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8. 귀국 (2) >
“규정상 저도 따라가는 게 맞는데 아쉽네요.”
비행선 정거장에 밖으로 나온 야렐리가 말했다.
란다의 비행선 정거장은 쌩또르메처럼 도시 외곽에 있었지만, 모든 구역의 밀집도가 높은 란다 특성에 걸맞게 주변은 북적북적했다.
특히, 택시를 타려고 길게 선 줄이나, 그들을 태우려는 택시 행렬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올리버가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저도 야렐리 씨와 같이 가고 싶지만, 이건 해결사 데이브로서 일이며 또 저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서요.”
올리버의 말은 진심이었다. 정말 올리버 혼자만의 문제면 야렐리도 데려갈 생각이었다.
멀린을 비롯한 올리버의 편의를 봐준 마탑 관계자들을 위해서라도.
허나, 지금 가는 건 포레스트의 호출 때문. 멋대로 야렐리를 데리고 가는 건 포레스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특히, 내가 마탑 관계자라고 알려진 상황에선……. 근데, 어떻게 알게 된 거지?’
올리버가 생각했다. 어디서 알려졌는지는 대충 예상됐지만, 전해진 디테일한 배경과 방법은 역시나 의문이었다.
일주일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뭐, 가보면 알게 될 테지…….'
“제가 거기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마탑에 전부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더 제 사정을 봐주실 수 없겠습니까? 야렐리 씨. 부탁드리겠습니다.”
올리버가 다시 한번 진지하게 부탁하자, 야렐리는 작게 숨을 내뱉고는 확인차 물었다.
“전부요?”
“……대부분요. 전부는 저도 장담할 수 없네요. 마탑에 말하기 곤란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으니까요.”
야렐리가 두꺼운 안경 너머로 경멸의 빛을 띠었다.
고아원 저녁 식사때처럼. 그때 왜 그랬는지 물어봤지만, 야렐리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이유가 뭐였을까.......'
“하아…….'
야렐리가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그녀답지 않은 모습. 정신적으로 많이 피곤해 보였다.
“알았어요……. 일단, 저 먼저 마탑으로 가서 말해놓을게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럼, 택시 잡는 걸-”
“-택시는 제가 알아서 잡고 갈게요.”
“아…….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천사의 집 분들은-”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야렐리는 진심이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뭔지 물어볼까 싶었지만, 올리버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 눈앞의 일이 급했기에.
그리 판단한 올리버는 품 안에서 축소화한 차를 꺼내 도로 가장자리에 놓고 마법을 풀었다.
안쪽 주머니에 쏙 들어가던 크기의 자동차가 원래 크기로 되돌아왔으며, 주변을 지나던 수많은 사람이 모두 이쪽을 바라보며 놀라 웅성거렸다.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란다에는 마법사가 많았지만, 일반인이 자주 접할 수 있는 존재는 또 아니었으니.
야렐리는 그 시선을 느끼며 올리버를 빤히 바라봤다. 참으로 뭐라 해야 할지 모를 사람이었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예상치 못할 돌발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럼, 저 먼저 가도록 하겠습니다. 부탁 들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약속한 대로 볼일 끝나면 마탑으로 바로 오셔야 해요.”
“예, 알겠습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
“제 추측이 맞는지 모르겠는데, 야렐리 씨 눈이 예쁘다고 한 건 진심이었습니다. 눈이 정말 예쁘세요.”
"......."
"이거 아닌가요?”
"가세요.”
"예."
심상치 않은 기색에 올리버는 바로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이제는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직 수련이 더 필요한 듯했다.
“역시 어렵네.”
***
-딸랑.
레스토랑의 문을 열자 종소리가 울렸다.
몇 년이 지났지만 참으로 한결같은 소리. 허나, 한결같은 건 종소리만이 아니었다.
"오셨습니까? 데이브 씨. 이리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스토랑 문을 열자마자 종업원인 알이 나타나 여느 때처럼 맞이해 주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전보다 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는 것. 마치, 귀빈을 대하듯 했다.
올리버는 본능적으로 포레스트가 부른 이유와 알의 태도가 관계있을 거라 판단했다.
“예, 오랜만입니다. 알 씨.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늘 잘 지냅니다. 사장님께서 보살펴주셔서요.”
“포레스트 님은 저 때문에 곤란한 것 같던데요?”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 듯 알은 반응을 보였다.
“……문제인지 아닌지, 감히 제가 판단할 영역이 아닌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따라오시지요.”
올리버가 수락하자마자 알이 예의 바르게 안내했다.
딱- 딱- 딱-
올리버가 쿼터스태프로 바닥을 짚으며 알을 따라가자 규칙적인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맞춰 1층 홀에 있는 해결사, 정보상, 브로커뿐 아니라 2층 홀의 부유층들도 모두 올리버에게 시선을 던졌다.
