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흑마법사-336화 (336/633)

< 336. 재정비 (2) >

레이크 빌리지에 마련된 생명학파의 거대 연구실.

그곳의 한 공간에서 빛에 굴절되듯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이윽고 공간이 찢어지며 포털이 형성됐다.

그렇게 찢어진 포털 사이로 한 남자가 나왔다. 생명학파의 그랜드 마스터 테어도어 브란트였다.

원래 나이의 절반밖에 되어 보이지 않은 그는 전투 중 힘을 강화하기 위해 10년은 더 젊어졌는데, 포털에서 나와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바로 그 반작용이 일어났다.

"큭......"!

테어도어는 온몸에 기운이 빠지는 감각을 느끼며 현기증과 함께 비틀거렸다.

당연한 거였다.

평소에도 젊음을 간신히 유지하였는데, 무리해가며 더 젊어졌으니. 거기에 격렬한 전투까지……. 반작용이 안 오는 게 더 이상한 거였다.

‘실험체 162번 생각보다 강했어. 필립과 틸다까지 상대한 후라 부담이 더욱 컸고……. 제기랄 손이.’

테어도어가 자신의 손을 보며 생각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탱탱하던 손이 급속도로 쭈글쭈글 주름이 잡혀 노인의 것처럼 변했다. 실로 두려운 변화였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테어도어의 실험체 겸 제자인 핀 루소가 옆에서 부축하며 말했다.

그는 테어도어의 상태를 척 보곤 약을 바로 꺼냈다.

젊음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막대한 에너지를 보충해줄 생명력 농축액과 특별 혼합 포션, 고칼로리 알약으로, 테어도어는 이를 단숨에 삼켜 전투 중 소모한 기력을 회복, 다시 육체의 젊음을 되돌렸다.

‘점점 효율성이 떨어지는군.’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육체의 젊음을 돌린 테어도어가 자신의 손을 보며 착잡하게 생각했다.

자신과 생명학파의 노력 덕분에 젊음을 되돌리고, 유지하는 기술을 손을 넣었지만, 그 기술은 모래성 위에 쌓은 건물처럼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시술 자체도 어렵고 비용도 높은 데 반해, 성공 확률은 낮고, 젊음은 영구 보존되는 게 아니라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했으니.

거기에 나이를 먹음에 따라 들어가는 노력 대비 효용도 점차 줄어들었다.

마치, 무슨 수를 써도 노화와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듯.

늘 느끼는 이 사실을 새삼 깨닫자 테어도어는 다시 보이지 않는 죽음의 손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듯한 공포를 맛봤다.

역시, 죽음은 두려웠다. 그 무엇보다 말이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이 절대적인 공포심이 그 증거.

허나, 테어도어는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그 절대적이고 피할 수 없는 저주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았으니. 이건 신이 주신 기회이자,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증거였다.

‘암, 그렇고 말고……. 그렇고말고.’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핀 루소가 심상치 않은 테어도어의 반응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난 괜찮아……. 그보다 확인했다고?”

“예."

제3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주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 게 유일한 혈육인 손자의 목소리였으니.

“칼……."

“할아버님.”

칼이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평소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

하지만 조금만 파고들면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칼의 오만한 자신감은 다름 아닌 할아버지의 가르침에 기인한 것이었으니. 유일한 자신의 가족인 테어도어에게 말이다.

“그래, 칼……. 놈이 놈이더냐?”

놈. 추상적인 호칭이었지만, 칼은 곧바로 알아듣고 대답했다. 이 일을 벌인 것 자체가 애당초 놈 때문이었으니.

“예. 할아버님. 케빈의 개인 직원 제논은 우리가 잡으려고 했던 해결사 데이브가 맞습니다. 제가 확인했습니다.”

테어도어는 입을 꾹 다물며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했다는 뜻. 그러자 의문이 생겼다.

“그런데 왜 확보하지 않은 것이냐?”

테어도어의 질문에 칼은 나이대에 맞지 않게 주눅 들어 머뭇거렸다.

칼 역시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목표물인 데이브의 물렁한 성격을 이용해 유리한 장소에서 제안해 데려오려는 등.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런데 놈은 말도 안 되는 마력을 분출하면서 칼의 마력까지 통제권을 빼앗아 지하실 전체를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말도 안 되는 퍼포먼스를 벌였고. 그 덕에 계획이 어그러지고 말았다.

힘으로 제압하기 위해 격뢰(激雷)를 쐈음에도 놈은 가볍게 막아내며 거리를 좁히기도 했다.

“막았다고? 그것도 가볍게?”

“예……. 죄송합니다.”

칼이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사과했다. 할아버지를 실망하게 했으니.

“……아니다. 괜찮다. 아직 넌 융합이 완벽한 상태가 아니니. 기술의 정밀도가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

테어도어가 애써 괜찮은 척 말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사기를 꺾을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제 잘못입니다. 스승님. 도련님 잘못이 아닙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려던 찰나 옆에서 병풍처럼 서 있던 핀 루소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서 놈과 계속 싸우려고 했지만, 제가 멋대로 도련님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러니, 이건 제 잘못입니다.”

