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1. 도착 (3) >
"……그리하여 우리 로어 가문은 왕국군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지.”
맞은편 좌석에 앉은 필립 로어가 사자 갈기 같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올리버가 손뻑을 치며 감탄했다.
“오……. 대단하군요.”
겉으로만 맞장구치는 게 아닌 진심으로 말이다.
그도 그럴 게 필립이 말한 로어 가문의 역사는 꽤 흥미로웠다.
마법이란 초인적 힘 때문에 존중받으면서도, 견제받는 마법사 중 먼저 시대의 흐름을 읽고 왕국에 충성을 표해 그 일부가 되다니. 더 대단한 건 편입된 후에도 멈추지 않고 노력해 단순한 인간 중화기에서 조직의 중추로 그 역할을 넓혔다는 점이었다.
앞으로 더 필요할 종군마법사 시스템을 짜고, 전문 종군마법사 양성 기관을 설립하며, 마법을 바탕으로 한 군 체계 및 전략 정립, 마법 무기 개발 시스템 같은 걸 개발해 말이다.
체스판의 말(馬)에서 말(馬)을 다루는 사람이 된 것.
그 과정은 해당 지식이 없는 올리버에게도 흥미 그 이상의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올리버는 이야기 중간중간 의문인 부분을 질문했다.
가령,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으며, 어떻게 이를 실행시켰는지.
기쁘게도 필립 로어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등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전부 올리버에게 해줬다.
“전쟁 현장에서 직접 뛰고 병사들과 부대끼며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라고 내 증조부께서 말씀하셨지. 필요한 장비, 병사가 필요한 지원 및 어려움. 그래서 우리 집안의 남자들은 모두 현장직부터 시작하지. 현장을 모르는 행정은 탁상공론일 뿐이니.”
“음……. 제가 잘 몰라 그러는데, 위험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위험하지. 전쟁터란 개인의 강약을 불문하고 죽음을 초래할 수 있거든. 눈먼 총알에도 재수 없게 죽을 수 있는 게 전쟁이니……. 이 녀석도 한번 죽을 뻔했고.”
필립이 자기 옆에 구겨 앉다시피 한 테렌스를 가리켰다.
테렌스 역시 건장한 남성이었지만, 필립 옆에 있으니 어린아이처럼 작아보였다.
그가 말했다.
“뭐……. 케빈 덕분에 목숨을 한번 부지했지만요.”
테렌스의 말은 진심이었다. 허나, 케빈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전 그냥 제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드문 것도 사실이지.”
필립이 능숙하게 케빈의 말을 동의하면서도 부정했다.
“아! 맞다……. 그건 그렇고 아까 전 하던 이야기는 마저 나눠야지?”
“무엇을 말씀입니까?”
"케빈 자네 여자 있는지 말이야? 대답해봐. 가볍게 즐기려고 만나거나, 혹은 결혼을 생각하는 여자 있나?”
케빈이 다시 한쪽 눈썹을 올렸다.
“소용없으니까. 그냥 대답해. 젊은이 따위가 눈치 준다고 늙은이가 배려해줄 것 같나? 늙는 건 슬프지만 이럴 때는 감사하다니까."
필립이 뻔뻔하게 말하자 결국 케빈은 항복했다.
“하아……. 없습니다.”
“잘 됐군. 그럼, 내 손녀 소개해 줄까? 열아홉 번째인가, 스무 번째가 지금 짝이 없는데.”
올리버는 놀랐다. 손녀가 스무 명이나 있는 게 놀랍고, 또, 케빈에게 손녀를 소개해 주려는 것도 놀라웠다.
올리버가 그동안 봐온 마탑의 마법사치고는 상당히 파격적인 행보였다.
“저한테 너무나도 관대한 제안이군요.”
“자넨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니까……. 자네한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자네 나이도 나이고. 슬슬 결혼하고 애도 낳아야지?”
“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군요.”
"결혼하고 애 낳는 게 왜 시대착오적이야?”
“어쨌건 괜찮습니다. 제안은 감사하나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정말 진심인가? 설마, 자네도 자네 스승처럼 홀로 외로이 늙어갈 생각이야? 그건 슬픈 건데?”
케빈은 짜증을 빛내며 침묵했다. 그리고는 이 자동차를 얻어 타게 된 원흉인 올리버를 바라봤다.
필립의 시선 역시 케빈을 따라 올리버로 향했는데, 그는 대뜸 제안했다.
“자네 이름이 제논이라고 했지? 혹시, 자네는 군에 입대할 생각 없나?”
