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 마탑 복귀 (2) >
“오……."
올리버가 뒤따라오는 학생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소리 냈다.
휴가를 낸 사이 무슨 감정 변화가 있었던 건지, 펠릭스를 제외하면 의욕이 없던 학생들이 모두 올리버를 따라 아직까지 뛰고 있었다.
물론 개중에 나가떨어진 학생들이 몇몇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체력이 다한 것뿐. 의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올리버는 뒤따라 오는 학생들을 계속해 관찰하며 뛰었다.
품속의 시계가 울릴 때까지 말이다.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품속의 시계가 울리자 올리버는 뛰는 속도를 천천히 줄이다 멈춰 섰으며, 뒤따라 오던 학생들도 제자리에 서거나 혹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역시, 대부분 체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시네.’
올리버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숨을 몰아쉬는 여학생이나, 대자로 뻗어 헐떡이는 남학생을 보며 생각했다.
올리버가 평가했던 대로, 테렌스가 평가했던 대로 학생 대부분 체력이 안 좋았지만, 그럼에도 올리버는 지금 상황이 꽤 만족스러웠다.
그도 그럴 게, 이전에는 조금만 숨이 차도 멈췄기 때문. 체력이 안 좋은 건 매한가지였지만, 지금은 최소한 뭐라도 해블 의지가 있었다.
의욕이 없던 전과 비교하면 상황이 아주 나아진 거였다.
“저, 저기……."
올리버가 휴식을 선언하고 잠시 숨 좀 돌릴 때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예, 말씀하십시오.”
“이다음에는 무슨 훈련으로 넘어가죠?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올리버는 시계를 봤다. 학생의 말대로 20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분만 쉬고 바로 근력 운동으로 넘어가죠. 다들 열심히 따라주셔서 제대로 테스트할 수 있겠네요.”
올리버가 의욕을 내며 말했다.
이전까지는 학생들이 제대로 따라주지 않아 점검도 훈련도 못 했는데 말이다.
허나, 그런 올리버와 달리 학생들은 실망한 눈치였다.
“저기……. 마력 훈련 쪽으로 넘어가면 안 되나요?”
“마력 훈련요?”
“예……. 순차적 마력 흐름을 점검하거나, 잡아주는 뭐 그런 거요……."
말꼬리를 미묘하게 흐리는 학생. 뭔가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것도 어떠한 확신을 가지며 말이다.
올리버는 그게 뭔지 대충 알 거 같았다.
“제 생각에는……."
***
수업이 몇 분 일찍 마치고 올리버는 위층 훈련실 앞에 똑바로 선 채 케빈을 기다렸다.
잠시 후, 훈련실 문이 열리며 다수의 학생이 나왔다.
바로 엊그제만 해도 첫 수업이었던 것 같은데, 정말 한 학기가 끝나는 건지 그들은 올리버가 기억한 것보다 멀끔하고, 덜 지친 기색으로 나왔다. 오히려 생기마저 느껴졌다.
참으로 대단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을림과 땀에 찌들어 기진맥진했건만, 그때와 비교하면 몰라볼 정도의 성장이었다.
훈련실 밖으로 나온 학생들은 오랜만에 다시 출근한 올리버를 놀란 눈으로 봤고, 올리버는 그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몇몇 학생들은 데면데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지만, 그 못지않은 학생들이 나름대로 예를 지키며 올리버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스카디 소학파의 야렐리라든가, 가이아 소학파의 펠릭스라든가……. 놀랍게도 그들 사이로 아그니 소학파의 데릭도 있었다.
‘전보다……. 부정적인 감정이 줄어드셨네. 자존감도 많이 회복하셨고.’
올리버는 그들을 떠나보낸 뒤, 훈련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 여느 때와 같이 마력으로 훈련실을 정리하고 있는 케빈이 보였다.
“뒷정리는 이제 제가 하겠습니다.”
“내가 하는 게 더 빨라.”
케빈은 자기 말을 증명하듯 순식간에 뒷정리를 마쳤다. 마력으로 다수가 할 일을 혼자서 착착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건 알지만, 제 할 일인지라……."
케빈은 올리버의 말을 무시한 채 청소도구를 정리한 다음 한쪽에 걸어놓은 재킷을 걸쳐 복도로 나갔다.
당연히 올리버도 뒤따라갔다.
"……데릭이 다시 수업에 나왔더군.”