이 말 역시 사실이었다.

칼이 격뢰(激雷)를 쏘자 올리버는 톤파를 버리고 쿼터스태프를 꺼내 가볍게 검은 번개를 쳐내곤 거리를 좁혔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에 상황을 지켜보던 루소는 자의적인 판단으로 개입, 포털을 열어 칼을 데리고 후퇴했다.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말이야?”

“그게……. 약간 감정적인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마텔에서처럼 말이죠.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상하리만치 차분하다고 했는데, 그런 상태가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괜한 충돌보다는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낫다고 판단해 제가 멋대로 도련님을 데리고 후퇴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루소는 모든 일의 책임을 자신이 지려 했다. 그만큼 칼을 보호하고 싶었기에.

테어도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굳이, 변수를 만들 필요는 없지. 그래서 나도 실험체 162번을 안 죽인 거니까. 중요한 건 놈의 정체가 확실해졌다는 거니……. 우린 작전대로 움직인다. 칼, 준비됐느냐?”

“벌써……. 시작하는 겁니까?”

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려웠기에.

“물론, 재료는 충분히 확보했고, 상황도 까발려졌으니 시간을 계속해 끌 이유가 없지. 솔직히 흑마법사를 계속 믿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 움직일 수 있을 때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한다. 문제 있느냐?”

칼은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저었다.

논리적으로 틀린 말이 아니었고, 평생을 할아버지의 손아귀에서 자란 그에게 선택지 따윈 애당초 없었으니까.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칼은 고개를 끄덕였고, 테어도어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손자를 데리고 한 곳으로 갔다.

가는 동안 자신을 지켜줄 생명학파의 충실한 마법사들과 마주쳤다.

멈칫.

테어도어와 칼, 루소가 한 문 앞에서 멈췄다.

거대한 철문으로, 안에 무엇이 있는지 음산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꿀꺽.

음산한 기운 때문인지, 앞으로 있을 시술(施術) 때문인지 칼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정작, 테어도어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지만.

끼이이익.

두꺼운 철문이 열리자 거대한 공간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해당 공간에는 백 명도 족히 넘을 것 같은 수많은 마법사가 포박된 채 벽면을 따라 묶여 있었다.

정육점 돼지처럼 말이다.

혈마법을 이용해 육체의 자유를 빼앗긴 상태라 다들 저항할 수 없는 상태였다. 참으로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마법사들이 돼지처럼 줄줄이 매달린 모습을 또 언제 보겠느냐 말이다.

허나, 이들은 이번 일의 메인이 아니었다.

진짜 메인은 공간 가운데 있는 거대 시험관에 둥둥 떠다니는 몇 방울 될까 말까 한 피였다.

테어도어는 천천히 걸어가 피가 담긴 거대 시험관에 손을 대며 동경과 탐욕이 깃든 눈동자로 칼에게 말했다.

“여기 있는 재료들을 이용해 이 피를 완전히 받아들여라. 그리고 완전한 존재가 되어라. 우리를 위해.”

***

“그러니까 생명학파가 이런 짓을 벌인 게 어떠한 일을 위한 재료 확보라고? 무슨 종말론에 대비한?”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올리버가 야렐리와 함께 지하실 내부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대답했다.

“음……. 무슨 일인 거 같나?”

“죄송하지만,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필립의 질문에 올리버가 다시 대답했다.

어떠한 목적을 위해 초대된 손님들을 납치한 것은 확실한 것 같았지만, 그게 뭔지는 올리버도 알 도리가 없었다.

혈마법의 소학파의 원마스터에게 알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칼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칼.......'

“종말론이란 건 또 뭐야?”

옆에 서 있던 테렌스가 끼어들어 질문했다. 올리버는 대답했다.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해결사로 일하는 와중에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는데, 생명학파 쪽에서 천지가 개벽(開關)한다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해 혹시나 해 물어본 것뿐입니다.”

“우리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어.”

필립이 자신의 풍성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테어도어가 나와 틸다 부인을 불러놓고 곧 세상이 개벽(開關)할 테니, 자기 쪽에 붙으라 하더군. 혼돈 가운데서 오직 선택받은 자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젊음과 영생을 준다고 했지.”

“젊음은 둘째치고 영생이라니……. 아무리 테어도어라 해도 그럴 기술이 있습니까?”

"나도 동감이야. 케빈 중령. 다만, 아주 흘려들을 것도 아니야. 테어도어가 그런 일로 허세를 떨 만한 인간은 아니거든.”

케빈은 반박하지 못했다. 개인의 성품과 개인적인 감정과 별개로 그가 뛰어난 마법사이자, 자신에 능력에 자부심을 가진 마법사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약간의 과장은 보탤지언정, 없는 걸 있다고 할 인간은 아니었다.

“왠지 그것과도 연관이 있을 거 같군……."

필립이 추측했다. 어떠한 논리 구조를 통한 추론이라기보다는 감에 의해서.

