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4. 뒷마무리 (2) >
“기부요?”
“예.”
카버가 놀란 듯 물었고, 올리버가 대답했다.
카버는 잠시 올리버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돈만 주시면 그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죠.”
"감사합니다. 여기.”
올리버가 기다렸다는 듯 품 안에서 통장을 하나 꺼냈다.
ABC 의뢰로 받은 성공 보수로, 통장 안에는 10억 란다가 들어 있었다.
특별한 능력을 갖췄거나, 타고난 사업 수완 혹은 엄청난 행운이 없으면 절대 만질 수 없는 거금.
올리버는 그런 거금을 망설임 없이 카버에게 건네줬다.
“기부 액수는 고아원이 딱 필요한 만큼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리고 돈이 다 떨어지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음……. 예, 알겠습니다.”
카버가 뜸을 들이며 대답하자 올리버가 물었다.
“혹시, 이유가 궁금하십니까?”
“솔직히 안 궁금하면 그게 이상하겠죠?”
실로 맞는 말이었다.
웬 흑마법사가 좌천당한 성기사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녀가 있었던 고아원에 관심을 가진다는 게 어떤 관점으로 봐도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네요. 음……. 이유는-”
“-아뇨. 말씀까지는 안 해주셔도 됩니다.”
카버가 올리버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정말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이 도시는 복잡하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 복잡한 사정을 가졌습니다. 공무원 생활을 해본 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꼭 필요한 게 아니면 남들의 사정에도 관심 가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게 정신적으로 덜 피로하거든요.”
“아……."
“제가 관심 있는 건, 이 도시의 번영과 그 번영을 도와줄 사람뿐. 그 외에는 걸림돌만 되지 않으면 데이브 씨가 무엇에 관심을 가지든 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궁금해도 말이죠.”
진심이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카버는 란다에서 봐온 사람 중 손에 꼽을 만큼 명확하고 올곧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신념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말이다.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예, 말씀하시죠.”
"란다에 피해를 줄 일이 생긴다면 미리 이야기해 주십시오. 데이브 씨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앞날은 또 장담할 수 없는 거라서요……. 같잖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갑자기 란다에 피해를 끼치면 저도 가만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카버는 진심이었다. 또한, 자신의 말의 무게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만약, 제가 란다에 피해를 끼칠 것 같으면 반드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
“전 카버 씨를 같잖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존경합니다.”
올리버는 진심이었다. 저런 책임감과 의지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걸 아는지 카버의 감정은 약간 흔들렸다. 인정 받았다는 기쁨과 그런 상대를 대한 존중으로 말이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포레스트 씨와 이야기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이야기를 마친 카버는 정중히 인사하며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가 다가왔다.
"이야기는 끝나셨습니까?”
“예, 조는 절 기다리신 건가요?”
“넵……. 혹시, 시(市)와 비공식 동맹을 맺으신 겁니까.”
“예, 맺기로 했습니다. 딱히, 손해 볼 건 없는 것 같고, 포레스트 님도 일단 맺는 게 좋다고 하셔서요. 동맹 제안을 거절하면 오히려 경계할 거라고 말이죠."
조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못마땅한 감정을 빛냈다.
그 감정을 보며 올리버가 질문했다.
“조는 별로 내키지 않나요?”
“그……. 아닙니다. 건방지게 왈가왈부할 생각은 아닙니다. 그저, 제가 여기 출신이다 보니, 시(市) 쪽 관계자들은 영 믿을 수가 없거든요."
아……. 무슨 말인지 이해됐다.
하긴, X구역은 시의원의 예산 빼돌리기와 이후 여러 악재, 그로 인한 시(市)의 무관심 속에서 몰락했으니.
거기다 란다 자체가 구역별로 시(市)에 대한 믿음도 갈라졌다.
부유한 앞 구역은 시(市)를 신뢰했지만, 그렇지 못한 뒤 구역은 시(市)를 불신했다.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부유한 구역은 시(市)가 제공하는 치안과 혜택을 누렸지만, 가난한 구역은 그렇지 못했으니.
카버의 말대로 란다는 참으로 복잡한 도시인 것 같았다.
“뭐……. 사정이 있으니 그런 것 아닐까요?”
올리버가 시의원들 입장에서 말해봤다. 남의 복잡한 사정에 관심 가져주는 사람은 드문 편이었으니.
