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흑마법사-385화 (385/633)

385. 조정 (1)

뚜벅. 뚜벅. 뚜벅. 뚜벅.

갈라하우트는 바닥을 보며 말없이 복도를 걸었다.

대리석으로 이뤄진 새하얀 바닥은 마치 티끌 하나 없는 신앙심을 대변하는 것 같아 보기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시선을 조금만 돌리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복도에 쭉 세워진 거대한 조각상들은 아름답고 위엄이 넘쳤으나 너무 사치스러웠고,

천장 위에 그려진 천장화(天障畵)는 파테르교의 위대함을 설파했지만 동시에 너무 화려했다.

너무나도 말이다.

검소와 소박함을 미덕으로 내세우는 파테르교의 가르침과 맞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권위와 위엄은 화려함에서 나오는 거니.’

갈라하우트는 경전의 교리와 현실의 괴리에 씁쓸함을 맛보면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치부했다.

대부분 사람은 어리석어 진실한 가르침보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에 더 쉽게 설득됐으니.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어쩔 수 없는 것.

“기사님.”

복도를 걷던 중 두 명의 사제와 마주쳤다.

이곳 성황청(聖皇廳)에서 일하는 사제들로, 갈라하우트는 그들의 인사를 받아줬다.

그리고 서로 지나쳐 제 갈 길을 갔다.

“그 소문이 사실인가 봐. 실패했다는 거.”

“그러게.”

작지만 선명하게 들리는 소리에 갈라하우트가 멈칫했다.

자신의 실패를 속삭이는 저 소리가 불쾌하고 거슬려.

허나, 저들을 탓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귀가 너무 좋은 것뿐이었으니······. 물론, 그렇다고 불편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특히, 추기사제를 만나러 가는 상황에선 말이다.

“하아······.”

갈라하우트는 걱정과 각오가 섞인 한숨을 내뱉고는 다시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조각상과 화려한 천장화를 지나 한 문 앞에 도달했다.

화려하게 금으로 장식된 문을.

갈라하우트가 문을 두들기려는 그때, 낮고 위엄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자신이 온 걸 알고 있는 그 목소리에 갈라하우트는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그러려니 받아들이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악마와 이교도 신들을 몰아내는 천사를 표현한 거대한 벽화와 그 벽화를 배경 삼아 앉아 있는 거구의 대머리 사내를 볼 수 있었다.

대머리 사내의 이름은 로데릭 보르. 현 파테르교의 추기사제이자, 성황청의 재정을 책임지는 재무관. 그리고 전(前) 성기사였다.

과거 성기사란 걸 증명하듯 그는 나이가 들었음에도 엄청난 기골을 자랑하였는데, 등 뒤에 장엄한 벽화와 어우러져 서류 작성 중임에도 엄청난 위압감을 뿜었다.

“잠시 기다리게.”

로데릭이 서류를 작성하며 말했다.

참고로, 그의 책상 한쪽에는 이미 사람 키만 한 서류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소문대로 엄청난 업무량이었다.

“흐음······. 기다려 줘서 고맙네. 갈라하우트 경.”

한참의 서류 작업을 마친 후 로데릭이 말했다.

그는 작성을 마친 서류를 다른 서류 더미에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세월과 행정업무로 인해 배가 나오고, 턱 역시 두툼해졌지만, 그럼에도 그는 성기사 시절처럼 위풍당당했다.

“와줘서 고맙네.”

갈라하우트 곁으로 다가오며 그가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殿下)······. 그보다 어쩐 일로 부르셨는지요?”

“사람 참 딱딱하고 성실하구만, 뭐 그래서 내가 자넬 좋아하는 거긴 하지만.”

로데릭이 갈라하우트에게 능글맞은 호의를 보였다.

실제로 로데릭은 갈라하우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긴 했다. 다름 아닌 강경파에 갈라하우트를 끌어들인 게 로데릭이었으니.

“임무에 실패한 자에게 너무 과분한 말씀입니다.”

“제아무리 신의 축복을 받은 성기사라 해도 어찌 성공만 할 수 있겠나? 이쪽 일은 전혀 모르는 일반인 출신 머저리들이나 그리 지껄이는 거지! 좆이나 까라 그러게.”

“전하(殿下)······!”

갈라하우트가 놀라며 작게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게, 성황(聖皇) 다음으로 높은 추기사제가 저리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는다니.

그러나 로데릭은 성호를 그으며 웃을 뿐이었다.

“확실히 신의 집에서 내뱉을 말은 아니지······. 용서하시게.”

갈라하우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개운하기도 했다.

이곳으로 돌아온 후 자신을 누르던 압박감을 로데릭이 조금이나마 대신 해소해준 기분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자였다. 분명 부패한 사제였지만, 그에게선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 있었다.

