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 언너 (1)
“잠깐만 기다려 봐. 이와 관련해 상의해볼 터이니.”
마탑 행정부장이 올리버에게 말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였으나 안으로는 불쾌, 곤혹, 당황, 난색 등을 빛냈다.
양옆에 앉은 마스터들도 마찬가지.
그들의 감정은 참으로 복잡하다고 할 수 있었다.
올리버를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음에도, 한편으로는 인정했고,
올리버가 떠나게 놔두고 싶음에도, 그러지 못했다.
싫어하지만, 인정하는 상반된 감정이 교차하며 서로를 제압하려 했다. 꽤 격렬히.
그만큼 고심한다는 이야기.
마탑 행정부장과 마스터들은 이야기를 거듭 나눴고 이윽고 올리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좀 더 논의가 필요할 것 같으니. 일단, 물러나서 대기하게.”
***
대기.
다소 어정쩡한 결정이었지만, 올리버는 만족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행정부장과 모이라이, 공간학파 두 마스터에게 정중히 인사하곤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자 널찍하지만 딱딱한 분위기의 사각형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각 학파의 이견과 관계를 조율하는 행정부 건물에 딱 어울리는 분위기.
올리버는 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 되돌아갔고, 방학 중임에도 출근해 마탑을 운영하는 직원들에게 인사했다.
그들은 올리버를 아는지 다소 굳은 반응을 보였다.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기도 했다.
곧 방학도 끝나는데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하면 조금 성가실 것 같아서 말이다.
‘그때까지 내가 마탑에 남아 있을지 의문이지만······. 음, 쫓겨날 수도 있으니, 한동안 책만 읽을까? 큰일이네, 방문해야 하는 곳도 두 곳이나- 응?’
복도를 돌아 입구에 다다르는 찰나, 올리버는 누군가와 마주쳤다.
다름 아닌 야렐리와 케빈의 연구원 데릭, 펠릭스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예상치 못한 만남. 올리버는 예의를 갖춰 인사하고 그들을 살펴봤다.
은빛 곱슬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쓴 야렐리는 평소와 같이 정갈한 모습이었으나, 데릭과 펠릭스는 꽤 변해 있었다.
둘 모두 신체를 단련한 남성. 그런데 지금은 오랜 투병 생활을 한 것처럼 체격이 왜소해지고, 얼굴도 핼쑥해져 있었다.
특히, 데릭은 그 정도가 심해 선명하던 적발(赤髮)은 탈색돼 그 빛깔이 꽤 옅어졌다.
‘테어도어의 실험으로 마력과 생명력을 흡수당해 쇠약해졌다더니. 이 정도였구나.’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흑마법사의 눈을 사용. 데릭과 펠릭스의 상태를 살펴봤다.
케빈의 말처럼 두 사람의 마력은 많은 약해진 상태였다.
거의 반 토막 수준.
왜 케빈이 입을 조심하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야기를 통해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게 좀 더 와닿았다. 케빈과 펠릭스의 상실감이 말이다.
‘앞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 좀 더 깊게 생각해야겠네.’
올리버는 자신의 무감각을 인지하며 입을 열었다.
“두 분 다 괜찮으십니까?”
“뭐, 나아진 편이야······. 이제는 걸을 수 있으니까.”
데릭의 대답. 야렐리가 덧붙였다.
“며칠 전까지 두 사람 다 걷는 것도 버거워했거든요.”
안타까운 소식이었지만, 올리버는 놀라지 않았다. 테어도어가 어떤 일을 벌였는지 두 눈으로 직접 봤기에.
솔직히 거기서 살아남은 것만으로 데릭과 펠릭스는 행운아라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군요. 좀 나아지셨다니까요.”
데릭은 잠깐 노기를 띠며 움찔했다. 허나, 말 그대로 잠깐일 뿐.
그는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자신의 감정을 다스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면접은 어떻게 됐나요? 마탑에 정식으로 들어오기로 했나요?”
데릭이 마음을 달래던 중 야렐리가 질문했고,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예? 아,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야렐리가 놀랐다. 마치, 올리버가 마탑에 들어올 게 기정사실이라는 듯. 데릭과 펠릭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잠깐 왜······?”
