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 도착 (1) >
란다의 여름은 아름다웠다.
그도 그럴 게 그 외에는 아름답지 못했으니.
세상에서 가장 풍요롭고, 화려하며, 발전된 도시이건만 날씨만큼은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오죽하면 란다에서 자살자가 많이 나오는 이유가 날씨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겠는가?
그러나 여름만큼은 예외였다.
기이하게도 늘 우중충한 란다도 여름에는 항시 맑았고, 기분 좋게 따뜻했다.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이 늘어난 게 그 증거.
물론, 밤이 되면 다시 추워져 죽는 사람도 나왔지만, 그건 테어도어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였다.
생명학파의 그랜드 마스터인 자신에겐 추위 따위는 전혀 위협이 안 됐으니. 그래, 추위 따위는 말이다.
“따뜻하군……. 아늑할 정도로.”
생명학파의 수장 그랜드 마스터 테어도어 브란트의 침실에서 웬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자기 혼자만 있는 공간인데.
그러나 그는 놀라지 않았다. 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았기에.
“아직도 갑자기 등장하는 걸 좋아하는구만. 멀린.”
테어도어가 앉은 의자에서 고개를 쭉 빼 마법으로 갑자기 나타난 평생지기 친구를 봤다.
“이해해 주게. 내가 느닷없이 방문하길 좋아하는 걸 알지 않나? ……또, 자네도 느닷없이 내 제자와 내게 초대장을 보냈고."
멀린은 손에 들고 있던 초대장을 탁자 위에 올렸다.
이번 생명학파와 생명 연금술 학과가 협력해 주최하는 학회 초대장이었다.
테어도어는 초대장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랍게도 거대한 의자에서 일어난 남자는 80살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었다.
그냥 눈으로 보기에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
심지어 그의 외모는 누가 봐도 이목을 끌 정도로 아름다웠다.
최소한 현재 사회에서 통용되는 개념으로 볼 때는 말이다.
자신의 손자처럼 인위적이다 할 정도로 빛나는 금발과 벽안(善眼), 잡티 하나 없는 흰 피부, 근육으로 잡힌 탄탄한 몸매, 쭉 뻗은 다리, 꼿꼿한 자세, 안경을 쓰지 않는 눈 등 테어도어는 누가 봐도 아름다웠다.
마치, 일부러 만든 것처럼.
왜 란다를 비롯한 수많은 부호가 생명학파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에 반해 테어도어를 마주 보는 멀린의 외관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나이를 그대로 반영한 주름진 얼굴, 푹 들어간 뺨, 달걀처럼 벗겨진 정수리, 길게 기른 주변머리까지 아무리 봐도 봐줄 만한 구석이 없었다.
거기에 걸치고 있는 코트마저 너무 오래돼 추레한 외관을 한껏 부각해줬다.
아마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이 둘이 친구라는 사실에 놀랄지도 몰랐다. 그것도 평생에 걸쳐 서로를 인정한 친구 말이다.
“벗에게 연구 성과를 자랑하고파 초대장을 보낸 게 무례한 행동인가?”
“……내가 그쪽 관련 연구에서 손 털었다는 것 기억하지 않나?”
그 말은 사실이었다. 테어도어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우생학에 심취하고, 수많은 합법, 불법 인체실험을 자행한 멀린은 돌연 어느 날 해당 연구에서 손을 뗐다.
테어도어를 제치고 정식으로 아카이브가 된 이후 말이다.
아직도 테어도어에게는 시큰거리는 추억이었다.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지 않나?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그건 바뀌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거지. 어쨌건 정중히 거절하겠네.”
“그거 참 안타깝군. 자네가 올지도 모른다고 뉘앙스를 띄웠건만. 학회에 초대된 사람들이 실망하겠어.”
“그건 미안하네.”
“혹시, 자네 제자도 막을 생각인가? 그……. 이름이 케빈?”
“맞네. 물어봤는데, 자긴 갈 생각이라더군.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똑똑하군. 열등종치곤. 억지로 안 막았으면 좋겠어. 어쨌건 자넨 마탑에서 은퇴한 몸이니.”
“그럴 생각이네……. 이번 학회가 자네 마지막 활동인가?”
“마지막 활동? 무슨 소리!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는 계속 일해야지. 내 새로운 활동을 위한 밑거름일 뿐이야. 늘 그렇듯.”
참으로 테어도어다운 말이었다. 원체 쉬는 걸 몰랐으니.
그렇기에 멀린도 인정할 높은 학식을 쌓은 거였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럽기도 했다.
멈추지 않는 차는 무조건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게 세상의 법칙인데.
멀린은 친구를 멈추고 싶었지만, 지금의 자신으로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게 안타까웠다.
“그러는 자네야말로 쉬지 그러나?”
"무슨 소린가? 난 은퇴한 몸이지 않나.”
“아, 그랬나? 내 깜빡했어. 잠자는 숲에 가 공주를 만났다기에.”
“……내게 감시를 붙였나?”