하긴, 그렇기에 추기사제까지 오른 것이겠지.

“어쨌건 내 말의 요점은 너무 의기소침하지 말라는 걸세. 이 일은 늘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자넨 여전히 최고의 성기사 중 하나야.”

“과분한 치하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진심이야······. 어쨌건 지금 자넬 부른 건 물어볼 게 있어서네. 어제 보니파를 보고 왔거든.”

보니파란 이름을 듣자마자 조금 나아졌던 기분이 다시 침울해졌다.

“상태가 어떤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흐음······. 솔직히 썩 좋은 상태 같진 않더군.”

로데릭이 살찐 턱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슬프기보다는 안타깝다는 태도였다.

“상처가 너무 심한 데다 자네 보고서대로 제대로 치료조차 힘들더군. 성수를 사용해도 말이야. 뭐랄까······. 뭔가 방해하고 있는 느낌이야. 마치, 그놈처럼.”

그놈. 추상적인 명칭임에도 갈라하우트는 그게 누군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갈라하우트 역시 베테랑 성기사였기에 로데릭이 누굴 지칭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그놈이면 위험한데······.’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흉터야.”

“몸의······. 흉터 말씀입니까?”

“그것도 그거고, 상징은 자고로 보기 좋아야 하니······, 하지만 진짜 문제는 경력적인 흉터지.”

“방금, 성기사도 실패를-”

“-성기사는 실패할 수 있지! 괜찮아! 아무리 신의 축복을 받았다 해도 결국 불안정한 인간이니까! ······하지만 천사의 아들은 그래선 안 되지. 천사의 아들이니까.”

로데릭이 단호하게 말했다.

“흠결이 있어선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하지만 보니파를 내세운 건 전하(殿下)지 않습니까?”

“아아, 내가 아니라 나를 비롯한 강경파 지도자들의 의지였지······. 그리고 실수였던 것 같아, 우리 역시 비천한 인간이니.”

로데릭이 참으로 뻔뻔하게 말했다. 사실상 보니파를 버리고 새로운 천사의 아들을 세우겠다는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말게. 나도 슬프니. 그 신실한 자를 이런 문제로 언급하는 게 참······. 하지만 별수 있나? 자네도 알다시피 대부분 사람은 눈뜬장님이라, 화려한 게 아니면 관심도 주지 않아. 인류의 운명이 다가오는 이때,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들의 입맛에 맞춰야 하지 않겠나? 자네도 알지 않나?”

“······.”

갈라하우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혐오스러운 의견이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파테르교의 가르침과 미덕은 검소와 겸손이었지만, 슬프게도 세상 사람들은 화려함과 과시에 더 주목했다.

슬픈 현실이었다.

“그럼, 보니파는-”

“-걱정하지 말게. 아직 급한 건 아니니, 당장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을 할 생각은 아니야. 일단, 보니파를 치료하는데 전력을 기울일 거야. 고대 서적을 뒤져가며 지금 노력 중이니, 일단 이 이야기는 잠시 미루도록 하지. 자넬 부른 이유는 다른 것에 관해서 물어보기 위해서니.”

갈라하우트는 아주 조금 안도했다. 보니파를 당장 버린다는 건 아니었으니.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자네가 준 보고서와 기록장치를 봤네. 안타깝게도 기록장치는 뒷부분이 전부 날아갔지만······. 정말 그게 다인가?”

“예, 저희도 확인해봤지만 전부 같은 부분이 날아갔습니다. 무슨 농간처럼요.”

갈라하우트도 알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보니파의 활약을 담기 위해 기사마다 기록장치를 들고 임무에 들어갔지만, 올리버가 본격적으로 움직인 부분은 누군가 일부러 자른 것처럼 날아가 버렸다.

“뭐, 좋아······. 그자에 대해서 직접 이야기해보게.”

“보고서에 이미-”

“-보고서는 나도 이미 읽어봤어. 일곱 번이나. 난 보고서가 아닌 자네 관점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네. 그놈과 같은 상처를 보니파의 몸에 새겼으니······. 정말 그놈이 란다에 있나?”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제 추측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자네 추측이면 확실한 거지······. 놈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T구역 30번 거리의 해결사 데이브 라이트라고 합니다. 자연의 힘도 다룰 수 있는 흑마법사지요.”

***

째깍. 째깍. 째깍.

란다 시(市) 내무부 장관 사무실. 책상 위에 있는 시계만이 조용히 울렸다.

책상 위에는 시계 말고도 여러 신문이 지저분하게 널브러져 있었는데, 그 종류가 다양했다.

