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0. 가보고 싶은 곳 (1) >
멀린의 설득에 따라 모두 올리버에 관한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고, 생명학파와 생명 연금술 학과의 배신에 관해 논의하기로 협의했다.
가장 급한 사안이기에.
협의가 되자마자 멀린은 올리버와 케빈에게 천막 밖으로 나가 있으라 했다.
중요한 문제니, 당장 논란이 있는 두 사람을 빠지는 게 좋겠다는 이유로.
애당초 그 논란을 만든 게 멀린이긴 했지만, 케빈은 따지지 않고 제자로서 예의를 갖춰 멀린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이곤 그 명에 따랐다.
올리버 역시 그 모습을 똑같이 흉내 내 인사하고 케빈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죄송합니다.”
올리버가 케빈의 뒤를 따라 천막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과했다.
사과한 이유는 정체를 들킨 것에 관한 것으로. 이미, 사과한 문제였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사과했다.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뭐가 됐건 도와준 케빈을 난감하게 한 셈이었으니.
정작 케빈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됐어. 이미 지난 일이고, 네가 정체가 드러나 좀 더 수월하게 대응한 것도 사실이니까.”
“그래도 죄송하네요……. 교수님 노력에 폐를 끼친 것 같아서요.”
어떠한 뜻이 있는 듯한 말에 케빈은 멈칫하더니 올리버를 슬쩍 보고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는 말없이 인적이 드문 곳을 향해 걸어갔다. 올리버를 데리고 말이다.
어느 정도 사람들과 거리가 벌어졌을 때 케빈은 손가락 끝에 마력을 모아 딱! 하고 튕겨 방음 마법을 펼쳤다.
“혹시 날 동정하는 건가?”
"동정요?”
“그래, 테어도어에게 내 과거 이야기 듣고 말이야.”
케빈은 지겹다는 감정과 약간의 언짢음을 빛냈다.
“잘……. 모르겠습니다. 동정이 어떤 건지 잘 몰라서요.”
보통 사람이 말했다면 조롱처럼 들릴 법한 발언. 허나, 케빈은 화내지 않았다.
올리버를 옆에서 봐왔기에 저게 진심인 걸 알았기에.
“다만, 교수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예. 개인적인 감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올리버가 당시 케빈의 감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케빈은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았고, 그 원한 역시 잊지 않았다.
그저 마음속 깊숙이 꼭꼭 숨겨 놨을 뿐. 잊기는커녕 오히려 더 독하게 숙성시키기까지 했다.
분명 그랬을진대, 그와 동시에 그는 엉망이 된 데릭과 펠릭스를 진심으로 구해주려고도 했다.
마탑 전체에 원한을 품고 있음에도, 그는 자신의 학생을 구해주려 했다.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모순된 감정. 허나, 케빈은 그러한 감정을 가졌고, 그 모순된 감정은 실로 예쁜 빛을 발했다.
이를 설명하자 케빈이 입을 열었다.
“난 감정에 휩쓸려 내 일도 하지 않을 바보가 아니거든.”
“압니다. 그래서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내 복수를 남의 손을 빌려 할 생각도 없어. 들어서 알고 있지?”
“예.”
올리버가 케빈과 테어도어의 대화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케빈이 멀린의 제자가 된 건, 스승이자 원수인 멀린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는데, 그뿐 아니라 당시 인체실험에 손을 담갔던 모든 마법사와 그 가족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가장 위대한 마법사가 돼서 말이다.
그건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뜨겁다 못해 독하기까지 한 케빈의 분노와 증오가 그 증거.
“그래서 난 내 일을 한 것뿐이야. 그날을 위해서 말이야. 그러니 내가 대단하다거나, 불쌍하다거나 함부로 재단하지 마. 난 그냥 내 계획대로 움직일 뿐이니까. 알아듣겠어?”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올리버는 케빈의 말에 탄성을 내며 사과했다.
확실히 올리버가 주제넘게 평가한 것일지도……. 케빈은 그저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인 거였으니.
‘그래도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올리버는 더 이상 해당 문제에 대해 발언하지 않기로 했다. 당사자인 케빈이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해당 문제에 관해 이야기가 얼추 끝나자 케빈은 다른 주제로 바로 넘어갔다.
“내가 루소에게 끌려가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을까? 아까 전 나눈 대화 얼추 들어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던 것 같은데 올리버는 곧바로 테어도어와의 전투 전반에 관해서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테어도어가 손자인 칼을 흡수하고, 이후 호수에서 싸우며, 테어도어를 쓰러뜨린 과정을 말이다.
