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 뒷마무리 (5) >
“뭐라고요?”
올리버가 다시 질문했다.
케빈의 말을 제대로 못 들었다기보다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다.
“야렐리의 아비를 내가 쓰러뜨렸다고. 마탑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철저하게.”
케빈이 다시 대답해줬다. 역시나 올리버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야렐리의 아버지를 케빈이 쓰러뜨렸다니. 그것도 마탑의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뭔가 사연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건 그 이상이었다.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봐.”
"왜 야렐리 씨의 아버지와 싸우신 거죠?”
케빈은 멍청한 질문이라도 들은 듯 한쪽 눈썹을 올렸다.
“반대로 질문하지. 넌 내가 마탑에 있는 게 이상하지 않나?”
“이상해야 하나요?”
“보통은 이상하지……. 마탑하면 무슨 이미지가 떠오르나?”
“마법사, 란다를 대표하는 거대 기관, 뛰어난 마법 기술, 거대한 부, 엘리트주의……. 적자생존, 우생학 같은 게 떠오릅니다.”
“제대로 배웠군. 다시 묻지. 내가 마탑에 내가 있는 게 안 이상하나?”
“……아.”
올리버가 두 박자 늦게 대답했다.
말의 요점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케빈은 홍인(紅人). 마법사들의 관점에서 아주 열등한 인종이었다.
멍청하고, 야만적이며, 스스로 발전하지 못하는…….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현재 마탑은 그런 흐름을 타고 있었다.
일부 교양 과목과 책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
그런 마탑에서 홍인(紅人) 마법사. 그것도 마스터에 교수까지 맡은 건 확실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처음 마탑에 왔을 때 이에 관해 인지했지만, 케빈의 성실함과 능력 덕분에 잠시 잊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니 약간 이상하긴 하네요……. 허나, 교수님께서는 어르신 제자이지 않습니까?”
어르신이란, 다름 아니 아카이브 멀린을 뜻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올리버가 그동안 보고, 듣고, 겪은 바에 따르면 아주 위상이 높은 존재인 건 확실했다.
“그러니 문제없는 것 아닙니까?”
딱!
케빈이 손가락을 평겼다.
“정답. 하지만 반쪽짜리 정답이야.”
“반쪽짜리 말씀입니까?”
“그래, 뛰어난 스승님을 둔 덕택에 내가 마탑에 들어올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마탑에서 인정받는 건 별개거든.”
“그렇습니까?”
“넌 스승님이 하나부터 열까지 다 쥐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케빈의 질문에 올리버는 그동안 봐온 멀린을 떠올려봤다.
좋은 책을 권해주지만 돈은 받고, 조언은 하지만 직접적인 도움은 주지 않으며, 직접 나섰을 때는 그만한 가치를 입증하라 요구했다. 수업 역시 환경과 방향만 제공할 뿐 공부는 직접 해야 했고.
“음……. 아뇨, 정말 기회만 줬을 거 같습니다.”
“맞아……. 스승님께선 마탑에 날 넣어주는 대신 판을 깔아줬어. 내가 스스로를 증명할 판을. 마탑은 스승님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지. 스승님의 요구는 그 무게가 남다르고, 마탑의 명예를 위해서도 거부하지 못했어……. 홍인(紅人) 따위에게 겁먹었다는 인상을 줄 수 없었으니.”
"그럼, 그때 야렐리 씨의 아버지와 싸우신 겁니까?”
“그를 포함한, 아그니 소학파, 묠니르 소학파, 엔릴 소학파, 가이아 소학파. 원소학파의 모든 소학파 마법사와 싸웠지.”
".....왜 원소학파죠?”
“내가 원소학파에 들어가고 싶었거든. 스승님의 소속학파인 데다, 가장 강력한 학파이기에……. 뭐, 요즘은 상대적으로 하락세긴 하지만.”
“아……."
올리버가 소리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기괴한 대화라 할 수 있었다.
홍인(紅人) 마법사 하나가 전통 학파인 원소학파와 싸운다고 하는데, 이상한 부분에서 반응하다니.
