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8. 진실과 진심 (1) >
“하아……. 역시, 아카이브는 아카이브네요.”
그레텔은 그리 말하며 포털 마법을 사용.
허공이 소용돌이 형태로 찢어지며 그레텔 본인뿐 아니라 멀린의 벼락에 맞아 쓰러진 그녀의 부하들 주변에도 포털이 열렸다.
기괴한 형태의 포털 가장자리에는 혀와 같은 촉수가 있었고, 촉수는 쓰러진 그레텔의 부하들을 집어삼켰다.
살아있는 사람이든 죽어있는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다.
멀린은 떠나는 그레텔에게 인사했다.
“양보 고맙소.”
“아직 당신은 좀 부담스럽거든요. 아직은 말이에요.”
그레텔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는 포털로 들어가 사라졌다.
등장한 것에 비해 허무한 퇴장.
그러나 올리버는 싱겁다고 생각하기보다 멀린이 자기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존재라는 걸 실감할 뿐이었다.
하긴, 올리버는 멀린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으니.
“괜찮나?”
그레텔을 완전히 떠나보낸 후, 멀린은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물었다.
올리버는 쿼터스태프와 망가진 송장인형-저격수, 그 안에 있는 차일드-세컨드를 챙기고 자신의 몸을 만져 확인한 후 멀린의 질문에 대답했다.
“선물로 받은 옷이 좀 찢어진 것 외에는 괜찮습니다.”
마탑의 그랜드 마스터를 상대한 후 고작 옷이 찢어진 게 최대 피해라니. 얼핏 듣기에는 허세 같았지만, 올리버는 진심이었다.
에디스에게서 선물 받은 옷이었기에. 조금 안타까웠다.
그런 사실을 아는 멀린은 허하고 웃을 뿐이었다.
그 테어도어를 상대하고 고작 저런 말을 하다니......
허나, 한편으로 멀린은 그게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당연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멀린은 말없이 올리버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순식간에 노화해 자신보다 더 늙어버린……. 아니, 산 송장이나 다름없는 테어도어와 겁을 먹어 반쯤 넋이 나간 칼을 봤다.
자신의 친구와 그의 손자를 말이다.
“흐음……. 데이브.”
“예, 어르신.”
“일단, 호수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할 수 있겠나?”
***
올리버는 멀린의 제안대로 호수 밖으로 나가 전투의 여파로 엉망이 된 숲에 발을 디뎠다.
호수의 물이 몇 번이나 넘쳐흐른 덕분에 땅은 뻘밭이 되어 있었으며, 여기저기에는 부러진 나무와 뿌리째 뽑혀 쓰러진 거목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송장인형에 부탁해 테어도어와 칼, 테어도어의 육체 파편을 챙겨 나온 올리버가 멀린에게 대뜸 질문했다.
“말하지 않았나? 변덕이 죽 끓듯 해서 왔다고.”
멀린의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로 대답했고, 올리버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바라봤다.
"……그 변덕을 일으킨 게 이곳에서 어떤 낌새가 보아서긴 하지만.”
“낌새요?”
“학회가 시작한 후 세계수를 통해 이곳을 살펴봤거든. 남 엿보는 걸 좋아해서……. 그런데 오늘 두 눈을 의심하는 걸 봤지."
“뭐죠?”
“이브(Eve) 둘이 싸우고 있더군.”
"아……."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소리 냈다.
안 그래도 된다고 했는데, 이브(Eve)는 자체적으로 이곳 소식을 밖으로 알리기 위해 애쓴 듯했다.
'고마워라……. 다치진 않았으려나?’
올리버가 이브를 걱정했다. 이브(Eve)가 말하길 여기서 싸우는 건 자신이 불리하다고 했던 것 같은데.
“좀처럼 보기 힘든 경우라 멀리서 구경했지. 자네도 알다시피 이브(Eve)란 존재는 하나만 있는 것도 기적인데, 두 개나 있고, 거기다 서로 싸우다니. 평생 못 볼 구경이지 않나?”