“예, 봤습니다.”
“진짜로 설득할 줄이야……. 어떻게 한 거지?”
“부탁드리고, 내기했거든요.”
“내기?”
"예, 저한테 궁금한 게 많으신 것 같아, 대련해서 이기면 가르쳐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대신, 지면 수업에 나와주고, 기말시험까지 쳐달라고 했습니다.”
“재주도 좋군. 그런 내기를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은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한테 화가 나신 것 같아서 그때 한번 제안해 봤습니다. 화나신 분들이 의외로 설득이 잘 되는 거 같거든요.”
"아......."
케빈이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소리 냈다.
올리버와 잠깐만 대화해도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데릭 씨는 어땠습니까?”
“……좀 처진 것 같기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실력이 더 좋아졌어. 아니, 정확히는 실력은 큰 변화가 없지만, 자세가 한결 더 나아졌어,”
“자세요?”
“그래. 소속 소학파에 대한 자부심인지 오만인지, 결정적인 순간에 고화력 마법으로 끝장내려는 안 좋은 버릇이 고쳐졌어. 필요한 타이밍에 필요한 마법만……. 혹시 네가 조언했나?”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릭과 세 번째 대련을 한 후, 데릭은 무엇인가를 놓은 듯 초연한 태도로 자신의 문제가 뭔지 물어봤고, 올리버는 그에 걸맞게 대답해 줬다.
데릭의 실력 자체는 훌륭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큰 기술을 쓰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이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거기에 집착하면 행동이 제약되고, 상대의 반격을 허용할수 있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톤파를 빼앗아 싸움의 주도권을 가져왔지만, 데릭은 그 결정적인 순간에 큰 마법을 쓰기 위해 올리버에게 여유를 줬고, 그 탓에 반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차라리 칼날에 마력을 실어 휘두르는 게 더 위협적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 사실을 지적하자 데릭은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였군.”
“예?”
“학생들끼리 대련시켜봤는데, 데릭이 제법 활약했어. 내리 여덟 번을 연속으로 시합시켰음에도 손쉽게 상대를 제압했지. 별로 지치지도 않고. 안 좋은 습관을 버린 덕분이야.”
케빈이 만족의 빛을 띠었다. 케빈은 그런 전투법을 추구하였으니.
"용케도 설득했군. 어정쩡하게 강한 녀석은 설득시키기 꽤 어려운 법인데 말이야.”
“전 부탁해서 말씀드린 것뿐이지, 딱히 설득한 건 아닙니다. 그냥 본인이 받아들일 자세가 된 것뿐입니다.”
“그래?”
“예, 제가 휴가 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탑은 겉으론 잔잔해도 그 아래로는 수많은 일이 일어나지.”
“저도 동의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조언을 하나 구하고 싶습니다.”
“조언?”
“예.”
올리버는 그리 대답하고는 아까 전 자신의 수업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학생들 상당수가 의욕을 내며 훈련을 잘 따라왔건만, 마지막에 어떠한 기대를 하며 마력 흐름 훈련을 할 수 있는지 묻던 그 상황을 말이다.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르지만, 펠릭스 씨가 받았던 방법을 받고 싶은 눈치였습니다.”
"다들 눈치는 있으니……. 넌 뭐라고 했지?”
“일단, 모르는 척하고, 체력단련부터 하자고 했습니다.”
“반응은?”
“안 좋았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편한 길을 놔두고, 지루하고 고단한 길로 가자고 하니.”
“허나, 그렇기에 가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단은, 기초 체력이 부족한 분은 체력단련을 시키고, 마력 흐름은 도저히 안 되는 부분만 잡아줄 생각입니다……. 해도 되겠습니까?”
“스승님께서 허락하지 않았나?”
“예. 하지만 어르신께서 남용하지 말고 하셔서요. 또, 학생들 수가 꽤 돼서 도와드리면 소문이 더 퍼질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네가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성격일 줄은 몰랐는데?”
케빈이 비꼬아 말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상황 탓인지, 성격 탓인지 올리버는 마탑에서 조용히 지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가끔씩 눈에 띄는 행동을 했다.
데릭과의 첫 번째 대련이라든가, 혹은 마운틴 페이스 건이라든가.
물론, 올리버만 비난할 문제는 아니었다. 올리버를 그런 상황에 노출한 것은 케빈과 멀린이었으니.