더 기괴한 건 어느새 케빈도 거기에 익숙해지다 못해 동화됐다는 거였다.
“모두 마스터 급. 혹은 그에 준하는 마법사……. 난 마탑에 들어오고자 모두가 모는 앞에서 그들과 차례대로 싸웠고, 철저하게 짓밟았지. 철저하게.”
철저하게라……. 올리버는 그냥 붙인 단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미, 케빈과 한번 싸워봤기에.
그는 싸움에선 가차 없었다.
“모두 패배를 부정할 수 없게 난 상대를 짓밟고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몸에 새겨줬지. 날 존중하라는 의미로.”
“상처를 남기면 존중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론, 상처는 고통이고, 고통은 공포, 공포는 존중을 부르니까……. 특히, 명문 가문에, 날 깔보던 야렐리의 아비에겐 가장 큰 존중을 심어줬지. 그것도 얼굴에. 결국, 원소학파는 날 마법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음……. 그분들은 어떻게 됐죠? 교수님과 대련했던 나머지 분들은요.”
“도태됐지.”
도태. 간결하지만 그 어떤 단어보다 명확한 단어였다.
올리버는 케빈이 상대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최악은 목숨을 잃는 거고, 차악은 마탑에서 쫓겨나는 거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울지도……. 마탑에서 개인의 실력만큼 중요한 게 행적과 체면이었으니.
의도치 않은 불행으로 너무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는 안타까운 구조. 덕분에 이곳 사람들 대다수 풍족함에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의문이었어.”
“무엇이 말씀입니까?”
“그 아비의 딸인 야렐리가 내 수업을 듣겠다고 찾아왔을 때 말이야. 명문가의 이름을 먹칠한 아비의 딸이라고 제법 들볶였을 텐데……. 그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내게 접근했는지 아나?”
“글쎄요? 전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거지, 생각까지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라서요.”
“아쉽네. 너 정도면 생각도 읽을 줄 알았는데.”
“실망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다만, 야렐리 씨가 교수님을 호의적으로 보는 건 아니라도, 그렇게 나쁘게 보는 것도 아닙니다. 부분적으로는 교수님을 존중하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올리버의 말에 케빈이 잠시 생각해 빠지다가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그는 이런 문제에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다른 주제를 꺼냈다.
“난 개인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안 좋아해. 그런데 그런 내가 왜 이 질문에 대답해 준 것 같나?”
"글쎄요?”
“부탁할 게 있기 때문이야.”
아……. 왜 말하기 싫은 눈치였던 케빈이 중간에 마음을 바꿔먹었는지 알았다.
그는 원하는 게 있었다. 뭐, 그것을 비난하는 건 아니었지만.
“말씀하시지요.”
“내게 흑마법을 가르쳐 줄 수 있나?”
“흑마법요?”
“그래, 배우고 싶어.”
올리버는 놀랐다. 무슨 부탁인지 몇 가지 예상해봤지만, 거기 흑마법은 없었기에. 예상 밖이었다.
“죄송하지만, 어째서 배우려는 건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너무 예상외라……. 혹시, 흑마법에 관심이 생기셨습니까?”
“아니, 솔직히 말하면 흑마법에는 딱히 관심이 없어. 너한테 대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난 마법과 흑마법 중 어느 것이 더 우월하냐고 생각하냐면 망설임 없이 전자라고 할 거야.”
“기분 안 나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만, 그러신대 왜 흑마법을 배우시려는 겁니까?”
“더 강해지기 위해서지. 그리고 흑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건 정말 흑마법을 구사하고 싶은 게 아닌 감정과 마력을 융합하기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해."
“아……. 예, 알겠습니다.”
납득가는 대답에 올리버는 바로 수락했다. 허무하리만치 쉽게.
감정과 마력의 융합.
기술의 가치와 위력을 고려하면 절대 이렇게 가르쳐 줄 것이 아니었건만, 올리버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올리버를 나름대로 파악했다고 생각한 케빈조차도 꽤 당혹스러웠다.