‘테어도어 님이 내 몸을 잠식하려고 했던 건……. 말하지 말자.’
올리버가 일부 사실을 숨긴 채 혼자 힘으로 테어도어를 쓰러트렸다고 말하자 케빈은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몹시 놀랐다.
그도 그럴 게 테어도어는 마탑에서도 그 존재감이 남다른 존재였으니.
하지만 그레텔이 나왔을 때는 그것에 족히 몇 배는 놀랬다.
“인육 요리사 여동생이?!”
“예, 이름은 그레텔. 본인이 그렇게 설명했고, 감정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니 사실일 겁니다.”
“그러니까 생명 연금술 학과의 교환학생인 로즈 두 부아가 검은손의 손가락, 인육 요리사의 동생이라고?”
“예. 어르신께서도 아시고, 아마 저기서 논할 겁니다.”
케빈은 고개를 돌려 멀린이 있을 거대한 천막을 봤다.
“그거 참 놀라운 일이군.”
“저도 동감입니다. 로즈……. 아니, 그레텔 씨를 처음 만나 봤을 때부터 보통 사람이 아닌 걸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인육 요리사의 동생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그렇지. 예상치 못하지. 대부분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녀석들인데. 그래서 반쯤 도시 전설 취급하는 거고. 그런데 그걸 깬 거야.”
케빈은 뭔가 아는 듯이 말했다.
하긴 종군 마법사는 전쟁뿐 아니라, 흑마법사나 마력 사용자, 길바닥 마법사와 같은 초인 범죄자를 잡는 임무도 맡았으니.
능력이 뛰어난 종군 마법사였던 케빈이 이에 안다고 해서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행이네. 그 말이 사실이면 한동안 네 일은 아무도 신경 쓰지 못할 거야.”
“그렇습니까?”
“그래, 인육 요리사의 여동생과 같은 거물이 생명 연금술 학과에 잠입한 것만으로 엄청난 사태거든. 자잘한 데 신경 못 쓸 거야. 그건 그렇고 이거 진짜 큰일이군.”
“무엇이 말씀입니까?”
“내 추측이지만, 십중팔구 생명 연금술 학과는 내부에서 잡아먹힌 상태일 거야. 그레텔에게. 그런 거물이 이런 일에 엮였다면 들러리는 아닐 테니……. 로큘리 대학은 물론 갈로스도 뒤집어지겠군.”
음……. 생각해보니 맞는 말 같았다.
자칭 손가락인 인육 요리사 여동생과 같은 거물이 이번 일에 관여되어 있다면 단순한 협력자가 아닌 사건의 주도자인 게 더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그레텔이 마법 대학의 학과 하나를 집어삼켰다면 로쿨리 대학은 물론, 로쿨리 대학을 세운 갈로스 왕실에게도 엄청난 일이 터였다.
다만,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었다.
인육 요리사도 결국 흑마법사인데, 갈로스의 마탑인 로큘리 대학을 내부에서 잡아먹는 게 가능한 겁니까? ……마법사지 않습니까?”
케빈은 설명하기 난감하듯 미간을 긁적였다.
“음……. 흑마법사가 마법사보다 못한 건 사실이지만, 인육 요리사와 같이 수백 년을 산 괴물은 이야기가 달라져. 내가 알기로 인육 요리사는 밀리유와 함께 갈로스의 뒷세계를 양분하고 있는 존재거든.”
밀리유.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였다.
과거 조 일행과 함께 백 포트(Back Port)로 방문했을 때 잠깐 들었는데, 그곳 사람이 말하길 밀리유는 갈로스의 크라임 펌이라 하였다.
거대한 범죄조직 연합.
다만, 사업가보다는 전사에 더 가까운 존재들이라 투박하다고 했다. 그 뿌리가 도적과 강도, 몰락 귀족에 두고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밀리유를 상대로 인육 요리사가 갈로스 뒷세계를 양분(兩分)했다니. 올리버는 새로운 정보를 곧장 머리에 새겼다.
“뭐 말이 좋아 양분(雨分)이지. 실상은 인육 요리사에게 밀리고 있지만.”
“그렇습니까?”
“그래. 조직력도, 사업 아이템도, 커넥션도, 무력도 모두 인육 요리사에게 밀려 점점 몰락하고 있는 처지거든. 인육 요리사는 본인 자체도 뛰어난 흑마법사인데, 그것도 모자라 본인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조직을 거느리고 있어서..... 갈로스 뒷세계의 제국이라 해도 좋을 정도지.”
뒷세계의 제국이라……. 표현이 꽤 묵직했다. 특히, 케빈의 입에서 나오니 더 묵직한 것 같았다.