“예.”
“그러던 그중 하나가 날 발견하더니, 갑자기 여기 상황을 알려줬어. 학회 주최 측인 생명학파와 생명연금술 학과가 손님들을 공격하고 있다고....... 그래서 급하게 여기 왔지.”
“그럼, 방금 오신 겁니까?”
“그렇지. 왜 그러나?”
올리버는 뭔가 이상했지만, 굳이 캐묻진 않았다.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그래서 바로 다음 본론으로 넘어갔다.
“어르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올리버가 그레텔로부터 자신을 도와준 것에 관해 정식으로 감사를 표했다.
자세한 실력은 알 수 없었으나, 그녀가 펼친 공간마법과 안개 결계, 질이 다른 마력, 한때지만 보이지 않는 감정 등을 고려했을 때 그녀 역시 보통 실력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기에. 거기다 부하들도 소환했고.
싸워서 이겼을지 졌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만약 그때 싸웠다면 테어도어와 칼은 빼앗겼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즉, 멀린이 도와준 덕분에 안전뿐 아니라 전리품도 지킬 수 있었던 셈이었다.
“나야말로 고맙지. 마탑 사람들을 도와줬다면서? 은퇴한 몸이긴 하지만, 나 역시 마탑에 속한 몸. 진심으로 고맙네.”
“저도 당장은 마탑 소속 직원이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들으신 겁니까?”
“오늘 길에 만난 야렐리에게서 들었네. 자네가 아주 열심히 도와준 걸 내게 필사적으로 설명하더군.”
“야렐리 씨요?”
"그래. 숲 밖으로 나와 도망치던 중 생명 연금술 학과 마법사들에게 습격받고 있는 걸 내가 구해줬거든. 거기서 여기 자세한 상황과 자네 활약에 대해 들었지……. 그 아이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말할 수 있는 줄은 몰랐어.”
“아……. 무사하신가요?”
“일단은? 왜, 신경 쓰이나?”
멀린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올리버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니 당연한 거긴 하지만.
올리버가 대답했다.
“예, 야렐리 씨께 여쭤볼 게 있거든요. 대답해주신다고 약속도 해주셨고요. 무사하시다니 다행이네요.”
참으로 한결같은 태도에 멀린은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바라봤다. 알 수 없고 흥미로운 존재를 관찰하듯이.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몸 안의 마력이 인상적이라서. 설마, 호수의 마력을 모조리 빨아들인 건가?”
“아, 맞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올리버는 뒤늦게 자신이 호수의 마력을 다 추출한 걸 기억하며 호수 근처로 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뭘 하려고?”
"다시 호수에 돌려주려고요. 테어도어 님을 상대하기 위해 일단 추출하긴 했는데, 이제는 필요 없으니까요.”
올리버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말도 안 되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레이크 빌리지에 있는 호수의 방대한 마력을 모조리 흡수해 몸을 담는 것도 사람이 가능한 영역이 아닌데, 이걸 다시 되돌려 주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였다.
폭포가 위에서 아래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이치(理致)에서 벗어난 영역.
그런데 올리버는 태연하게 그 일을 멀린의 눈앞에서 실행했다.
사용하고 남은 호수의 마력을 다시 호수로 돌려줬다.
폭포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진풍경. 멀린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 그리고 죄송합니다.”
호수에 마력을 돌려주는 일을 끝마치자마자 올리버는 멀린에게 되돌아와 사과했다.
“뭐가, 죄송한가?”
“제 정체가 드러났거든요.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분에게요……. 도와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올리버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났는지 상황을 설명하며, 멀린에게 다시 사과했다.
아까 전이야 눈앞에 놓인 상황이 다급해 그냥 넘어갔지만, 이제 소란이 종료됐으니, 흑마법사인 자신이 신분까지 위조해 마탑의 직원으로 있는 것은 정식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했다.
이곳에서 세운 공이 있으니 크게 안 번질 수도 있지만, 마탑에서의 흑마법사 인식 때문에 쉽사리 장담할 수도 없었다.
