“오······. 좋은 방법인 거 같습니다.”
“그리고 자네도 비슷한 방식으로 마탑에 소속될 거야.”
“저요?”
“그래, 바토리 패밀리의 처우를 결정하던 중 자네 처우도 같이 결정했거든. 어느 학파에도 소속되지 않는 길거리 마법사 신분으로, 마탑이 고용한 거로 할 거야.”
“전 이미 마탑의 실험체로 발표된 거 아닙니까?”
“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거든. 워낙 많은 사건이 복잡하게 일어나서, 자네 활약도 있고······. 그냥 적당히 가져다 붙이기로 했어. 무슨 일이 발생할 경우 쳐내기도 쉽고.”
“현명하네요.”
올리버가 진심으로 말했다.
“신분은 평마법사, 직책은 마탑 비정규직 직원······. 직책도 낮고, 급여도 짜지만, 마탑에 최소한의 의무만을 가진 채, 언제든 그만둘 수도. 잘릴 수도 있어.”
“좋은 것 같습니다.”
마탑 하류층에 속한 비정규직이란, 직책에 올리버는 반색했다.
짜다고 해도 마탑 급여는 높은 편이었고, 직책에는 흥미가 없었으니. 뭣보다 올리버가 가장 신경 쓰이던 문제를 해결해 만족이었다. 고마울 정도로 말이다.
“걸맞은 대우야. 이미 레이크 빌리지에서의 활약과 세운 공, 논문으로 실력은 증명해도 한참 전에 증명했으니. 거기다 바토리 패밀리를 설득한 수완까지······. 일단 쥐고 있는 게 마탑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거야.”
“그래도 감사하네요······. 최소한의 의무는 뭔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아침 9시 출근해 저녁 6시 퇴근. 마탑에서 주는 업무를 수행하는 거야······. 물론, 따로 일을 시킬 순 있지만, 할지 말지 선택권 정도는 줄 거야.”
“알겠습니다. 관대하군요.”
“마탑은 원래 관대하고, 융통성이 넘쳐. 실력이 있는 자에겐. 때때로 그게 과하긴 하지만······. 그보다, 아까 전에 듣길 갈로스 선발대에 자청해 가겠다고 했다던데 사실인가?”
“예, 그렇습니다.”
올리버가 대답했다. 인육 요리사의 전언을 전한 직후 올리버는 자신도 갈로스로 가겠다고 선언했고, 마탑에서도 이를 반대하진 않았다.
“갈로스란 곳이 재밌을 거 같고, 인육 요리사 님도 한번 만나 뵙고 싶어서요.”
“인육 요리사를? ······왜?”
“음······. 인육 요리사 님을 한 대 때려주고 싶어서요.”
“아······.”
“또, 그분께 궁금한 것도 하나 있습니다.”
“궁금한 거?”
“예. 궁금한 거요.”
***
일주일이 지났다.
멀린의 말처럼 언너 일행은 마탑의 도움과 시(市)와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대륙 중앙에서 온 난민 마법사로 신분을 꾸며, 단 사흘 만에 새로운 신분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늘 많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란다의 이주민, 난민 정책 덕분으로, 그 누구 하나 의심하지 않았다.
새로운 신분을 발급받은 언너 일행은 서류상 진짜 자매가 되어 마탑에 취직, 혈마법 소학파에 배정받았다.
마탑에 정식으로 소속되자마자 그녀들은 약속대로 자신들이 확보한 바토리의 연구 중 일부를 마탑에 넘겼으며, 그뿐 아니라 인육 요리사에 대한 정보도 공유했다.
사제관계를 주축으로 한 피라미드 형태의 수직적인 조직 구조와 인육 요리사와 커넥션을 가진 갈로스의 각계 인사들, 범죄 제국을 유지하는 핵심 사업과 그 사업을 운영하는 사업장 등등.
언너는 자신이 했던 말처럼 인육 요리사에 대해 다는 아니지만, 생각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최소한, 로큘리 대학에서 맛보기로 공유해준 자료보다는 더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언너가 제공한 자료를 보고, 로큘리 대학이 얼마나 허술하게 일을 진행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으니.
‘당연한 거요. 전쟁이란 주도권을 쥔 자가 이기는 법인데, 로큘리 대학은 싸우기 전이나, 후로나 끌려다니기만 했으니······. 몰락 중이라도 이 정도일 줄이야. 이대로 지원 보내봤자, 마탑의 시간, 자원, 명성만 낭비할 거요.’
순수마력 학파의 명예 그랜드 마스터이자, 왕실 마법사관학교 교장인 필립 중장이 평했다.
원래라면 마탑 일에 관여할 수 없는 그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휴가를 내 마탑에 남아 여러 조언을 해줬는데, 그는 차라리 로큘리 대학을 단순 지원하는 걸 넘어 마탑 자체적인 전선을 짜자고 주장했다.
‘전쟁에서 강한 적보다 더 무서운 건 멍청한 아군이요. 이렇게 꼬인 전쟁터에 아군을 밀어 넣을 봤자, 피만 흘릴 게 뻔하니, 차라리 우리 자체적인 전선을 짜도록 합시다.’
마탑에서 나온 무수한 의견 중 가장 파격적인 주장.
당연히 여느 파격적인 주장처럼 반대의견이 나왔다.
소모되는 자원이 너무 크다, 자칫 로큘리 대학과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 타지에서 마탑 자체적인 전선을 짜는 게 불가능하다······. 와 같은 의견 말이다.
그리고 이 의견 역시 타당하였다. 바다 건너 남의 땅에서 주인 노릇을 하자는 것인데.
될지 의문이었고, 되도 문제였다.
허나, 필립은 물러서지 않고 승리라는 키워드를 무기 삼아 반대하는 자들과 기나긴 토론을 펼쳤고, 이윽고, 한 가지 결론을 내놓았다.
“로큘리 대학을 돕기 위한 선발대인 척하며, 자체적으로 현지 조사를 해 보라고요? 이 인원으로요?”
여객선 일등석에 탄 올리버의 물음에, 같은 객석에 타고 있던 케빈과 테렌스, 야렐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렇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