“하! 그건 아니야. 내가 감히 무슨 배짱으로 아카이브께 감시를 붙이겠어. 몇 년 만에 갑자기 나타나 내 연구실에 침입한 흑마법사도 그냥 못 본 척 넘어가 달라는 부탁도 들어줬는데.”
테어도어가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실제 나이가 노년에 접어든 남자들의 대화라 하기에는 다소 유치한 기색마저 있었지만, 그만큼 둘이 오랫동안 사귀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건 사과하겠네.”
“괜찮아.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겠지. 잠자는 숲도 그런 걸 거고……. 참고로 감시를 붙인 건 아니야. 알다시피 나도 속삭여 줄 친구들은 많은 것뿐이야.”
멀린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생명학파의 특성상 발이 넓은 게 사실이고, 더 이상 친구를 추궁하기도 싫었기에.
또한, 이미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한 상태라 섣불리 간섭할 수도 없었다.
그저 다가오는 흐름에 맞게 대응해야만 할 뿐.
멀린은 자신의 무력감을 곱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는 건가?”
“연구할게 있어서 말이야.”
“자네가?”
“그렇네. 진짜로. 나도……. 배워야 할 게 많거든. 그러니 자네도 너무 집착하지 말게. 우리가 세상 전부를 깨우칠 수 없는 법이니."
테어도어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자신보다 몇 수. 어쩌면 그 이상이 있을지도 모르는 존재가 저리 지껄이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닥치고 웃어야지.
“잘 가시게.”
“나중에 또 오지……. 아무런 용건 없이 술이나 마시러.”
멀린은 친구에게 인사하며 떠났고, 그런 멀린을 배웅한 테어도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놈……."
***
쏴아아아아아아아악ㅡ
쏴아아아아아아아악ㅡ
올리버는 갑판으로 나와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바닷소리를 들었다.
그리고는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와 그 바다보다 푸른 하늘을 둘러봤다.
꽤나 신선한 경험이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온다는 게.
자만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란다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라고 해 더 이상 감흥을 느낄 풍경을 못 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즐거운 착각이었던 것 같다.
가끔씩 멀리서만 보던 바다를 이리 직접 나와 보니 참으로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얼음 땅도 그렇고 바다고 그렇고. 인간이 만든 구조물과 다른 경이로움이 있었다.
학회에서 무엇을 볼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한 보람이 있었다.
“배를 처음 타보나?”
케빈이 갑판 위에 올라오며 말했다.
1등석 손님만 오를 수 있는 갑판에 홍인(紅人)이 등장하자 잘 차려입은 손님들이 힐긋힐긋 시선을 던졌다.
마치, 기름통 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그나마 마법사처럼 보이는 이들은 케빈인 걸 알고 무시했지만, 일반 손님들은 계속해 쳐다봤다. 무슨 신기한 동물을 보듯.
“예, 배는 이번에 처음 타 봅니다.”
“좀 놀랍군.”
“타볼 기회가 없어서요……. 교수님은 많이 타보셨나요?”
“원한 건 아니지만, 타보긴 좀 타봤지. 종군마법사 때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했으니까……. 곧 있으면 하프웨이(Halfway)에 도착할 거야”
하프웨이(Halfway).
셀랜드 바다 건너 대륙의 한 지역.
갈로스와 대륙중앙 사이에 있는 어중간한 땅으로. 이번 학회가 개최할 곳이었다.
지리적 특성상 갈로스도, 대륙 중앙도 아니라, 간섭이 덜하고, 안전도 비교적 확보되어 있다고 말이다.
“아쉽네요. 배를 조금 더 타보고 싶었는데요.”
“1등석에 타고 있으니 그런 말을 하는 거지. 3등석에 탄 녀석들은 아닐 거야.”
3등석에 탄 학생들은 다름 아닌 에디스의 지원을 받아 이번 학회에 참석한 학생들이었다.
그 수가 열 명 남짓으로, 원래는 더 많은 학생이 참가하고자 했지만, 에디스가 자기 돈을 바보들에게 지원해줄 수 없다며, 일대일 면접을 통해 그나마 투자할 가치가 있는 병신들에게만 지원해주겠다고 해 이 정도 숫자밖에 되지 않았다.
참고로 에디스는 해당 과정 중 케빈과도 잠시 얼굴을 마주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병신 새끼요?’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돈도 없이 못 가면 병신 새끼지 뭐요? 도둑질해서라도 돈을 만들어야지.’
올리버는 그 모습을 그냥 가만히 지켜봤다.
자신은 할 만큼 한 것 같았고, 또 에디스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어쨌건 에디스의 지원을 받은 학생들은 저기 3등석에서 가고 있었다.
“정말 따라온 학생분들은 저희가 인솔하지 않아도 됩니까?”
“어. 난 교수지 보모가 아니니까. 우리 학생 말고도, 다른 학생들도 있을 텐데, 그들 모두 마탑 행정부 직원이 대신 인솔할 거야. 마탑도 이런 일로 교수들이 제 일 못 하는 걸 싫어하거든."