<더 토커(The Talker)>

<노 크레딧(NO Credit)>.

<라이어(Liar)>

<지브리쉬(Gibberish)>

<인콘비니언 트루(Inconvenient Truth)>

<카산드라(Cassandra)>

<뷰글러(Bugler)>

그 외 기타 등등.

판매량이 곧 수입이자 힘이 되는 신문답게 온갖 자극적인 이야기로 떡칠 돼 있었다.

유산을 둘러싼 한 자산가 집안의 막장 드라마,

인기 라디오 드라마 배역들의 치정 싸움,

왕실의 찌라시성 스캔들,

여성 참정권 운동,

심지어 하수도에 괴물 쥐가 나타나 같은 쥐들을 모조리 잡아먹어 하수도를 청소해준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있었다.

모두 쓸데없는 이야기뿐······. 허나, 쓰레기장에도 간혹 제대로 된 물건이 있듯 간간이 무시할 수 없는 기사도 있었다. 가령, 해외 쪽이라든가.

[갈로스 왕실 마법 대학 로큘리! 흑마법사에게 잠입을 허용하다!]

란다의 내무부 장관 폴 카버는 해당 신문을 다시 읽어봤다.

놀랍게도 갈로스의 마탑이라 할 수 있는 로큘리 대학에 흑마법사가 잠입했다는 것인데, 더 충격적인 것은 단순히 연구 자료나 정보를 빼앗긴 걸 넘어 주요 학과가 통째로 포섭당해 대학 자체를 배신했다는 거였다.

그로 인해 대학 측은 서로를 의심하며 사실상 내전 상태에 돌입.

참으로 충격과 공포가 아닐 수 없었다.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일임을 고려해도 말이다.

흑마법사가 마법사······, 그것도 마법 사회에 정점에 있는 로큘리 대학에 잠입해 주요 학파(학과)를 집어삼키다니.

아무리 로큘리 대학이 오랜 세월과 사회적 혼란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해도 믿기지가 않았다.

마탑을 통해 미리 레이크 빌리지 사건을 들었음에도 말이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부정한 걸지도.’

카버가 생각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과도한 충격을 받을 시 오히려 사실을 제대로 인지 못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과도한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말이다.

‘그리고 이것도 같은 이치겠지.’

카버는 곧 있을 약속시간을 다시 확인하며 생각했다. 이제 슬슬-

-칙! 칙!

[장관님. 약속하신 손님이 오셨습니다.]

책상에 연결된 음성장치를 통해 들려오는 비서의 목소리.

카버는 후하고 한숨을 내쉬고는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골치가 아프더라도 귀한 손님에게는 그에 걸맞은 대접이 필요한 법이었으니 말이다.

“······들어오시라고 해.”

카버의 음성장치를 통해 대답했고, 잠시 후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다름 아닌 란다의 최고 해결사 중 하나인 데이브였다.

‘아니면 사이비 신이든가······.’

딱. 딱. 딱.

데이브, 아니 올리버. 여하튼 그가 쿼터스태프로 바닥을 짚으며 장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장관님.”

“안녕하십니까? 데이브 씨······. 데이브 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데이브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금은 그 이름을 쓰고 있으니까요.”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카버는 괘씸하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이래서 사람 평소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시(市)도 마찬가지겠지.’

카버가 그렇게 생각하는 그때.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제가 혹시 바쁠 때 찾아왔는지요?”

카버가 올리버의 시선을 따라 뒤를 봤다. 자신의 책상 위였다.

“아······. 신경 쓰지 마시죠. 그냥 신문 좀 읽고 있었던 거니까요. 바쁜 건 밑의 직원들이 바쁘죠.”

“그렇군요. 그런데, 저건 뭔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올리버가 책상 한쪽에 널브러진 여러 캔 통조림과 치약 같은 튜브, 비스킷, 초콜릿, 인스턴트커피, 소량 포장된 마가린 등을 가리켰다.

“아······. 시(市) 방위군에 납품할 전투식량 샘플입니다. 점심으로 먹고 있었습니다.”

“전투식량을 좋아하십니까?”

“아뇨, 싫어합니다. 군대 입대한 후로는 더 싫어하고요.”

“아······. 그럼 왜 드신 거죠?”

“그나마 뭐가 더 맛없는지 알아보려고요. 그나마 군인의 즐거움은 먹는 거거든요. 물론 저한테 결정권은 없지만, 알아두려고 합니다.”

“그렇군요······. 맛은 있으십니까?”

“글쎄요. 제 입맛에는 그다지······. 혹시, 괜찮으시다면 데이브 씨도 한번 드셔보시겠습니까?”

카버가 아직 뜯지 않은 여분의 전투식량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영영 못 드실 수도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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