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흑마법사-322화 (322/633)

< 322. 레이크 빌리지 (1) >

“그 양반 생긴 거랑 다르게 패션 감각이 좋구만. 과할 정도로.”

저녁 8시 50분. 케빈이 문 앞에서 기다리는 올리버를 보며 말했다.

그 이유는 올리버가 교수 개인 직원이라는 신분치고 과할 정도로 잘 챙겨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올리버의 사정을 다 들은 에디스가 고심 끝에 챙겨준 거였으니.

정장과 구두, 허리띠와 손목시계 등 모든 게 최고였다.

케빈의 것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

더 웃긴 건 그렇게 차려입었음에도 올리버는 퍽 자연스러웠다는 거였다.

옷의 격에 비해 사람이 맞지 않으면 옷이 사람을 입은 듯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기 마련이었는데, 올리버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마치 타고난 듯.

자신을 살펴보는 케빈을 보며 올리버가 물었다.

“좀 이상한가요? 교수님.”

“아니, 그렇게 이상하진 않아. 일개 직원치고 너무 잘 차려입은 것만 빼면……. 에디스라는 그 양반 날 싫어하나 보구만.”

“그분은 대부분 다 싫어하십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까요?”

“다른 옷?”

“예, 일반 정장이라면 몇 벌 챙겨와서요.”

“됐어. 수수한 것보다는 화려한 게 낫지.”

케빈은 그렇게 말하고는 연구원인 데릭과 펠릭스와 합류. 호텔 최상층에서 주최하는 사교장에 도착했다.

객실과 마찬가지로 사교장 역시 막 새로 지은 듯 화려했으며, 그뿐 아니라 온도와 습도, 공기 중에 은은히 퍼진 향기까지 모든 게 최상의 상태였다.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질 지경.

그런 사교장에는 깔끔한 정장을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마법사들이 벌써 한 아름 모여 있었다.

“역시, 화려하구만.”

데릭이 낮게 중얼거렸다.

아그니 소학파의 명문가인 레드힐 가문 소속답게 그는 사교장에 참석한 손님들이 누군지 대충 아는 눈치였다.

반면에 올리버와 펠릭스는 전혀 알지 못해 답답했는데, 데릭은 이를 눈치채고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자진해서 말이다.

“저쪽 사람들은 로큘리 대학의 이름난 교수들이야. 대화하는 사람들은 대륙 중앙의 마법사 가문……. 어? 혈마법 소학파의 원마스터도 나오셨네?”

데릭이 핏빛 머리 남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원마스터(One Master)라는 높은 자리에 있음에도 남성은 꽤 젊어 보였다.

“저분이 혈마법 소학파의?”

“그래. 나도 진짜 오랜만에 보네. 생명학파에서 나온 지 10년 좀 넘은 신생 학파의 수장이라 그런지 외부활동을 잘 안 하는데.”

데릭은 신기해하면서도 그러려니 다시 설명을 시작했고, 펠릭스와 올리버는 관광객처럼 그의 설명대로 손님들을 살펴봤다.

사교회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은 고위직이라 하더니, 그 말을 증명하듯 모두 방대하고 질 높은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 생명학파의 영향력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 우리 마탑 쪽 사람도 저기 있네.”

데릭이 사교장 한쪽에 모인 사람들을 가리켰다.

마탑에서 일할 때 몇 번 멀리서 보거나, 지나쳤던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하지만 그중 가장 낯이 익는 건 오늘 차를 태워준 필립이었다.

그는 분명 노년에 접어들었음에도 거대한 키와 덩치 덕분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뿜었고, 그로 인해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나방처럼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스스로 자부한 것처럼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다는 증거.

그런 그는 유쾌하게 사람들을 상대하는 도중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는 케빈을 발견하곤 반갑게 손을 흔들며 불러주었다.

“케빈! 이쪽으로 오게!”

사교장에 어울리지 않은 아주 큰 목소리. 허나, 타고난 존재감과 매력 덕분인지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케빈을 챙겨준 것에 놀랄 뿐.

"중장님."

케빈은 차분히 다가가 예를 갖춰 필립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필립 역시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농담을 섞지 않고, 예를 갖춰 인사를 받아줬다.

농담을 좋아하지만 가릴 줄 안다는 거였다.

“그래, 반갑네. 여기서 보니 반갑구만……. 여러분께 소개해 주겠소. 케빈 중령. 아니지, 아니지. 지금은 마탑 교수로 재직 중인 마탑의 마스터 케빈 던바라 하오. 여기 마탑에서 근무 중이신 분들은 알겠지?”

