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 약사 (2)
“거래 말씀입니까?”
“왜, 싫나?”
약사의 물음에 올리버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히려 감사합니다. 제 신용이 바닥일 텐데, 거래를 제안해주셔서요.”
올리버가 자신이 멋대로 떠난 전적을 떠올리며 말했다. 거래를 제안해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였다.
“말이 통해서 다행이군. 그럼 바로 본론으로 돌아가지.”
약사는 어느새 더블 배럴 샷건을 완전히 거둬들였다.
“우선, 한 가지 사실부터 못 박지. 내가 줄 수 있는 건, 로렌스를 비롯한 다른 사제들이 붙잡힌 장소뿐이야. 그 이상은 못 도와줘. 인정하나?”
올리버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 말했다시피 약사는 칩거 생활을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태.
이 이상 돕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
“그럼, 이제 내 조건을 이야기하지.”
“말씀하십시오.”
“첫 번째, 일이 잘못돼도 날 언급하지 않는 거야. 당연한 거지만 약속을 받고 싶군.”
“물론입니다. 약속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마리를 통제해 줬으면 좋겠어.”
“죄송하지만 말뜻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마리를 통제해 달라니, 혹시, 마리가 약사님께 무슨 무례라도 저질렀습니까?”
“대놓고는 아니지만, 점점 그 아가씨가 내 머리 위에서 놀려고 하더군.”
“아······. 죄송합니다.”
“자네가 죄송할 건 아니지. 그 아가씨 제품으로 내가 재미 본 건 사실이니까. 딱히, 원망하는 건 아니야. 아쉬운 쪽이 숙이는 건 당연한 거니. 그래서 나도 지금 상황을 이용하려는 것뿐이야.”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구체적으로 제가 어떻게 통제하면 될지요?”
“마리가 이 도시의 모든 통제권을 포기하는 거야. 솔직히 난 그 선택받은 사람들이란 종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내 고향에 사이비 종교가 판치는 건 질색이라······. 자넬 흉보는 건 아니고.”
“아닙니다. 선택받은 사람들은 사이비 종교 맞습니다.”
올리버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뭐, 인정하니 다행이군······.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은 자네가 날 좀 도와줬으면 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요?”
약사가 양팔을 벌려 지하 온실을 가리켰다.
지하실에는 각종 약초와 꽃, 정체불명의 식물, 분재 따위가 질서 정연하게 늘어져 있었다.
“여기 있는 식물 중 엔조이먼트 드루이드에게 구입한 식물도 몇 개 있어. 드루이드들이 키우는 식물은 저마다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지. 자네가 사용한 콩처럼.”
올리버는 자신이 싹 틔운 녹색 콩 줄기를 봤다. 셰이머스와 다른 드루이드를 살해하고 노획한 물건이었다.
“식물뿐 아니라, 종자 씨도 있고······. 개인적으로 이것들을 연구하고 있는데 그렇다 할 성과는 없지. 자네가 내 연구를 도와줬으면 좋겠어.”
“어······. 죄송하지만 약사님. 전 드루이드에 관해 아는 게 없습니다.”
“상관없어. 지식은 부족하게나마 내가 구했거든. 문제는 자연의 힘을 다룰 수 있는 능력. 자네도 알겠지만, 드루이드는 마법사보다도 더 보기 드문 존재들이라 그쪽 인력을 확보하기 힘들어. 난 자네가 그 역할을 맡아줬으면 해······. 만약, 도와주면 내가 확보한 지식을 공유해주지.”
“그런 거라면 오히려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올리버가 관심을 보였다. 올리버 역시 드루이드의 힘과 지식에 관심이 갔기에.
“좋아, 거래 성립이군.”
약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거래가 성사된 증거로 악수를 하자는 것.
올리버는 과거 약사와 악수했을 때를 떠올렸다.
약사가 호의를 보이며 좋은 관계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 싶다고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으나, 그 직후 올리버는 그와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어겼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옳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두 번째 기회를 준다니······. 올리버는 약사의 손을 마주 잡으며 감사를 표했다.
“신용을 잃은 제게 두 번째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안 고마워해도 돼. 자네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가치가 높아져 그런 것뿐이니······. 또, 태도도 마음에 들고.”
“제 태도 말씀입니까?”
“그래, 날 협박하는 대신 정중히 사과하고, 부탁했으니까. 솔직히 보기 드문 태도거든. 흑마법사든, 마법사든, 드루이드든, 성기사든. 조금 특별한 힘을 가진 인간들은 하나같이 재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 태도 유지하게. 그게 자네 힘이 될 테니.”