“설마, 누가 반대한 거야?”
올리버는 고개를 저으며, 그들을 진정. 차근차근 해당 일에 관해 설명해줬다.
왜 마탑에 들어가지 않는지.
설명을 다 들은 그들의 반응은 케빈과 행정부장, 모이라이, 공간학파의 두 마스터와 다르지 않았다.
“정말 이해가 안 되네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인데······. 아무리 제논 씨가 밖에서 성공하셨다 해도 이건······”
야렐리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보기 드물게 말꼬리를 흐렸다. 올리버는 둘러댈 뿐이었다.
“개인 성향이라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탑이 싫은 건 아닙니다.”
“당연히 아니겠지.”
데릭이 비꼬며 말했다. 그의 감정은 잠에서 깬 활화산처럼 천천히 요동쳤고, 이윽고 분노와 질투, 원망이란 감정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이봐······.”
펠릭스가 당황하며 데릭을 말렸다. 원래 이게 아니잖냐는 투로.
그러나 데릭은 감정의 압력에 떠밀려 계속해 입을 열었다. 용암을 토하는 분화구처럼.
“왜 사실이잖아? 저 녀석처럼 잘난 녀석이면 꼭 마탑에 붙어 있을 필요는 없잖아? 어디든 저 능력으로 잘 먹고 잘살 테니······. 병신처럼 주변의 눈치도 안 봐도 되고, 남들은 평생 바라기만 하는 기회도 망설임 없이 걷어찰 수 있지. 폼나게.”
거침없이 쏟아내는 감정. 그 감정은 날카롭고 격정적이었지만, 올리버는 싫지 않았다.
왜냐면 공격적이었지만, 그만큼 진실했기에.
오히려 방해한 건 야렐리였다. 그녀는 더 이상 못 듣겠다는 듯 성을 냈다.
“너 진짜-”
“-아뇨. 괜찮습니다. 야렐리 씨. 전 좋거든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세 사람의 시선은 올리버에게 몰렸다.
의도치 않게 쥐게 된 대화의 주도권. 올리버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저 데릭 씨께서 솔직히 말씀해주신 게 좋다는 거지, 모욕하거나, 조롱할 의사는 없습니다.”
올리버는 데릭을 바라보며 말을 멈췄다. 자신의 생각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행히 제대로 전달된 듯했다.
“데릭 씨가 저한테 화를 내는 것도 이해합니다. 큰일을 겪으셨고, 여러모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제가 마탑의 질서와 여러분의 가치관에 반하는 행동을 했으니까요······. 제가 조심성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건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제 결정 자체는 잘못된 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올리버는 상냥하면서도, 고집스럽게 자기 의견을 이야기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데릭은 어느새 가슴속에 들끓던 울분이 사라지며, 화내는 것 자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어이가 없네······. 네가 받은 기회는 엄청난 거야. 네 논문 이야기 나도 들었어. 그것만 있으면 순식간에 마스터 직위에 오를 거고, 네 실력이면 그 이상도 노려볼 수 있을 거야······. 넌 그 테어도어하고도 싸운 사람이니까.”
데릭이 차분히 말했다. 비꼬는 게 아닌 진심. 아무래도 데릭은 기절하지 않고 올리버와 테어도어가 싸운 걸 본 듯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질투나 분한 감정과 별개로, 올리버를 인정하고, 조금 동경하고 있었다. 본인은 이를 부정하려 했지만.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니라 사실이지······.”
“그래도요. 데릭 씨 같이 의지가 강한 분이 절 칭찬해주시니 기쁘네요.”
데릭이 움찔하며, 올리버를 봤다.
올리버가 진심인지 아닌지 살펴보기 위해.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데릭은 입을 열었다.
“······미안. 사실, 구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러 왔는데······, 미안······.”
데릭은 사과나 감사 인사에 익숙하지 않은지 더듬더듬 말을 흐렸다.
목소리가 작고, 내용도 명확하진 않았으나, 그 감정만큼은 진심이었다.
