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흑마법사-312화 (312/633)

< 312. 기간제 화해 (2) >

“여기 사인하시면 됩니다.”

O구역의 여성 부동산중개인 하나가 서류 사인란을 짚으며 말했다.

란다에서도 보기 드문 여성 전문직 종사자인 그녀는 허투루 이 바닥에서 살아남은 게 아니라는 듯 친절하고 매력적이면서도 빈틈도 없었다.

무력과 다른 종류의 강함.

올리버는 관찰을 끝마친 다음 그녀의 요구대로 사인란에 사인한 후, 현금이 담긴 케이스 가방을 내밀었다.

찰칵-!

부동산중개인이 가방을 열어보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빳빳한 고액화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해당 주택의 1년 치 선(先) 대여료와 계약금, 부동산중개인에게 줄 중개료, 그 외 비밀보장 등을 포함한 기타 특별 수수료였다.

란다의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거금을 받은 그녀는 빙긋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앞으로 1년간 이곳은 고객님의 집입니다. 깔끔한 거래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올리버도 란다 생활에 익숙해졌는지 처음 자신의 거주지를 계약할 때보다 더 능숙하게 서류를 주고받았다.

깔끔한 거래에 여성 부동산중개인은 크나큰 만족을 빛내며 인수인계를 한 뒤 올리버와 올리버 뒤편에 있는 언너 일행에게 정중히 인사하곤 집 밖으로 나갔다.

탁.

“여기 키 받으시지요.”

여성 중개인이 나가자 올리버가 저택 열쇠 꾸러미를 언너에게 내밀었다.

“일반 열쇠니 별 어려움 없이 인원수에 맞게 열쇠를 복사할 수 있을 겁니다.”

언너는 아직도 이 상황이 와닿지 않는지 머뭇거리며 열쇠를 받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제대로 하는 것인지 의심하고 고민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올리버는 자기 할 말을 했다.

“O구역도 아슬아슬하지만, 란다의 중상층 거주지로 꽤 괜찮은 구역입니다. 치안, 편의시설도 괜찮은 편이죠. 특히, 이곳은 사생활을 보호하기도 좋습니다.”

그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이곳 집은 과거 올리버가 거주지를 정할 때 살펴봤던 여러 후보 중 하나였으니.

집이 크고, 지하실이 있었으며, 방음 기능도 있는 데 더해 주변 집과 어느 정도 거리도 있어 사생활을 지키기 유리했다.

언너도 그 부분은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집에 관한 설명을 마친 올리버는 잠시 고민하더니, 뭔가 떠올랐다는 듯 품에서 빨간색 수첩과 지갑 크기의 먹보 주머니를 꺼냈다.

“이건……. 어머니의?”

“알아보시는군요. 바토리 님의 수첩입니다. 고객 명단인 거 같습니다.”

바토리의 유품이라 할 수 있는 물건에 언너는 물론 다른 제자들의 감정은 순간 요동쳤다.

허나, 올리버의 압도적인 무력과 기묘한 압박감, 원수에게 도움을 받는 나쁜 농담 같은 상황에 켜켜이 눌려 아무도 움직이진 못했다.

어쩌면 하수도에서 했던 그 약속 때문일지도.

‘잠시나마 화해해 주실 수 없을까요……? 최소한 1년 정도만요.’

언너는 그때 수락했다.

승패가 너무 명확히 갈렸기에.

물론, 죽음을 택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과연 바토리 패밀리가 이국의 땅 하수도에서 허무하게 사라지는 게 옳은지 의문이었다.

죽으면 끝이지 않은가? 말 그대로 끝.

그래서 언너는 1년 동안의 화해를 받아들였다. 질 나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한 화해를 말이다.

“이 먹보주머니에는 돈을 좀 넣어 뒀습니다. 1년 생활비는 될 겁니다.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의 바르게 말하는 원수를 보며 언너는 자매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 잠시 침실로 올라가 있어.”

“예? 하지만 언너......."

“올라가 있으라고 했어.”

현재 대장인 언너의 단호한 명령에 자매들은 올라갔다. 그녀들은 불안해했으나,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 모습을 올리버가 보며 말했다.

