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9. 처우 (1) >
“정확히는 스카우트 제안서에 가깝지.”
포레스트가 그리 말했다.
어쩌면 틀린 말이 아닐지도.
종이에 쓰인 내용은 크라임 펌을 포함한 란다 기업들의 계약서이긴 했지만, 정확히 주고받는 계약서가 아닌 일방적으로 퍼주는 계약서였다.
일종의 백지수표.
"전 회계나 재무는 모르는데, 왜 갑자기 회계사나, 재무이사로 고용하겠다는 겁니까?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액수를 쓰면서요.”
올리버가 서류에 적힌 내용을 순식간에 읽으며 물었다. 참고로 제안한 쪽은 크라임 펌 이사들이 운영하는 회사뿐 아니라, 란다에서 유명한 기업도 몇몇 보였다.
“빨리 읽는군.”
“마탑에서 일할 때 서류 업무를 하다 보니 눈에 좀 익은 것 같습니다……. 포레스트 님께서 잘 가르쳐주시기도 했고요.”
포레스트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파이터 크루를 포레스트가 관리하는 과정에서 올리버가 도와주겠다며 서류 작업 기초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때는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는데, 이제는 알 거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상당히 교묘했다.
“그런데도 얄밉지가 않군.”
“예?”
“아닐세……. 일단, 대답부터 해주자면 자넬 정말 회계사나 재무이사로 고용할 생각은 아니야.”
“그럼 뭐죠?”
"그냥 형식상의 직위지. 실제 업무는 자네 이름값을 빌려주고, 저쪽에서 요청할 때 움직여 주는 거야. 셰이머스와 비슷한 거라 생각하게."
셰이머스. 이 이름을 듣자 올리버는 그제야 이해했다.
크라임 펌 뿐 아니라, 양지의 사업체 역시 폭력이 필요할때가 있었으니.
“마탑이 시(市)에 보고서를 제출한 후, 일부 굵직굵직한 사람들이 자네 이야기를 알게 됐어. 해결사 데이브가 사실 마탑 소속이라고.”
“이렇게 짧은 시간에요?”
올리버가 시(市)의 보안이 이리 허술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곧 포레스트가 답을 줬다.
“아마 시의원들 쪽에서 새어나간 걸 거야. 모두 보고서를 봤고, 저번 ABC건에서 활약한 자네를 기억하고 있을 테니. 그들 모두 커넥션을 가지고 있고…….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왜 란다에 비밀이 많으면서도 없다는지 알겠네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나요? 제가 마탑 소속인 걸?”
“란다 사람. 특히, 이쪽 사람들은 이치(理致)보다는 이문(利益)에 더 관심이 많아. 비행선 정거장에서 사고가 나면 사람을 구하기보다 해당 비행사 주식을 공매도 때리지. 그들은 자네가 마탑에 어떤 경우로 소속됐는지보다, 소속 자체에 가치를 두고 있어.”
“아……."
너무나도 란다다우면서도, 설득력 있는 말이라 올리버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사실, 반은 농담이고, 보고서 자세히 읽어보면 자네에 대한 설명도 첨부되어 있어. 마탑에서 특별 실험체라고 자넬 소개했더군. 흑마법사지만, 마법사로 바꿔 키운 실험체라고. 난 믿지 않지만.”
올리버는 파일을 다시 훑어봤다. 포레스트의 말대로 뒷장에 해당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올리버가 흑마법사였지만, 실험체로 거둬 마법사로 만들었다고 말이다.
‘상관없으려나? 어르신이 하신 말씀과 거의 일치하니.’
올리버가 생각하곤 질문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믿나요?”
“안 믿을 건 또 뭔가? 마탑에서 스스로 그렇다 하는데. 복잡해 보이지만, 그렇게 복잡하지도 않아. 중요한 건 자네가 가장 주가를 올리는 해결사인 동시에 마탑 소속이라는 거니. 그래서 크라임 펌을 비롯한 란다 내 여러 기업이 자넬 정식으로 스카우트하려는 거고. 얼마를 쏟아붓든 그 이상은 뽑아낼 수 있을 거라 판단해 말이야.”
“음……. 혹시, 포레스트 님께선 제가 이 중 하나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 내가 자네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그럴 리가 있겠나? 그 계약서를 보여준 건 지금 자네 가치를 설명해주기 위해서야.”
“제 가치요?”
"그래. 자넨 이제부터 걸어 다니는 중견기업이라 할 수 있거든.”
