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5. 뒷마무리 (3) >
“음……. 처음부터 균형이 맞게 강한 분요?”
올리버가 별거 아닌 듯 말했지만, 정확한 표현이기도 했다.
스카디 학파의 명문가인 아이스아이 가문의 야렐리는 그 명성에 걸맞은 마력량과 마법 능력, 그 못지않은 전투경험을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건조한 곳에서는 사용하기 불리한 얼음 마법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구사할 만큼 능숙했으며, 그 이상으로 얼음 마법의 특성인 독과 같은 냉기와 구속력, 공간 장악 능력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그녀는 보유한 마력량에 비해 소소만 마법만 사용함에도 상대를 손쉽게 제압했으며, 그 와중에도 상대가 다치지 않게 배려해 줬다.
실력이 몇 수 위여야 가능한 행동들.
그런 탓인지 야렐리를 상대한 학생이나, 구경하던 학생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그녀에게 호감과 동경 등 긍정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다.
‘본인은 조금 피곤해 보이지만......'
올리버가 야렐리의 감정을 꿰뚫어 보며 생각했다.
뭐, 그리 이상한 게 아닐지도..…. 마탑의 대부분 학생은 저마다 압박감에 시달려 정신적, 감정적으로 늘 피로한 상태였으니.
아닌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으며, 명문가 사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올리버가 여태껏 본 바로는 명문가 소속일수록 그 기대치가 높은 것 같았으니.
‘다들 힘드시겠구만.’
올리버가 케빈과 함께 야렐리에 대한 평가표를 작성하며 생각했다.
사각. 사각. 사각….
잠시 후 펜을 쓰는 소리가 멈추며, 케빈은 타이머를 맞춰놓은 시계를 되돌린 후 질문했다.
"펠릭스하고 데릭은 마지막 열 번째 시합까지 치른 거지?”
“예, 데릭 씨와 펠릭스 씨는 끝났습니다. 야렐리 씨는 아직 마지막 시합이 하나 남았고요.”
올리버가 작성한 평가표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마법 전투 기초] 기말시험은 케빈이 정한 대전표대로 학생들끼리 시합시키는 것으로, 학생들 한 명당 열 번의 시합을 연속으로 치러야 하는 강도 높은 방식을 취했다.
덕분에 데릭이나 야렐리와 같은 소수의 학생을 제외하고는 학생들 대부분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허나, 그래도 이렇게 해야 한다. 마법 전투는 종군 마법사를 대비한 수업이고, 전쟁은 시합이 아니니. 극한까지 자신을 쥐어짜야 비로소 도움이 된다.’
다른 [마법 전투 기초] 수업과 궤가 다른 강도 높은 시험 방식에 학생들이 기겁할 때 케빈이 그리 말했다.
올리버가 듣기에는 그렇게 틀린 말 같진 않았다.
목숨을 건 싸움이라면 예상치 못한 상황이 더 자주 발생하는 법이었으니. 이쪽이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물론, 성적은 아니겠지만.’
올리버가 앞의 시험을 치른 학생들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실력이 괜찮은 학생도 모자란 학생도 있었지만, 그와 별개로 대부분 연속된 시합에 지쳐 중간에 나가떨어졌고, 케빈은 그들에게 ‘넌 죽었어.’라고 말했다.
평가에 냉정한 케빈의 성격상 대부분 좋은 성적 받기는 힘들 터.
근래 마탑에서는 도움 되는 과목보다 성적 잘 받는 수업을 선호하는 이유가 왜인지 올리버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저기 한 말씀 드릴 수 있을까요?”
데릭과 펠릭스가 내려오고 다음 차례 학생들이 올라가던 중 야렐리가 차분하지만 선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독특한 목소리였다.
분명 목소리가 크지 않음에도 사람의 이목을 끌고 귀에 잘 박혔으며, 듣기에도 좋았다. 꼭 연습이라도 한 것 같았다.
“뭐지? 혹시, 어디 안 좋나?”
케빈이 물었고, 야렐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다친 곳이 없으며, 체력도 괜찮습니다.”
“그럼?”
"허락해주신 다면 마지막 상대는 제가 지명해볼 수 있을까요?”
“상대를 지명?”
너무 의외의 발언이었는지, 케빈은 미간을 찌푸렸다.
“예."
“음..….누구랑 싸우고 싶은 거지?”
“제논 씨와요.”
야렐리가 평가표를 작성 정리 중이던 올리버를 가리켰고, 모두의 시선이 올리버에게 쏠렸다.
***
모두에게 쏠리는 시선. 올리버는 기시감을 느꼈다.
[마법 전투 기초] 첫 수업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유가 뭐지?”
케빈이 물었고, 야렐리는 청산유수 대답했다.