필립은 자연스럽게 대화 중이던 사람들에게 케빈을 소개해 주었다.

케빈은 소개에 맞춰 사람들에게 정중히 인사했고, 사람들 역시 필립의 체면을 생각해 예를 갖춰 인사를 받아주었다.

덕분에 사교장에 들어와도 섞이지 못하며 겉돌던 케빈은 간신히 남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 장소에 녹아들 수 있었다.

필립이란 사람은 보면 볼수록 배려심이 깊었다.

‘응?’

대화가 진행되던 중 올리버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질적인 마력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서늘하다고 할까?

올리버의 시선 끝으로 수많은 인파가 길을 트는 장면이 들어왔으며 , 이윽고 한 노파를 볼 수 있었다.

빛나는 은빛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이를 먹었음에도 곧게 선 도도한 노파를.

그녀의 뒤로 야렐리와 수행원으로 보이는 다수의 여성 마법사들이 따라왔다.

“아, 원마스터(One Master) 틸다! 오랜만입니다.”

필립은 특유의 스스럼없는 태도로 노파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했다.

틸다라 불리는 은빛 머리 노파 역시 필립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오랜만입니다. 필립 중장.”

서로 다른 분위기의 두 사람. 그럼에도 올리버는 서로에 대한 존중심을 엿볼 수 있었다.

"설마, 틸다 부인도 여기서 볼 줄은 몰랐소. 혹시, 나처럼 초대장을 받아 오신 것입니까?”

“예."

“허, 테어도어 씨께서 아주 대단한 걸 준비하셨나 보군. 혹시 다른 원마스터들도 오셨습니까?”

“전부 다는 아닙니다. 가이아 소학파의 원마스터는 외부활동을 자제해 대리인을 보냈고, 다른 분들은……. 아, 혹시, 그는 만나셨습니까?”

'그’ 상당히 추상적인 명칭이었으나, 테어도어는 한 번에 알아들었다.

“안타깝게도 안 오시는 모양입니다… … . 케빈!”

필립이 케빈을 버럭 불렀고, 케빈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다가갔다.

“안 오신다고 했지?”

“예, 그렇습니다. 중장님……. 안녕하십니까? 원마스터 틸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케빈이 필립의 질문에 대답한 뒤 틸다에게 예를 인사했다.

겉으로는 예를 갖춰 인사했지만, 케빈은 그녀에게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틸다 역시 결이 다르긴 해도 불편한 감정을 빛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케빈이 말하길 마탑에 들어오기 위해 스카디 학파의 마스터이자, 야렐리의 아버지. 즉, 틸다의 가족을 철저하게 쓰러트렸다고 했으니.

틸다는 케빈을 잠시 바라보더니 인사를 받아주었다.

“만나서 반갑네……. 야렐리에게 듣길 수업이 꽤 훌륭했다고 들었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스승님께서는 개인적인 연구 때문에 오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대신에 안부를 물어 달라 제게 부탁하셨습니다.”

“연구?”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던 틸다가 의문과 함께 눈을 살짝 구겼다.

멀린이 연구를 한다는 게 꽤 놀란 눈치였다.

“허, 그분이 연구라……. 저도 그게 뭔지 참 궁금하군요.”

케빈이 대답하려는 찰나,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젊고 생기 있는 목소리.

다들 고개를 돌리자 로큘리 대학 소속의 마법사들을 볼 수 있었다.

올리버는 그중 로즈에게 가장 먼저 시선이 갔고, 또 고정됐다.

로큘리 대학 사람 중 유일하게 올리버가 아는 사람이고, 또한 이곳 사교장에서 유일하게 감정을 볼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허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올리버와 전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말을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무리 가장 앞에선 여성에게.

분위기를 보아 상당히 높은 위치의 사람인 것 같았다.

‘근데 꽤 젊으시네?’

올리버가 여성의 외관을 살피며 생각했다.

신경 쓰이는 것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갑자기 난입한 그녀를 보자 모두가 놀랐다.

늘 침착하던 케빈을 포함해 감정 표현에 솔직한 필립, 차가운 분위기의 틸다 등. 여러 사람이 입도 열지 못할 정도로 놀랬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런 반응인지 올리버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필립이 곧 이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혹시……. 생명 연금술 학과의 학장 데지헤 듀란스 아니오?”

“네, 바로 접니다.”

"허……. 어째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아주 젊어지셨구려.”

필립이 감탄했고, 데지헤 듀란스는 우월감에 젖어 든 미소로 화답했다.

