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0. 원군 (3) >
“예,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올리버가 사람 형상을 한 핏덩어리를 보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사했다. 손까지 살짝 들어서 말이다.
처음 보는 혈마법에 놀란 야렐리는 올리버의 반응에 한층 더 놀랐으며, 핏덩어리 인간 역시 당혹한 기색을 보였다.
허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혹시....... 혈마법 소학파의 원마스터(One Master)십니까?”
정답이었는지 핏덩어리 인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안 거지?]
“학회에 온 첫날 사교장에서 데릭 씨가 가르쳐주셨거든요. 혈마법 소학파의 원마스터가 오셨다고요. 지금 쓰고 있는 마법은 혈마법이고요 데릭 씨랑 펠릭스 씨는 어디 계시죠?”
올리버가 지나가듯 가볍게 물었다. 진짜 가볍게 물어본 것이기에.
[하…….걱정되나?]
“예. 교수님 연구원이거든요.”
걱정하는 이유가 교수 연구원이라서라니……. 겉보기에는 정상적이지만, 그 내면에는 말로 쉬이 설명할 수 없는 뒤틀림이 느껴졌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사람조차 초조하게 만들 뒤틀림이.
“왜 이런 일을 벌이신 거죠?”
기묘해진 분위기 속 야렐리가 끼어들었다.
[뭐라고?]
“왜 이런 짓을 벌였냐고 여쭤봤습니다. 엄연히 마탑 소속인 생명학파가 다른 조직과 손을 잡고 초대 손님을 습격하다니요.”
[너무하다고 생각하는군.]
“당연하죠!”
냉정하던 야렐리는 보기 드물게 언성을 높이며 화냈다.
피를 뒤집어써 평정심이 흔들린 상태였고, 생명학파의 배신에 진심으로 분노했기에.
흥미로운 건, 단순히 자신이 피해를 봐 화가 났다기보다는 작금의 사태 자체에 화가 난 것이었다.
[뭐,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솔직히 나도 지금 상황이 안타까우니. 허나, 이해해주길 바라. 다가올 위기에 대응하는 것뿐이니까.]
다가올 위기라니..…. 알 수 없는 소리에 야렐리가 미간을 찌푸렸고, 올리버는 흥미를 보였다.
핏덩어리 인간이 흥이 난듯 말을 이었다.
[자세한 건 이야기할 수 없지만, 곧 천지가 개벽(開關)할 일이 일어날 거야. 오직 미래를 예지하고 대비하는 자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지. 그 일을 위한 작은 희생일 뿐이야.]
“음……. 죄송하지만 잘 이해가 안 되는데 좀 더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올리버가 손을 들어 정중히 부탁했지만, 핏덩어리 인간은 불쾌해할 뿐이었다.
[당연히 이해할 수 없겠지. 마법사도 아닌 열등종은……. 그렇지만 마탑에서도 천재 소리를 들은 넌 이해할 수 있겠지. 야렐리.]
“아뇨. 저도 이해가 안 되는데요.”
야렐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핏덩어리 인간은 생각대로 대화가 진행되지 않자 불쾌해했다.
자신이 나서면 누구든 쉽게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뭐, 그럼 어쩔 수 없고..…. 천재 소릴 듣는다 해도 아직 학생이니. 좀 더 생산적인 대화를 나눠볼까? 우리 쪽으로 와라. 이미 승패는 결정 났고, 네 할머님 역시 결국 우리 쪽으로 올 테니.]
야렐리가 반사적으로 올리버를 봤다. 올리버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기로는 테어도어 님이랑 싸우고 계십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요.”
[거짓말. 이름이 제논이지? 홍인(紅人)의 개인 직원? 그런 놈 따위가 무엇을 안다고 끼어들어.]
“일개 직원이 아니에요.”
야렐리가 핏덩어리 인간의 말을 잘랐다.
“제논 씨는 세계수를 볼 수 있어요.”
[거짓말이겠지.]
“아뇨, 제가 봤어요. 마탑 교수님도 인정했고요.”
야렐리가 강렬한 믿음을 빛냈다. 마탑 교수는 케빈을 말하는 걸 텐데 꽤 신기했다.