그 증거로 그는 거부 반응을 일으키면서도 끝까지 올리버에게 사과와 감사 인사를 했다.
참으로 좋았다. 이런 거 말이다.
“고맙다고 해주셔서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올리버가 한쪽 가슴에 손을 대며 정중히 말했다. 그 모습을 본 펠릭스 역시 자기도 고맙다고 인사하러 왔다고 했고, 올리버는 똑같이 펠릭스에게도 인사했다.
“야렐리 씨에게도 감사합니다. 두 분을 데리고 와주셔서요.”
“어려운 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보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제논 씨는 마탑을 떠나는 건가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대기해보라 하시더군요.”
“대기요?”
“예.”
“어지간히 네가 탐나긴 하는가 보네.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데릭이 아까 전보다 한결 편하게 말했다. 심리적인 거부감이 줄어든 것 같았다. 남을 인정하는 감정 말이다.
꽤 보기 좋았다.
“아, 그런데, 두 분은 언제쯤 회복하시는지요?”
펠릭스가 대답했다.
“자세히는 잘 모르겠지만, 적잖은 시간을 회복하는 데 전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력뿐 아니라 기력도 잃은 상태라, 일단, 몸부터 회복시켜야 해서요.”
올리버는 다시 한번 흑마법사의 눈으로 데릭과 펠릭스를 살펴봤다.
마력 못지않게 약해진 생명력.
“포션으로는 회복이 안 됩니까?”
“포션은 안 돼요.”
야렐리가 단호히 말했다.
“안 된다고요?”
“예. 보통 사람들은 포션의 기적의 약인 줄 알지만, 잘못하면 죽는 약이거든요. 포션의 역할은 엄밀히 말하면 활성제. 신체를 억지로 활성화해, 상처 회복을 높이는 것뿐이에요. 포션의 질에 따라 그 효과와 부작용만 차이가 있을 뿐, 그 메커니즘을 벗어나진 못해요.”
상세한 설명에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초학까지는 공부했어도, 연금술은 아직 공부하지 못했는데. 설마, 포션 전부 그런 메커니즘으로 움직일 줄은 몰랐다. 마탑의 포션이라면 다른 게 있을 줄 알았건만.
역시, 마법이라고 만능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포션은 적당히 쓰면 편리하지만, 잘못하면 독이 될 수 있는 물건이에요. 복용자의 체력이 낮아졌을 때는 특히요.”
“그럼, 어떻게 몸을 회복하죠?”
“식사와 수면, 적절한 운동으로 자연 회복을 하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에요. 그 외에는·····. 기껏해야 영양제 정도겠죠.”
영양제라······. 올리버는 품 안을 뒤졌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혹시, 이거 한번 드셔보시겠습니까? 영양제라 하니 떠올라서요.”
올리버가 꺼낸 것은 작은 약통으로, 안에는 알약이 2개 들어 있었다. 붉은색이었지만, 그 빛깔이 너무 진해 얼핏 보면 검은색처럼 보였다.
피의 영약이었다.
“이건······. 뭐죠?”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야렐리가 질문했다.
“우연히 (제작법을) 구하게 된 약입니다. 제가 듣기로 남자는 원기를 회복시켜 주고, 여성은 피부 미용을 좋게 해준다고 하던데. 드셔보시겠습니까?”
데릭은 의심과 꺼림칙함 빛냈다.
“이거 흑마법으로 만든 거야?”
“제가 알기로는요. 드시는 분을 한 분 알긴 한 데, 그분께선 효과가 좋다고 했습니다.”
올리버가 에디스를 떠올렸다, 그는 올리버에게서 주기적으로 약을 받았고, 상당히 만족했다.
‘하루 다섯 번씩 한다!’
아직도 무슨 말일지 모를 칭찬. 어쨌건 에디스는 만족했다.
“귀한 물건 같은데, 저희를 주셔도 됩니까?”
“예. 괜찮습니다.”
올리버는 진심이었다. 과거였다면 수량 부족으로 힘들었을 테지만, 이완에게 받은 면피 조끼 덕분에 작업 효율이 높아져 생산력도 대폭 올라갔기에 문제없었다.
