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6. 그런 놈 (2) >
“혹시……. 선택받은 사람들을 조사한 자료와 파테르교가 그들을 소탕하게 된 이유를 알고 계시면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될 수 있는 한 자세히요.”
올리버가 부탁했고, 놀랍게도 에디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파일을 두 개 꺼내 올리버 앞에 던져주었다.
툭- 하고 떨어진 두 개의 파일에는 제각기 선택받은 사람들에 대한 자료와 그들을 토벌하는 파테르교의 공식, 비공식적 목적이 담겨 있었다.
올리버는 그 파일을 읽어보았다.
꽤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었다.
“꽤……. 흥미롭네요.”
“난 역겹다고 할 텐데. 뭐, 취향은 다양한 법이니까 이해해줄게.”
“감사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 자료 제가 챙겨가도 되겠습니까?”
“넌 내가 정보상 나부랭이로 보이나? 그리고 내 물건은 꽤 비싸. 바가지를 씌우거든. 감당할 수 있겠나?”
“음……. 에디스 님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돈이 좀 있는데, 혹시, 팔아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에디스는 일부러 비웃었다.
“크크크크크. 돈 좀 있다라. 하긴, 해결사치고는 꽤 있는 편이겠지. 그래 봤자 해결사 수준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매력 없는 제안이야. 네 전 재산을 다 합쳐도 내 뒷주머니에 있는 푼돈만도 못하거든.”
허세가 아닌 진심이었다.
“음…….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이 자료를 받을 수 있을까요?”
“간단하지. 넌 나한테 빚진 거고, 나중에 내가 말하면 그 빚을 갚으면 돼. 쉽지?”
"예, 알겠습니다.”
빚이라는 모호하면서도 어떤 형태로 치를지 모를 대가에 올리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했다.
참으로 경솔한 선택. 그러나 에디스는 그런 올리버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싫지 않았다. 원래 바보는 혐오하는데 말이다.
“거래 성립. 이제부터 그건 네 거야.”
에디스가 그리 말하더니,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리버에게 손을 내밀었다.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았다.
설마 에디스가 악수를 청할 줄이야……
“에디스 님. 괜찮으시다면 물러나 봐도 되겠습니까?”
“뭐, 식사도 다 했으니 상관없겠지. 이제 뭘 할거지?”
에디스가 기대와 흥미를 품으며 물었다. 올리버가 답했다.
“일단, 논문부터 마저 쓰려고 합니다.”
***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에디스와 헤어진 후 올리버는 곧바로 차를 다시 몰아 거주지로 복귀. 곧바로 여태까지 확보한 자료와 쓰다만 논문을 다시 읽고는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말이다.
서걱서걱서걱서걱서걱서걱서걱서걱.
분명, 에디스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버벅거렸건만, 올리버는 갑자기 딴사람이 된 것처럼 빠르게 논문을 써 내려갔다.
단순히 글자 수만 채우는 게 아닌, 한 단어, 한 문장 만족스럽게 말이다.
아마, 머리를 복잡하게 하던 잡생각이 깔끔히 정리된 덕분일 터였다.
“끝.”
자리에 앉은 지 몇 시간이 지난 후, 올리버가 논문 작성을 마치며 말했다.
작성을 다 마친 논문은 책과 거의 비슷한 두께로, 보통 사람이라면 크나큰 만족감과 함께 피로감을 느껴야 마땅했으나, 올리버는 오히려 아까 전 보다 더 빠릿하게 움직였다.
우선 샤워를 해 몸을 깨끗하게 하고, 새 옷을 반듯하게 갖춰 입고는 논문을 챙긴 후, 품 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포털 마법이 깃든 종이였다.
위이이잉……!!
올리버가 종이에 마력을 부여해 저장되어 있던 술식을 발동하자, 벌레의 날갯짓처럼 작지만 선명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보랏빛 포털이 허공에서 열렸다.
올리버는 포털을 보며 참으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필요할 때를 대비해 최근에 준비한 것인데, 이렇게 바로 쓰일 데가 생긴다니 말이다.
올리버는 자신의 운에 감탄하며 옷을 단정하게 정리하곤 포털로 들어갔다.
포털로 들어가자 멀린의 대저택 내부 풍경과 자신을 둘러싼 나무인형-골렘 한 무리를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나무인형-골렘들은 하나하나 마스터급의 마력을 품고 있었다.
“어르신 좀 만날 수 있을까요?”
올리버가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부탁했다.
***
멀린은 대저택 안에 있었다.
참으로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없었으면 시간을 꽤 허비해야 했을 텐데.
