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 학회 초대 (3) >
“이런 개-!”
도움을 청하는 올리버를 향해 에디스가 서두를 땠다.
그리고는 자그마치 십분 가량 올리버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말이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그가 쉬지 않고 욕을 내뱉음에도 운율과 박자가 살아 있고, 욕이 겹치지 않도록 다양하고 폭넓게 사용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욕이라는 모국어가 있는 것처럼.
처음 1분간 가만히 듣던 올리버는 어느새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자신에게 저렇게 하라 해도 못 할 것 같았기에.
역시 사람은 저마다 대단한 분야가 있는 것 같았다.
“하아……. 이런 미친놈이 부모 욕을 하는 데도 눈을 반짝여?”
흥미로워하는 올리버를 보고 에디스가 어이없어했다.
그는 쉬지 않고 욕을 내뱉느라 잘 익은 토마토처럼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시다시피 전 고아라서요.”
올리버가 담담히 대답했다. 아무런 악의나 의도도 없이.
에디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들으니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양심이 아주 조금 뜨끔했다.
올리버는 그 감정을 읽었다.
“아, 전 괜찮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원장님이 말씀하시길 저 같은 고아들 부모는 전부 무책임한 놈팡이에, 매춘부일 게 뻔하다고 하셨으니. 에디스 님은 딱히 욕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귀를 의심하게 하는 말에 에디스는 아까 전보다 찝찝한 기분을 맛봤다.
억울했다.
갑자기 불려 나와 개 같은 부탁을 들은 건 분명 자신인데 왜 죄인이 된 기분을 맛봐야 하는가?
“……? 저기 에디스 님? 정말 신경-”
“-닥쳐. 제발.”
에디스가 결국 한 손을 들어 올리버의 입을 다물게 하더니 탁자 위 술을 잔에 가득 따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올리버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혹시, 제가 무슨 실수를 했습니까?”
“글쎄, 네 존재가 실수가 아닐까?”
“아, 그 이야기도 고아원 원장님께 들었습니다. 저희 같은 고아들은 부모가 멍청해 피-”
“-개놈아 쫌!”
에디스가 다시 버력 화를 냈다. 그러나 화내는 겉모습과 달리 찝찝함은 더욱 짙어졌다.
올리버는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입을 열수록 상황을 악화시켰기에.
에디스 역시 짧은 시간 사이 화를 몇 번이나 낸 덕분에 체력이 쭉쭉 빠지고 말았다.
올리버에게 피의 영약을 받아 건강이 호전되었음에도 말이다.
쪼르르르륵. 꿀꺽.
에디스는 연신 술을 들이켜 불쾌한 기분을 씻으려 했다.
올리버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며 자신이 어디서부터 실수를 했는지 분석했다.
역시 처음 만났을 때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게 실수였나 싶었다.
협상 관련 책에 따르면 유머러스한 농담으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했으니.
‘역시 돈을 지원받는다는 게 쉬운 게 아니구나……. 교수님들은 이걸 어떻게 한 거지?’
올리버가 새삼 마탑 업무의 어려움을 실감했다.
잠시 후, 에디스가 입을 열었다.
“정말 억울하군. 억울함을 느끼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어.”
“……뭐가 억울하시죠?”
“잘 쉬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불려 나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도 모자라 돈 좀 달라는 무례함을 당했는데, 내가 실수한 것 같아서? 심지어 뚱뚱하고 호색하다는 모욕까지 들었는데 말이야.”
아, 올리버는 자신이 어느 부분에서 실수했는지 깨달았다.
“제가 모시고 있는 교수님께서 그리 말씀하신 겁니다.”
“넌 그렇게 생각 안 하고?”
“전…….에디스님을 좋아합니다.”
에디스는 드디어 화낼 기운도 없는지 독한 술을 다시 들이켰다.
“다시 입 다물까요?”
에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앉은자리에서 술을 몇 병이나 더 비우곤, 천사의 집 종업원들을 호출해 술을 더 가져오라 그랬다. 아주 독한 것으로. 종업원이 새 술을 쟁반에 가득 담아 나오자 에디스는 다짜고짜 술병 뚜껑을 따고는 올리버에게 내밀었다.
“마셔.”
“예?”