“이 시험의 목적은 단순히 성적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식 마법사로 승격 받은 뒤 종군 마법사 때를 대비한 훈련이기도 하다고 교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하나하나 봐둬서 약점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올리버는 감탄했다. 야렐리는 지금 자만이 아닌 냉철한 평가를 통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쩐지..…. 학생들이 머뭇거리는 타이밍이나 혹은 다음 대응 방식을 훤히 깨고 있더라니, 전부 파악해 둔 거였다. 놀라운 관찰력과 기억력이었다.
케빈도 그것을 인정하는지 아무런 반박도 안 했다.
즉, 야렐리는 정확히 맞는 말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녀는 못을 박았다.
“그러니 제가 잘 모르는 제논 씨와 시합하는 게 훈련 면에서나 평가 면에서나 더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올리버가 학생이 아니라는 점만 고려하면 그리 틀린 말 같지는 않았다. 다른 학생들도 흥미를 가지며 동조했고.
올리버는 케빈을 봤다. 그는 잠시 고민하고 있었다.
단순히 싫다기보다는 좀 더 사연이 있는 듯한 거부감을 빛냈다.
“혹시, 안 되는 이유가 있나요?”
야렐리가 툭하고 질문을 던졌다. 허나,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뼈가 있었다. 의심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감정이 그 증거.
도발 아니 도발에 케빈은 미세하지만 불쾌감을 빛냈다.
의외였다. 서로 약간씩 불편한 감정이 있었지만, 그건 홍인(紅人)이라 그런 것이고 그 외에는 아무 문제 없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착각인 듯했다.
케빈이 올리버를 바라봤다.
“제논, 해볼 생각 있나?”
“뭐..…. 일이라면 하겠습니다.”
***
올리버는 야렐리와 케빈의 제안대로 겉옷을 벗은 다음 톤파를 챙겨 경기장 위로 올라갔다.
일단, 하겠다고 하긴 했지만, 갑자기 왜 이런 상황이 된 건지 의문이었다.
‘이것도 기시감이 드는데?’
관심과 흥미로 두 눈에 생기가 돌아온 학생들을 보며 올리버가 생각했다. 그들은 시험도 잠시 중단하곤 경기장을 둘러싸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첫 수업 데릭과 시합했을 때도 이랬던 것 같았는데 말이다.
“쿼터스태프가 낫지 않나요?”
어색한 분위기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올리버를 향해 야렐리가 대뜸 물었다.
“예?”
“쿼터스태프가 낫지 않겠냐고 물었어요. 첫날 수업 때 그걸 사용하셔서요.”
“아. 요즘은 톤파가 더 손에 익어서요. 말씀은 감사합니다.”
올리버가 반쯤 거짓말했다.
송장인형-던칸과 조에게 톤파와 싸움을 배우고 있어 손에 많이 익은 건 사실이었지만, 사용 기간 탓인지 쿼터스태프보다는 덜 익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올리버가 그리 생각하며 케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케빈은 제법 진지하게 경기장 가운데로 와 시합 규칙에 관해 설명했다.
데릭 때와 똑같아 크게 신경 쓸 것은 없었다.
“시합 시간은 다른 시험처럼 5분. 이해했나?”
“예."
“이해했습니다.”
“좋아......."
케빈은 그 말과 함께 경기장 밖으로 나갔고, 마력을 조작해 경기장 주변에 마력 장벽을 둘렀다.
“시합 시작.”
케빈의 선언과 함께 야렐리는 자신의 발을 매개로 경기장 바닥에 광범위한 얼음을 형성. 사방으로 뻗어 나가게끔 했다.
다른 학생들처럼 미리 준비한 게 아닌 시합 시작과 동시에 시작한 것이라 올리버는 평소보다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실로 놀라운 숙련도.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 필살의 공격이 아닌, 포석에 불과하다는 거였다.
야렐리의 감정이 이를 이야기해주었고 올리버는 그에 보답하고자 톤파를 도끼처럼 고쳐 잡아 아래에서 위로 뒤집듯 전방을 헤집었다.
덕분에 경기장 전체를 덮던 얼음이 헤집어진 부분은 덮지 못했다.
‘오래 끌면 위험하겠지?’
올리버가 앞에서 본 야렐리의 시합과 그녀의 감정 상태를 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독과 같은 냉기로 상대의 신체기능을 저하시키고, 덫과 같은 얼음으로 공간을 지배해 상대방을 천천히 찍어 눌렀기에 오래 끌면 올리버가 불리했다.
단순히 지는 거면 괜찮았지만, 어째 찜찜했다.
희미하긴 하지만 야렐리가 올리버를 향해 의심과 확인이라는 욕구를 빛냈기에.
악의적이거나, 음험하진 않았지만 뭔가 속셈이 있었고, 조심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올리버는 얼음이 뒤덮지 않은 땅을 밟아 앞으로 나아갔다. 얼음송곳이 파칭! 하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솟구쳐올라 올리버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얼음으로 덮인 옆의 땅에서 솟아난 것으로 고밀도의 마력까지 머금고 있어 일순간 시야가 차단됐다.
