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1. 호수의 약속 (1) >
마탑 케빈의 교수연구실.
올리버가 물었다.
“그럼, 데릭 씨와 펠릭스 씨를 비롯한 다른 학생분들은 괜찮은 겁니까?”
“글쎄……. 마력과 생명력을 흡수당해 몸은 쇠약해지고, 힘들게 쌓은 마력도 토막 났으니, 괜찮다는 건 조금 무리가 있지."
올리버가 아르크 고아원을 방문하는 사이 있었던 일을 설명해준 케빈이 말했다.
실제로 자신이 쌓은 성취가 사라지는 건 마법사에게 큰 비극이었기에 케빈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올리버는 마법사가 아니라 그런지 다르게 반응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목숨이 무사하다면 노력이야 다시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핏 듣기에는 남의 일이라고 속 편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올리버는 아는 케빈은 저게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아마, 본인이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도 저렇게 말했을 터였다.
케빈의 감정을 읽은 올리버가 물었다.
“혹시, 제가 말실수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네 말이 틀린 건 아니지. 거기서 목숨 건진 것 자체가 행운이니까……. 그래도 본인들 앞에선 그렇게 말하지 마. 속이 복잡할 테니.”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네 이야기를 해봐. 야렐리가 혼자 돌아와 말하길 거래하던 중개인을 만나러 갔다 하던데, 무슨 이야기를 나눴지?”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안 나눴습니다. 제가 여기 소속인 걸 어떻게 알게 됐는지 이야기해주며, 제가 계속 마탑에 있을 수 있는지 물어보고, 또 제 가치에 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네 가치?”
“예, 제 가치가 중견기업 정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올리버가 스스로 말하며 민망해했다.
그렇지 않은가? 분명, 자신은 몇 년 전만 해도 광산에서 일하던 고아인데, 지금에 와서는 중견기업과 맞먹는 가치를 가진 사람이라니……. 뭐랄까 실감이 안 됐다.
그러나 케빈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정확한 표현이네. 그 정도 급은 되겠지.”
“그렇게 생각합니까?”
올리버가 되묻자 케빈은 오히려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지. 내가 알기로 넌 이 도시 해결사 중 최고고, 인맥도 넓잖아?”
“제가요?”
"내가 저번에 뚱뚱하고 호색한 부자한테서 투자를 얻어 오라고 했던 거 기억나?”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크 빌리지에서 개최하는 학회에 참석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참석 못 하는 학생들을 위해 올리버는 케빈의 말을 따라 에디스를 찾아가 부탁했다.
올리버가 아는 뚱뚱하고 호색한 부자는 그 사람뿐이었기에.
“이 마탑에서 그렇게 투자를 받아올 인간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해? 보통 학생이나, 평마법사는 만나는 것조차 힘들고, 마스터라 해도 설득하는 데 엄청난 공을 들여야 해. 그럼에도 실패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지.”
“음……. 제가 부탁한 돈이 비교적 적어서 그런 건 아닐까요?”
“부자들의 재밌는 점이 뭔지 알아?”
“글쎄요?”
“본인 허영과 쾌락을 위해서라면 돈을 물 쓰듯이 써도, 투자는 동전 하나 깐깐하게 따진다는 거야.”
올리버가 이해가 되지 않아 잠시 침묵했다.
“……수전노라는 뜻입니까?”
"아니, 그만큼 투자는 허투루 안 한다는 뜻이야. 푼돈이라고 쉽게 썼으면 애당초 그 자리에 있지 못했을 테니. 그만큼 투자받는 건 어렵다는 거야.”
“아, 그렇군요.”
올리버의 반응에 케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러웠다.
단순히 겸손한 걸 넘는 무언가가 느껴질 정도였다.
세상이 인식하는 자신과 본인이 인식하는 자신이 차이가 있는 법이었지만, 올리버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하고 특이했다.
보통은 세상이 평가하는 것보다 자신을 조금 더 과대평가하는 법이었는데, 올리버는 그 반대였고, 정도는 비상식적일 정도로 심했다.
단순히 겸손한 걸 넘는 수준.
이에 관해 물으려는 찰나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아, 야렐리 씨는 괜찮으십니까?”
“뭐?”
“야렐리 씨요. 제가 부탁해서 혼자 오셨는데, 혼나시진 않으셨습니까?”