“다들 언너 씨에 대한 믿음이 대단한가 보군요.”

“문제가 있나요?”

언너가 적의와 경계심을 빛냈다.

이해하는 바였다. 뭐가 됐건 올리버는 원수였으니.

1년간 화해를 하기로 했지만, 적개심마저 없애는 건 힘들 터였다.

"아뇨……. 그냥, 대단해서요. 보통 흑마법사 패밀리는 겉으로 사이가 좋아도, 안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아니라서요……. 그게 조금 신기하고 대단하네요.”

언너는 경계심을 빛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어색했고, 올리버는 슬슬 물러날 때라 판단, 이만 헤어지려 하였는데, 그때, 언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같은 어머니를 둔 자매니까요.”

“아……. 바토리 님이요?”

언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바토리를 어머니라 생각했다.

올리버는 다시 한번 바토리가 그녀들을 쓸만한 도구 정도로만 생각한다는 걸 이야기할지 말지 고민했다.

해당 사실에 대한 그녀들의 의견과 감정이 몹시도 궁금했기에. 허나, 한편으로는 조금 그렇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예? 아, 예……. 어떻게 아셨죠?”

“저도 흑마법사니까요……. 당신은 감정이 몹시도 약해 구별은 잘 안 되지만요.”

"아……. 말씀처럼 말하고 싶은 게 있긴 합니다. 다만, 실례가 될 것 같아서요. 아마도요.”

언너는 조금 망설이다가 해보라고 했다. 올리버를 파악하려는 의도로 말이다.

“음……. 언너 씨를 비롯해 다른 분들은 바토리 님을 소중히 생각하는 거 같지만, 사실, 바토리 님은 아니라는 것 아십니까? 말은 딸이라고 하시지만, 여러분을 다른 흑마법사와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즉, 그녀들을 자신의 재산 혹은 도구로 본다는 것. 허나, 언너는 그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닌,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시는군요.”

“그분을 오랫동안 곁에서 보필했으니까요.”

그녀는 생각 이상으로 담담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분을 따르는 거냐고요?”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송장인형으로 만든 바토리를 보여줬을 때 그녀가 보여준 분노는 진짜였다.

강렬한 감정이 이성을 잡아먹은.

그럼에도, 바토리가 자신들을 도구로 보는 걸 알고 있었다.

흥미로웠다.

“……나와 내 자매들은 대부분 버림받은 존재예요. 가난한 하류층에 여자이기까지 하죠.”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난하고 하류층인데, 여자이면 얼마나 힘든지 올리버도 얼추 알았다.

고아원에서 봤으니.

"대부분 죽을 뻔……. 아니, 죽었었죠. 비참하고 쓰레기 같게요. 그때 유일하게 도와준 게 어머니예요.”

“바토리 님이요?”

“예……. 그분이 저희에게 불안정하나마 두 번째 생명을 주셨고, 가르침을 주시고, 더 나은 삶과 자매를 주셨어요. 그분이 우릴 도구로 봤다해도 그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아……. 올리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바토리의 행위 목적이 어떻든 그녀들에게 도움을 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

그렇기에 바토리와 그녀의 관계는 거짓되지만 진실하기도 한 것이었다.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좀 더 진심을 담아 말이야.

“바토리 님 건은……. 정말 죄송합니다.”

언너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1년간 화해라는 정신 나간 관계를 맺었지만, 아직 용서 안했다는 증거.

딱히 불만은 없었다. 올리버가 먼저 제안하고 원한 것이기에.

그러던 중 언너가 입을 열었다.

“저도 질문하나 할 수 있을까요?”

“말씀하시죠.”

“왜 우리를 이렇게 도와주는 거죠? 돈도 적잖게 들었을 거 같은데.”

그녀의 말은 맞았다. 이 집을 빌리고, 생활비 등 2, 3년 전의 올리버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액수를 사용했다.

"음……. 전 여러분이 좋거든요.”

“뭐라고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던 언너가 불쾌감을 표출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매분들과 사이가 좋지 않습니까……. 흑마법사 패밀리가 그러는 게 쉬운 게 아닌데요. 그게 흥미롭고 보기 좋아서요.”