마법사나, 흑마법사나 지식이 가장 큰 재산인 매한가지인데. 올리버에겐 그런 개념이 없었다.
“아, 물론 공짜가 아닙니다.”
올리버가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케빈은 짜증보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런 문제는 좀 더 상식적으로 가는 게 마음이 놓이는 법이었으니.
“……원하는 게 뭐지?”
“교수님께서도 제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셨으면 합니다. 마법이라든가, 마탑이라든가, 지금 하는 연구라든가, 종군 마법사라든가 혹은 어르신 밑에서 어떤 수련을 하셨는지 등……. 교수님께서 하기 싫은 개인적인 이야기를요.”
".....왜? 갑자기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거지?”
“갑자기는 아닙니다. 사실 전부터 궁금하던 건데, 도움을 받는 처지라 여쭤보지 못한 것뿐입니다.”
“다른 거로 거래할 생각은 없나?”
“음……. 없습니다.”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
“예? 뭐죠?”
“난 네가 싫어.”
***
올리버와 케빈이 거래를 마치고 대략 2주 안팎의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케빈과 올리버는 힘을 합쳐 종합 성적 채점, 계절학기 신청, 계절학기 교육 과정 보고서 및 예산 신청, 교수 개인 연구 신청 및 일정 조율, 그 외 기타 등등 온갖 잡무를 처리했다.
해일이 몰아치는 것처럼 바쁜 수준은 아니지만, 마를 새 없이 일이 끊임없이 들어왔는데, 다행히 그것도 오늘 밤 9시쯤이 되자 끝이 나고 말았다.
“고생하셨습니다.”
마지막 업무까지 끝마친 올리버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 작업으로 굳은 몸을 우두둑 풀었다.
케빈 역시 몸을 우두둑 풀며 대답했다. 원래는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을 빈틈투성이 모습……. 아닌 척해도 한 학기 동안 같이 일하며 올리버와 익숙해졌다는 증거였다.
“너도 고생했다. 이만 퇴근해.”
“예, 알겠습니다……. 교수님께선 퇴근하지 않으실 겁니까?”
올리버가 전혀 일어날 생각이 없는 케빈을 보며 물었다.
“난 할 일이 조금 더 남아서.”
“아, 그럼 저도 마저 돕고 퇴근하겠습니다.”
“됐어. 어차피 네 도움이 필요 없어. 솔직히 있으면 방해야. 그냥 퇴근하고, 삼일 휴식하다 다시 나와.”
“아…….그럼, 알겠습니다.”
케빈의 진심을 들은 올리버가 대답하고는 정중히 인사하며 퇴근했다.
케빈은 지루한 서류 작업이 끝났다는 해방감과 그로 인한 피로감에 잠시 의자에 기대 한숨 돌렸다.
“……이제는 아주 막 들어오시는군요.”
잠시 쉬는 중 느껴진 인기척에 케빈이 말했다.
마법의 힘으로 사무실에 들어온 멀린이 대답했다.
“미안하네. 하지만, 내가 말하지 않았나-”
“-스승은 제자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고 멋대로 들쑤시고 들어와 마음의 평화를 깨뜨릴 권리가 있다고요? 옛날에 많이 겪어봐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막 들어오는 모습 들키면 어쩌려고요. 원마스터(One Master)들이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 들킬 염려가 없을 테니. 미리미리 확인하고 들어오거든.”
멀린이 의자를 가져와 케빈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속 편한 소리가 아닌, 사실이었기에 케빈은 그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스승은 아카이브 멀린이었으니.
“……이번 학기 역시 성적이 짜더군.”
멀린이 대뜸 말했다. 케빈은 별일 아닌 듯 대꾸했다.
“성적은 교수 재량껏 줄 수 있는 거니까요.”
“이러면 다음 학기 때 학생들이 수업을 듣지 않을 걸세.”
“상관없습니다. 듣든 안 듣든……. 능력도 안 되는 주제 좋은 성적 받겠다는 놈들은 오히려 제가 사양입니다.”
