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 출진 준비 (1)
“오, 신이시여······. 맙소사······.”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신을 모시는 파테르교의 권위를 깎는 데 간접적으로 일조한 마법사. 그것도 마탑 행정부장의 입에서 신이 나온다는 게.
심지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며 진심으로 말했다.
하긴, 그게 신의 대단한 점일지도.
선량한 사람이든, 죄인이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든, 얕은 사람이든 종국엔 너나 할 것 없이 신을 찾았으니. 참으로 대단한 것 같았다.
그 무엇으로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다.
‘그건 그렇고 생각 이상으로 반응이 좋지 않네?’
올리버가 행정부 타워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가장 상석에는 마탑의 각 학파를 조율하는 행정부장이 머리를 싸매며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는 마탑에서의 발언권이 강한 각 학파의 그랜드 마스터 혹은 원마스터들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 중년에서 노년인 그들은 마탑 그리고 란다의 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는데, 올리버와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뿐이었다.
그나마 아는 얼굴이라고는 생명학파의 새로운 그랜드 마스터가 된 멀린, 그 옆에 선 케빈.
스카디 소학파의 원마스터 틸다 아이스아이와 순수마력학파의 명예 그랜드 마스터 필립 로어 정도였다.
정말 극소수. 그럼에도 올리버는 반가웠다.
“그대는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만 가져오는군. 너무 말이야.”
깊은 고민과 침묵 후, 행정부장이 말했다.
그의 감정은 진심이었다. 곤혹과 난감의 감정이 한껏 빛났으니까.
하긴, 올리버의 처우가 결정되기도 전에 인육 요리사의 전언과 도시 테러 사태를 보고하고,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손님을 데려왔으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긴 했다.
“정말 그 아가씨들이······. 바토리 패밀리인가?”
“예, 그렇습니다. 행정부장님.”
올리버는 자기 뒤에 선 언너와 오르쇼여, 커털린, 언드라시, 팔. 에르제베트 다섯 자매를 가리켰다.
그녀들은 예의를 지키기 위해 천사의 집에서 소개해준 옷가게로 가서 란다에서 유행하는 간소하면서도 세련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옷을 맞춰준 종업원들 모두 인형처럼 아름답다고 말했다.
“아······. 그러니까, 마운틴 페이스에서 우리 마탑을 습격해 점거한 흑마법사 패밀리인 바토리 패밀리란 말이지.”
“예, 마탑을 배신한 생명학파를 습격 점거한 바토리 패밀리 맞습니다······. 다만, 흑마법사 패밀리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행정부장의 압박에도 올리버는 개의치 않고, 부족한 정보는 채우고, 의문인 점은 짚고 넘어갔다.
왜냐면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마운틴 페이스는 일단 넘어가지······. 그런데, 흑마법사인지는 모르겠다니. 바토리 패밀리는 흑마법사가 아니란 뜻인가?”
“아뇨. 흑마법사가 맞긴 하지만, 동시에 마법사이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올리버는 몇몇 마법사들이 분노하는 걸 보았다. 마법사란 자신의 신분에 자부심이 넘치며, 그만큼 배타적인 이들이었기에.
허나, 올리버의 말에 아주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바토피 패밀리 분들은 흑마법보다는 마법이나, 혈마법을 더 잘 다룹니다.”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흑마법사가 소수 있으나, 그들을 마법사라고 부르지 않네.”
“에르제베트 바토리는 엄밀히 말하면 마법사입니다. 그분은 대륙 중앙의 마법사 가문 에르제베트 태생이거든요. 제출한 자료에 있을 겁니다.”
올리버가 언너에게서 받은 자료를 언급했다.
주장은 부정할 수 있어도, 서류는 부정할 수 없는 법이었으니.
해당 자료를 이미 확인한 마탑 행정부장은 짜증과 답답한 감정을 빛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빛내는 건 마탑 행정부장만이 아니었다.
호출로 온 다른 그랜드 마스터와 원마스터들도 마찬가지.
그들은 학장과 비슷한 감정, 혹은 그 이상의 감정을 빛내며 올리버를 봤다.
이해가 안 됐다. 마탑이 배타적인 조직이라는 걸 알았지만, 동시에 외국인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조직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최소한 마탑에 이익이 있을 때는······.
“·····이익이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행정부장의 추궁에 올리버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다른 그랜드 마스터와 원마스터들은 할 말이 많음에도 침묵하는 것으로 보면, 일단, 행정부장만 설득하면 될 거 같았다.
‘안 되면 뭐 어쩔 수 없는 거고.’