올리버가 감정적으로 할머니에게 종속된 야렐리를 떠올리며 물었다.
올리버의 부탁을 들어주고 그로 인해 혼난다면 미안했기에.
“그 아이는 혼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갑자기 연구실 한쪽에서 멀린이 나타나 말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케빈과 올리버가 고개를 휙 돌렸다.
케빈이 말했다.
“스승님……. 이제는 숨어다닐 필요도 없는데, 왜 또 그렇게 나타나신 겁니까.”
“케빈.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스승은 언제 어디서든 느닷없이 나타나 제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권리가 있다고. 난 내 권리를 행사한 것뿐이네. 재밌거든.”
올리버가 눈에 신경을 집중했다.
두터운 마력벽으로 인해 멀린의 감정을 읽을 순 없었으나, 올리버는 그가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멀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건, 야렐리는 딱히 혼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 일이 많아 크게 혼낼 틈도 없었거든.”
“그렇습니까?”
“그래. 생명학파를 어찌할지 논하고, 향후 검은손과 어찌 대응할지 등. 의논할 게 많았거든.”
“아, 그건 저도 궁금하군요. 어떻게 됐습니까?”
케빈이 질문했다.
“생명학파는 해체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일단, 테어도어에게 협력한 자들을 색출하고, 학파로서의 권한을 제안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네. 일의 사안이 심각하긴 하지만 생명학파의 기존 가치와 이해관계가 너무 크고 복잡해서 말이야.”
올리버는 한순간 아쉬워하면서도 납득하는 케빈의 감정을 읽었다.
케빈은 생명학파에 대한 원한과 별개로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납득하는 것 같았다.
하긴, 생명학파는 의료와 군사 등. 다양한 범위에서 활약했으니.
“그럼, 생명학파는 이제 누가 관리하기로 했습니까? 이런 사건이 터졌다지만, 그 거대한 학파가 해체되지 않고 유지되면 통제하기가 어려울 텐데요.”
실로,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처음 생명학파를 해체하자고 말한 이들 역시 그러한 이유로 인해 생명학파의 해체를 주장했다.
그 정도 규모와 자본, 기술을 가진 학파를 내버려 두면 곧 힘을 회복할 테니 말이다. 물론, 생명학파의 기술이 탐난 것도 있지만.
“그래서 내가 맡기로 했네.”
멀린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자신을 가리켰다.
올리버와 케빈은 둘 다 놀랬으나, 차이가 있다면 케빈은 곧바로 납득했다는 점이었다.
“……합리적인 선택이군요. 스승님이 가면 확실히 통제하겠지요.”
복잡하면서도 담담한 케빈의 태도. 그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뒤로 미루며 다음 질문을 했다.
“검은손과는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검은손 인육 요리사 계파와는 전쟁을 선포하기로 했네.”
“전쟁 말씀입니까?”
“그래, 이런 일까지 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니까. 바다 건너에 있어 까다롭긴 하지만, 그나마 나은 경우지.”
“왜 그렇죠?”
가만히 듣던 올리버가 질문했다. 바다 건너 있는 적이면 몹시도 까다로울 것 같았는데.
그 때문에 크라임 펌이 경매장을 대놓고 습격당했음에도 침묵한 거였고.
“손가락 중 그나마 근거지가 확실한 건 인육 요리사 계파거든. 퍼펫은 너무 광범위한 점조직이고, 영원한 아이 팬의 근거지는 아무도 모르지, 피리 부는 사나이는 근거지 없이 떠돌아다니기만 하고. 그에 비하면 인육 요리사는 그나마 괜찮은 편이야. 갈로스 내부에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
케빈이 말을 보탰다.
“또, 거대한 범죄 제국을 설립했으니. 쌓은 게 아까워서라도 쉽게 도망치진 못하겠지……. 그래도 쉽겠습니까? 마탑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건 란다 내인데요. 하물며 바다건너 외국은……."
“그래서 란다 시(市)와 중앙의회, 거기에 파테르교와도 협력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어. 사안이 사안이니 그들도 협력할 수밖에 없겠지.”
“말 되는군요……. 그럼, 마지막 질문. 이 녀석은 어떻게 하기로 했죠?”