“조언 명심하겠습니다.”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거 받게.”
약사가 올리버의 손을 놓으며 온실 한쪽에 마련된 낡은 책상에서 갈색 종이봉투를 가져왔다.
“지금 성기사들이 비밀리에 둥지를 튼 아지트 위치와 그쪽으로 침투할 수 있는 예상 루트야.”
올리버는 곧바로 봉투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확인해 봤다. 지하 대피소 도면이었다.
“음······. 그런데, 약사님. 아지트를 따로 마련한 이유가 있습니까? 경찰서라든가 도시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편하고 나을 텐데요.”
“여러 이유가 있어. 성기사들은 자기가 특별하다고 생각해 따로 움직이려는 경향이 있고, 또, 이곳 공권력을 믿지 않거든. 대부분 부패했다고 생각하지. 어느 정도 사실이긴 하지만.”
“아······.”
올리버가 와인햄에서 약사의 영향력을 떠올리며 소리 내곤 자료를 훑어보았다.
약사가 말했다.
“성기사가 번거로운 인간들인 건 맞지만, 무능하진 않아. 저들이 둥지를 튼 곳은 시민 대피용 벙커로 공간도 넓으며, 방어하고, 폐쇄하기도 용이해. 쳐들어가는 건 어느 정도 돼도,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을 거야.”
약사가 준 자료를 훑어보며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성기사가 임시로 둥지를 튼 아지트는 치고 빠지기 쉬워 보이지 않았다.
지하 대피소 입구는 하나밖에 없었고, 대피소 내부는 폐쇄된 형태를 띠었으며, 상주하는 인원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됐다.
“가장 큰 문제는 붙잡힌 것으로 추정된 인원만 해도 수십 명이 된다는 거야······. 전부 데리고 도망치긴 힘들지. 로렌스만 데리고 도망칠 건가?”
“음······. 글쎄요? 그건 좀 그런 것 같으니, 될 수 있는 한 전부 데리고 도망칠까 합니다.”
“초 치려는 건 아니지만, 가능하겠나? 인원수가 많으면 도망치기 어려울 텐데. 거기다 대부분 상태가 말이 아닐 거고.”
“노력하면 될 거 같습니다.”
올리버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대답이었지만, 더 어이없는 건 왠지 올리버라면 저 허무맹랑한 말을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였다.
***
좁고 어두운 방. 버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찰칵.
경쾌한 소리에 맞춰 스탠드 조명에 강렬한 빛이 들어와 홍해를 가르듯 어둠을 갈랐다.
버튼을 누른 남성이 조명을 조작해 맞은편 남자의 얼굴을 비췄다.
“······크윽.”
갑작스러운 빛에 남자가 신음소리 냈다.
“대단하군······. 로렌스.”
조명을 조작한 남자, 성기사가 말했다.
“3일 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버티다니······. 사이비지만, 대단해. 다른 녀석들은 짧으면 반나절, 길어도 하루를 못 버티는데 말이야.”
“······고문했으니까 그렇지.”
로렌스가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불편한 건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강렬한 빛 때문에 쉽게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로렌스의 상태는 썩 좋지 못했다.
얼굴 한쪽이 심각하게 부어올라 한쪽 눈을 뜨지 못했고, 목과 벌거벗은 상체에는 보랏빛, 푸른빛 멍이 줄무늬처럼 가득 나 있었다.
거기다 등에는 온갖 상처가 나 있었으며, 손톱 역시 멀쩡한 것보다 안 멀쩡한 게 더 많았다.
“흑마법사가 신문(訊問) 좀 당했다고 칭얼거리나?”
“아니, 자칭 신을 모시는 인간이 고문 따위를 해 따지는 거야.”
온몸이 만신창이인 로렌스가 유일하게 멀쩡한 한쪽 눈을 부릅뜨며 되받아쳤다.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웬만한 인간은 이 상황만으로 주눅이 들어 눈을 마주치긴커녕 말도 제대로 못 하는데 로렌스는 고문까지 당하고도 당당히 말대답했다.
“······근성 하나는 알아주지.”
성기사가 그리 말하고는 로렌스의 목 뒤쪽을 붙잡아 그대로 당겨 책상에 처박았다.
그와 함께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그마치 세 번이나 더.
쾅━!
쾅━!
쾅━!
공기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책상 위에 피가 흘러내렸다.
로레스의 머리에서 흐르는 피였다.
“그래 봤자 얼마나 버티느냐의 차이지만.”