올리버가 그리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이분들은 혈마법에 관해서라면 마탑보다 훨씬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전, 이론 모두 다요. 애당초 혈마법의 원류가 이분들이니까요.”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이크 빌리지 사건 이후, 생명학파는 멀린을 필두로 한 조사관들에게 철저히 조사당해, 흑마법사와의 대규모 거래를 들키고 말았으니까.
그중 가장 큰 거래처 중 하나가 바토리 패밀리라는 것 역시 밝혀졌고, 심지어 생명학파에서 파생된 혈마법이라는 신생학문 역시 바토리 패밀리와 거래한 지식으로 탄생했다는 게 밝혀졌다.
마탑의 명예를 위해 그저 큰 소리로 떠들지 않을 뿐,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
“언너 씨와 자매분들이 마탑에 합류하면 혈마법은 단숨에 발전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들을 받아들여 준다면 가진 혈마법 지식을 일부 공유하겠다고 하셨거든요.”
올리버의 의견에 언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지식을 내놓는 건 마법사나 흑마법사에게 어려운 일이었지만, 약속을 어긴 페널티와 구해준 보답, 인육 요리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기꺼이 올리버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아시다시피 혈마법은 뛰어난 학문입니다. 제 논문인 [혈마법과 생명마법을 접목한 신체와 장기의 재구축과 이식]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며, 얼마 전 기력을 많이 회복하신 데릭 씨와 펠릭스 씨 역시 피의 영약으로 회복했으니까요······. 마탑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침묵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올리버가 제출한 [혈마법과 생명마법을 접목한 신체와 장기의 재구축과 이식]은 이미 상당한 관심을 받고 있었고,
레이크 빌리지의 피해자인 데릭과 펠릭스가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회복하는 것 역시 제법 큰 사건이었기에.
신체를 활성화해 상처와 체력을 회복시키는 포션과 달리 외부의 생명력을 주입하는 피의 영약은 올리버의 예상대로 그렇다 할 부작용 없이 데릭과 펠릭스의 몸을 빠르게 회복시켰고, 모두 이에 적잖게 관심을 가졌다.
그도 그럴 게, 다른 피해자들 역시 빨리 회복시킬 수 있다는 거였으니.
마탑의 고위직뿐 아니라, 로큘리 대학 인사와 대륙 중앙 마법사 가문까지. 이는 마탑의 실력을 입증하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법 큰 기회였다.
혈마법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두 개나 언급하자 사람들은 침묵한 채 동요했다.
감정적으로 올리버와 바토리 패밀리 모두 싫었지만, 이성으로는 혈마법이 가져다줄 마탑의 이익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기에.
하지만 언너 일행을 받아들여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인육 요리사와 싸워야 하는 지금 바토리 패밀리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잘 아는 분야는 아니지만요.”
주장하지만, 잘 모른다는 뻔뻔한 말에 한 마법사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고작 다섯 명의 흑마법사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고작 흑마법사 다섯이 어떤 도움이 될지 의문이었다. 그것도 인육 요리사로부터 도망친 흑마법사들이.
올리버가 해당 사실에 관해 설명하려는 찰나, 언너가 입을 열었다.
“······저희는 인육 요리사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침묵. 모두 날카로운 눈으로 언너를 노려봤다.
마탑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노장들의 눈빛은 물리적인 기운이라도 깃든 듯 상대를 주눅 들게 하는 힘이 있었지만, 언너 역시 300년가량을 산 노괴(老怪)를 모신 몸. 주눅 들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갔다.
“인육 요리사는 강력한 존재이지만 그저 강하기만 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귀 기울였다.
“그는 강한 힘 못지않게 교활합니다. 수많은 조직을 거느린 검은손 단원 중 조직력 하나만 보면 그는 가장 으뜸입니다. 모든 조직을 자신이 직접 관리하기에 황제나 다름없죠. 거기다 갈로스 뒷세계의 반을 장악할 정도로 그 크기 역시 방대합니다.”
과거 케빈에게 들은 사실과 일치했다.
“그래 봤자 뒷골목 깡패지. 갈로스의 반을 지배한다는 건 다르게 말하면, 나머지 반은 지배 못 하는 거잖아?”
동조하는 사람들. 허나, 언너는 바로 그 주장을 부숴버렸다.
“그건 힘이 모자라서가 아닌, 인육 요리사가 그걸 원했기 때문입니다.”
“뭐?”