“요컨대 내 돈이 필요하다는 거지?”
“예, 자비(自費)로 하는 건 여러모로 곤란해서요.”
“그럼, 마셔. 남의 돈 얻고 싶으면 비위를 맞출 줄 알아야지.”
올리버는 바로 납득하며 술병을 건네받아 잔에 따르려고 했다.
에디스가 멈춰 세웠다.
“잔에 따라서 나눠마시지 말고, 병 채 한 번에 들이켜.”
“이유가 있나요?”
“돈 줄 사람이 원하니까.”
실로 합리적인 이유. 올리버는 시키는 대로 독한 술병을 통째로 들이켜 마셨다.
에디스는 다음 술병을 따서 올리버를 건네줬고, 올리버는 다시 들이켰다.
그렇게 가져온 술병이 반 정도 비었을 때쯤 에디스가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술이 더럽게 세구만!”
“그렇습니까?”
그랬다. 취하게 할 요량으로 술을 마시게 했건만, 올리버는 취하긴커녕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에디스는 란다에서 온갖 인간을 봐왔지만, 장담컨대 지금 자기 눈앞에 있는 놈보다 더 골 때리는 인간은 없을 거라 확신했다.
도대체 정체가 뭔지..…. 에디스가 의문과 허탈함을 느끼며 질문했다.
“하아아아……. 도대체 마탑에서 위장 근무를 하는 걸 나한테 왜 이야기한 거야?”
“음……. 도움이 필요한데, 제가 부유층을 잘 몰라서요? 또, 에디스 님은 제 본명(本名)도 알고 계시니 사실대로 말하고 부탁드리기 좋을 것 같아서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제인을 구하고 에디스를 만났을 때 올리버는 에디스와 진실 게임을 했고, 그 과정 중 올리버는 자신의 본명이 올리버라는 걸 에디스에게 밝혔다.
얼핏 납득되는 이야기 같았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었다.
올리버가 마탑에서 위장 근무를 하고 있다는 건 꽤나 심각한 일이었기에 충분히 약점이 될 사안이었다.
물론, 올리버 역시 피의 영약으로 에디스의 목줄을 쥔 상태라 할 수 있었지만, 놈이 그럴 인간이 아니라는 건 에디스가 잘 알고 있었다.
인품이라던가, 성품 그런 문제를 넘어 말이다.
그렇기에 대화하면 대화할수록 혼란만 가중됐다. 두려울 정도로.
"……돈이 필요하면 다른 식으로 요구할 수 있었잖아? 갑자기 재료비가 더 필요하다든가?”
“그럼 거짓말해야 하는 데 그건 좀 그래서요.”
"......."
“또, 절차상 에디스 님께서 공식적으로 지원을 해주셨으면 해서요. 그럼, 사정을 전부 밝히고 부탁드리는 게 예의에 맞는 것 같고요."
에디스는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너무 화를 낸 탓인지 오히려 피곤해졌다.
“……뭐, 좋아. 뭐가 됐건, 난 들어줄 수밖에 없을 테니.”
“감사합니다……. 그런데, 들어줄 수밖에 없다니요?”
“내 목숨줄을 이어주는 약을 만들 수 있는 게 너뿐이니까……. 내가 어찌 감히 거절할까?”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 거절해도 약은 계속 지급할 생각입니다.”
에디스가 양손을 깍지를 끼고 탁자에 몸을 기댔다.
눈앞에 있는 흑마법사의 머랏속이 정말 궁금할 따름이었다. 따서 안을 살펴보고 싶을 정도로.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만약,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할 거야? 유일한 협상 카드가 그거뿐인데? 아니면 날 설득할 새로운 협상 카드라도 가져왔나?”
“생각해봤는데 없어서 그냥 왔습니다. 정중히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해서요.”
“네가 나보다 약했으면, 병으로 후려쳤을 거야. 그것도 뒤질 때까지..…. 내가 거절하면 어쩌려고?”
“그럼, 제인 아가씨께 부탁을-”
“-이런 개!”
***
에디스는 다시 십분 가량 욕을 기관총처럼 내뱉기 시작했다.
