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 도착 (2) >
180센티미터의 쭉 뻗은 키, 넓은 어깨, 탄탄한 근육질 몸매, 포마드로 뒤로 쫙 넘긴 머리카락, 깔끔하게 정돈된 짧은 수염.
테렌스 로어가 손을 살짝 든 채 올리버와 케빈에게 인사했다.
케빈은 그의 등장에 놀라면서도 곧바로 이해했다는 듯 인사를 받아주었고, 올리버 역시 예의 바르게 그에게 인사했다.
올리버가 휴가로 자리를 비웠을 때, 일을 잘해주었고, 친절하게 대해줬기에. 물론, 맞았으면 죽을 뻔한 주먹을 날리긴 했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케빈과 올리버가 인사를 하자 뒤이어 데릭과 펠릭스 역시 눈치껏 테렌스에게 인사했다.
테렌스가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 반가워. 반가워. 로어 가문의 테렌스라고 하네. 저 외로운 늑대가 연구원을 받아들이다니, 이 얼마나 뿌듯한지. 옆에서 잘 좀 도와주고 배워. 성격은 까칠하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진퉁이니까.”
무뚝뚝한 케빈과 달리 테렌스는 친근하게 데릭, 펠릭스와 악수를 나누며 덕담을 해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케빈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배에서 분명 안 보였는데, 여기 어떻게 온 거야?”
“우아아아……. 네가 날 그렇게 보고 싶어 할 줄은 몰랐는데?”
“보통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나?”
“크크크크! 까칠하긴.”
테렌스는 케빈의 무뚝뚝한 대답에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웃음으로 화답했다.
겉으로만 웃는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진심을 담은 웃음이었다.
전에도 봤지만, 테렌스는 케빈에게 참으로 우호적이었다.
‘하긴, 군인분들은 교수님께 다들 우호적이었지.’
올리버가 마운틴 페이스로 가던 열차 때 일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케빈의 개인 직원이라는 걸 밝히자마자 다들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잘 아는 분야가 아니라 섣불리 판단 내릴 순 없었지만, 그건 마탑 교수에 대한 호의나 존중이 아닌, 케빈이란 사람 자체에 대한 호의와 존중이었다.
아무래도 케빈은 종군마법사 시절 일을 상당히 잘했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도 잘 챙겨준 것 같았다.
‘교수로서 일하시는 걸 보면 그리 이상하진 않지만.’
테렌스와 케빈의 대화가 이어졌다.
“알다시피 난 금수저잖아? 이름보다 가문 이름을 먼저 말할 정도로. 당연히 개인 여객선을 타고 왔지.”
테렌스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손가락을 가리켜 그리 멀지 않은 선착장에 정박한 여객선 하나를 가리켰다.
놀랍게도 케빈 일행이 탄 여객선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
올리버의 경제 관념으로 볼 때, 한 개인이 가지기에는 과한 물건인 것 같았다.
“네가 금수저긴 해도, 로어 가문의 수많은 구성원 중 하나. 혼자서 저걸……아아, 중장님도 오셨군.”
케빈이 말하는 도중 뭔가를 눈치챘다. 테렌스가 미소 지었다.
“잘 알고 있네. 그럼, 내가 여기 온 이유도 알겠네? 따라와.”
테렌스는 이미 결정 났다는 태도로 손가락을 까딱였고, 케빈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순순히 따라갔다.
케빈이 올리버와 데릭, 펠릭스에게 말했다.
“너희도 따라와.”
***
“크하하하하핫! 오랜만이구만, 중령! 잘 지내는 거 같구만!!”
마차를 타기 위해 인파가 몰린 도로에서 떨어진 선착장 근처.
그곳에서 커다란 간이의자에 앉아 느긋이 누군가를 기다리던 5, 60대 남성이 말했다.
그는 참으로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뭐라고 표현할까……? 그래, 바위와 사자를 연상시켰다. 아니면, 바위로 만든 사자나.
그만큼 그는 단단하고 용맹해 보였다.
2미터를 가볍게 넘기는 거구에 넓은 어깨, 격식을 차리기 위해 옷을 두껍게 입었음에도 강대한 근육이 그 존재감을 뿜어댔다.
사람보다는 골렘을 연상시키는 육체. 거기에 사자 갈기처럼 길게 기른 수염과 머리카락은 그 존재만으로 근엄함과 위압감을 주기 충분했다.