“잘 아시는군요?”
“군에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최신 정보를 몇 개 얻었거든.”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글쎄......,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알 수 없는 말에 올리버가 고개를 갸웃댔다. 더 의문인 건 저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라는 거였다.
"어쨌건 그런 조직을 가진 인육 요리사의 여동생이라면 아주 못 할 것도 아니라는 거야. 돈도 인맥도 충분하니……. 어쩌면 흑마법의 힘으로 마법사들이 원하는 걸 제공해줬을지도 모르고.”
“뭐가 있죠?”
“마법사가 원하는 게 뭐겠어? 지식, 힘, 젊음 같은 거지. 검은손은 수백 년을 산 존재들이니, 마법사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걸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진 않겠지.”
썩 틀린 말 같진 않았다.
테어도어처럼 흑마법 지식에 관심 가진 이들도 있을 테니.
“어쨌건, 이건 꽤 큰일이라는 거야. 가급적이면 수면 아래에서 활동하는 검은손이 공식적으로 활동했다는 거니……. 아무리 마탑이라도 이 사실을 오래 숨길 수는 없어, 이를 대외적으로 발표해야 하고, 다른 세력들과 힘을 합쳐 이 일을 논의해야겠지. 갈로스 정부와 란다 시(市), 왕국 중앙 정부, 파테르교 등등.”
케빈이 각 조직을 읊자 사안의 심각성 한층 피부로 와닿았다.
“성격이 다른 여러 조직과 유기적으로 이야기를 나눠야 하니, 아마 스승님께서 도맡겠군.”
“어르신이요?”
“아카이브는 인맥이 넓고, 권위도 높아 이런 민감한 문제를 담당하기 딱 좋거든. 특히, 마탑도 구린 구석이 있을 때는. 안 맡겠다고 한다면 몰라도, 스승님께서 자청해 나간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협조할 거야.”
"아......."
‘스승님이 일을 도맡을 테니, 네 문제는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고……. 운이 좋네.”
‘아……. 뭔가 아이러니하네요. 꽤 나쁜 일이 일어난 것 같은데, 제가 덕을 봐서요.”
“세상만사 다 그런 법이지. 전쟁이 나면 무기공장주인들이 돈을 벌고, 새로운 전염병이 창궐하면 제약회사가 돈을 벌지. 대공황이 와도 공매도한 인간들은 돈을 벌고.”
관록이 있는 듯한 케빈의 발언에 올리버가 잠시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세상은 복잡해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도 누군가에겐 불행일 수도 행운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흥미롭고 재밌는 거고.
올리버가 질문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교수님.”
“뭐가?”
“생명학파는 마탑을 배신했고, 생명 연금술 학과는 거기에 한술 더 떠 인육 요리사 쪽에 잡아 먹혔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케빈은 특유의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깊게 고민했다. 그도 쉽사리 판단할 수 없다는 듯이.
“음……. 글쎄, 나도 이 정도 일은 겪어보지 못해서. 다만, 생명학파는 어떻게 될지 예상할 수 있어.”
“어떻게 되죠?”
케빈이 대답하려는 찰나 퉁- 퉁- 손으로 천막을 치는 듯한 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방음 마법 바로 앞에서 야렐리가 손에 마력을 모아 방음 마법을 두들겨 노크한 것이었다.
물리적인 장벽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올리버와 케빈을 존중해 이런 식으로 부른 거였다.
케빈은 그녀의 등장에 방음 마법을 해체했다.
“무슨 일이지?”
“전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교수님. 일단, 아카이브께서 포털을 이용해 여기 있는 마법사 전원을 소유하신 병원으로 데려갈 거라 하셨습니다. 두 분도 준비해주십시오.”
“좋은 선택이군. 병원에 몰아넣어야 치료하기도 용이하고, 입단속 하기도 쉬울 테니……. 혹시, 그 외에 무슨 이야기 들은 건 없어?”
“죄송합니다. 저랑 테렌스 씨를 비롯해 다른 분들은 얼마 가지 않아 천막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시다고 해서요.”
"아, 그렇군. 바로, 준비하도록 하지.”
케빈이 움직이려는 바로 그때, 올리버가 케빈을 불러 세웠다.
“교수님. 뭐하나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뭐지?”
“잠시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 전 거기 좀 들렀다 갈 수 있겠습니까?”
올리버답지 않으면서도, 올리버다운 질문에 케빈이 미간을 찌푸렸다. 실없이 관광이나 하겠다고 이런 말을 꺼낸 건 아닐 텐데……. 어딘지 궁금 했다.
“어딜 가보고 싶은데?”
“고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