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 돌아온 마탑 (1)
이완에게 주문한 아이템을 받고, 개발 반대 위원회의 원로인 바솔로뮤에게 X구역 공사 허가를 받은 지 닷새가 지났다.
일주일에서 이틀을 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올리버는 뢰합(雷合)의 여파로 욱신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가볍게 스트레칭한 후 샤워실로 걸어갔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가장 먼지 기억이 나는 건 포레스트.
그는 올리버가 개발 반대 위원회에서 공사 허가를 받아 왔다는데 상당히 놀랐다.
아니, 놀란 건 포레스트뿐만이 아니었다. X구역에 사는 조 역시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그만큼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개발 반대 위원회가 그런 약속을 한 게 말이다.
‘당연히 이례적일 수밖에 없지. 그 시(市)조차 포기한 족속인데.’
포레스트는 오랜만에 순수한 놀라움을 빛냈다. 그만큼 충격적인 일이라는 것.
애당초, 말한 사람이 올리버가 아니었다면 믿지 않았을 이야기였다.
란다엔 온갖 사기와 거짓말이 판을 쳤으니.
그러나 포레스트는 다름 아닌 올리버가 하는 말이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주었다.
그 개발 반대 위원회가 X구역에서 공사를 하는 걸 허락해줬다는. 란다인이라면 절대 믿지 않을 이야기를.
그리고 그것은 조 일행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그는 올리버에게 부탁했다. 자신들이 사는 거주지도 공사할 수 있게 이름을 빌려달라고 말이다.
‘여태까지 모은 보수라던가, 크라임 펌 은행의 대출이라던가 돈은 마련할 수 있는데, 그 개발 반대 위원회 때문에 시멘트 가루 날리는 곳에서 살았거든요······. 당연히 돈은 저희가 낼 건데, 개발 반대 위원회가 방해하지 못하게 이름만 좀 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조의 감정은 걱정과 책임감으로 빛났다.
필시 소속된 공동체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생활을 제공해주고 싶은 것.
올리버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애당초 자신에게 그런 권한이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개발 반대 위원회가 약속한 것도 사실이었으니.
올리버의 허락을 받자마자 조를 비롯한 쌍권총 샘, 쇠몽둥이 오언 등은 만세를 불렀고, 조는 포레스트에게 자기들 거주지도 공사해줄 건설사를 찾아봐 달라 부탁했다.
포레스트는 기꺼이 그래 주기로 했다.
‘덕분에 포레스트 님도 참 바빴지······. 마리도 바쁘지만.’
올리버가 뜨거운 물로 샤워하며 닷새 동안 마리의 행적을 떠올렸다.
마리는 란다 X구역에 거주가 확실해지자마자, 약사를 통해 와인햄에 숨겨둔 비자금을 회수. 란다에 정착할 준비를 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을 다른 소도시로 파견, 성기사로 인해 끊어진 다른 타 지부와의 통신망을 다시 구축. 조직 전체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마리는 해당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올리버에게 약속했다.
‘당연히 다른 지부의 종교활동도 멈추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거리가 있고, 정책변화에 따른 혼란도 있으니, 부디 여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데이브 님.’
마리는 거짓이 아닌 진심으로 말했다.
그 안에 어떠한 생각을 품고 있긴 했지만, 올리버는 따지지 않고 그러라고 했다.
생각을 품었다는 건 딱 그 수준. 구체적으로 뭘 하려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바로 따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바쁘고 마음도 심란한 마리에게 괜한 압박을 주고 싶진 않았기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고치면 될 테니 말이다.
“약사님도 바쁘셨지······.”
치지지직!
샤워를 끝마친 올리버가 아침 식사로 스테이크와 소시지, 달걀 세 장, 베이컨 여섯 장 등을 동시에 구우며 중얼거렸다.
성기사가 있을 때 자택에서 칩거해 몸을 웅크리고 있던 그는 성기사가 떠나자마자 곧바로 움직여, 마리와 기타 다른 범죄 조직의 공백을 메우는 것으로, 도시의 질서와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뿐 아니라 그는 마리가 란다에 정착할 수 있게 마리가 숨겨두고, 맡겨놨던 비자금 및 선택하는 사람들 구성원을 란다에 그대로 배달해줬다.
마치, 마리를 란다로 아주 보내려는 듯.
뭐, 그게 나쁜 건 아니었다.