테렌스와 케빈마저 왜소하게 보일 정도로 말이다.
가히 감탄스러웠다.
“안녕하십니까. 필립 중장님.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필립 로어가 대답했다.
“일선에서 물러나 후진 양성에 애쓰고 있는 노인이 무슨 고생이 있겠나? 그보다 경례는 어디 다 팔아먹었지?”
필립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 유쾌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중간중간 위압감을 뿜었다.
마치, 초식동물을 상대로 농담하는 사자와 같았다.
허나, 케빈은 초식동물이 아닌지 주눅 들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더 이상 군인이 아닌 마탑의 교수입니다.”
“그게 늘 아쉬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뚝 박게 했었어야 했는데 말이야.”
놀랍게도 농담이 아닌 진심이었다. 그저 어떠한 사정이 있어 그러지 못한 것뿐.
아쉬워하던 필립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그렇지……! 자네 여자는 있나? 가볍게 즐기려고 만나거나, 혹은 결혼을 생각하는 여자 말이야.”
“예?”
사적이면서도 느닷없는 질문에 케빈이 한쪽 눈썹을 들며 되물었다. 당혹스럽고 불쾌하다는 뜻.
그러나 필립은 넘치는 자신감과 자부심에 걸맞게 타인의 사소한 불만은 가볍게 무시하며 재차 질문했다.
“여자 있냐고. 여자. 진지하게든, 가볍게든……. 내 나이쯤 되면 이 정도는 물어봐도 되지.”
“하아……. 연구원들과 직원 앞에서 할 대답은 아닌 것 같군요.”
필립이 그제야 올리버와 펠릭스, 데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실례했군……. 만나서 반갑네. 제군들. 백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왕국군의 한 축을 떠받치고 있는 로어 가문의 가주 필립 로어라 하네. 다들 우리 가문에 대해 들어봐서 익히 알겠지?”
필립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그만큼 자신의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데릭과 펠릭스는 예라고 대답했다. 올리버만 빼고.
“자세히는 모릅니다.”
"............"
"............"
"............"
"............"
"............"
납을 넘어 철 덩어리와 같은 침묵이 갑자기 주변 공기를 내리눌렀다. 그와 함께 모두가 올리버를 봤다.
불쾌. 당혹을 빛내며.
올리버가 케빈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제가 실수한 건가요.’
‘엄청.’
눈빛으로 대답하는 케빈. 올리버는 뒤늦게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문양이 사자이고, 명문 종군마법사 가문이며, 식민지와 대륙 전쟁에서 수많은 공훈을 세운 것만 압니다. 그 외에 자세히는 모르고요."
올리버가 뒤늦게 자신이 아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머피의 두 번째 의뢰에서 알게 된 정보로, 해당 임무 중 로어 가문 출신 마탑 학생을 제압한 덕분이었다.
“하아……. 다행이군. 난 케빈 중령 자네가, 상식 없는 자를 데리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기본적인 건 아는구만. 왜 모른다고 했지?”
안도한 듯 표정이 풀린 필립이 다시 인상을 쓰며 질문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로어 가문에 대해 아는 건 딱 그 정도뿐이라서요. 그 정도로 아는 거라고 하면 어르신께 실례일 것 같아 그랬습니다.”
“호오……. 틀린 말이 아니야. 우리 로어 가문을 그 정도로 안다 하는 건 실수지.”
필립이 굵직한 손가락을 턱에 대며 생각했다. 저 두꺼운 손에 붙잡히면 사자에게 물린 것만큼 치명적일 것 같았다.
“최소한 거짓말은 안 하고 솔직한 건 좋군. 정직한 건 미덕이니까……. 우리 가문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나?”
케빈이 올리버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올리버가 대답했다.
“알려주시면 듣고 싶긴 합니다.”
“진심인가?”
“예. 마법사임에도 왕국군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식민지 전쟁에서 활약한 로어 가문에 대해 궁금한 게 많거든요. 개인적으로 여쭤보고싶은 것도 있고요.”
자신의 생각을 솔직히 말한 올리버. 그 마음이 필립에게 전달됐다.
사자의 아가리를 연상시키는 입이 비죽 올라간 것이 그 증거.
“허어……. 거 참 재밌는 친구로군. 케빈 중령 자네가 직원을 고용했다길래 보통은 아닐 걸 예상했지만, 생각 이상이야.”
“죄송합니다. 제가 다시 잘 교육하겠습니다.”