조는 이해는 해도 받아들이진 못한 듯 복잡한 감정을 빛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다른 주제를 꺼냈다.
“흐음……. 혹시, 괜찮으시다면 언제부터 다시 가르침을 청할 수 있는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신입들 말고도 기존 멤버 중 데이브 씨께 점검을 받고 싶어서 하는 녀석들이 있는데, 귀찮으시더라도 한 번 봐주셨으면 합니다.”
조가 그답지 않게 말을 빙빙 돌려가며 어렵게 부탁했다.
“안 귀찮습니다. 저도 여러분들에게 배우는 게 있으니, 너무 어려워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다만, 2주 정도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2주요?”
“예, 일이 좀 있어서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시간이란 게 정말 물 흐르듯이 빨라 기말시험이 다가왔기에 올리버는 현재 마탑 업무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일이었지만, 그것을 바탕으로 성적을 계산하고 기타 서류를 준비하며, 그 외에도 방학 이후 교수 일정 조율 및 수업 신청, 연구 신청 등. 온갖 잡무가 넘쳤다.
그런 잡무에 소모되는 잉크와 종잇값만 해도 상당할 지경.
조는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때 동안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냥 기다리면 시간이 아까우니, 2주 동안 이것 좀 작성해주시겠습니까?”
올리버가 품 안에서 파일을 꺼냈다.
조는 파일을 건네받아 살폈다.
“이건……?”
“테스트 목록입니다. 거기 적힌 대로 체력 테스트를 해 등급을 나눠주시고, 각자 특기 계열과 특기 흑마법을 작성해주세요……. 아, 자신 없는 것도요.”
“제가 잘은 모르지만 뭔가 체계적이군요.”
조의 말은 정답이었다.
케빈의 말에 따라 순수마력학파 타워 도서관에 찾아가 훈련에 관한 책을 읽고 참고해 만든 것이었다.
참고라고 해봐야, 마력과 마법을 감정과 흑마법으로 수정한 것밖에 안 됐지만 말이다.
“아, 혼자서 하지 말고, 각 간부분들과 나눠서 해보세요.”
“이유가 있습니까?”
“이제 여러분들도 사람 가르치는 법을 배워야죠. 계속해 인원을 보충하려면요.”
너무나도 맞는 말에 조가 아무 말도 못 했다.
신입을 보충할 때마다 올리버에게 도와달라 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음……. 알겠습니다.”
“무슨 문제 있나요? 뭔가 불편하신 것 같은데요?”
“아……. 다름이 아니라, 몇몇 글을 모르는 녀석이 있어, 이런 작업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서요.”
"아......."
올리버가 아차 하며 탄성을 냈다. 파이터 크루에는 문맹이 많았다.
아니, 많은 걸 넘어 대다수가 문맹이었다.
딱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글을 읽는 것도 상당한 교육을 받았어야 가능한 것이었으니.
올리버도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문맹이었고.
‘마리 덕분에 배우게 됐지만……. 잘 지내고 계시려나?’
올리버가 문득 마리를 떠올렸다. 솔직히 유쾌한 만남도 유쾌한 이별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았다.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란다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약속을 지킨 것 같고……
"저기, 데이브 씨?”
“예?”
“무슨 생각 하셨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했습니다. 그보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요?”
“다름이 아니라 일단, 글자 읽을 줄 아는 놈들끼리 해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글을 읽지 못하니 시작도 못 할 것 같아서요. "
“아……. 예, 그럼, 어쩔 수 없죠. 대신 다른 부탁 하나 더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떤 걸……?”
“파이터 크루 분들 전부 글을 배우세요.”
“글을요?”
“예. 글을 모르니까 아무것도 못 하네요. 글 배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글을 가르쳐줄 사람이 없습니다만? 아는 놈들도 간신히 아는 수준이라 누굴 가르칠 수준이 아닙니다.”
"포레스트 님에게 부탁해보세요.”
“예?”
“포레스트 님요.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알 씨나 다른 종업원들 모두 글을 읽을 줄 아는 데다 가르치는데 일가견이 있거든요.”
올리버가 지난 3년 동안 배운 레스토랑 일과 농담을 떠올리며 말했다.
종업원들 모두 손님을 상대하는 일을 해서 그런지 말을 잘했고, 특히, 알은 그중에서도 가르치는 재능이 좋았다.
레스토랑 농담에 관한 노트도 작성해 줄 정도였으니.
