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6. 이브(Eve) (1) >
“마법에 간섭해 제가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안개와 접촉하던 올리버가 대뜸 말했다.
케빈은 이제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그럼에도 익숙해지지 못하고 물었다.
“설마, 공간학파 마법도 사용할 수 있나?”
“아뇨. 제대로 사용할 줄은 모릅니다.”
"제대로 사용할 줄은 모른다니?”
“아무런 매개도 없이 허공에서 만들 수 없고, 종이를 매개로만 사용할 수 있거든요. 처음 저희가 싸웠을 때 기억하십니까?”
“아……. 기억나. 종이를 매개로 포탈을 두 개 소환했지. 그중 하나에서 좀비가 세 마리 튀어나와 날 붙들고 자폭했고.”
“아……. 악의는 없었습니다.”
“사소한 건 넘어가지.”
케빈이 진심으로 말했다. 자신도 올리버를 죽이려고 했으니.
“어쨌건, 그 종이가 마법 아이템이 아닌 네 마법이라고?”
“예. 아이템이라기보다는 편법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편법?”
“예. 공간학파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어 만든 방법이거든요……. 어르신의 기술에 비하면 초라합니다.”
올리버가 솔직한 자신의 평가를 이야기했지만, 정작 케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마법이란 편법 자체도 하나의 실력으로 치부해야 하는 학문이기에.
허나, 이런 문제로 토론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자잘한 이야기는 일단 전부 뒤로 미루지. 요컨대 지금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거야?”
“예. 확실하진 않지만, 안개의 공간 마법 술식을 이용해 원하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을 듯합니다.”
올리버의 대답에 케빈이 기뻐했다. 예상치도 못한 데서 큰 문제가 해결됐으니. 그러나 곧바로 다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실상 지금 사태는 란다의 생명학파와 갈로스의 생명 연금술 학과가 힘을 합친 것으로 추정돼, 어디로 가 어떻게 대응할지 감이 안 왔다.
심지어 그들의 협력자가 얼마나 있을지도 미지수였고.
상대의 힘이 너무 강한 데 반해, 이쪽으로서는 정보가 너무 없었다.
“혹시, 안개 밖으로도 이동할 수 있나?”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안개 밖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의외군.”
“예?”
“넌 호기심 때문이라도 그러지 말자고 했을 것 같은데. 또, 데릭과 펠릭스를 비롯해 학생들도 도와야 한다고 말할 것 같았고.”
“아……. 상황이 상황이고, 일단, 전 지금 교수님 개인 직원이니까요?”
올리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뭐, 말 자체가 틀린 건 아니었다.
개인 직원은 교수의 말을 듣는 게 제 역할에 맞았고, 또, 지금 상황에서 누굴 돕는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됐으니.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어려운 상황.
여기서 혼자 빠져 나간다 해도 그 누구 하나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혼자서라도 도망쳐서 지금 상황을 밖에 알리는 게 더 맞았다.
‘분명, 그게 더 맞는 거긴 한데…….'
케빈은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더니, 이욱고 입을 열었다.
“제논.”
“예, 교수님.”
"세계수가 어디 있는지 아나?”
“예, 알고 있습니다. 수맥(水服)을 살펴볼 때 확인했습니다.”
"그럼, 일단 세계수가 있는 그곳으로 가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 하니까……. 부탁해도 되겠어?”
“예, 물론입니다.”
케빈의 말에 올리버가 흥미를 빛내며 대답했다. 그리곤 몸에 저장한 마력을 출력, 안개에 깃든 마력과 술식에 간섭을 시도했다.
놀랍게도 올리버의 말대로 이 방대하고 복잡한 술식 일부분이 반응하였다. 케빈은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재능이란 범주에 넣을 수 있을지……
“갑니다.”
올리버의 말과 함께 장막처럼 처져있던 안개가 일렁이며, 수십 가닥의 촉수 같은 입처럼 올리버와 케빈을 집어삼켰다.
잠시 후 뿌연 안개가 걷히며 새로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레이크 빌리지에 걸쳐있는 숲 근처로, 그곳에는 막 싸움을 끝마친 테렌스 로어와 야렐리 아이스아이가 숨을 헐떡인 채 서 있었다.
그들 주변으로 얼어붙은 바닥과 날카롭게 솟구친 빙산(氷山), 포격을 연상케 하는 구덩이 수십 개와 처참하게 찢기고, 얼어붙은 시체가 다수 널브러져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만남.