“죄송하지만, 전 마력무생성증입니다.”
“분명, 안타까운 거긴 하지만, 그것도 실력이 되면 문제없지. 남자는 능력이니까. 소문을 들어보니 제법 실력이 좋은 것 같던데? 홀로 열차 강도도 때려잡고, 마탑 학생들하고도 대련할 정도로?”
올리버는 살짝 놀랐다.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니.
“자기 몸 정도만 지킬 수준입니다.”
“또, 학생들도 잘 훈련시킨다고? 무슨 동방의 주술 같은 거로 말이야?”
“먼 동방의 사막 땅에서 건너온 시술(施術)입니다.”
“그래, 그거. 꼭 누가 그렇게 말하라고 한 것처럼 들리는 이름이네.”
올리버와 케빈이 움찔했다. 날카로운 추리처럼 말에 뼈가 있었다.
다행히 필립은 그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그냥 웃자고 한 말이야.”
케빈이 끼어들어 이야기 주제를 바졌다.
“중장님……. 중장님께선 어쩐 일로 이번 학회에 참석하신 겁니까? 원래 이런 자리는 직접 참석하지 않으셨잖습니까?”
“뭐, 그렇지. 초대받았거든. 테어도어 씨께.”
“초대요?”
“그래. 우리 가문이나 순수마력학파가 아닌 나에게 직접. 거절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 참가했네. 특히, 테어도어 씨라면…….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자네 스승님은 오시나? 그런 소문이 있던데.”
“아마, 안 오실 겁니다.”
“아……. 아쉽구만,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뭐, 자네가 온 것만으로 신기하긴 하지만.”
“안 올 이유가 없으니까요.”
케빈이 감정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한두 마디의 말이었지만, 말속에 숨은 뜻이 있는 것 같았다.
올리버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잠시 후, 창문을 통해 비치던 빽빽한 나무가 한 그루, 두 그루 줄어들더니,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프웨이(Halfway) 내륙에 있는 작은 관광지. 레이크 빌리지(Lake Village)였다.
팸플릿에 있던 지도대로 레이크 빌리지는 거대한 호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로, 곳곳에 생명학파와 생명 연금술 학과가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연구실, 건축물이 보였다.
마을에 도착하자 차량은 더욱 속도를 내 숙소인 마을 중심 언덕 위 거대하면서도 오래된 호텔에 멈췄다.
호텔은 처음에는 화려했으나, 세월에 흐름을 이기지 못해 퇴색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올리버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닌지, 차에서 내린 필립이 말했다.
“대륙 중앙 인근답군. 음침하구만.”
“동감입니다. 중장님.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올리버와 함께 내린 케빈이 인사했다.
“빈말이라도 고맙군. 학회가 보름 동안 진행되는 데 일정 있나?”
“일정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주최 측에서 준비한 발표물 중 흥미로운 걸 보며 쉬는 거지요.”
“사교회도 빼놓으면 안 되지. 학회란 단순히 지식의 장만이 아니니. 특히, 우리 같은 마법사들은.”
“예, 알고 있습니다. 사교회에도 참석할 생각이긴 합니다.”
“다행이네. 그럼, 중간중간 얼굴은 볼 수 있겠군. 만나서 반가웠고, 일단 여기서 헤어지지. 난 인사하러 가야 할 곳이 있거든."
“예, 알겠습니다.”
케빈과 필립은 그렇게 인사를 나눠 제각기 헤어졌다.
올리버는 케빈의 뒤를 따라 짐을 챙겨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어째 뭔가 좀 이상한 곳 같았다.
***
"오…….꽤 좋은데요?”
올리버가 케빈의 짐을 든 채 초대 손님을 위한 VIP룸에 들어오며 말했다.
호텔의 외관은 세월과 호수의 안개 때문에 우중충했건만, 호텔 내부와 객실은 생각보다 좋은 편이었다.
아니, 정정하겠다. 생각보다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좋은 편이었다.
깨끗한 것은 물론이요. 침대와 가구 모두 새것처럼 번쩍 번쩍했다.
“당연해.”
“예?”
올리버가 케빈의 짐을 풀며 되물었다.
“나름대로 신경 쓰는 학회인 줄은 알았지만, 이번 학회는 그 이상인 것 같아. 그러니 손님 대접도 최대로 신경 쓸 수밖에.”
“아…….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까 전 필립 중장이 말했잖아? 가문도 학파도 아닌 자신에게 직접 초대를 받았다고.”
"예.”