“끄으으······. 내가 교주님을 팔 거 같나?”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야. 어차피 너희는 곧 토벌될 거거든. 차이가 있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 뿐이냐지.”
“그따위 수작 넘어가지 않는다······.”
“수작이 아니라 사실이야. 이 작전에 누가 관여했고, 투입했는지 모르지? 네 교주는 절대 도망칠 수 없어.”
“그렇게 자신만만하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고통스러워지라고. 난 너 같이 순교자인 척하는 사이비가 싫거든. 마치, 내 신앙이 모욕당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하······.”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렌스가 냉소했다.
순교자라니······. 정말 웃기는 단어였다.
자신은 신 따위 믿지 않았는데 말이다.
파테르교의 아버지 신도, 선택받은 사람들의 신 올리버도 말이다.
믿고 따르는 게 굳이 있다면 그건 오직 마리뿐이었다.
시궁창 같던 자신의 인생을 구해준 아름답고, 신비로우며, 강인한 그녀 말이다.
‘교주님을 위해 죽는 게 순교라면 순교자겠군······. 하지만 후회는 없다.’
로렌스가 생각했다. 허세가 아닌 진심으로 말이다. 그녀를 위해 죽는 거라면 딱히 억울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기사는 로렌스의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듯 인상을 쓰며 물었다.
“뭐가 웃기지?”
“너희 파테르교는······.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나에 대해서도 모르고, 사람들이 왜 우리 종교를 믿는지도 모르지······. 너희는 장님이야. 너희가 모시는 신처럼.”
꽈악.
로렌스가 말을 끝마치자마자 성기사가 로렌스의 머리를 거칠게 끌어당겨 자기 얼굴 가까이 댔다.
“감히, 사이비 따위가 진정한 신을 모독해······!”
성기사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의 신이 욕보여졌기에.
허나, 로렌스는 담담할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즐거워했다. 이 오만한 성기사에게 상처를 줬으니.
과거였다면 대화조차 불가능했을 텐데. 이것만으로 의미가 있었다.
“왜? 또 책상에 내 머리를 처박으려고? 아니면 손톱을 뽑거나, 뜨거운 물을 끼얹을 건가? 해봐.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폭력뿐이니까.”
성기사는 얼굴에 핏줄이 돋을 만큼 분노하더니, 로렌스를 다시 책상에 처박으려고 하다 그만뒀다.
정말 그 말대로 한다면 로렌스의 말이 사실이고, 자신은 지는 것이기에.
그럴 순 없었다. 성기사인 자신이 감히, 사이비 놈 따위에게 휘둘릴 순 없었다.
그래서 성기사는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북 거리 582R 번지 폐쇄된 신전.”
“······!!”
성기사가 내뱉은 주소를 듣자, 로렌스의 두 눈이 커졌다. 왜냐면 그곳은 현재 마리가 숨어 있었기에.
“아아······. 반응을 보아하니 그곳이 맞나 보군.”
로렌스는 ‘어떻게 알아냈냐’라고 묻고 싶었지만, 필사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성기사는 상관 안 한다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저 로렌스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그는 말을 이어갔다.
“궁금하겠지? 어떻게 알아냈는지. 어렵지 않아. 너희 같은 사이비들은 신앙심이 가짜이듯 의지도 얄팍해, 조금만 위기에 몰리면 쉽게 배신하는 놈들투성이거든······. 또, 너처럼 멍청해 금방 얼굴에 티 내고. 이렇게 쉽게 걸려들 줄 몰랐군.”
순간 분노한 로렌스가 성치 않은 몸으로 벌떡 일어나 달려들려 했다.
허나, 성기사는 억센 팔로 로렌스를 내리눌러 책상에 처박을 뿐이었다.
쾅━!!
“일어나서 뭘 하려고 그랬지? 몸은 망가졌고, 양손은 팔찌로 묶여 흑마법도 사용할 수 없는데 말이야······. 응? 뭘 하려고 한 거지?”
“끄윽······.”
로렌스가 뭐라 말하려고 하였으나, 성기사의 힘에 눌려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네가 모시는 가짜 교주는 곧 붙잡힐 거야. 그리고 넌 아무것도 못 하겠지. 아무것도······. 또, 네가 모시는 사이비 신처럼 말이야.”
로렌스가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악을 썼다.
“난━”
━벌컥!
“기사님!”
성기사와 로렌스의 신문 도중 서번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급한 기색을 보아하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야?”
“습격입니다! 웬 드루이드가 침입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