오, 꽤 좋은 것 같았다. 각자 자기 일에 집중할 수 있으니.
“꼭 제가 처음 광산을 나왔을 때 같네요.”
“뭐?”
"배를 타보는 것도 처음이고, 외국으로 가는 것도 처음이라서요……. 마치 주인님께 거둬져 처음 광산 밖을 나왔을 때가 떠오릅니다.”
“좋았나?”
“예, 괜찮았습니다. 여관 주인과 직원이 스승님과 절 살해하려 했지만요. 전체적으로 좋았습니다. 세상 밖으로 나온 게 그때가 처음이거든요.”
케빈이 말없이 올리버를 봤다. 뭔 질문을 할때마다 상식 밖의 대답이 나오니……. 아니, 어쩌면 좋은 걸지도.
"나쁘진 않네.”
“예?”
“우리가 갈 곳도 마냥 안전한 곳은 아니거든. 갈로스 인근이긴 하지만, 대륙 중앙과도 인접하고 있어서. 그러니 처음 광산에 나왔을 때처럼 방심 하지 마.”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왜 학회를 진행하는 거지요?”
올리버가 정말 궁금해 질문했다.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안전한 곳에서 학회를 진행하는 게 상식적으로 맞는 것 같았기에.
케빈이 대답해줬다.
“안전이 확실히 보장된 곳은 국가의 행정력이 닿는 곳이고, 대부분 그런 곳은 간섭이 심하거든. 마탑은 조금 예외지만, 아주 예외도 아니지…… 여하튼 간섭을 피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외진 곳에서 연구를 하는 거야. 흔한 경우지. 마운틴 페이스처럼.”
“아……."
“또, 학회에는 굵직굵직한 사람이 많이 와 저마다 인맥을 다지거나, 거래하는 장이 되기도 해. 여하튼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감시나 간섭이 없는 걸 더 선호하는 거야.”
"그렇군요.”
“그러니 여러모로 조심해. 마탑과 로큘리 대학뿐 아니라 대륙 중앙 중소 마법사 가문도 많이 오니까. 자칫 실수하면 골치 아파질 수도 있어.”
올리버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그와 함께 선착장이 눈에 들어왔다.
하프웨이(Halfway)에 도착한 것이었다.
***
히이잉……!
선착장에서 내리고 짐을 챙긴 다음 예약된 마차를 타고 학회 장소로 이동하려고 할 때, 약간의 차질이 발생했다.
수많은 예약 손님을 기다리던 마차의 말들이 갑자기 겁에 질린 듯 통제에서 벗어난 거였다. 일하기 어려울 정도로.
배를 타 지친 손님들은 때아닌 난리에 피로와 짜증을 느꼈고, 마부들 역시 난감한 기색을 비쳤다.
한두 마리만 이러는 거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갑자기 얌전하던 말들 전부가 이러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덕분에 선착장은 일대는 때아닌 혼란을 빚었다.
그 누구도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아, 정정. 단 한 명은 알고 있었다.
“저기....... 차를 타고 갈 수는 없나요?”
올리버가 인파들 사이에 끼인 채 펠릭스에게 물었다.
펠릭스가 난감해하며 대답했다.
“아마 없을 겁니다. 아니, 찾으면 찾을 수야 있겠지만, 엄청 힘들 겁니다. 여긴 차가 잘 보급이 안 되거든요. 마차가 대중화돼 있죠."
“누가 촌 동네 아니랄까 봐.”
데릭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한마디 보탰다.
올리버는 다시 마부들을 봤다. 백 마리가 넘는 말들이 계속해 날뛰었고,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올리버는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케빈에게 작게 속삭였다.
“교수님.”
“뭐야? 중요한 게 아니면 나중에 이야기해.”
"조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케빈은 의문을 빛내며 올리버를 봤다.
“뭐지?”
“혹시, 괜찮으시면 저 혼자 뛰어가도 되겠습니까?”
“학회 장소가 어딘지나 알아?”
“오기 전 팸플릿을 읽었고, 최신 지도로 위치도 확인했습니다. 갈 수 있습니다.”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 안 했나 보군?”
“확인했습니다. 시간이 꽤 걸릴 테지만, 제가 있으면 계속 지체될 거라서요.”
“……? 그게 무슨 소리야?”
“동물들이 절 싫어하거든요.”
느닷없는 헛소리였지만, 케빈은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과거 자신이 소환한 정령이 올리버에게 겁먹은 걸 본 적 있었기에.
납득을 넘어 왜 자신이 이걸 인지하지 못했나 싶었다.
“……이유가 뭐지?”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옛날부터 ……제 냄새가 싫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혼자 가겠다고?”
“왜 혼자 간대?”
케빈과 올리버의 대화 도중 활기찬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올리버가 휴가를 떠난 사이 대리로 맡아줬던, 로어 가문의 테렌스를 말이다.
그가 반갑게 손을 들었다.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