분명, 케빈과 야렐리는 간접적으로 악연이 있었건만, 이토록 신뢰하다니.
개인적인 감정을 벗어난 공적인 믿음이었다.
그녀가 그러한 믿음을 다시 빛냈다.
“그리고 스카디 소학파의 원마스터이자, 제 할머님께서 이런 참담한 일에 손을 담그지 않을 거라 믿어요.”
핏덩어리 인간이 침묵했다. 피를 매개로 자신을 투영한 덕분인지 올리버는 그의 감정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고, 그는 지금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굴욕감과 짜증, 오기 등을 빛냈다.
잠시 후, 그가 애써 괜찮은 척 말했다.
[뭐, 좋아……. 기회를 안 잡는다면 안 잡는 대로 방법이 있으니. 또, 네놈은 될 수 있는 한 잡아두라고 위에서 명령받은 상태고.]
핏덩어리 인간이 올리버를 보며 말했다.
의외의 사실이었다. 올리버를 붙잡으라고 하다니……
당사자인 올리버가 그 이유를 물어보려는 찰나 야렐리와 올리버의 마력 감지에 무엇인가 포착됐다.
지하실 내 다수의 생명체가 이쪽으로 접근하였다.
[선택은 자유지만, 그 대가는 짊어져야지? 어디 재주껏 도망쳐 봐라……. 아, 참고로 아직 이곳에 데려가지 않은 녀석들도 있거든. 원래는 곧 재료로 데려갈 예정이었는데, 네가 여기 있는 동안에는 기다려 주지. 애당초 저 녀석들 구하러 여기 온 걸 테니.]
핏덩어리 인간이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갑자기 옆 방을 비롯한 복도에는 막 정신을 차린 듯한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올리버는 눈을 집중했다.
핏덩어리 인간의 말대로 사람으로 위장한 피 풍선 외에도 진짜 사람들이 있었다. 미세하지만 이제는 얼추 구별되었다.
“혈마법으로 깨운 겁니까?”
[혈마법으로 재웠으니까. 자, 어떡할 거지? 여기 있는 사람들을 계속 구할 건가? 아니면 도망칠 건가?]
핏덩어리 인간이 조롱하듯 물었다.
야렐리는 인질을 가지고 협박하는 핏덩어리 인간의 도발에 당황해 올리버를 바라봤지만, 올리버는 의견 대신 질문했다. 핏덩어리 인간처럼.
“어떡하시겠습니까? 야렐리 씨.”
차분하다 못해 담백하기까지 한 목소리는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을 물씬 풍겼고, 그 말을 들은 야렐리는 물론 핏덩어리 인간까지 당황하게 했다.
".....제논 씨 생각은 없나요?”
“예. 전 딱히 드릴 의견이 없습니다. 데릭 씨나, 펠릭스 씨도 없고요.”
진심이 담긴 대답에 야렐리는 어이없어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분명, 여기 납치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 것도 올리버고, 구할 것인지 물어본 것도 올리버인데, 막상 선택의 순간이 오자 아무런 의견도 내놓지 않고 의견만 물어본다니.
야렐리가 화 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야렐리의 심정과 달리 올리버는 정말 그렇다 할 의견이 없었다.
이곳 상황을 이야기한 것도 그저 이브가 자신에게 알려준 걸 케빈에게 그대로 이야기한 것뿐이었으니.
[참으로 인정머리가 없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곳에 갇힌 사람들을 버리고 가자고 이야기하다니 말이야.]
핏덩어리 인간이 도발이랍시고 말했지만, 올리버에겐 그렇다 할 충격을 주지 못했다.
“아뇨, 의견이 없다고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구하자고 하셔도 되고, 안 구하고 빠져나가셔도 딱히……. 여기 계신 분들 다들 마법사들이니, 이런 상황에 어느 정도 각오가 있으실 것 아닙니까?”
올리버가 자신을 바라보며 몰이해란 감정을 빛내는 야렐리와 핏덩어리 인간에게 설명했다.
해결사 일을 하면 살해당하는 것도 각오해야 하듯, 인체실험을 자행하는 마법사라면 자신들 역시 비슷한 처지가 될 각오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좀 그렇지 않은가?