멀린은 나무인형-골렘들의 손에 체포돼 끌려온 올리버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젊은 시절에는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하곤 했지만, 그렇다고 무단침입한 적은 없었는데……. 도대체 언제 내 집에 포털 마법 종이를 심어둔 거지?”
나무인형-골렘들에 의해 밧줄로 포박돼 끌려온 올리버가 답했다.
“저번에 논문 자료를 챙길 때 심어뒀습니다. 어르신을 정말 급히 만나야 할 때를 대비해서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심은 건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또 감사드립니다.”
“무엇이 감사한가?”
“제가 몰래 심을 때 모른 척해주셔서요.”
멀린이 한쪽 눈썹을 살짝들 어 올렸다.
“이제 내 감정도 꿰뚫어 볼 수 있나?”
“아뇨. 다만, 어르신께서 눈치 못 채셨을 리는 없다고 생각해서요. 그럼, 모른 척해주신 거겠죠.”
“허……. 며칠 사이 능글맞아졌구만. 풀어줘.”
멀린이 손짓하며 명령하자, 나무인형-골렘들은 마법으로 올리버를 묶은 밧줄을 풀어 챙긴 후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갔다.
단둘이 남게 된 멀린과 올리버.
그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고, 그 사이 멀린은 올리버가 가져온 논문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겼을 때 올리버가 질문했다.
“어떻습니까? 어르신.”
“훌륭하군.”
멀린이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허나, 말의 무게는 그 어떠한 장문의 칭찬보다도 무거웠다.
아카이브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생각 이상이야. 처음 네가 해당 주제로 논문을 쓴다고 했을 때 걱정했거든, 왜냐면 네가 선택한 주제는 높은 의학지식은 물론, 생명 마법 분야를 수십 년 공부해야지만 손댈 수 있는 거라……. 그런데 기우였군,”
“테어도어 님께서 제 몸을 흡수하시려 했을 때 우연히 그분의 지식을 부분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거든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운이 좋았다라……. 멀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얼핏 듣기에는 정말 운이 좋은 것처럼 들릴 수 있었지만, 사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테어도어의 흡수에서 살아남은 것, 부분적으로나마 본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것 자체가 곧 실력이었다.
감히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영역.
허나, 멀린은 굳이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말해줘 봤자 눈앞의 존재는 이해하지 못할 거고, 또,그보다 먼저 물어봐야 할 사실이 있었기에.
“이 정도 논문이면 마탑에서 자넬 받아들일 거야. 레드카펫을 깔며.”
“그렇습니까?”
“그렇네. 다들 자존심 때문에 아둔해졌지만, 그렇다고 장님이 된 건 또 아니거든.”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하지만 의문이야. 네가 논문 하나 직접 건네주기 위해 이런 식으로 왔을 거 같지는 않거든……. 내게 다른 볼일이 있나?”
날카로운 질문에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 드리고 싶은 부탁……. 아뇨,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말씀드릴 거라……. 내 허락을 구하진 않는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감히, 어르신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요……. 일이 생겨 잠시 란다를 좀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란다를? 얼마나?”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 다. 잘 해결되면 며칠 만에 돌아올 수도 있고, 잘 해결 못 하면 오래 걸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물어볼 수 있겠나? 꽤 심각해 보이는데?”
멀린이 질문했고, 올리버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옷의 단추를 살짝 풀고는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던 가죽 가면을 벗어버렸다.
그와 함께 올리버의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의 모습이 말이다.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네가 얼음 땅에서 기절했을 때 벗겨봤거든.”
“그런데 아무 말씀하지 않으셨군요.”
“그런 건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매너라고 생각해서.”
그 말에 올리버는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했다.
“배려 감사합니다.”
“란다에서 비밀 한두 개 정도는 흔한 거니까……. 하지만, 지금 밝힐 줄은 예상 못 했군. 이유가 뭔가?”
"대답에 앞서 먼저 절 정식으로 소개해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게 순서인 것 같아서요.”
멀린이 손짓으로 허락해줬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제 이름은 데이브가 아닌, 올리버라고 합니다. 고아원의 고아이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광산에서 일하던 일꾼이었습니다.”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멀린이 멀끔한 올리버의 모습을 보며 말했다. 품위마저 느껴졌다.
“제게 도움을 주신 분들이 있거든요.”
올리버는 그와 함께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했다.
조셉에게 거둬지고, 그곳에서 마리의 도움을 받아 글을 익히며, 성기사 요안나를 만나 세상 밖으로 나와, 캔트라는 존재를 만나며, 포레스트를 소개받은 이야기를 말이다.