다들 깊은 흥미를 보였는데,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와 비슷했지만, 동시에 뭔가 달랐다.
옛날에는 흥미와 탐욕 등. 해결사를 보는 시선이었지만, 지금은 단순히 그게 아니었다.
좀 더 존중과 감탄, 조심스런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마치, 도시의 엘리트를 보듯 말이다.
‘시(市) 공무원이나, 사업가, 마법사와 같은 엘리트…….'
“데이브 씨, 들어가시면 됩니다.”
어느새 도착한 사무실 앞. 알이 손수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알이 연 문틈 사이로 손때가 묻은 책상과 오래된 캐비닛, 서류 더미 그리고 언제나처럼 깔끔하고 멋진 복장을 한 포레스트가 서 있었다.
그가 올리버를 보며 말했다.
"와줘서 고맙네.”
***
쪼르르륵.
올리버가 맞은편 자리에 앉자 포레스트는 크리스털 잔에 양주를 따라 두꺼운 파일과 함께 올리버 앞에 건넸다.
올리버가 술을 마시려다 말고 도로 내려놓았다.
“포레스트 님. 죄송하지만, 물로 주실 수 있겠습니까?”
데이브가 이곳에서 볼일을 마치자마자 바로 마탑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 떠올리며 말했다. 포레스트는 기꺼이 술잔을 거둬가 물로 바꿔주었다.
“감사합니다. 물이 시원하군요.”
“귀한 손님에게 미지근한 물 따위를 대접할 수는 없지.”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파일은 뭐죠?”
“한번 읽어보게.”
포레스트가 파일을 정중히 가리키며 권했다. 올리버는 시키는 대로 파일을 열어 살펴봤고 곧 입을 열었다.
“……이걸로 제가 마탑 소속인지 알게 되셨군요.”
“그렇네. 나도 놀랐지만, 카버 씨도 많이 놀랐지. 확인하자마자 내게 이걸 가져와 알고 있었는지 물어볼 정도였으니 말이야.”
올리버는 다시 파일 안 마탑 보고서를 읽어 봤다.
바다 건너 레이크 빌리지(Lake Village)에서 일어났던 생명학파와 생명 연금술 학과의 배신을 다룬 보고서로, 해당 보고서에는 ‘마탑 교수 개인 직원 제논 브라이트 겸 해결사 데이브 라이트’라는 단어가 떡 하니 박혀 있었다.
심지어 붉은 잉크로 표시까지 되어 있었다.
“이미 확인됐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물어보지. 거기 보고서에 적혀 있는 ‘마탑 교수 개인 직원 제논 브라이트 겸 해결사 데이브 라이트’가 자네 맞나?”
“예, 저 맞습니다.”
올리버가 허무하리만치 쉽게 인정했다. 어차피 마탑에 들킨 마당인지라 굳이 부정할 이유도 없었기에.
그러나 뭔가 잘못됐는지 대답을 들은 포레스트는 평소 점잖은 모습과 다르게 웃기 시작했다. 그것도 주체가 안 되듯 폭소 수준으로 격렬하게.
"큭! 크크크크큭! 크흐흐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
연기가 아닌 진짜 웃음.
올리버는 예상치 못한 포레스트의 반응에 눈에 신경을 집중했다.
웃음처럼 포레스트의 감정 역시 꽤 복잡했다.
진심으로 웃긴 듯하면서도, 지금 상황에 적잖은 압박을 느끼고 있었고, 동시에 어이없는 감정과 믿기지 않는 감정 등. 제각기 다른 감정을 동시에 빛냈다.
올리버는 포레스트의 그런 반응에 적잖게 당황하며 물을 꼴깍꼴깍 마셨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포레스트가 웃음을 가라앉혔다.
“아……. 미안하네. 사람 앞에 놔두고 너무 웃었구만. 사과하겠네.”
포레스트는 곧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정중히 사과했다.
“아닙니다. 저도 잘못했으니까요……. 그보다 괜찮으십니까?”
“솔직히 신이 장난을 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이가 없긴 하네.”
"그렇습니까?”
“아, 오해하진 말게. 나쁜 의미로 말한게 아니니. 다만, 묘하지 않나? 난 자네가 단기간 내 너무 성장해 한동안 해결사 일 쉬라고 했는데, 그사이 자넨 더 거물이 되어버렸으니까. 난 그게 참으로 웃기네.”
“더 거물요?”
“ABC건을 해결하고 자넨 이미 거물이 되었네. 그 셰이머스를 혼자 힘으로 쓰러뜨렸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 이상이 되어버렸네……. 굳이 말하자면, 셰이머스 급에서, 데이브 급이 된 거지. 독자적인 존재가.”
뭔가 미묘한 설명. 그럼에도 대충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됐다.
역시, 포레스트. 설명하는 솜씨가 남달랐다.