“어…….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이 아니라 사실이야. 내 말을 안 믿는 눈치군.”
“안 믿는다기보다는 와 닿지 않아서요.”
올리버가 말했고, 진심이었다.
올리버는 기이할 정도로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자신의 이룩한 성과도 잘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했다.
포레스트 역시 올리버와 같이 일하며 그 성향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답답해하는 대신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자네 가치가 중견기업이라 한 이유는 네 가지가 있네. 설명해 줄 테니 잘 듣게.”
“예, 알겠습니다.”
“일단, 자넨 해결사에게 필수인 경력과 무력, 신용 모두 만점이야. 임무에 실패한 적이 없고, 셰이머스를 혼자서 쓰러뜨렸으며, 3조 1302억 5500만 란다를 꿀꺽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거든.”
“ABC건 말씀입니까? 제 돈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대단하다는 거야. 솔직히 대단하다기보다는 미친 거지. 3조가 넘는 돈인데, 내 거인지, 남의 것인지 뭐가 중요하나?”
“아……."
“두 번째는 파이터 크루 때문이야.”
"파이터 크루요?”
“자네답게 이 일을 인지 못 하는 거 같은데. 파이터 크루 건도 현재 이 바닥에서 소문이 자자해.”
“뭐 때문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포레스트가 양손 검지를 치켜세웠다.
“자네가 파이터 크루를 다 설득하고, 크라임 펌과 담판을 벌여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며, 파이터 크루의 실력을 급속도로 높인 것 모두 말이야. 특히, 파이터 크루의 실력을 키운 게 가장 큰 요인이야.”
실로 그랬다. 올리버가 맡기 전에도 파이터 크루의 명성은 높은 편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뒷골목 갱 수준.
그러나 올리버가 크라임 펌과 계약을 통해 파이터 크루를 맡은 후부터 그러한 평가는 서서히 변하더니, 현재에 이르러는 완전히 바뀌었다.
뒷골목 건달들에서 핑크맨과 같은 프로페셔널한 무력집단으로 말이다.
“과장된 게 아닐까요?”
“아니, 나도 해당 평가에 어느 정도 동의해. 일단, 조직원 하나하나의 실력이 월등히 높아졌고, 전투에 관한 조직력도 훨씬 높아졌거든. 어지간한 용병대는 감히 명함도 내놓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올리버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일에 관해서는 믿을 수 있는 포레스트가 진심으로 말했기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저들을 어떻게 훈련한 건가? 자네가 훈련시킨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예상 이상이라서……. 무슨, 마법이라도 부렸나?”
“마법은 아니고, 순수마력학파 도서관에 있는 종군 마법사 훈련 및 부대 관리, 전술 교본. 그리고 제 경험을 참고해 훈련해봤을 뿐입니다……. 효과가 있다니 다행이네요.”
마치 운이 좋았다는 식으로 올리버가 말했다. 듣는 포레스트로서는 어이가 없었다.
강력한 조직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이 강한 것 이상을 의미했다.
그저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하수인에서, 스스로가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즉, 신분 상승이 가능하다는 이야기.
그런데 정작 올리버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어쩌면 저런 성격이라서 이렇게 될 수 있는 걸지도. 만족이라는 걸 모르니. 어떤 의미로는 누구보다 탐욕스럽다고 할수 있군.’
포레스트는 눈앞의 상황에 다시 집중했다.
“어쨌건 조직을 키울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거야. 규칙에 위반돼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크라임 펌의 이사 중 몇몇이 자네에게 자기 조직원을 맡기려고 했거든. 파이터 크루처럼 키워달라고.”
“그렇습니까?”
“그래. 자네와의 계약과 크라임 펌 협력 체계에 악영향만 미치기에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조직을 키울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대단한 능력이야. 본인이 강한 것 이상으로 말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세 번째 이유는 뭐죠?”
“마탑이라는 간판이야. 실효성이 있는 간판인지 아닌지는 나중 문제고, 일단, 간판은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거든. 양지의 기업이 자네에게 접근 한 결정적 이유고.”
“그렇군요. 마지막 네 번째는 뭐죠?”
"아까 전 자네가 말했지? 마탑에서 개인적으로 공부한 게 원소학파 마법 전반, 순수마력학파 마법 전반, 종군 마법사를 위한 훈련 및 부대 관리, 세계수 관련 서적, 약초학 이론에 골렘과 골렘 의지(義版) 분야라고?”