올리버는 제인 아가씨와 자신은 친구라는 사실을 언급하며 충분히 할 수 있는 부탁이라고 언급했지만, 에디스가 욕을 십분 더 하고, 술을 마시게 하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었다.
그렇다 할 성과를 끌어내지 못한 채 빈 술병만 늘어가는 상황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올리버는 지금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한순간이나마 에디스가 제인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기에.
초반에 에디스가 감정 소모를 너무 심하게 한 탓에 감정을 통제할 기력이 떨어진 덕분이었다.
그래서 올리버는 금전 지원과 별개로 지금 상황에 나름대로 만족하고 있었다.
남을 도우면 자기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경전 말씀이 뭔지 알 거 같았다.
“하아……. 제인이랑 너랑 친구라고?”
“예. 저번에 저랑 만났던 투자 파티 기억하십니까?”
"그래. 기억이 안 날 수가 있나?”
“거기서 친구 하기로 했습니다. 생각보다 흔쾌히 수락해주셔서 기뻤습니다.”
“기뻐?”
“예. 전 친구가 없었거든요.”
“널 보니까 왜 그런지 알 거 같군.”
“아..…. 에디스 님은 친구가 많으셨습니까?”
올리버 대뜸 물었다. 깊이 고민해 나온 질문이라기보다는 반사적으로 나온 거였지만.
허나, 예상과 달리 에디스는 그 말에 움찔했다. 의도치 않게 아픈 부분을 자극당한 듯.
이를 포착한 올리버는 눈치를 발휘해 입을 다물며 술을 들이켜는 에디스를 관찰했다.
그가 먼저 입을 열길 바라며.
다행히 이번에는 올리버의 의도대로 돌아갔다.
“반대로 묻지. 넌 내가 친구가 있었을 거 같나?”
"음……. 글쎄요? 나름대로 친절하시고, 입담도 좋으시니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진심이야?”
“예. 진심입니다.”
에디스는 투기꾼의 눈으로 올리버를 노려봤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하듯.
“놀랍군……! 놀라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다니 말이야.”
“……? 이상한가요?”
“당연히 이상하지. 계집애 같은 이름을 가진 괴팍한 늙은 뚱보가 친구가 많을 거라 생각하다니. 정상적으로 그런 생각 잘 안 하지.”
“음……. 하지만 돈이 많지 않습니까?”
“그건 맞아. 난 돈은 많지.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하지만 처음부터 돈이 많았던 건 아니야.”
맞았다. 에디스는 자수성가의 아이콘이라 했으니. 그 말은 즉 그전에는 가난하다는 걸 의미했다.
“다시 묻지. 돈도 없고, 괴팍한 뚱보에게 친구가 있었을 것 같나? ……아니지! 정정. 괴팍하다는 건 빼지. 나도 한때 착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에디스는 술에 다소 취한 상태였으나, 말 자체는 진심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착했다. 최소한 자기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말이다.
올리버는 흥미가 동했다.
“그러셨습니까?”
“그래. 나름 순진한 시절이었거든. 산타할아버지가 있는 줄 알고, 신이 이 세상을 굽어살피며, 착하면 언젠가 복을 받고, 최소한 그걸 하나의 긍지로 삼아도 된다고 믿었지. 겁나 순진했다고. 씨발!”
에디스는 진심이었고, 나쁜 말 같지 않았다.
착하게 사는 걸 자체를 하나의 긍지로 받아들인다니. 아름다운 말 같았다.
“지금은 아니라는 겁니까?”
“당연히 아니지. 술, 약, 여자. 심지어 흑마법사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아……."
“지금 데리고 사는 좆 같은 마누라도 돈 주고 사 온 년이고. 첫날밤도 억지로 치렀어. 말을 안 들어서 뺨을 후려치고, 가죽 벨트로 등을 마구잡이로 후려쳐줬지. 내 엉덩이를 핥고, 날 사랑한다고 스스로 말할 때까지. 딱히 미안하진 않아. 내 돈 주고 내가 사 온 거니까,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잖아? 안 그래?”
에디스의 말투가 평소와 달라졌다. 확정적인 말투가 아닌 동의를 구하는 형태를 띠었다.
그는 지금 술뿐 아니라 자신의 기억과 감정에도 취하였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켜켜이 쌓아놓은 둑이 무너진 것처럼.