마리와의 관계를 재구축하는 것은 이미 올리버와 약속한 사항이었고, 약사의 의도가 뭐든, 덕분에 마리 역시 란다 정착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으니 서로 손해 보는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약사는 와인햄을 제외한 일에선 마리를 최대 거래처로 예우, 다른 지부와의 통신망 회복을 도와주는 등 최대한 협조해 줬다.
물론, 마리의 일을 빨리 끝내 올리버와 같이 드루이드 식물 공동 연구를 시작하고 싶은 이유도 있었지만, 그건 욕할 게 아니었다.
원래 서로 필요로 하기에 도와주는 법이었으니.
올리버는 통신 장치로 약사와 어제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언제쯤 시작할 수 있을까? 마리 쪽 재정비가 다 끝나면 되나?’
‘음······. 죄송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을 줄 수 있으시겠습니까?’
‘뭐, 상관없긴 한데, 이유는 알 수 있겠나?’
‘급한 호출이 들어와, 거기 일부터 해결해야 하거든요.’
‘호출? 어디?’
‘마탑입니다.’
회상이 끝남과 동시에 올리버의 식사도 끝났다.
올리버는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한 뒤, 다시 2층으로 올라가 정장으로 갈아입고, 향수를 뿌리는 등 마탑으로 갈 채비를 마쳤다.
과연 마탑에서 자신을 왜 부른 건지 궁금해하며 말이다.
***
“오랜만이네······.”
택시 창문을 통해 점점 가까워지는 마탑을 바라보며 올리버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지 않음에도 말이다.
어쩌면 일이 많아 그리 느끼는 걸지도 몰랐다.
갈로스에서 마탑을 돌아오고 바로 논문 작성이다, 연구다, 개인 실험이다, 에디스다, 마리다, 와인햄이다, 성기사다, 개발 반대 위원회다. 짧지만 꽤 많은 일이 있었으니.
나름 알차게 보낸 거 같아 싫진 않았다.
택시가 멈췄다.
올리버는 갈색 종이봉투에 술병을 담아 마시는 택시 기사에게 감사 인사와 함께 팁을 포함한 택시비를 지급한 뒤, 차에서 내렸다.
택시 기사는 씀씀이가 큰 손님에게 정중히 인사하고는 곧바로 불법 유턴을 해 다시 일하러 떠났다.
평소와 같은 란다의 모습.
올리버는 떠나는 택시를 아무 생각 없이 본 뒤, 체감상 참으로 오랜만인 마탑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음······. 이 시선도 오랜만이네.’
정문을 지나 길을 걷던 중 하나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올리버가 생각했다.
과거, 데릭과의 시합 그리고 마운틴 페이스 건으로 마탑 내에서 잠깐 주목을 받은 적 있었지만, 뭐랄까. 이번에는 뭔가 좀 달랐다.
그때는 기껏해야 적당한 호기심과 흥미였지만, 지금은 의심과 불신, 기대와 감탄, 두려움과 혼란, 적대와 견제 등. 감정의 그 세기가 더 강했다.
심지어 학생들뿐 아니라, 마탑 내에서 한자리 씩 맡고 있는 마법사들까지 올리버를 주시하고 있었다.
신기한 동물 보듯 바라보던 과거의 시선과 확연히 달랐다.
마치, 해결사 데이브로 일할 때 받은 시선과 비슷했다.
조금 큰 건을 해결해 명성이 높아졌을 때 말이다.
갑자기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제때 왔군.”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원소학파 타워에 도착하자 누군가 말을 걸었다.
다름 아닌 케빈이었다. 멀린의 제자이자, 마탑 원소학파의 마스터 겸 교수인 케빈 던바.
그가 원소학파 타워 앞에서 올리버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수님······. 오랜만입니다.”
“그래, 오랜만이다. 논문 작성하러 떠나고, 이번이 처음 보는 거지?”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 그런데 혹시, 마탑에 무슨 일 있습니까?”
“······왜?”
“다름이 아니라, 방학 중이라 사람들도 얼마 없는데, 다들 절 주시하는 것 같아서요.”
올리버가 저 멀리 벤치에 모인 한 학생 무리와 창문 너머에서 관심 없는 척 이쪽을 바라보는 교사 두 명 등을 훑어봤다.
올리버의 질문을 들은 케빈은 올리버와 똑같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어이없다는 감정을 빛냈다. 진심으로 어이없는 감정을.
그가 올리버를 바라보며 물었다.