[너는 좀……. 거슬리는군. 아까 전부터 말이야. 마음에 안 들어.]
핏덩어리 인간이 그리 말하며 일렁이더니 핏빛 칼날을 만들어 올리버를 공격하려 했다.
올리버는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야렐리가 먼저 움직여줬기에.
핏덩어리 인간의 도발과 압박에 정신이 흔들리던 그녀는 곧 평정심을 되찾아 능숙하게 지면에 마력을 주입, 한 박자 빠르게 핏덩어리를 얼려버렸다.
‘역시 풀지 못하는구나.’
올리버가 자력으로 얼음을 깨지 못하고 기능이 정지한 핏덩어리 인간을 보며 생각했다.
바토리처럼 혈액의 온도를 높여 스스로 빠져나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예상대로 혈마법의 수준이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았다.
바토리의 혈마법에 비하면 그 수준이 몹시도 낮았다.
올리버는 허리춤에서 톤파를 꺼내 얼어버린 얼음덩어리를 그대로 후려쳐 부수고, 그중 적당한 크기의 얼음 파편을 품 안에 넣었다. 혹시, 몰라 말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야렐리는 마력을 끌어모아 손안에서 술식을 전개 그대로 양쪽 복도 쪽으로 얼음 마법을 쏴 이쪽으로 달려오는 개량 인간을 얼려버렸다.
고민을 끝낸 야렐리가 물었다.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 건가요?”
“예."
올리버가 최대한 야렐리를 보호하고, 도와주라는 케빈의 말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납치된 사람들 구해 주실 생각입니까?”
“예. 상대 뜻대로 움직여 주는 거 같지만, 이대로 놔뒤도 좋을 것 같지는 않아서요.”
올리버도 동의했다.
창고에 가둔 사람들을 애써 옮기고, 피 풍선으로 바꾼 것으로 볼 때 괜히 이동시킨 게 아닌 것 같으니.
인력도 모자란 와중 그런 작업을 한 이유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터.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방해하는 게 좋을 듯했다.
“문제는 사람들과 그 피 풍선이라는 걸 제대로 구분할 수 있을지인데요.”
“아, 그건 제가 할 수 있을 듯합니다.”
***
사람으로 위장한 피 풍선과 진짜 사람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올리버는 그 미세한 차이를 한번 본 덕분에 얼추 구분할 수 있었다.
올리버는 야렐리를 도와 사람들이 갇힌 방문을 부수고, 개중에 피 풍선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지목해 야렐리 얼음 마법으로 열려 아까 전처럼 터지게 못 하게 했다.
그렇게 안전을 확보한 후 올리버는 의자에 묶인 사람들의 벨트를 풀어 도와줬다.
대부분 막 잠에서 깬 덕분에 사람들을 추려내기 쉬웠는데, 개중에 잠에서 깨지 않은 사람은 올리버가 자세히 살펴봐 가려낼 수 있었다.
묶여 있던 사람들 모두 혈마법의 영향 탓인지, 제대로 거동하기도 어려워했지만, 다행히 혈마법의 수준 자체는 낮아 올리버가 접촉해 마력을 간섭하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도와줄 수 있었다.
‘역시, 마탑의 혈마법과 바토리 패밀리의 혈마법 메커니즘은 똑같네. 차이라면 첨가된 흑마법의 비율…... 바토리 패밀리와 생명학파가 거래하는 도중에 얻게 된 혈마법 지식을 자신들 방식으로 바꾼 건가?’
올리버가 스무 명도 넘는 사람들을 풀어주며 생각했다.
그 외에도 의문인 점은 계속 쌓여만 갔다.
가령, 자신을 잡아두라는 명을 위에서 받았다는 원마스터의 말이라던가…... 분명, 혈마법 소학파의 원마스터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생명학파 그랜드 마스터뿐일 텐데 말이다.
도대체 왜?
‘혹시, 케빈 교수님 때문인 건가?’
“이게 마지막인가요?”
야렐리가 마지막 방 앞에서 말했다.