뭐, 정 안 되면 숨거나 도망치는 방법도 있었지만, 자신을 도와준 케빈과 멀린은 이조차 여의치 않았다.
그렇기에 미안했다. 일하는 중이든 뭐든 도와준 사람들을 난감한 상황에 빠트린 건 사실이었으니.
“걱정하지 마. 그 이야기도 미리 들었으니까. 처음 들었을 때는 조금 화가 나긴 했지만.”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에 말려서요……."
올리버가 바토리에게 토끼처럼 붙잡힌 칼을 슬며시 봤다.
“……그런데 걱정하지 말라는 건 무슨 방법이 있다는 뜻입니까?”
“나 정도 연륜이면 그 어떠한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지. 이미 해결책을 두 개나 짰어.”
“오……. 어떤 거죠?”
"케빈에게 내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거야.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지. 케빈은 마탑에서 약자인 데 반해 난……. 날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아까 전에 도와줬잖아?”
“아, 죄송합니다……. 그럼, 다른 하나는 뭐죠?”
“약간 불안하고, 나도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방법이지.”
“개인적으로는 그 방법을 썼으면 좋겠네요”
“오, 케빈을 걱정해 주는 건가?”
“예, 대단한 분이니까요……. 어르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지 않습니까?”
뼈가 있는 말에 농담하듯 너스레를 떨던 멀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두터운 마력 벽으로 인해 그 감정을 읽긴 힘들었지만, 그에게서 죄책감을 엿볼 수 있었다. 과거 캔트가 그런 기색을 낸 적 있었기에.
“……들었나 보군.”
“어쩌다 보니까요……. 아,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제 주제에 어르신을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교수님이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
“……괜찮다면 나도 부탁 하나 할 수 있겠나?”
“제게요? 예, 말씀하십시오.”
“테어도어와 칼에 대한 처분권을 내게 주겠나?”
뜬금없는 제안에 올리버가 고개를 갸웃댔고,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송장인형들이 특유의 날카로운 괴성을 지르며 공격 의사를 내비쳤다.
“대머리! 썅! 죽인다!! 대머리!!”
“캬햐햐햫一!”
올리버의 의사를 묻는 송장인형들. 올리버는 그런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 진정하라고 부탁했다.
“어르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네가 테어도어와 칼을 어찌할 건지 대충 들었네. 하지만, 테어도어에게서 원하는 질문을 묻긴 힘들 거야. 곧 죽을 테니까."
올리버가 셰이머스의 손에 개처럼 붙잡힌 테어도어를 봤다.
멀린의 말대로 곧 죽을 사람처럼 생명력이 쇠약해져 있었다. 기껏해야 5분? 10분?
거기다 정신도 온전치 못한 상황이었다. 공포감에 물들어 감정이 붕괴 중이었기에.
그렇다 해도 올리버로서는 썩 내키는 제안이 아니었다.
“시체도 제겐 충분히 값어치가 있습니다.”
“알지. 그래서 부탁하는 거야.”
멀린이 차분하지만, 굳은 의지를 담아 부탁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 올리버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과거 바토리와의 대화 도중 느꼈던 짜증을……
“……그런 부탁을 하시는 이유가 뭐죠? 살릴 생각입니까?”
“아니, 저 친구는 이제 나도 살릴 수 없어. 그냥 묻어주려는 거야.”
“테어도어 님을요?”
“그래.”
“왜죠?”
“친구니까. 그리고 나 역시 저렇게 될 수 있었거든……. 그래서 묻어주고 싶네. 나처럼 나쁜 놈이지만 최소한의 존엄성은 지켜주고 싶어서.”
올리버는 말없이 멀린을 바라봤다. 여전히 두꺼운 마력 벽이 쳐져 있어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으나, 왠지 멀린이 테어도어를 동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칼 씨도 넘겨드려야 하나요?”
“그래, 주면 고맙지. 친구 손자라서……. 지은 죄의 대가는 마탑에서 내릴 거야.”