언너는 올리버가 진심인지 조롱하는 건지 판별하기 위해 눈에 신경을 집중했다. 올리버는 조롱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거듭 설명했다.

“물론, 꽤 큰돈을 썼지만, 최근에 벌이가 좋아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기도 하고. 또, 여러분께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아서요. 바다 건너 소식은 신문 외에는 접할만한 게 없거든요.”

“우리를 정보통으로 쓰고 싶다는 거군요. 우리는 대답할 수밖에 없고요. 이렇게 도움을 받았으니……."

“아뇨. 그건 아닙니다. 대답해주시면 감사하겠지만, 억지로 안 그러셔도 됩니다. 이렇게 도와 드린 건 1년 화해 감사 겸 나름대로 사죄의 표시라서요.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제가 바토리 님을 죽였으니까요.”

언너의 얼굴 근육과 힘줄이 살짝 도드라졌다.

“……그럼, 질문에 대답 안 해도 되나요?”

"음……. 그때그때 서로 도와주는 건 어떨까요? 여러분이 제 물음에 도움을 주면, 저도 여러분을 도와 드리는 거요.”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이 정신 나간 소리를 올리버는 진심으로 지껄이고 있었다.

언너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올리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오늘은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가끔씩 찾아올 테니 필요한게 있으면 말씀해주십시오. 아, 그리고 저랑 약속한 건 꼭 지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약속이란 도와주는 조건으로 최소 1년 동안은 자신을 공격하지 않고, 란다에 해가 될 짓을 하지 말라는 상식적인 것이었다.

어길 시 모조리 죽이겠다는 조건을 걸었고, 언너는 이를 받아들였다.

“하나만 더 물어보죠.”

“……뭐죠?”

“혹시, 우릴 굴복시켜 아래에 둘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언너는 고민 끝에 질문했다.

간혹 자신의 힘과 재력, 카리스마로 다른 흑마법사를 휘하에 두는 경우가 있었기에.

올리버는 온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아뇨. 절대로요……. 또,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요.”

***

“휴가 잘 보냈나?”

합법적인 3일 동안의 휴가를 마치고 마탑으로 돌아온 올리버에게 케빈이 대뜸 물었다.

“예....... 잘 보내고 왔습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그냥. 종강 뒤풀이로 사건 사고가 많을 때라 혹시 몰라 물어봤어.”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곳에 초대받지 못해서요.”

“그냥 어수룩해 보이는 마탑 관계자를 노리는 강도나, 좀도둑. 사기꾼도 있어서. 또, 왠지 너는 호기심 때문이라도 그런 곳에 스스로 발 디딜 것 같고.”

케빈이 올리버를 정확히 꿰뚫어 봤다.

경우가 다르긴 했지만, 저번에 올리버도 강도를 한번 만나긴 했고.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조심하도록 해. 계절학기가 곧 시작될 테니.”

“예, 명심하겠습니다. 혹시, 제가 할 일이 있습니까?”

“때마침 있어. 일단, 점심시간까지 이거 분류하도록 해.”

케빈이 자신의 책상 위에 쌓인 서류 다발을 가리켰다.

서류는 학생들의 신상 정보로, 그 양이 제법 됐다.

“분류라면 학기 초에 했던 그 분류 말씀입니까?”

“맞아. 소속 학파나 소학파 기타 특성에 맞게 나눠. 학생들을 파악해야 그에 맞게 수업을 짤 수 있으니까.”

맞는 말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의문이 생겼다.

“원래 계절학기는 학생들 숫자가 적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아."

"하지만 저기 쌓인 서류는 양이 꽤 되어 보입니다?”

“그것도 맞아. 저번 학기에 네가 맡았던 학생들이 모두 재수강을 신청했고, 다른 학생들도 추가 신청을 했거든."

"아......."

“뭔가 소문을 들은 것 같기는 한데, 그것과 상관없이 난 내 방식대로 진행할 거야. 급한 건 아니니, 점심때까지 천천히 정리하고, 오후에는 날 따라와.”

“무슨 일인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방학 동안 도와줄 연구원을 뽑을 생각이거든. 와서 보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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