너나 할 것 없이 침묵하는 와중, 안개에서 손을 뗀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두분다 안녕하십니까?"
***
침묵.
예상치 못한 만남과 올리버의 인사에 테렌스와 야렐리는 모두 침묵했다.
뇌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
케빈은 배려 차원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들에게 다가갔고, 이윽고 야렐리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죠?”
"생명학파와 생명 연금술 학과가 일으킨 짓이야.”
야렐리의 질문은 그게 아니라 어떻게 이곳으로 온 건지 물은 거겠지만, 케빈은 일부러 다른 대답을 했다.
이곳에 온 걸 설명하면 올리버에 관해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해야 했는데, 케빈 개인 사정상으로나, 지금 공적인 상황으로나 백해무익했다.
현재 가장 중요한 건 상황을 최대한 정확히 파악하고, 타개책을 찾거나, 혹은 이곳에서 도망치는 거였다.
야렐리는 지친 탓인지 바로 반박하지 못했고, 케빈은 상황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바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테렌스. 필립 중장님은 어디 계시지?”
“테어도어가 호출해 만나러 갔어. 수행원 한 명도 없이……. 틸다 원마스터도. 생명학파가 저지른 짓이라는 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생명학파와 생명 연금술 학과가 주최한 학회에서 이런 대규모 결계가 발생했는데, 상식적으로 누가 일으킨 거겠어? 또, 이 시체도 그 증거야.”
케빈이 사람 거죽에 개 두개골을 넣은 형상의 키메라를 가리키며 말했다.
“키메라?”
“정확히는 개량인간이라는 거야. 생명학파에서 연구하고 있던 연구물이지. 이곳 마을 사람들과 호텔 직원을 상당수 이걸로 만들었어.”
케빈의 발언에 야렐리가 놀랐다.
너무나도 끔찍하고 상식 밖의 이야기였으니. 아니, 그 이전에 그녀는 이런 연구에 대해 아는 게 부족한 듯했다.
그 증거로 테렌스는 놀랐지만, 그 결이 달랐다. 연구 자체는 그러려니 했지만, 이런 식으로 이용한 것에 놀란 눈치였다.
테렌스가 정보를 모으기 위해 질문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원한다면 설명해줄 수 있지만, 괜찮겠어? 시간이 없는데.”
케빈의 말은 사실이었다.
현재, 시간이 몹시도 부족했다. 이쪽 상황을 파악한 미지의 적이 안개를 다시 조종해 우리를 떨어뜨릴 수도 있었고, 테어도어를 만나러 간 필립과 틸다의 안전 역시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당장 눈앞의 상황과 직접적으로 상관없는 세세한 것까지 파악할 여유 따위 없었다.
당연히 종군마법사로 복무 중인 테렌스 역시 이 사실을 인지했고.
“맞는 말이네…….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지.”
“이제 좀 말이 통하네. 야렐리. 그대는?”
케빈이 귀찮은 말이 나올 것을 예방하기 위해 야렐리를 보며 물었다.
그녀의 할머니 역시 테어도어를 만나러 간 상황인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스럽고 의문스러운 것투성이였으나, 당장 눈앞의 사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으니.
“다행이네. 그럼, 움직이지.”
어느새 상황을 주도한 케빈이 숲속으로 걸어갔다.
가는 도중 올리버를 불러 세계수가 어디 있는지 물었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올리버는 기민하게 움직여 세계수가 어디 있는지 안내해줬다.
“세계수에 접속하려고?”
세계수 앞에 도착하자 테렌스가 물었다.
“그래.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나마 제대로 파악할 수단은 세계수니까.”
“소용없어.”
“소용없다니? 무슨 말이야?”
"나도 접속해 봤는데, 실패했거든.”
“실패하다니?”
“말 그대로야. 룻 넷(root net)에 접속하려는 순간 거대한 벽에 가로막혔고, 곧바로 튕겨 나왔어.”
테렌스의 실력을 아는 케빈은 놀라며 난감한 기색을 빛냈다.
케빈과 테렌스 모두 전문 넷 내비게이터(Net Navigator)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테렌스가 실패했다는 건 무언가가 방해를 했다는 것.
아무래도 생명학파가 보통 작정한 게 아닌 듯했다.
세계수 접속을 방해하려면 접속을 시도하는 자들 이상의 수와 실력을 갖춰야만 가능했다.
아무리 생명학파라도 그만한 인력을 보유하는 건 말이 안 됐고.
케빈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넷 내비게이터의 방해야?”