바토리에게 붙잡혀 있던 칼은 겁에 질린 채 멀린과 올리버를 봤다.
올리버 역시 그를 봤는데, 그는 테어도어만큼은 아니지만, 올리버에게 겁을 먹은 상태였으며, 내면으로 깊은 혼란과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다.
할아버지인 테어도어에게 배신당한 충격을 아직까지 씻지 못한 것처럼.
덜덜덜 떠는 그 모습에서 올리버는 아이러니하게도 콜린을 떠올렸다.
마텔에서 올리버가 구해주지 못한 소년이 말이다.
“거절하면 어떻게 하실 거죠?”
“주인이 거절하는 데 뭘 하겠나? 그저 진심을 다해 부탁할 뿐이지.”
감정을 볼 수 없어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올리버는 왠지 멀린이 진심인 것 같았다.
올리버는 고민했다. 솔직히 시체도 내주기 싫었다.
둘 다 성능이 꽤 괜찮을 편이니……. 설사, 성능이 좋지 않아도 그냥 송장인형으로 만들고 싶었다.
왜냐면 그러고 싶었으니까.
올리버는 강렬한 충동을 느끼며 칼을 다시 봤다. 그는 떨고 있었다. 또, 콜린이 떠올랐다.
그러자 강렬한 충동 가운데에서 뭔가가 끼어들었다. 올리버로서는 설명하기 힘든 뭔가가.
혼란스러웠고, 올리버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그 순간 캔트의 말이 떠올랐다.
‘난 자네 그런 성격이 좋네. 그러니, 부디 이런 일로 복수나 분노, 증오에 물들지 말게. 그런 감정은……. 아주 중독적이거든. 자넨 안 그랬으면 좋겠어.’
그 말을 떠올리자 올리버는 혼란과 충동이 잦아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두 개 있습니다.”
“말하게.”
"제가 궁금한 게 몇 개 있는데, 어르신께서 테어도어 님 대신 알려주십시오. 친구분이시니까요.”
“약속하지.”
“두 번째는 칼 씨를 한 대만 때릴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때리고 싶거든요.”
멀린은 고개를 돌려 바토리에게 붙잡혀 주저앉은 칼을 봤다.
“……알았네.”
대답을 듣자마자 올리버는 멀린을 지나쳐 칼에게 다가갔고, 송장인형-바토리는 칼을 일으켜 세웠다.
분명 흡수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던 칼은 눈동자가 덜덜 떨릴 정도로 겁을 먹은 채 올리버를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감히 저항할 생각도 전혀 하지 못한 채.
올리버는 무력해진 그를 향해 무감각하게 주먹을 들어 기계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퍽-
무미건조한 타격음과 함께 칼은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깊은 절망에 빠진 채.
올리버는 고아원과 광산에 버려진 아이들이 다시 떠올랐다.
"콜린."
"......?"
“마텔에서 죽은 그 아이 이름이 콜린입니다. 그리고 그 애는 당신보다 더 무서워했습니다……. 그냥그렇다고요."
올리버는 그렇게 말을 마치곤 뒤돌아 칼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멀린에게 다가갔다.
그럼에도 올리버는 칼이 깊은 죄책감과 후회에 물드는 걸 볼 수 있었다.
‘저걸 보기 위해 내가 말한 건가?’
올리버가 자신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며 자문했다. 콜린에게 고해성사를 해줄 때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왜 하는지 자신도 구체적인 이유를 모른 채 그저 그래야 할 것만 같은……. 혼란스러웠다.
“그거면 충분하나?”
멀린의 질문에 올리버는 넋이 나간 채 눈물을 흘리는 칼을 봤다.
"잘은 모르겠지만……. 볼일은 끝난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예……. 괜찮으시다면, 이제 어떻게 수습할 건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멀린이 미소지었다.
“남자답게 진실과 진심을 담아 정면 돌파해야지."
“정면 돌파요?”
“그래, 진실과 진심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