케빈이 올리버를 가리키며 질문했다. 올리버의 마탑 처우에 관해 묻는 것으로, 멀린이 이 역시 대답해줬다.
“잡음이 있긴 했지만, 조건부로 남겨두기로 했네……. 제논. 자네 논문 하나 쓸 수 있나?”
“논문요? 쓰라면 쓸 수는 있습니다만,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요?”
"설명하자면 말이 좀 길어지는데, 자네 논문을 보고 괜찮은 수준이면 마탑에 정식으로 소속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왔거든. 다른 마법사들과 학생들을 생각해 말이야. 아주 틀린 말 같지는 않아 받아들였네.”
멀린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으나, 실상은 꽤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마탑 마법사들이 인정할 정도의 수준의 논문을 쓰는 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으니.
매년 수백 수천 편의 논문이 나오건만 그중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는 건 극소수.
그러나 케빈과 올리버는 그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케빈은 올리버의 실력을 믿어서였고, 올리버는 별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케빈이 질문했다.
“논문 쓸만한 소재 있나?”
“글쎄요? 저도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어르신. 혹시, 생명학파의 의료기술 중 절단된 신체나, 장기 등을 골렘 의지(義版)가 아닌 진짜 피와 살점으로 복구하는 기술이 있습니까?”
심상치 않은 질문. 멀리과 케빈이 서로를 바라봤다.
"아직 그 정도 기술까지는 없지. 그건 창조에 가까운 영역이니.”
“왠지 가능할 것 같은데, 그 이론을 논문으로 써도 되겠습니까?”
멀린과 케빈이 다시 서로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케빈이 종이와 펜을 손수 가져와 올리버 앞에 내려놓았다.
"어디 한번 설명해봐."
올리버는 시키는 대로 설명을 시작했다.
올리버가 말한 논문 주제의 핵심은 시술 대상자의 소량의 살점과 뼈를 핵(核) 삼아 이를 바탕으로 다른 뼈와 살점을 재료로 더해 온전한 팔다리, 장기를 만든다는 거였다.
“여기서는 혈마법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올리버가 종이 위에 수조를 그리며 말했다.
"생명력을 응축시킨 피 수조 안에 핵이 되는 뼈와 살점을 넣어 활성화하고, 다른 피와 살점을 조금씩 덧붙여 장기, 혹은 신체를 재구성 겁니다. 시간이 다소 걸리고, 많은 자원이 소모되지만,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온전한 신체와 장기를 만들 수 있죠.”
올리버가 설명을 위해 그린 그림과 술식을 본 케빈과 멀린은 잠시 생각했다.
얼핏 보기에 제법 그럴듯했다.
“핵이 되는 뼈와 살점에 조금씩 다른 뼈와 살점을 뒤섞어 성질 변화를 시키는 건 이해가 되는데, 두 개의 세포를 합치는 정밀한 작업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수조 안에 든 피가 오염되면 말짱 도루묵인데?”
올리버가 대답 대신 허공에 마력을 퍼트려 마법진을 구축한 다음, 테어도어의 마법인 ‘프타스 어시스턴트(Ptah's Assistant)’를 발동시켰다.
마력으로 이뤄진 기계 손은 척 봐도 매우 섬세해 어떠한 복잡한 작업도 가능해 보였다.
“이 손이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매우 섬세해서요.”
이 마법으로 자신의 신체를 수복한 테어도어를 기억하는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마법을 이용해 피와 살점을 활성화하며, 성질 변화를 시도하는 와중 프타스 어시스턴트로 세포를 하나로 합치면 새로운 신체를 만드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해 보였다
설명을 다 들은 케빈이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겠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지?”
“필립 중장님 골렘 의수를 보강해주고 나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은 실험이 있었는데, 여기 써먹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고요.”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은 실험?”
“예, 같은 방식으로 송장인형에 강력한 유전자가 깃든 세포를 이식해 강화할 수 있을까 해서요……. 아, 맞다. 어르신.”
올리버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어르신 서재를 좀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참고해야 할 자료가 생명학파 쪽에 있는데, 제가 거기 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어르신 서재에서 해당 서적과 논문이 있었는데, 그걸 좀 참고하고 싶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여쭤보고 싶은 것도 있고요.”
“여쭤보고 싶은 거?”
“예, 저번에 약속하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