“예."
“어느 정도 익혔나? 실제로 사용 가능하고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인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기초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올리버가 곰곰이 생각하다 대답했다. 사실, 약초학과 골렘 쪽은 좀 더 공부가 필요했지만, 테어도어의 지식 일부를 얻은 덕분에 어느 정도까지는 괜찮을 것 같았다.
올리버의 대답을 들은 포레스트는 손뼉을 쳤다. 자신의 추측이 정답이란 걸 확인했기에.
“그게 가장 결정적인 이유야. 마탑의 귀중한 지식을 배웠으니까. 그런 지식은 아는 것만으로 재산이지.”
“칭찬은 감사하지만, 해당 학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신 마법사들께 비하면 그리 대단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리고 마탑에서 나온 마법사들도 그 수가 상당히 되는 편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실제로 마탑에서 떨어져 나온 마법사들을 여러 기업과 자본가들이 거둬들여 자체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니……. 하지만, 자네는 또 경우가 다르지. 이미 자넨 스스로 자기 능력을 증명했으니까.”
“절 너무 높이 평가하시는 것 같은데요?”
"내 생각이 틀리면, 아쉬운 거니, 자네가 걱정할 건 아니지……. 그보다 마탑에는 계속 있을 수 있을 것 같나? 아는 게 없으니 판단이 안 되는군.”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저도 아는 게 없습니다. 다만, 한 분께서 말씀하시길 규정상으로는 제가 나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안 나가도 되겠군.”
“예?”
“규정이란 건 평화로울 때나 통하는 거니까. 아무 생각 없이 관성대로 흘러가도 문제없을 때 말이야.”
“지금은 아니라는 겁니까?”
“당연히 아니지. 마탑에서 가장 큰 명성을 떨치던 생명학파가 사실상 공중분해 돼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가 된 데다. 늘 수면 아래에서 활동하던 검은손이 공식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평화와 거리가 있지.”
그 평화와 거리가 있던 곳 한가운데 있던 올리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관성대로 처리하기는 문제가 있는 사안이었다.
“운이 따른다면 자넨 마탑에 계속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걱정이구만.”
“무엇이 말씀입니까?”
"정식으로 자네가 마탑 소속이 되면, 해결사 일을 하는데 제약이 따를 테니까. 마탑은 규율이 꽤 엄격하거든.”
“그럼, 그만두면 되죠.”
올리버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아쉽긴 했지만, 애당초 그런 각오로 들어간 곳이었으니까.
***
"......자, 그럼, 이 일은 일단 이렇게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마탑의 행정타워 회의실. 한 남자가 말했다.
그의 주변에는 원소학파와 순수마력학파, 모이라이 학파, 연금술 학파, 공간학파, 골렘학파, 마법 기계공학파 등등. 생명학파를 제외한 마탑의 모든 그랜드 마스터(Grand Master)와 원마스터(One Master)가 모여 있었다.
“이번 레이크 빌리지에서 일어난 사건은 마탑을 위협하는 1급 사안으로 분류. 외부와의 공조는 물론, 자체적인 수사망을 가동하며, 이번 사건의 주축인 검은손 인육 요리사 계파와 사실상 전쟁을 선포하도록 하겠습니다.”
각 학파의 수장은 물론 행정부의 수장 역시 침묵으로 동의했다.
이런 사건이 벌어졌으니 좋든 싫든 검은손 인육 요리사 계파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재 생명학파는 수사를 통해 전(前) 그랜드 마스터 테어도어 브란트와 관련된 모든 이들을 색출하며, 학파의 그 권한을 제한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침묵하며 동의했다. 아무리 죽음이 두렵기로서 흑마법사의 꼬드김에 넘어간 배신자를 용서할 수 없었기에.
“단, 생명학파는 해산하지 않고, 새로운 생명학파가 질서를 잡을 때까지……. 아카이브 멀린 님께서 맡기로 하겠습니다. 반대 의견 가지신 분들 있으십니까?”
남자의 질문에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현재 회의실에 있는 자들 모두 마탑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거물들이었지만,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멀린은 그 이상의 존재였기에.
애당초 아카이브란 그런 존재.
반대 의견이 나오지 않자 남자가 회의를 끝마치려 했다.
“그럼, 이번 회의는 여기서-”
“-잠깐.”
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고 싶은 이야기가 있네. 제논……. 아니, 데이브에 관해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