“아냐, 아냐. 칭찬하는 거야. 마음에 들어. 우리 가문에 대해 궁금하다고?”
“예, 알려주신다면 기쁘게 배우겠습니다.”
“역시 마음에 들어! 좋아! 케빈 중령. 나와 같이 가지!”
“예?”
“싫은 티 내지 말고……. 싫은 티 낸다고 내가 그냥 보내줄 사람 아닌 거 알지 않나? 거기다 갈 수단도 마땅치 않고 말이야?”
필립이 아직도 혼잡한 도로를 가리켰다. 올리버가 좀 멀어지자 말들이 안정을 되찾았지만, 그럼에도 여태까지 밀린 승객 때문에 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지금 가봤자 한나절 정도 시간을 낭비해야 할 것은 명확해 보였다.
시간 낭비를 싫어하는 케빈은 결국 항복했다.
“하아…….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기꺼이 받아들이지. 한숨을 안 쉬었으면 더 좋았을 테지만.”
“……혹시, 마차를 따로 부르셨는지요?”
케빈이 뒤늦게 말들이 올리버를 겁낸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물었다.
만약 마차일 경우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어쩌면 올리버만 따로 걸어오게 해야 할지도.
다행히 필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발전한 왕국의 신사이자, 순수마력학파의 명예 그랜드 마스터, 왕실 마법사관학교 교장이자, 왕실 마법연구부의 실장, 로어 가문의 수장인 내가 그런 시대착오적인 교통수단을 이용할 것 같나?”
“그럼, 여객선에 차라도 싣고 오셨습니까?”
“아……. 반은 맞았는데, 반은 틀렸군. 군을 제대해서인지 감을 잃었어.”
필립은 한탄하고는 수행원으로 서 있던 한 여성에게 손을 뻗었다.
다부진 몸매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그녀는 바닥에 쌓인 짐 더미에서 여행용 가방을 들어 내밀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가방이었으나, 올리버의 눈에 여러 개의 마법 술식이 걸린 물건이 들어있는 게 보였다.
‘고도의 축소화 마법과 경량화 마법, 충격 흡수 마법.’
마법 자체는 기본이지만, 대상에 따라 그 술식의 난이도가 급격히 변하기도 하는 마법들.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찰칵.
필립이 가방을 열었다. 그러자 안에 든 작은 자동차 모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섬세하게 잘 만든 모형……. 얼마 있지 않아 이게 진짜 자동차라는 걸 알아차렸다.
“진짜 자동차군요.”
“이 나이에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다니면 욕먹지 않겠나?”
필립은 그리 말하고는 축소화된 자동차 4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케빈을 비롯한 데릭과 펠릭스 심지어 올리버조차 놀랍게 그 모습을 바라봤다.
앞서 언급했듯 축소화 마법과 경량화 마법, 충격 흡수 마법은 순수마력학파 마법 중 기초에 해당하는 마법이었지만, 대상에 따라 그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가는 마법이기도 했다.
대상이 클수록, 무거울수록, 내부 구조가 복잡할수록 술식에 요구하는 정교함은 하늘과 땅 차이.
하물며 부품 개수가 평균 3만 개인 자동차라면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축소, 경량, 충격흡수 상태를 장기간 유지하는 마력까지 고려하면 더더욱 그 수준을 가늠하기 힘들었고.
필립의 육체에 내재한 막대한 마력량과 섬세한 마력 흐름을 보고 보통 인물이 아닌 건 알았지만, 이건 그 이상이었다.
딱-!
필립은 굵은 손가락을 튕겨 마법을 풀었다. 일렬로 배치한 자동차는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맞춤형 고급 차량으로 장갑차처럼 튼튼해 보임에도, 푸른색 바탕의 황금빛 사자 문양이 새겨져 있어 몹시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주변의 모든 시선이 자동차에 쏠리는 게 그 증거.
필립이 뿌듯하게 말했다.
“4대나 있으니 모두 탈 수 있을 걸세. 케빈 중령. 자넨 나와 같이 타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너희들은 가장 뒤쪽에 타라.”
케빈이 올리버와 데릭, 펠릭스를 가장 뒤쪽 차량에 보냈다. 필립이 케빈을 멈춰 세웠다.
“잠깐만……. 그 친구도 자네랑 같이 타지.”
“제논 말씀입니까?”
“그래, 방금 우리 가문에 대해 알려주기로 했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