***

놀랍게도 데지헤 듀란스란 여성의 나이는 올해 64살이라 하였다.

분명 겉보기에는 삼십 대 초반 같았건만……. 그녀는 자신의 본래 나이에 절반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나이에 대해 알고 있던 마법사들이 왜 그리 놀랐는지 올리버도 공감할 수 있었다. 젊음이란 축복은 극소수의 재능을 가진 마법사들도 쉽사리 되찾을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이를 증명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잔잔하게 물결치던 사교장은 바위가 떨어지듯 일대의 파문이 일어났다.

필립과 틸다 등. 마탑의 거물들과 인사를 나누려던 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작스럽게 젊어진 생명 연금술의 학장과 대화하기 위해 일제히 몰려들었다.

흡사, 어미를 쫓아가는 병아리 떼.

첫날에는 가볍게 인사만 나누는 게 관례라는 게 무색해질 정도로 사교장은 소란스러워졌고, 자연히 생명학파와 생명 연금술 학과의 연구 성과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됐다.

팸플릿에 분명 신체 개조를 통한 수명과 젊음의 연장이라는 항목이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무도 기대하지 못한 듯했다.

'그게 당연한 거긴 하지만.’

그렇게 사교장에는 강렬한 호기심과 다양한 형태의 욕망이 번쩍번쩍 빛났고, 올리버는 의도치 않게 그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후우……. 좀 낫네.”

잠시 후, 사교장을 빠져나온 올리버가 말했다.

젊음을 되찾은 마법사와 그걸 도와준 기술에 올리버 역시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현재 올리버의 신분과 위치, 상황으로는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거라 판단해 그냥 나왔다.

실제로 한 마법사가 생명학파와 생명 연금술 학과의 연구 성과인지 직설적으로 물음에도 데지헤란 여성은 자세한 이야긴 테어도어와 함께 정식 발표 때 대답해 주겠다고 둘러델 뿐이었다.

그렇기에 올리버는 적당히 시간이 보내다 케빈의 허락을 구한 뒤, 지체없이 사교장을 빠져나왔다.

흥미롭긴 하지만 당장 알 수 없는 걸 지켜볼 바에는 다른 궁금한 걸 살펴보는 게 이롭다고 판단해 말이다.

가령, 마력을 품은 안개를 만드는 호수라던가 말이다.

“역시나 안개가 짙네.”

올리버가 호텔 언덕 아래로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사람이 다닐 길이 아닌 차도라 그런지 상당히 걸은 뒤에야 마을로 내려갈 수 있었다.

언덕 아래 마을은 호텔보다 저지대라 그런지 안개가 더 짙었으며, 어둠까지 더해져 시야 확보가 더 힘들었다.

그런 탓인지, 거리에는 사람도 없었고.

뭐, 올리버는 사람을 보러 온 게 아니라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터벅. 터벅. 터벅.

올리버는 한정된 시야에도 불구하고, 팸플릿에 있는 지도를 참고해 호텔을 기준으로 호수로 갈 수 있는 길을 따라 걸었다.

호수가 관광 명물이라 그런지 지도에 제대로 표기되어 있고, 큰 도로로 길이 나 있어 헤매는 일은 없었다.

중간중간 지나치는 여관이나, 집에서 시선 같은 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 외에는 그렇다 할 어려움이나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채 올리버는 울창한 숲을 지나 호수에 도착했다.

호텔에서 멀리 봤을 때도 보통 마력을 머금은 게 아니란 걸 알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그 이상이었다.

얼음 땅만큼은 아니지만, 마력의 양이 상당했다.

올리버가 추출해 펑펑 써도 될 만큼.

가만보니 호수 외곽 마을 외에는 일절 손을 안 댔는데, 어쩌면 사람의 손을 거의 타지 않은 자연일수록 마력이 많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응?"

올리버가 마력을 머금은 거대한 호수와 그 주변을 살펴보던 중 신경 쓰이는 걸 발견했다.

흑마법사의 눈을 집중하고 집중하니 호수 저 아래에 여러 개의 수맥(水服)이 뚫려있는 것이 보였다.

호숫물이 흐르는 수맥. 수맥은 다방향으로 쭉 뻗어 나가 마을 전체를 아울렀다.

아무리 봐도 자연적인 수맥이 아니었고……

올리버는 본능적으로 팸플릿과 펜을 꺼내 자신의 위치를 확인, 지도 위에 펜을 긋기 시작했다.

< 322. 레이크 빌리지 (1) > 끝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