“그럼, 인사고과에서 밀리지 않겠나? 마스터는 길러낸 학생 수로 평가받을 텐데. 또, 나중에는 그 학생들이 마법사가 돼 영향력을 발휘할 거고.”
“인사고과는 다른 곳에서 메꾸면 되고, 그딴 정치는 필요 없습니다. 실력만 압도적이면요. 그런 이야기 하러 오신 겁니까?”
“아니, 고맙다는 인사하러 왔네. 방학 중에는 개인 연구에만 몰두할 생각이었을 텐데, 계절학기도 맡아줬잖나?”
“아뇨, 괜찮습니다. 저도 흥미가 동해서요. 또, 연구보다 더 관심이 있는 게 생겼고요.”
케빈은 진심이었다. 군사 마법을 연구해 입지를 다지려던 원래 계획보다, 감정과 마력을 융합하는 기술에 더 관심이 갔다.
군사 마법 연구는 단기적인 실적이라면, 감정과 마력을 뒤섞는 기술은 케빈의 수준을 한 단계, 어쩌면 몇 단계 영구적으로 올릴 수 있는 일이었으니.
물론, 흑마법이라 자칫 리스크가 따를 수 있었지만,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됐다. 힘이란 그런 것이었으니.
“그렇다면 다행이군.”
“네……. 이왕 오신 것 저도 질문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출장에 관한 건가?”
“아뇨. 궁금하긴 하지만, 어차피 이야기 안 해주실 거잖습니까? 말해 줄 거면 이미 진즉에 해주셨을 테니.”
“끌끌끌……. 날 너무 잘 아는군. 그럼 뭘 물어보려고?”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약간 신경 쓰이는 건데, 저번에 데이브와 식사했을 때 이브(Eve)에 관해 이야기했잖습니까?”
“그렇지.”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이라서요. 스승님께선 단순 정보 축적만으로는 이브(Eve)가 탄생하는데, 회의적이지 않았습니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아직 탄생하지 않았지만, 언제가 탄생할 거라 믿었던 세계수의 의지 이브(Eve).
해당 분야를 연구한 마법사들은 이브(Eve)에 관해 저마다 의견을 냈고, 논문도 썼다.
또 다른 혁명이라 할 수 있는 거였으니.
그리고 그중 한 명인 멀린 역시 이에 대한 의견을 가졌지만, 주류 의견과 달리 단순 정보 축적만으로는 이브(Eve)가 탄생할 수 없다는 쪽이었다.
벽돌이 많이 있다 한들 탑을 쌓을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치.
벽돌을 지지해줄 시멘트와 철근이 필요하다고 멀린은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런 그가 데이브와의 식사 때 단순 정보 축적만으로 이브(Eve)가 탄생한다고 주장하다니, 중요한 건 아니지만 신경 쓰였다.
“뒤늦게 생각이 바뀌신 겁니까?”
“음……. 아니.”
“그런데 왜?”
“거기서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케빈은 침묵했다. 옛날부터 느낀 거긴 하지만, 멀린은 데이브 녀석을 무슨 위험한 종기처럼 취급했다.
애당초 자신에게 맡긴 이유가 적절한 거리에서 관찰하기 위해서였으니.
뭐, 녀석의 재능과 능력, 불가해한 특성을 보면 충분히 이해 가는 바이긴 하지만.
“예, 알겠습니다.”
“으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나도 하나 질문하나 하지. 자네는 이브가 갑자기 왜 생겨난거 같나?”
“? 그건 모르죠. 스승님을 포함한 모두 권위자들도 결국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나눌 뿐이지 않습니까.”
“만약에 말일세. 감정으로 세계수에 접속할 수 있는 일종의 오류가 발생하면 어떨 거 같나?”
“예?”
“감정으로 세계수에 접속하면 어떻게 될 거 같냐고 물었네.”
“그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말한 거고, 오류라고 칭한 거지.”
"그럼……. 세계수에 감정이 흘러 들어갈 테고, 그 감정은 축적된 마력과 정보와 반응……. 아.”
케빈은 반쯤 넋이 빠진 소리를 냈다.
딱 한 명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는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