“앞서 말했다시피 그는 교활합니다. 갈로스의 뒷세계를 통째로 지배하면 얼마나 많은 견제를 받을지 잘 알고 있습니다. 경찰, 마법사, 다른 범죄자, 파테르교·····. 그건 위험하고, 비효율적이죠. 그래서 그는 그 정도에서 멈춘 겁니다. 그게 안전하고, 효율적이니까요.”
“하고자 했으면 갈로스 뒷세계를 다 장악했을 거다?”
“상당한 자원과 시간을 소비하겠지만······. 예. 할 수 있을 겁니다. 제 어머니께선 그리 판단하셨으니까요.”
착각이었을까? 올리버는 공기가 싸해지는 걸 느꼈다.
“제 어머니. 바토리께선 평생을 인육 요리사와 싸워왔습니다. 우린 그가 어떻게 갈로스의 혼란을 이용해 뿌리내렸는지 알고, 그가 얼마나 많은 계층에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도 압니다. 귀족, 자본가, 정치인, 민간인을 가리지 않죠. 장담하건대, 힘만으로는 절대 잡을 수 없습니다. 그들에 대한 정보가 있어야 싸울 기회라도 생길 겁니다.”
“······그렇게 잘 알면, 그대들은 어찌 이곳에 있는 건가?”
가만히 듣던 행정부장이 툭 하고 물었다. 상대방의 아픈 부분을 찔러 입을 다물게 하는 화법. 언너는 물러서지 않고 똑같이 툭 던져 대답했다.
“힘이 모자랐거든요.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조차도요. 그런데 어머니께서 죽기까지 했죠.”
언너가 말을 끝마치며 눈을 굴려 올리버를 바라봤다.
올리버로 시작해서 올리버로 끝나는 대화. 따질 것이 참으로 많았지만, 똑똑한 사람들만 모인 곳이라 그런지 말이 샛길로 새진 않았다.
“그럼, 인육 요리사에 대한 모든 정보를 안다는 거로 이해해도 되나?”
“전부 다는 아닙니다. 하지만, 마탑은 물론, 갈로스 정부와 로큘리 대학보다는 많이 알고 있다 자신합니다. 우린 그들과 달리 인육 요리사와 싸웠으니까요.”
수군수군. 몇몇 마법사들이 귓속말을 나눴다.
그들은 개인적인 감정과 별개로 언너의 주장에 수긍하고 있었다.
실제로, 마탑이 서둘러 움직이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다름 아닌 갈로스 현지에서 그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도 있었다.
마탑 이상의 피해와 수모를 겪었음에도, 로큘리 대학은 인육 요리사로부터 그렇다 할 성과를 못 냈고, 경찰국 역시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했다.
“당연한 겁니다. 갈로스 정부는 외부로는 식민지 전쟁, 내부로는 권력 투쟁으로 혼란하고, 사회 고위층은 젊음과 정력, 아름다움을 주는 인육 요리사의 요리를 먹기 위해 번호표까지 뽑고 있죠. 거기다 공무원은 박봉, 일반인들은 먹고사는 문제에 시달리고 있고요. 장담하건대, 1년도 안 돼, 피로감을 못 이겨 흐지부지 끝날 겁니다. 과거에도 비슷한 경우가 몇 번 있었거든요.”
언너가 자신 있게 말했다. 말이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실제로도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기에, 그 말을 흘려듣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인육 요리사와 싸우기로 했고, 그 기일마저 타의에 의해 앞당겨진 마당.
싸움은 피할 수 없었고, 그렇다면 이기는 방향으로 가야 했다.
만약, 갈로스로 병력을 파견하고도 승리하지 못하면 이는 마탑의 권위 추락으로 이어질 테고, 그건 수많은 세력에 견제받는 마탑에 있어 치명적인 일이었으니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마탑의 지도부는 어느새 적의를 잠시 접어두고, 어떻게 해야 마탑에 이익이 될지 진지하게 토론했다.
보수적인 마탑의 이미지치고는 꽤 놀라운 모습. 그러나, 한편으로 당연한 모습이기도 했다.
애당초 마탑이란 실리적인 목적으로 설립된 곳이었으니.
“잠깐. 짚고 넘어가지.”
웅성웅성 토론을 하던 마법사들 무리 가운데 한 남자가 말했다.
푸른색 머리카락과 수염을 거칠게 기른 노인으로, 깔끔하고 세련되게 입은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옷을 자유롭게 입었으며, 얼굴과 몸, 팔뚝에는 거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남들과 달리 독보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그가 입을 열자 수군대던 장내는 침묵이 찾아왔다. 남자의 존재감을 알 수 있었다.
“난 자잘한 거 싫으니, 한 가지만 대답해봐.”