“그건 둘 중 하나야. 그 누구도 깜짝 놀라지 않고는 못 배길 연구를 했거나, 아니면 아주 중요한 거래를 제안하겠다는……. 구체적으로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각 조직의 수장들 선에서 다뤄질 중요한 건일 거야. 그랜드 마스터가 관여할 만큼.”
케빈은 조용히 의욕을 불태웠다.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부정인 감정을 기반으로 했지만.
뭔가 케빈 역시 생명학파와 인연이 있는 듯했는데, 꽤 신경 쓰였다.
‘신경 쓰이는 게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올리버가 짐을 풀며 아까 전 오면서 마주쳤던 호텔 직원들을 떠올렸다.
뭐라고 할까, 조금 느낌이 이상했다.
생명력과 마력 흐름 미묘하달까? 문제는 어떻게 미묘한지 콕 짚을 수 없다는 거였다.
어디서 한번 본 것 같으면서도, 그게 어딘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안개가 짙네요.”
올리버가 케빈의 짐을 다 정리한 후, 호텔 창문 밖을 보며 말했다.
올리버의 말처럼 마을 전체가 안개에 물들어 있었으며, 호수와 안개에 마력이 머금어져 있어 일반적인 시야뿐 아니라 흑마법사의 시야로도 제법 방해가 되었다.
케빈이 대답했다.
“호수 근처니까. 한때 이 호수의 관광 명물이라 하던군.”
“관광 명물요?”
“그래, 왜 이런 거대한 호텔이 있겠어? 마력을 머금은 호수와 안개는 몸을 담그거나, 공기를 들이켜는 것만으로 자잘한 질병을 완화해 준다고해 한때 유명 관광지였다더군.”
호오……. 놀라웠지만, 그럴듯하기도 했다.
현재 케빈 일행이 머무는 호텔 말고도 이 말을 곳곳에 크고 작은 여인숙이 널려 있었으니.
“하지만 제 눈에는 그렇게 관광지처럼 안 보입니다만? 방문자라고는 저희와 같은 학회 초대자들뿐이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 50년 전부터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으니까.”
“50년요? 이유가 뭐죠? 호수나 안개의 기능이 저하됐나요?”
올리버가 창문 밖 호수와 안개에 깃든 순수한 마력을 보며 물었다.
안개의 농도는 그리 짙지 않았지만, 질은 높았고, 호수의 경우에는 농도도 꽤 높았다.
“아니, 흑마법사 때문이야.”
“흑마법사요?”
“그래, 피리 부는……. 하아, 큰일 날 뻔했다.”
“예?”
“이쪽으로 이야기 빠졌으면 또 시간 잡아 먹혔을 테니까.”
올리버는 부정하지 않았다. 실제로 케빈이 대답해 줬으면 또 물어봤을 터였다.
“시간이 촉박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널널한 건 아니야. 우린 1박 2일에 걸쳐 배를 탔고, 몇 시간에 걸쳐 차를 타고 왔지. 그리고……."
케빈이 시계를 살펴봤다.
“3시간 후에 저녁 식사를 하고, 또 그 3시간 후에는 학회 첫 사교모임이 있을 거야.”
"예, 맞습니다.”
올리버가 대답했다. 일정표를 공유받아 학회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올리버도 인지하고 있었기에.
“난 참고로 사교 모임을 싫어해. 나한테 너무 피곤한 행사거든. 특히, 정신적으로. 그럼에도 난 참가할 생각이고, 그전까지는 피로를 느끼고 싶지 않아. 내 말 이해했나.”
“예, 이해했습니다.”
올리버가 대답했다. 오늘은 더 이상 피곤하게 하지 말라는 것.
케빈은 올리버의 대답에 기뻐하며 말했다.
“좋아. 그럼, 이만 나가서 펠릭스와 데릭이 제대로 자기 방에 들어갔는지 확인하고, 너도 이만 네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쉬어. 네 숙소가 어딘지 알지?”
“예. VIP층 구석, 하인들을 위한 쪽방입니다.”
“좋아 잘 알고 있네.”
“말씀하신 일을 하고 전 제 방으로 가보겠습니다. 사교회 참석 때 방문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모임에 참석할 때 입을 정장과 구두는 챙겨왔지?”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준비물에 있어 챙겨왔습니다. 격식에 맞는 게 뭔지 구체적으로 몰라 그냥 골라주는 대로 챙겨왔지만요.”
“양복점 주인이?”
"아뇨, 에디스 님이요. 잘 모른다고 하니 골라주시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