어찌나 생산력이 높아졌는지, 퍼스트는 적법 근로시간(휴식시간 제외)인 18시간 노동에서 자그마치 2시간을 줄인 16시간 파격 노동을 할 수 있었다.
아직도 퍼스트의 그 말이 잊히지 않았다.
‘씨발.’
데릭과 펠릭스는 제각기 피의 영약을 한 알씩 집어 들어, 먹을지 말지 고민했다.
“아, 물론, 억지로 드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거 효과 확실한 거 맞아?”
“주로 복용하던 분들이 고령자라, 솔직히 젊은 분들에겐 어떤 효과가 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뭐든 효과는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감사 인사하러 왔는데, 모르모트 역할을 맡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다시 말씀드리지만, 억지로 드실 필요는-”
-꿀꺽!
올리버가 말하던 중 데릭이 피의 영약을 삼켰고, 뒤이어 펠릭스도 눈을 꼭 감고 약을 삼켰다.
내려앉은 침묵. 올리버가 물었다.
“어떻습니까?”
“약 방금 먹었거든.”
“아······. 참. 부탁 하나 드릴 수 있겠습니까?”
“뭐 달라는 거면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런 건 먹기 전에 미리 말했어야지.”
“아뇨, 그런 게 아니고, 약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주시겠습니까? 부작용이 일어나는 게 아니면 말입니다.”
수상쩍은 부탁에 데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데릭은 눈을 여전히 가늘게 떴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수상쩍어함에도 한편으로는 올리버를 믿어주었다.
뭐랄까······. 꽤 보람찼다.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제 생기면 바로 고발할 거니까, 너무 좋아하지 마······. 근데, 어디 갈 데 있어? 아까 전부터 시계를 계속 보는데?”
“아, 실례했습니다. 아직 시간이 좀 남긴 했지만, 혹시 몰라 살펴봤습니다.”
“누구랑 약속 있는데?”
“잠깐 화해했던 분들과 입니다.”
“잠깐?”
“예. 드릴 말씀이 있거든요.”
***
란다의 중상층 거주지 O구역.
올리버는 이곳에 거주하는 바토리 패밀리를 찾아갔다.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찌 거부할 수 있겠어요? 이 집도, 생활비도 주신 분인데요.”
현 바토리 패밀리의 대장 에르제베트 언너가 차가운 예의로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 집은 사죄의 뜻으로 드린 것이니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죠. 저희의 어머니를 죽인 값이죠.”
“그런 뜻은······. 죄송합니다.”
“됐습니다. 약자의 운명은 비참한 거니. 전 알지요······. 그보다 무슨 일로 오신 거죠? 뭔가 물어보실 게 생기셨나요?”
“아뇨······.”
탁자 앞에 앉은 올리버가 말꼬리를 흐렸다.
언너의 자매 중 막내인 에르제베트 팔이란 소녀가 올리버 앞에 커피를 내려다 줬고, 다른 자매들 역시 무슨 일인가 싶어 거실로 내려왔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올리버를 둘러쌌다.
“물어볼 게 없다라······. 그럼,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거죠?”
“다름이 아니라, 다시 정식으로 사과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바토리 님 일에 관해서요.”
까득. 차분하고 이성적이던 언너가 이빨을 깨물었다.
분노한 것.
그러나 올리버는 말을 돌리지 않았다.
“조롱하러 오셨군요.”
“진심입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전에도 정말 죄송하다 하셨는데, 그때는 거짓이셨어요?”
“아뇨. 다만, 느낌이 좀 다릅니다.”
“느낌?”
“예, 소중한 사람이 죽는다는 게 그땐 어떤 건지 잘 몰라 죄송하긴 했어도, 여러분이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잘 몰랐거든요.”
올리버가 마리를 떠올렸다. 자신을 대신해 칼을 맞고 쓰러진 마리를······.
“······그런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서요. 그래서 다시 사과드리려고 합니다. 그게 맞는 것 같아서요.”