그 어떠한 각색도 없이 있는 그대로.
처음인 것 같았다. 란다에서 데이브가 아닌 올리버로서 자신을 이야기한 것은.
“……그리고 어르신도 만나게 됐죠.”
“흥미로운 이야기구만. 특히, 악마가 너에게 인사하고, 널 신으로 모시는 사이비 종교단체가 있다는 게 가장 흥미로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내 추측에 의하면 지금 란다를 떠나겠다는 것도 그것과 관련 있을 거 같고.”
"맞습니다.”
올리버가 순순히 인정하며, 에디스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멀린에게 설명했다.
파테르교에 의해 마리와 마리가 세운 교단이 위기에 처했다는.
정신이 아득해질 이야기였으나, 멀린은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들을 구하러 갈 생각인가?”
"아뇨, 구한다……. 그런 거창한 건 아닙니다. 조금 도와주러 가는 것뿐입니다.”
"말장난이군……. 여하튼, 좋아. 그럼, 왜 도와주려는 건가?”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솔직히 말해줘. 진짜 궁금하거든.”
"그렇다 할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신경 쓰이고, 도와주고 싶어서입니다.”
"미안하지만,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안 미안하셔도 됩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거든요. 왜 제가 저들을 도와주려는 건지요……. 로스번 때와 비슷한 기분입니다.”
"로스번?”
"예……. 아, 참 그 저번에 로스번과 아이들이 준 편지 있잖습니까? 일이 있어서 먼저 읽었습니다. 깜빡하고 이제야 말씀드리네요. 죄송합니다."
"음……. 못 참아서 읽은 건가?”
“예, 일이 좀 있었거든요, 안 읽었으면……."
올리버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허공에 손을 들어다 놨다 했다.
마치 속마음을 설명 못 하는 아이와 같은 제스처.
멀린은 그 모습에서 아이의 미숙함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그럼, 됐어. 약속한 거니.”
“감사합니다……. 어쨌건 로스번 때와 비슷합니다. 솔직히, 제가 로스번을 도와주러 갈 구체적인 이유는 없었잖습니까?”
멀린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마텔은 생명학파 휘하의 거대한 기관. 그 힘과 영향력은 개인의 그것과 결코 비교할 수 없었다.
죄 없는 아이가 부당하게 끌려가 비참한 실험 끝에 죽는 걸 안다 해도 대부분 사람은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다고 세상 그 누가 감히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외면하는 것이 정상이었고, 상식이었다. 란다에서는 특히.
"그런데도 자넨 구하러 갔지?”
“그냥 모르는 척하면 계속 떠오를 것 같아서요. 밥을 먹을 때나, 잠자기 전, 연구하거나 공부할 때 이따금씩요. 그건 좀 뭐랄까……. 짜증 날 거 같아서요.”
“그래서 자네가 원치도 않는데 숭배하는 이들을 도와주러 가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멀린은 올리버를 빤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는 반대하고 싶군. 이건 로스번 때와 경우가 달라. 파테르교가 하는 건 엄밀히 말하면 옳은 일이거든.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제가 건네받은 자료에 따르면 선택받은 사람들에서 크게 문제 되는 범법행위는 없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마찬가지야. 파테르교는 인간계를 지키는 방패. 수상쩍은 사이비 종교를 때려잡는 건 의무이자 권리야.”
"거기에 관해 나름대로 협상안을 생각해 봤습니다.”
“무슨 협상안인지는 모르겠지만, 통하지 않을 거고. 돕는 순간 자네 역시 무사하기 힘들 거라 장담하네. 지금에 와서 다소 위세가 꺾이긴 했지만, 파테르교는 인류를 지키는 방패. 그들을 정면에서 대적하는 순간 자넨 악으로 찍힐 거야.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나?”
“글쎄요?”
“자네가 란다에서 쌓은 모든 것과 앞으로 누릴 권리를 잃는다는 걸 뜻하네. 자네의 명성과 신용, 인간관계, 마탑을 통해 배울 수 있는 무수한 배움을 기회를 말이야……. 아깝지 않나?”
“아까울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운 좋게 타고난 재능 덕분에 쌓은 것들인데요.”
“올리버-”
“-아뇨, 어르신. 겸손도, 아무 생각도 없이 하는 말도 아닙니다. 전 정말 운 좋게 재능이란 축복을 받은 별거 아닌 인간이거든요.”
올리버의 목소리에 진지함이 깃들어 있었다. 멀린 마저 무시하지 못할 진지함이.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 그리 말하는 건가?”