올리버는 호기심이 동해 물었다.
“왜 그 긍지를 포기하신 거죠? 착하게 사는 것요. 대단한 건데요.”
“……끅끅끅끅! 진심이야? 올해 최고의 농담이군! 사람 고깃값 핏값으로 먹고사는 해결사이자, 사람을 재료로 사용하는 흑마법사가 그따위 말을 하다니?”
“그래서 더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나도 양심이 없지만, 너도 나만큼 없구만.”
“그렇습니까?”
“내가 볼 땐. 악의가 없는 악의랄까?”
에디스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술을 들이켰다. 감정의 통제력이 많이 약해졌다.
“제인 그 어미년 때문이야.”
“예?”
“내가 이렇게 살게 된 이유. 제인 그 어미년 때문이라고.”
“어째서죠?”
“날 배신하고 돈 많은 남자를 따라갔거든. 난 이제 지긋지긋하다면서. 떠나기 전에 뭐라 말했는지 아나?”
“글쎄요?”
“내가 착한 건 착한 게 아니라, 무능한 걸 숨기기 위한 포장이라더군. 내 면전에 대고 말이야.”
“……그래서 투자 사업을 시작한 겁니까?”
“물론. 나도 궁금해졌거든, 나의 선량함이 진짜인지, 아니면 무능을 숨기기 위한 포장인지……. 너무 궁금해서. 일부러 경쟁사에 뒷돈을 받아 일하던 공장에 사고를 내 목돈을 만들었지. 그다음 그걸 기반 삼아 투기판에 뛰어들었고. 놀랍게도 내가 투기에 재능이 있더군.”
“기쁘셨겠군요.”
“기쁘다마다. 내 선량함은 포장이 아닌 진짜였다는 게 밝혀졌으니까. 또 큰 가르침도 얻었고.”
“뭐죠?”
“사람이란 아프게 해 줘야지만 존중심을 표한다는 거.”
에디스는 진심을 넘어 신념이라도 해도 좋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을 빛냈다.
"......왜 뭐라 하고 싶나?”
“아뇨. 제가 그런 것에 의견을 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서요.”
“……어쨌건, 충분히 돈을 벌었다고 생각했을 때, 난 그동안 아껴뒀던 케이크 위에 딸기를 집어 먹었지.”
“제인 아가씨 어머니요?”
“그래. 공을 들여 그 집을 박살 냈거든. 돈을 쏟아부어 그 집안 수입을 막아버리고, 도박과 술, 여자로 가장을 타락시켰지. 그 집 가장은 나름대로 건실한 놈인데, 내가 폐인으로 만들어 버렸거든. 내가 제 침대 위에서 마누라랑 붙어먹어도 짖지도 못하게 하는 개새끼로 거세시켰지.”
"......."
“최고의 복수였고, 그때, 제인이 탄생했지.”
에디스가 다시 끅끅끅 숨넘어가듯 웃으며 기쁨을 빛냈다.
꽤나 이상했다. 에디스는 분명 기뻐했지만, 그 이면에는 슬픔과 씁쓸함도 품고 있었다.
“그리고 이게 네가 그토록 오랫동안 궁금해하던 질문의 대답이기도 하지.”
“질문요?”
“내가 제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 선량함과 복수, 승리의 증거거든. 그래서 조금 챙겨주는 거고. 보고만 있어도 즐겁지.”
에디스는 그게 진실인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올리버는 그 내면에 숨겨진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후회, 죄책감, 씁쓸함, 그리움, 미안함 등 애써 억눌린 감정을 말이다.
그러나 올리버는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얼추 궁금한 것을 해결했기에.
투자를 받기 위해 왔는데,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이거 큰일이군. 내 가장 중요한 패를 오픈해 버렸으니. 씨부랄 것! ……술이 원수지.”
“그만큼 전 감사할 따름입니다. 덕분에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됐습니다. 이야기 여부와 상관없이 약은 계속해 드릴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속에 든 감정과 기억을 쏟아낸 에디스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듯 빈 병을 거꾸로 흔들 뿐이었다.
"거 참 고맙군. 한결같이 미친놈이야. 내가 고마워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럼, 이번 마탑에-”
"-이런 개 같은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