올리버가 언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언너는 잠시 올리버의 두 눈을 노려봤지만, 흔들리지 않는 올리버의 눈이 부담스러운 듯 이내 시선을 돌렸다.
“고작 그런 말 하러 오신 건가요?”
“아뇨. 사실, 드릴 말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실 것 같진 않지만, 제가 제대로 말씀드리는 게 맞는 거 같아서요.”
“······뭐죠?”
“제가 어쩔 수 없이 바토리 님을 죽였다고 했지요? 저도 살기 위해서라고요?”
“······.”
“사실, 거짓말입니다. 충분히 적정선에서 제압할 수 있었음에도 죽였습니다. 사지를 자르고 목을 잘라서요.”
“······!!”
언너, 오르쇼여, 커털린, 언드라시, 팔. 바토리의 딸들이 간신히 숨긴 살의를 다시 표면에 드러냈다.
공기가 저릿저릿할 수준.
올리버의 실력을 경계하는 게 아니었으면 진즉에 덤볐을 터였다.
그러나 올리버는 아무런 제스터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언너를 바라볼 뿐이었다.
독처럼 발효된 분노로, 얼굴이 짐승처럼 일그러진 언너가 소리쳤다.
“그걸 말한 이유가 뭐죠?!”
“변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바토리 님을 죽인 이유요. 그분께서 먼저 제 소중한 사람의 사지를 잘라 죽인다고 하셨거든요.”
놀랍게도 그 한마디에 채찍처럼 팽팽하던 공기가 가라앉았다.
바토리 패밀리의 분노가 올리버에게 압도된 것.
올리버가 커피잔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 전 바토리 님에게 제압된 상태였고, 바토리 님은 진심이셨지요······. 짜증이 났고, 그래서 죽였습니다.”
“······.”
“물론, 제가 바토리 님을 죽일 권리가 있었다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죄송하지 않다는 것도 아니고요.”
“······.”
“다만, 여러분의 소중한 사람이 제 소중한 사람을 먼저 건드리려고 했다는 점은 부디 참작해주셨으면 합니다. 왜냐면······. 이런, 뭐라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에 오르쇼여, 커털린, 언드라시, 팔 등 바토리의 딸들은 서로 눈빛을 나눴다.
유일하게 언너만이 그러지 않았는데, 그녀는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소중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길래 그런 거죠?”
“저도 대답해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답을 못 드릴 것 같습니다. 저 아래에 있는 분들 때문에요. 인육 요리사 제자입니까?”
올리버가 거실 아래 지하실에 있는 사람을 꿰뚫어 보았다.
그들은 다른 색깔의 진흙을 뭉친 것처럼 비상식적인 양의 감정과 마력이 어색하게 뭉쳐진 상태였다.
“들켰구만!!”
거실 바닥 아래.
호쾌한 외침과 함께 감정으로 이뤄진 검은 검격이 아래에서 위를 뚫고 나와 올리버를 노렸다.
그와 동시에 언너와 그녀의 자매들은 각오를 다지며 올리버를 덮치려고 했다.
비록, 그 각오는 올리버의 단호한 눈빛과 멈추라는 손짓, 약간의 고갯짓으로 무너졌지만 말이다.
“······!”
올리버는 흑마법사의 눈을 통해 아래에서 올라온 검격을 꿰뚫어 가볍게 피하곤, 검격의 일부를 추출, 감정으로 되돌려 다시 흑마법으로 가공해 몸과 쿼터스태프에 둘렀다.
그러자마자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거실 바닥이 무너져, 올리버는 저 아래로 떨어졌다. 올리버가 원하는 대로.
내려가자마자 양손에 정육칼을 든 남자가 보였다.
그는 쇠줄로 갈았는지 이빨이 모두 뾰족뾰족했다.
“하! 하! 하! 제 발로 내려오는구나!! 인육 요리사님의 제자인 내가 널━”
━뽝!!
“죄송합니다. 이쪽 이야기가 더 급해서요.”
떨어지는 속도를 이용해 올리버는 쿼터스태프를 내질렀고, 쿼터스태프는 상대의 정육칼을 산산조각냈을 뿐 아니라, 입도 허물어버렸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