“……왜 그렇게 된 거죠?”
“왜냐면 자넨 마탑 소속이니까.”
포레스트가 파일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전 일개 교수 개인 직원인데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사람들은 자세하고 복잡한 정보보다 그냥 눈에 띄는 간판에 더 집중하는 법이거든. 교수 개인 직원보다는 마탑이란 단어에 더 눈이 갈 수밖에 없어……. 심지어 그게 해결사로 주가를 올린 데이브 자네라면 더욱이 말이야.”
청산유수와 같은 설명에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물어보지 않으실 겁니까?”
“무엇을?”
“제가 어떻게 마탑에 들어갔는지 말입니다. 물론,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요.”
포레스트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올리버를 빤히 바라봤다.
올리버가 정보를 숨겼음에도 그에 대한 분노나 배신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솔직히 말해 궁금하긴 하지. 안 궁금하면 내가 미친놈 아니겠나?”
“아, 저 그게……."
“-아, 아. 그렇다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네.”
포레스트가 손을 들어 올리버의 말을 가로막았다. 거짓이 아닌 진심이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물론이네. 애당초 이 바닥에서 평범한 배경을 가진 인간이 얼마나 있겠나? 신용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건 일에 대한 신용이지. 그 외 자잘한 것 까지는 아니야. 그거까지 따지기 시작하면 이 시장은 성립할 수 없네.”
흑마법사로 알려진 데이브가 마탑 소속이라는 건 결코 자잘한 게 아니지만, 포레스트는 그리 말했다.
사업을 위한 것도 맞지만, 올리버를 배려하려는 조치이기도 했다.
“뭣보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 간직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법이지 않나? ……물론, 자넨 나한테 까보라고 했지만.”
“아……. 죄송합니다.”
“농담일세. 어쨌건 요점은 굳이 무리해가며 내게 설명 안 해도 된다는 거네. 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말이야.”
“배려 감사합니다.”
“다만, 한 가지만 대답해 줄 수 있겠나? 잘난 척 떠든 직후 이런 말 하기 창피하긴 하지만 궁금하거든.”
“괜찮습니다. 뭐가 궁금하신지요?”
“자네 마탑에 완전히 소속된 건가? 마탑이 자넬 보호해 줄 정도로 말이야.”
올리버는 포레스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곧 깨달았다.
과거, 그는 올리버에게 조직에 가입할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위상이 더 올라간 덕분에 도시의 잡어(雜魚)뿐 아니라 대어(大魚)들까지 올리버를 이용하거나, 적대할수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가장 좋은 건 조직에 소속되는 거라고 말씀하셨지.’
올리버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전 마탑의 정식 소속이라기보다는 그 정식 소속의 비품 같은 거라서요.”
“비품?”
“예, 교수 개인 직원은 일종의 비품이라서요. 사람으로 치지도 않습니다.”
“끔찍한 말은 너무 무감각하게 하는군.”
“아, 오해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전 개인적으로 제 위치가 마음에 들거든요.”
“그런가?”
“예. 노동시간도 짧고, 업무 강도도 높지 않으며, 일에 비해 급여도 좋고, 추가 수당도 잘 나와서요."
"그건 좀 부럽군.”
“또 시간이 날 때는 수업을 청강할 수 있고, 도서관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서요.”
그 말에 포레스트가 관심을 보였다.
“호오……. 도서관이라면 마탑도서관?”
“예.”
“무슨 책을 읽었나?”
“원소학파 마법 전반, 순수마력학파 마법 전반, 종군 마법사를 위한 훈련 및 부대 관리, 전술 교본과 세계수 관련 서적, 약초학 이론 등등. 여러 가지를 읽고 있습니다……. 요즘은 골렘과 골렘 의지(義版) 분야를 주로 읽고 있지만요.”
포레스트가 조용히 경악했다. 올리버가 말한 것 모두 마탑 내부에서만 배울 수 있는 고등학문이었다.
선택받은 자들만이 배울 수 있는.
포레스트는 전부 다 이해했냐고 물을 뻔했으나, 이내 질문을 삼켰다. 이미 답이 뭔지를 알 것 같았기에.
올리버가 포레스트의 감정을 꿰뚫어 보며 질문했다.
"혹시, 하고 싶으신 말씀 있으십니까?”
“그렇네. 자네에게 해줄 말이……. 다만, 이걸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이군. 음……. 일단, 이거 받아보게.”
포레스트가 캐비닛에서 커다란 갈색 종이봉투를 다수 꺼내 올리버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죠?”
“중요한 건 아니지만, 한번 꺼내서 읽어보게.”
올리버는 포레스트가 시키는 대로 봉투를 열어 안에 든 새하얗고 빳빳한 종이를 꺼내 보았다. 꽤 고급품 같았다.
“이건……. 계약서군요.”
“정확히는 스카우트 제안서에 가깝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