그녀는 막 구속에서 풀려 동작이 굼뜬 사람들을 스무 명도 넘게 지키며 전방위로 압박해오는 개량 인간과 소수의 마법사를 상대로 혼자 싸워 이기고 있었다.
정식 마법사가 돼도 이상하지 않을 실력자라더니, 소문 그 이상이었다.
물론, 장기간 다수를 상대해 체력과 마력 적잖게 소비했지만 말이다.
올리버가 대답했다.
“예, 이분들이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올리버가 흑마법사의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며 말했다.
야렐리는 안도하며 다시 움직이려 했다.
“좋아요. 그럼, 이제 움직이-”
야렐리는 말을 하다 말고 중간에 멈췄다. 야렐리의 얼음 마법으로 얼린 개량 인간이 요동치는 게 아닌가.
정상에서 벗어난 모습에 야렐리는 경계하며 마력을 끌어모았고, 올리버도 그 모습을 바라봤다.
개량 인간의 생명력이 요동치더니, 폭탄처럼 터지며 피를 매개로 핏빛 머리 남자가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데릭이 말한 혈마법 소학파의 원마스터였다.
그는 주변에 흩뿌려진 혈액을 조종해 칼날처럼 휘두르며 말했다.
“역시 내가 나서야 한다니까.”
날카롭게 움직이는 핏빛 칼날.
야렐리는 다시 한번 사방을 얼음으로 뒤덮고 거대한 얼음벽을 만들어 방어했지만, 핏빛 칼날은 야렐리의 얼음을 너무나도 쉽게 잘라버렸다.
구해진 다른 마법사들은 성치 않은 몸임에도 마력을 끌어모아 야렐리를 도와주려 했지만, 혈마법 원마스터는 피를 송곳처럼 만들어 그들을 가볍게 꿰뚫어버렸다.
[블러드 도네이션(Blood Donation)]
영창과 함께 몸을 꿰뚫은 피의 송곳은 대상의 혈액을 빨아들여 미라처럼 쭈그러뜨렸다.
당연히 피를 흡수한 송곳의 크기는 커졌고, 그 모습에 야렐리는 당황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원마스터가 물었다.
“정말 우리 쪽으로 올 생각 없나?”
야렐리는 가볍게 제압당한 자신의 마법을 본 다음 무엇인가를 결심하며 두꺼운 안경을 벗어 혈마법 원마스터를 노려봤다.
원마스터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피의 장막을 만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야렐리의 시선이 닿은 피의 장막 일부분이 얼기 시작했다.
올리버는 저게 뭔가 싶었다.
“아이스아이의 고유 능력……! 무모하군. 아직 제대로 못 다루는 거 아닌가?”
원마스터가 소리쳐 친절히 설명해줬다.
그 말은 사실인 듯 야렐리의 눈은 서서히 냉기에 침식되어 눈 주변이 트고, 피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야렐리는 멈추지 않았다.
“당신 하나 정도는 제압할 수 있습니다!”
진심. 그러나 원마스터는 이를 비웃었다.
“어디 한번 확인해 볼까? ……[혈화(血火)]”
원마스터는 영창했고, 거의 다 얼려가던 피의 장막은 갑자기 부글부글 끓더니 끈적끈적한 핏빛 화염으로 발화했다.
야렐리의 눈마저 압도할 정도.
그는 화염을 조종해 야렐리를 덮치려 하였고, 야렐리는 안경을 다시 쓰며, 거대한 얼음벽으로 혈화를 막으려 했다.
비록, 화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아 그대로 녹고 말았지만.
뒤로 도망치는 마법사들과 덮쳐오는 핏빛 화염 그리고 맞서 싸우려는 야렐리.
그 모든 것을 본 올리버가 혈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제논?!”
“미친놈. 나사 빠진 줄은 알았지만, 스스로 죽을 정도로 미친놈일 줄은 몰랐군."
올리버가 짜증 났는지, 원마스터는 기뻐하며 혈화의 화력을 한껏 높였다.
재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속셈.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혈화의 통제권이 점점 넘어가는 거였다.
"바토리 씨와 데릭 씨 마법을 본 게 도움이 되네요.”
올리버가 혈화를 갑옷처럼 두른 채 말하곤, 그대로 원마스터에게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