허나, 이를 모르는 올리버는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노력은 하지만, 계속 실수하네요.”
“……넌 어떻게 하고 싶지?”
“예?”
“네가 맡은 학생들한테 네 교육방식을 써보고 싶나?”
질문을 들은 올리버는 잠시 생각해 빠졌고, 대답하려는 찰나 어느새 교수연구실 앞에 다다랐다.
케빈이 연구실 문을 열자 교수석에 앉아 멋대로 보고서를 읽고 있는 멀린을 볼 수 있었다.
“왔나?”
***
원래 자기 자리인 것처럼 멀린은 자연스럽게 인사했다.
어디 멀리 떠났던 사람답지 않게 너무나 자연스러워 케빈과 올리버는 저도 모르게 대답부터 했다.
“안녕하십니까. 스승님.”
“오셨습니까. 어르신.”
“그래, 내가 왔어. 길 좀 헤매느라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 그런데, 어째 반응들이 뜨뜻미지근하구만. 스승이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전 기쁩니다.”
올리버가 평소와 같은 무덤덤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고, 케빈도 뒤이어 대답했다.
“저도 반갑습니다. 다만, 제 연구실에 멋대로 들어와 허락도 없이 보고서를 읽는 모습을 보니 반가움 이상으로 불쾌함도 느낍니다.”
케빈의 말은 진심이었다. 참으로 거짓 없는 좋은 사제지간이라 할 수 있었다.
“할말이 두 개 있어.”
“첫 번째는, 포기하라는 거야. 스승은 제자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고 멋대로 들쑤시고 들어와 마음의 평화를 깨뜨릴 권리가 있거든. 진짜야."
케빈이 불쾌감을 더욱 높아졌다.
“두 번째는 이 보고서는 자네 게 아니야. 자네 사제(師弟) 것이지.”
멀린이 올리버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저 보고서 어디 낯이 익었다. 다름 아닌 모이라이 학파에게 제공한 이브(Eve)에 관한 보고서였다.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서랍에서.”
“아……. 제 말은 서랍을 잠가놨는데, 어떻게 꺼내셨냐는 말씀입니다.”
멀린이 품 안에서 대량의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어찌나 열쇠가 많은지 움직일 때마다 짤랑짤랑 소리가 났다.
“내가 저번에 말한 적 있지? 난 언제 어디서든 멋있고, 느닷없이 등장할 수 있게 이 마탑 곳곳에 비밀스럽게 이동할 수 있는 장치를 몰래 심어놨다고……. 그와 같은 이치로 마탑의 어떠한 잠금장치도 열 수 있게 모든 열쇠를 가지고 다니지. 서랍 여는 건 일도 아니야.”
“……그건 농담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것도 농담이야.”
전혀 농담 같지는 않았지만, 올리버는 구태여 따지지 않았다.
“일단, 둘 모두에게 사과하지. 멋대로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또 보고서 읽은 거. 고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미안해.”
멀린의 마력 장벽 탓에 감정을 읽을 순 없었지만, 아무래도 진심인 거 같았다.
미안하면서도 고칠 생각은 없었다.
케빈도 그걸 아는 눈치였고.
“그게 사과하는 사람 태도입니까?”
“앞으로 안 이런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잖아?”
“그건 그렇죠.”
“봐봐. 그리고 소문 때문에 이렇게 방문할 수밖에 없었어.”
“소문요?”
“그래, 데이브란 해결사가 란다에 이름난 드루이드를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여러 재밌는 재주를 보여줬다는……. 가령, 세계수를 다룰 수 있는 것을 넘어 이브(Eve)와 접촉해 풀어줬다던가 말이야.”
이브(Eve) 건은 케빈도 처음 듣는지 놀란 표정으로 올리버를 봤다.
올리버가 물었다.
“어르신. 혹시 돌아오신 지 좀 되셨습니까?”
“놀랍게도 오늘 막 도착했지.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잖아. 난 나를 위해 이야기를 속삭여줄 사람이 많다고."
“아……."
“그리고 뒷내용이 궁금해.”
멀린이 흥미를 보이며 올리버가 쓴 보고서를 흔들었다.
“화가 난 이브에게 자네는 뭐라고 했나?”
“별 말 안 했습니다. 조금만 참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올리버가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담담히 대답했다.
< 301. 마탑 복귀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