"그건……. 아닌 것 같아. 넷 내비게이터의 방해면 의식이 파도처럼 서로 부딪혀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말 그대로 벽에 가로막힌 느낌이었거든. 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넷 내비게이터는 아니야.”
케빈은 조용히 올리버를 바라봤다. 올리버는 케빈이 왜 바라보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케빈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일단 한번 접속해 봐야겠어. 해본 다음에 생각해 보지.”
테렌스와 야렐리 누구 하나 말리지 않았다. 만약에 케빈의 실력이 좋아 세계수 접속에 성공하면 이득이었고, 실패해도 손해는 아니었으니.
케빈은 손끝에 마력을 모아 세계수에 댔고 눈을 감았다.
그에 맞춰 테렌스는 야렐리와 올리버에게 명령해 무방비해진 케빈을 둘러싸 지키게 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케빈이 입을 열었다.
“진짜군……. 거대한 벽에 둘러쳐져 있어.”
반응을 보아 접속에 실패한 듯했다. 테렌스와 야렐리가 이제 어찌할 건지 묻으려는 순간 케빈이 믿을 수 없는 발언을 했다.
“제논……. 네가 한번 접속해 봐.”
***
케빈을 제외한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게 세계수 접속은 타고난 재능과 기교, 정신력이 뒷받침되어야만 가능한 기술.
마법사 중에서도 할 수 있는 자들은 소수였다.
그런데 그걸 마법사는커녕 학생도 아닌 마력불생성증 교수 개인 직원에게 시킨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놀란 건 당사자인 올리버도 매한가지였다.
단둘이 있을 때면 모를까 테렌스와 야렐리가 있는 와중에 이런 말을 하다니. 심히 당황스러웠다.
올리버가 이에 관해 묻듯 케빈을 바라보자, 케빈 역시 올리버를 바라보며 눈으로 이야기했다.
구체적인 뜻까지는 모르겠으나, 상황이 급하니 일단 지금 급한 일부터 하자는 뜻 같았다.
올리버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 부정해봤자 의미 없을 테고. 또, 상황이 심각한 것도 맞았으니.
“……실례하겠습니다.”
올리버가 케빈과 위치를 바꿨다. 야렐리와 테렌스는 더욱 놀란 반응을 보였다.
테렌스와 야렐리가 지금 상황에 질문하려 했지만, 상황을 먼저 주도한 케빈이 가볍게 그들을 침묵시켰다.
지금 상황에서 자잘한 건 무시하라고 말이다.
입을 다무는 테렌스와 야렐리. 올리버는 그렇게 뒷수습을 케빈에게 맡긴 채 몸 안에 저장된 마력을 손끝으로 모아 세계수에 가져다 대 접속을 시도했다.
팍———!
강한 바람에 촛불이 꺼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올리버는 세계수의 안 룻 넷(Root Net)에 접속했다.
테렌스와 케빈의 말처럼 올리버의 눈앞에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검은 벽이 세워져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현상.
그러나 기이하게도 올리버는 과거 이런 비슷한 일을 한번 겪은 기시감을 느꼈다.
‘언제였더라…….'
아, 기억났다. 마텔에 잠입하기 전 정보를 얻기 위해 세계수에 접속했을 때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생명 연구소 마텔의 정보를 확인하던 중 허공에서 거대한 눈이 나와 올리버에게 질문했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라고.
그때 그 눈깔과 이 벽은 비슷한 느낌을 풍겼다.
‘또, 이브(Eve)와도 비슷하고.’
당시 올리버는 약간 시간이 다급했던 상황인지라 알수 없는 집념을 빛내며 귀찮게 하는 눈깔을 향해 손을 휘둘러 유리 파편처럼 깨트렸고, 그때의 기억을 참고해 올리버는 다시 한번 검은 벽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급한 상황이었으니까.
다행히도 절대 뚫리지 않을 것 같던 벽은 올리버의 손짓 한 번에 살얼음처럼 부서졌다.
그와 함께 벽 너머의 허공 세계 룻 넷(Root Net)이 눈에 들어왔다.
“이브(Eve). 저 좀 도와줄 수 있나요?”
올리버가 룻 넷에 진입하자마자 소리 내어 말했고, 올리버의 말은 메아리처럼 퍼지더니, 눈앞에 녹색계열로 통일된 에너지 덩어리가 빛처럼 빠르지만 부드럽게 나타났다.
이브였다.
[부르셨습니까? ……올리버.]
“예, 오랜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