짧고 간결한 요구.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되는 것도 알겠고, 지금 우리 상황에 필요한 것도 알긴 알겠는데······. 믿을 수 있나? 신용이 없으면 아무리 조건이 좋아도 같이 일할 수 없어. 맛있어 보인다고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는 사과를 먹을 순 없지.”
“믿을 수 있습니다.”
올리버가 짧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난 누군가의 순진한 보증이 아닌, 실질적인 안전장치가 있냐고 묻는 거야.”
꽤 중요한 문제였다. 사정이 있었다지만, 언너는 한번 약속을 어긴 적 있었으니.
그래서 올리버도 이번에는 그에 걸맞게 준비해 왔다.
“있습니다.”
“자신감이 넘치네·····. 뭐지?”
“언너 씨를 비롯한 다른 자매분들 몸에 폭탄을 심어놨습니다. 뼛조각과 사람의 살점으로 만든 고기 폭탄이요······. 언너 씨.”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에 맞춰 언너는 반쯤 체념한 채 스스로 단추를 풀어 입고 있던 상의를 살짝 펼쳤다.
슬쩍 드러난 가슴과 가슴 사이로, 수술 흔적 하나가 보였다.
올리버가 한 수술로, 원래는 흔적도 없이 봉합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입증할 겸 언너 일행도 잊지 말라 당부할 겸 일부러 흉터를 남겨줬다.
“저 안에 고기 폭탄이 있고, 언제든 터트릴 수 있습니다.”
올리버가 품 안에서 해당 고기 폭탄 모델과 기폭장치를 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대답에 만족했는지, 마탑의 마법사 중 그 누구 하나 따지지 않았다.
비록, 올리버에게 충격과 혐오, 꺼림칙함, 거부감, 경계, 두려움 등의 감정을 느끼긴 했지만.
그렇지 않은 건 멀린을 비롯한 케빈과 필립 등 소수로, 그중 필립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야기 끝났구만,”
***
회의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났다. 안전을 보장받았다지만, 혹시 모를 사태가 발생할 줄 알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폭탄의 위력과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고, 덕분에 올리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언너의 가슴을 열어 폭탄을 꺼내 보여주거나, 준비한 시체 더미(Dummy)를 꺼내 폭탄의 위력을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다행이네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마탑에서 받아들일지 않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분위기를 보아 기대해도 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고생하셨습니다.”
올리버가 자신의 제안대로 잘 따라와 준 언너 일행에게 말했다.
정말 고생이 많았다. 올리버와 함께 대폭발에서 살아남고, 이후 올리버의 제안대로 마탑에 의탁하기로 결정하며, 이를 위해 자신들의 몸에 폭탄을 박았으니.
약속을 어긴 페널티가 있다곤 했지만,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선택지가 많지 않았으니까요.”
올리버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인육 요리사가 소스에 48시간 재워 잡아먹겠다고 선언했으니.
그럼 할 수 있는 선택은 둘 뿐이었다. 어떻게든 인육 요리사를 피해 구석진 곳으로 도망쳐 숨어 살거나, 아니면 인육 요리사가 죽는 데 일조하는 것뿐이었다.
위험은 전자가 더 낮을지 몰랐으나, 없는 살림에도 피의 영약을 제조하려던 그녀들로는 선택하기 힘든 사항일 터였다.
그녀들은 단순히 살아있는 것 이상을 원하였으니.
그런 의미에서 마탑은 좋은 선택이었다. 안전을 확보할 뿐 아니라, 뭔가를 할 수 있었으니.
무엇보다 올리버의 도움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됐고.
“······이유가 뭐죠?”
언너가 대뜸 질문했다.
“무엇이 말씀입니까?”
“우릴 이렇게······. 돕는 이유요. 이미, 약속도 한번 어겼잖아요?”
언너는 정말로 궁금해했다. 올리버가 이 정도로 도와준 이유를. 이미 한번 신용도 잃었는데 말이다.
이런 경우는 처음 겪는 듯 했다.
“음······. 인육 요리사 님에게 협박받은 것도 있고, 이미 페널티도 받으셨으니,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또······, 여러분을 돕고 싶기도 하고요.”
한결같은 대답. 언너 일행은 납득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 이유를 묻지도 못했다. 그냥 이런 올리버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 말이다.
“······고-”
언너가 꾹 참은 말을 전하려는 찰나, 저 복도 너머에서 누군가 뚜벅뚜벅 다가왔다.
윗머리가 벗어지고, 주변머리만 남은 멀린이었다.
그가 말했다.
“오랜만이군.”
올리버가 답했다.
“예, 오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