허나, 때때로 이런 감이 훨씬 정확할 때가 있었다. 그 증거로 필립의 추측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생(永生)은 생명학파에서 추구하는 궁극의 결과물이었으니.

다만, 석연치 않은 것도 있었다.

“관련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영생 하나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케빈이 당당히 의견을 냈다.

“이유가 뭐지?”

"영생은 실로 대단한 결과물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런 짓을 벌인 건 말이 안 됩니다. 지금 생명학파가 저지른 짓은 자신이 마탑을 무너트리 거나, 혹은 삼킬 각오가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그런 목적으로 필립과 틸다를 회유하려 한 거였고.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로 한 것은 결국 힘입니다. 힘이 없으면 협상도 술수도 성립이 되지 않으니까요.”

“즉, 자네 말은 테어도어가 힘을 강화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건가?”

“예. 물론, 영생일 수도 있지만, 힘도 관련되어 있을 겁니다……. 최소한 스승님과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는요."

케빈의 스승이라 하면 다름 아닌 아카이브 멀린을 말했다.

천 년이 넘는 아카이브의 지식을 승계받은 존재. 시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통상적으로 가장 뛰어난 마법사.

그런 마법사와 맞서 싸울 힘이라……. 그 정도라면 이런 미친 짓을 벌인 것도 충분히 납득됐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차분히 이야기를 들으며 정보를 취합하던 틸다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큰 편이 아님에도 특유의 서늘한 느낌 때문에 사람들의 귀를 집중시켰다.

"다들 괜찮은 추측이지만, 그것보다 먼저 정해야 할 게 있습니다.”

모두 그녀를 바라봤다. 이목이 쏠리자 틸다가 이어 입을 열었다.

“여기서 테어도어와 맞서 싸울 건지, 아니면 후퇴할지부터 정해야죠.”

실로 맞는 말이었다.

상대의 상황이나, 속셈을 파악하는 것도 분명 중요한 거였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건 이쪽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다들 보다시피 상황은 좋지 못합니다. 안개가 이곳을 둘러싸고 있어 상황은커녕 피해조차 파악하기 힘들고, 이쪽 전력은 소수인 데다 대부분 상태도 좋지 못하니까요.”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필립은 한쪽 팔이 날아갔고, 케빈과 테렌스는 제각기 마력을 과하게 사용한 덕분에 휴식과 요양이 필요했다. 전투로 인한 부상은 별개였고. 그나마 멀쩡한 것은 야렐리와 틸다, 구출된 마법사들이었지만, 이들 역시 피로가 쌓인 상태라 멀쩡한 건 아니었다.

이 전력으로 이번 일에 참가한 생명학파 마법사와 테어도어를 상대로 맞서 싸운다?

상식적으로 승산이 적었다.

허나, 필립이 다른 의견을 냈다.

“그러니까 지금 싸워야 합니다.”

“지금요?”

“그렇소. 틸다 부인. 저들이 원하는 건 재료를 확보해 주술이든 의식이든 시술이든 뭔가 하는 걸 테니……. 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위협적인 것은 부정할 수 없소. 그 테어도어가 이런 리스크까지 감수하며 벌인 일이니. 우리 역시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지금 방해해야 하오.”

나름대로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이런 일을 벌인 것은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 그렇다면 그런 상황이 되게끔 놔둬선 안 됐다.

실로 군인다운 의견.

그러나 틸다는 냉철하게 성공 가능성과 그 피해에 대해 논하며, 차라리 이 사실을 마탑에 알려 대비해 테어도어를 막는 게 낫다는 의견을 냈다.

필립 역시 뒤지지 않고 이를 반박했다. 테어도어처럼 치밀한 자라면 자신들이 도망치는 사이 뒤를 습격할 수도 있고, 회유됐을지도 모를 다른 마법사들을 이용해 마탑을 속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이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명예 그랜드 마스터와 원마스터가 구체적으로 자기 생각을 나누며 다른 이들도 각각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의견을 보태던 중 케빈이 대뜸 입을 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형태로.

“……제논.”

“예, 교수님.”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침묵하며 두 사람을 봤다.

“네 의견은 어떻지? 이 결계를 이용할 수 있는 건 너잖아?”

“저는 여러분의 의견에 따를 뿐입니다.”

“또, 아무래도 좋다는 건가요?”

야렐리가 끼어들어 물었다. 지하실에서처럼 시큰둥한 반응에 약간 화를 냈다.

올리버가 야렐리의 감정을 읽으며 대답했다.

“아…….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저 전 일개 직원이니 여러분 앞에서 의견을 낼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거기다 흑마법사고요.”

“동시에 야렐리를 도와 다른 마법사들을 구해주고, 안개를 이용해 이동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기도 하지……. 정말 아무 의견 없어?”

케빈이 진지하게 물었다.

올리버는 그 감정을 보고 진지하게 화답했다.

“음……. 전 개인적으로 생명학파와 싸웠으면 좋겠습니다.”

“이유가 뭐지?”

“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올리버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칼을 떠올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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