올리버는 다시 조에게 포레스트에게 도움을 청하라 하였고, 조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오오......."
[마법 전투 기초] 기말시험 중 학생들이 일제히 감탄했다.
눈앞의 벌어진 데릭의 시합에 감탄하는 것.
그는 벌써 열 번째 연속 시합을 치렀음에도 지친 기색 없이 깔끔하게 승리를 끌어냈다.
반박할 생각마저 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분명, 결석 기간이 길었음에도 그는 이전보다 놀라운 실력을 보였다.
“교수님 말씀이 맞네요. 훨씬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올리버가 데릭에 관해 평가하며 말했다.
실력 자체는 마지막으로 싸웠을 때와 비슷하였으나, 그와 별개로 전투 스타일은 큰 변화가 있었다.
과거에는 강력한 화염 마법만이 메인이고 나머지는 곁가지였다면, 지금은 상황에 따라 골고루 가리지 않고 썼다.
가령, 화력 싸움으로 가면 까다로운 상대는 일부러 근접을 유도해 특별한 마법 없이 가검으로 제압하였고,
근접전에 자신 있는 상대는 고화력의 화염 마법으로 찍어 눌렀다.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상대는 검술과 화염 마법을 뒤섞어 변칙적으로 공격해 뒤흔든 후 제압하는 등. 데릭은 과거보다 더 폭넓고 효율적인 전투를 구사했다.
"저쪽도 만만치 않아.”
케빈이 바쁘게 손을 놀리며 옆의 시합을 보며 말했다.
그곳에서는 펠릭스가 시험 시합을 치르고 있었으며, 꽤나 선전하고 있었다.
간신히 케빈의 수업을 들을 수준이 돼 뒤처지지 않을까 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짧은 시간 안에 케빈의 가르침을 최대한 흡수해 가이아 학파 특유의 단단하고 묵직한 마법으로 상대를 압박했다.
경기장의 돌을 마력으로 조작해 벽을 형성하고, 묵직한 탄환 혹은 무기로 만들어서 말이다.
케빈의 화염 마법처럼 화려함은 없었지만, 벽과 같은 단단함과 한 방만 제대로 맞아도 판세를 뒤엎는 묵직함으로 상대방이 제풀에 나가떨어질 정도로 숨 막히게 압박했다.
“차분하네요.”
“그리고 빨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펠릭스 본인 자체가 움직이지 않아 느리게 보일 뿐, 그는 상대가 마법을 쓸 때면 즉각적으로 반응해 방어 혹은 반격을 가했다.
과거에는 저것이 되지 않아, 충분한 마력과 마법 수준을 갖췄음에도 그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진 것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음……. 다들 많이 부러워하시는구나.’
올리버가 펠릭스의 시합을 구경하는 학생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펠릭스와 같이 올리버와 기초 훈련을 한 학생들이었으며, 동시에 이번 학기 동안 그렇다 할 성장을 이루지도 못한 학생이었다.
얼마 전 그들이 올리버에게 펠릭스가 받은 도움을 똑같이 받고 싶다고 넌지시 요청했지만, 올리버는 이를 거절했다.
다들 기초 체력이라든가, 마력 흐름 등. 자기가 할 수 있는 분야도 제대로 갈고닦지 못했기에.
‘많이 아쉬워. 펠릭스 씨처럼 처음부터 잘 따라와 줬으면 도와줬을 텐데. 어르신도 내키는 대로 하라고 했고.’
아마, 케빈의 수업 지도 방식에 따르면 대부분 하위권 성적을 받을 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올리버가 그리 생각하며 펠릭스의 시합을 평가했다.
사각. 사각. 사각. 올리버가 평가를 작성하던 중 케빈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데릭과 펠릭스의 실력향상에 관해 어찌 생각하지?”
일하는 중에는 잡담을 하지 않는 케빈의 성격상 그냥 묻는 것은 아닐 터.
올리버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데릭 씨께서는 과한 걸 덜어낸 덕분에 더 강해졌고, 펠릭스 씨는 부족한 것을 채워 강해진 것 같습니다.” 정답이었는지, 케빈은 만족하는 빛을 띠었다.
“그럼, 저건 어떻게 생각하지?”
케빈이 세 번째 경기장을 보며 물었다.
그곳에는 얼음 마법으로 상대를 얼려 제압한 야텔리 아이스아이가 서 있었다.
“음……. 처음부터 균형이 맞게 강한 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