올리버는 톤파를 휘둘러 앞을 가로막은 얼음송곳을 파괴하고는 앞을 봤다.
야렐리는 그 자리에 없었다.
휙——————팡!!
올리버는 야렐리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온몸에서 마력을 뿜어 주변을 감지, 톤파를 채찍처럼 휘둘러 측면에서 날아온 얼음 다트를 쳐냈다.
유리잔이 깨지는 듯한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얼음 파편이 사방에 튀었고, 그 너머에 있는 야렐리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얼어붙은 땅을 매개로 재빠르게 이동해 다시 얼음 다트를 생성 던졌다.
트드드드드......휙—!
올리버는 톤파를 채찍처럼 휘둘러 얼음 다트를 쳐냈고 야렐리는 계속해 얼음 다트를 날렸다.
그녀답지 않은 비효율적이고 지루한 공격. 올리버는 곧 속셈을 알 수 있었다.
휙一!
휙一!
여러 개의 얼음 다트 가운데 올리버는 두 개를 깨지 않고 옆으로 몸을 틀어 피했다.
올리버가 깨지 않은 얼음 다트가 마력 장벽과 부딪히자 주변을 얼게 하는 강력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수가 간파당한 야렐리는 바닥에 깔아놓은 얼음을 매개로 큰 공격을 준비하려 했으나, 올리버는 그것을 보자마자 톤파를 도끼처럼 던져 마법의 시전을 방해했다.
마법이나 흑마법이나 몸싸움이나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전개 전에 막는 거였으니.
생각 이상으로 저돌적인 공세에 야렐리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올리버를 봤다.
아직 끝이 아니었지만.
올리버가 던진 톤파는 바닥에 박혔고, 올리버는 미리 설치한 마력실을 잡아당겨 야렐리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얼음으로 바닥이 미끄러워 지지할 것이 필요했기 때문.
‘얼음 마법. 불과 정반대지만 비슷하네.’
주변 환경에 큰 영향을 받고, 광범위한 마법을 통해 공간을 장악하는 점을 콕 집어 올리버가 생각했다.
야렐리는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는 올리버를 보고 잠시 당황했지만, 정말 실전 경험이 많은지 곧바로 진정하며 마법을 사용했다.
[프로스트 브레스(Frost Breath)]
야렐리가 경기장 주변의 냉기를 삼킨 다음 그대로 올리버를 향해 후하고 뱉어냈다.
피부를 찢고, 신체기능을 저하시킬 살인적인 하늘빛 냉기를 말이다.
접근 중 정확히 날린 것이라 피하기도 여의치 않았기에 올리버는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뚫기로 했다.
한쪽 톤파를 쥔 채 마력을 꽉꽉 담아 정권을 내지르는 것.
파앙.....!!
마력을 꽉 담은 올리버의 주먹이 날아오는 하늘빛 냉기를 향해 뻗어갔고, 놀랍게도 냉기는 구심점을 잃은 듯 넓게 퍼졌다.
솨아아아아아……
마력으로 위력을 높이고, 술식의 약점을 공략했기에 가능한 결과.
경기장 밖에서 구경하던 학생들은 짧은 시간 이뤄진 공방에 감탄을 내뱉었다.
야렐리 몇 발자국 앞에서 멈춘 올리버.
야렐리는 자신의 마법이 파훼되었음에도 당황하지 않고, 땅에 얼어붙은 얼음을 끌어모아 반격을 준비했다.
올리버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마력실로 연결된 톤파를 잡아당겨 회수 야렐리의 어깨를 향해 휘둘렀다.
팍!!
야렐리는 끌어모은 지면의 얼음을 방패처럼 둘러 올리버의 공격을 방어했을 뿐 아니라, 박힌 톤파를 고정해 톤파와 올리버의 손을 그대로 얼리려 했다.
아차하면 당하는 치밀한 반격.
올리버는 감탄하며 멀쩡한 반대쪽 톤파로 얼어붙은 톤파를 후려쳐 손을 둘러싼 얼음을 깬 다음 마력을 집중해 떨어진 체온을 회복했다.
고화력으로 상대방을 순식간에 압도하는 화염 마법이 얼음 마법보다 더 효용성이 높다고 생각했건만, 아무래도 잘못된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화염 마법이 고화력으로 상대를 찍어 누른다고 한다면, 얼음 마법은 상대방을 서서히 옥죄었다.
성격의 차이만 있을 뿐 화염 마법 못지않게 위협적이었다.
얼어붙은 손 회복을 마친 올리버는 다시 야렐리를 공격하려 했으나, 그녀는 한발 빠르게 양손에 마력을 끌어모으더니 얼음으로 뒤덮인 땅에 마력을 부여했고 거대한 얼음벽을 만들었다.
올리버와 자기 사이에..…. 그리고 경기장 전체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