“진심으로 묻는 거야?”
“어······. 예.”
“하아······. 놀랍구만. 신경이 얼마나 굵은 건지.”
케빈이 감탄 아닌 감탄을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대단해서. 레이크 빌리지 일을 벌써 잊었다는 반응이라······. 정말 까먹은 건 아니지?”
“······아.”
올리버가 두 박자 늦게 소리 냈다.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이.
혹시나 하던 케빈은 한층 더 어이없어했다.
“역시, 스승님 말씀대로 미리 부르기 잘했네, 고작 이런 반응이라니······.”
“죄송합니다······. 일이 조금 있어서요.”
“알아. 일단, 따라와. 가서 설명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으니까.”
***
케빈은 올리버에게 따라오라 했으며, 올리버는 그의 말을 그대로 따라 케빈의 교수 연구실로 향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명패(名牌)를 보면 분명 케빈의 교수 연구실이 맞았는데, 올리버가 알던 그 위치가 아니었다.
“교수님. 원래 교수님 연구실 위치가 여기 아니지 않았습니까?”
올리버가 교수 연구실 위치를 확인하며 물었다. 바뀐 연구실은 원소학파 타워 내에서 명당(明堂)이라 할 정도로 좋은 곳이었다.
“내 연구실은 그 누구와도 교류할 수 없고, 출근하기도 불편한 외딴곳 구석진 자리라는 뜻인가?”
“예.”
올리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교수 연구실 문을 열던 케빈은 올리버를 빤히 바라봤고, 그제야 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올리버가 정정했다.
“교수님께서 그곳이 어울린다는 게 아니라, 제가 기억하던 곳이 아니라서요······. 죄송합니다.”
케빈은 한결같은 올리버는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열던 문을 마저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올리버도 뒤따라 들어갔다.
“오······.”
새로운 교수 연구실을 살펴본 올리버가 감탄했다. 위치만큼이나 내부 환경도 좋았다.
처음 케빈이 배정받은 교수 연구실은 너무 오래되고 좁아 마탑치고는 궁색한 느낌마저 있었는데,
이곳 교수 연구실은 좋은 위치만큼이나 내부도 넓고, 깨끗해 마탑이란 이름값을 느낄 수 있었다.
아예 눌러살아도 될 정도.
“새로 배정받은 연구실이야. 보다시피 위치도, 크기도, 질도 좋아 인기가 많은 곳이지······. 내가 어떻게 여길 배정받았는지 아나?”
올리버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고민했다.
“······레이크 빌리지 때문입니까?”
“다행이네. 무감각해도 멍청하진 않아서. 몰랐다고 했으면 답답해서 죽어버렸을 거야, 내가.”
“죄송합니다······. 잊으려고 잊은 건 아닌데, 다른 일도 조금 있었습니다.”
“스승님한테 들어서 알고 있어. 와인햄, 선택받은 사람들 그리고 네 이름이 올리버라는 것도.”
“······숨겨서 죄송합니다.”
“됐어. 그런 자질구레한 과거 이야기는 크게 관심 없으니. 어쨌건, 이렇게 돌아온 걸 보니, 잘 해결했나 보군.”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마리를 구하고, 시(市)와 협상까지 성공했으니, 전부 잘 해결되고 있었다.
‘심지어 파테르교도 잠잠하고······. 솔직히 걱정스럽지만.’
“아, 그런데 제가 돌아온 건 어떻게 알고 연락하신 겁니까?”
올리버가 뒤늦게 깨달으며 물었다. 일단, 불러서 오긴 왔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어떻게 자신이 란다로 돌아온 걸 알았는지 궁금했다.
“스승님께서 네가 돌아왔으니, 연락하라고 해서.”
“전 어르신에게 돌아왔다고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만?”
“당황스럽지?”
“예.”
“익숙해져.”
“아······. 예.”
멀린의 두 제자가 당혹과 부조리에 자발적으로 익숙해지자는 대화를 나눴다.
잠시, 침묵이 찾아왔고, 케빈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마탑 이야기를 나누지. 나는 이쪽 일이 더 중요하니까······. 사람들이 왜 널 바라보는지 궁금하다고?”
“예. 전에도 비슷한 경우는 있었지만, 지금은 그 결이 좀 달라서요.”
“내가 더 좋은 교수 연구실로 옮긴 것과 비슷해······. 네가 레이크 빌리지에서 활약했기 때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