“음……. 제가 광산에서 일할때, 한 아이가 굶어 죽은 적이 있습니다. 눈과 뺨은 움푹 들어가고, 얼굴은 창백해지며, 갈비뼈가 드러난 채, 팔목과 손목은 막대기처럼 가느다랗게 변해서요. 당시 저와 비슷한 나잇대였죠.”
"이유가 뭐지?”
“별거 아닙니다. 일하다 다쳐 일을 못 하는 상태가 됐거든요.”
"......."
“일을 못 하니, 밥을 못 받고, 밥을 못 먹으니, 회복이 안 돼 또 일을 못 해서 결국 굶어 죽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먹을 걸 조금씩 나눠주면 나아졌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도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식사로 나오는 감자 수프가 너무 묽어서 혼자 먹기도 부족했거든요. 그리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잠자리 위치 때문에 늘 옆에서 굶는 걸 봤지만, 전 한 숟가락도 나눠주지 않고 혼자 다 먹었습니다. 배가 고팠고, 살고 싶었거든요.”
멀린은 이야기에 집중하며 올리버를 빤히 관찰했다.
분명, 올리버는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뭔가 미묘하게 변한것 같았다. 뭐랄까. 아주, 아주……
“원래는 잊었던 일이었습니다. 굶어 죽은 그 애요. 전 당시 힘이 없고, 배가 고팠으며, 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아르크 고아원 원장님께서 하신 말씀 때문에 근래 다시 떠올렸습니다.”
“무슨 말을 들었나?”
“제가 자신에게 실망하고, 용서하지 않는 분위기를 풍긴다고요……. 전 잘 모르겠지만요. 제가 수프를 나눠 주지 않는 건 죄일까요?”
“그런 것까지 죄라 한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겠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신경 쓰이네요. 기분도 이상하고요.”
올리버가 다시 속마음을 설명하지 못하는 아이와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서 도와주려는 겁니다. 지금 안 도와주면 또 계속 신경 쓰일 것 같아서요.”
“……그래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군.”
“어째서지요?”
“저번에 말했듯이 내가 널 거두고 보호하는 건 세상 바깥존재인 이유도 있어. 종말에 대비해 변수를 통제하기 위해 말이야.”
“압니다.”
“그런데 지금 네 행동은 그런 내 선택을 흔들려고 하는 짓이야. 변수가 되려고 하는 거지.”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그냥 저니까요.”
“……? 무슨 말인가?”
“저도 좀 신경 쓰였거든요. 제가 세상 바깥 존재이고, 종말의 첫 줄을 시작했다는 거요……. 솔직히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제가 그런 특별한 존재라는 게 영 현실성도 없고, 잘 와닿지 않아서요. 혼란스러웠지요……. 그래도 논문도 버벅거렸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고, 잘 썼던데?”
“그건 며칠 동안 버벅거리던 걸 폐기하고, 몇 시간 만에 새로 쓴 거 거든요. 잡생각이 깔끔히 정리된 덕분입니다.”
“어떻게 정리됐지?”
“전 그냥 저라는 겁니다. 고아에 광산 노동자, 감자 수프를 혼자 먹고, 흑마법을 배우며, 이후, 해결사가 된 사람요……. 물론 농담을 못 한다는 건 인정하기 힘들지만, 여하튼 전 저라는 겁니다. 세상 바깥 존재도, 종말의 첫 줄을 시작한 존재가 아닌, 그냥 올리버이자, 데이브이자, 제논요. 그게 접니다.”
올리버의 목소리는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시원한 분위기 마저 풍겼다.
“그리고 마리를 돕고 싶다는 것도 접니다.”
“……정말 도우러 가고 싶은가 보군.”
“예."
“그럼, 내가 만약 막겠다고 하면 어쩔 거지? 아카이브는 종말을 막기 위한 존재이기도 하거든. 자네가 스스로 변수가 되려고 하면 나도 선택지가 없어.”
"일단, 보내달라고 정중히 부탁드려야지요. 결코, 우려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멀린이 허공에서 책을 꺼내 한쪽 손에 쥐었다. 그와 동시에 방대한 마력이 멀린과 올리버가 있는 공간을 장악했다.
완벽한 전투태세.
“그런데도 내가 싫다고 한다면?”
마력의 상태를 통해 멀린의 생각을 읽은 올리버가 답했다. 평소와 같이.
“그럼 싸워야죠.”
“자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뇨, 이기고 지는 건 두 번째 문제이지요.”
“첫 번째 문제는 뭔가?”
“제 선택이죠.”
< 366. 그런 놈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