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0. 마탑 복귀 (1) >
서걱. 서걱. 서걱…….
마탑 원소학파 타워 구석진 곳에 위치한 교수 개인 직원실.
그곳에서 올리버는 짬을 내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보고서는 다름 아닌 이브(Eve)에 관한 내용으로, 모이라이 학파에게 제공할 것이었다.
그들은 올리버 때문에 이브(Eve)를 확보하지 못했으니, 최소한 정보라도 공유해달라 했으며, 올리버는 기꺼이 그러겠다고 수락했다.
이브(Eve)란, 세계수에 정통한 자들에겐 있어 그런 존재였으니.
‘뭐……. 그래도 후회하진 않지만.’
올리버는 당시 순간을 떠올렸다.
셰이머스를 쓰러뜨리고 세계수에 접속한 그 순간을.
무형의 에너지 덩어리 이브(Eve)는 악의적이다 할 정도로 꽁꽁 묶여있었다.
거미에게 붙잡힌 먹이처럼 말이다.
인간으로 치면 손가락 까딱일 자유마저 빼앗긴 상태.
당연히 이브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했고 올리버를 보자마자 풀어달라 부탁했다.
물에 빠지면 아무에게나 살려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것과 같은 이치.
[……그리고 전 풀어줬습니다.]
서걱. 서걱. 서걱……. 올리버가 보고서를 계속해 작성해 나갔다.
의지를 발휘해 드루이드들이 쳐놓은 구속구를 풀고, 그 대가로 이브에게 ABC 피해금과 셰이머스에 관한 자료를 확보해달라고 한 것을 말이다.
나름대로 인상 깊은 순간이었기에 올리버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서걱서걱 펜을 써 내려갔다.
“음....... 그것도 써야 하나?”
갑자기 글 쓰는 소리가 멈췄다.
다름 아닌, 구속이 풀려난 후 이브의 상태와 자신이 한 행동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거였다.
구속에서 풀려나자 이브는 자유를 만끽하며 잠깐의 기쁨과 개운함을 느꼈으나, 말 그대로 잠깐일 뿐.
이브는 곧바로 강렬한 적개심을 뿜었다. 인간에 대한 적개심을 말이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에 올리버가 살짝 놀랐지만, 곧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멀린이 준 [세계수 진화론]에 따르면 축적된 정보량에 따라 이브(Eve)가 인간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가령, 인간에 관해 긍정적인 정보만 얻으면 인간을 좋아하고, 반대의 경우라면 싫어하는……. 아무래도 이브는 후자인 듯했다.
‘그래서 셰이머스 님이 그렇게 구속한 건가? 아니면, 구속해서 화가 난 건가?’
올리버는 뒤늦게 이브가 왜 그토록 화가 났는지 생각해보았다.
할 수만 있다면 사람도 죽일 기세였는데 말이다.
올리버는 잠시 고민하다 해당 내용을 일단 보고서에 적었다. 생각도 할 겸해 말이다.
[그다음엔 제가……]
ㅡ똑. 똑.
이브의 상태를 확인한 후 자신이 어떻게 했는지 적으려는 찰나, 갑자기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흑마법사의 눈으로 문 너머의 사람을 확인했다.
처음 보는 사람의 감정이었으며, 상당히 순수하고 방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똑. 똑.
다시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올리버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작성 중이던 보고서를 서랍 속으로 넣은 후 문 앞으로 갔다.
문을 열자 180센티미터에 탄탄한 근육으로 몸이 잡힌 건장한 남성이 서 있었다.
머리를 포마드를 발라 뒤로 쫙 넘긴 그는 면도를 깔끔히 하는 기본의 마법사들과 달리 짧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저분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나름의 멋을 부린 듯 꽤 정갈했다.
“그쪽이 케빈의 개인 직원인 제논 브라이트?”
그는 다짜고짜 올리버의 이름을 확인했다.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예, 누구-”
“-로어 가문의 테렌스라고 하네. 만나서 반가워.”
자신을 테렌스라고 소개한 그는 마탑 사람답지 않은 살가움으로 올리버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손동작이 날렵하고, 손아귀 힘도 상당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소매에 달린 커프스단추.
단추에는 포효하는 사자가 새겨져 있었다. 어디서 한번 본 거 같은데……
“괜찮나?”
자신을 테렌스라 소개한 남자가 물었다.
올리버가 뒤늦게 반응했다.
“아…….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테렌스 님.”
“님 자는 무슨! 그냥 테렌스라고 편하게 불러. 어쨌건 반갑다니 기쁘군. 내가 누군지 아나?”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케빈 그 녀석 설마 내 이름도 이야기 안해준 거야? 참 한결같네.”
놀랍게도 테렌스는 케빈을 친근하게 불렀다. 겉으로만이 아닌 속으로도 말이다.
“케빈 님과 아는 사이입니까?”
“알다 뿐일까? 자네 대신 대타 좀 뛰어달라 부탁까지 했는데 말이야.”
대타. 그 순간 올리버는 눈앞의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ABC건 때문에 올리버가 휴가를 낸 사이 케빈이 대리로 부른 사람이었다.
‘실력이 괜찮은 종군 마법사라고 하시더니 진짜였구나.’
올리버가 그의 육체 상태와 몸에 머금어진 질 높은 마력을 다시 보며 생각했다. 척 보기에도 그는 상당한 실력을 갖춘 실력자였다.
"너무 빤히 보지 마. 내가 잘 생기긴 했지만, 남자는 취향이 아니거든.”
테렌스가 농담 반 진담 반 섞어가며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케빈 님께 간접적으로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해서요.”
“나도 생각 못 하긴 했어……. 케빈 그 외로운 늑대가 직원을 고용할 줄이야. 그래서 휴가 중임에도 나온 거야. 어떤 놈일까 싶어서……. 근데, 아무래도 헛수고한 게 아닌 것 같군.”
테렌스가 올리버를 빤히 봤다. 그는 호기심을 충족한 듯 만족한 빛을 뿜었다.
“무슨 말인지 잘一”
ㅡ피잉!
테렌스가 주먹을 날려 올리버 바로 코앞에서 멈췄다.
아주 빠른 주먹. 마력까지 머금고 있어 위력이 상당했다.
풍압(風壓)으로 올리버의 앞머리가 휘날릴 정도로 말이다.
"왜 안 피한 거지?”
“……너무 빨라서요?”
올리버가 거짓말했다. 주먹이 빠른 것은 사실이었으나, 피하지 않은 이유는 때리겠다는 의지가 없어서였다.
다행히 거짓말이 통했는지 테렌스가 호탕하게 웃었다.
“하-! 내 주먹이 빠르긴 하지. 이래 봬도 마탑 내 권투 챔피언이기도 했거든.”
“마탑에도 권투가 있습니까?”
“물론, 마법사도 육체단련이 덕목이니까. 몸뚱이가 마력을 감당해야 하니. 특히, 순수마력 학파의 경우에는一”
——피잉!!
테렌스가 다시 한번 주먹을 뻗었고, 이번에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탁!
올리버는 고개를 트는 동시에 주먹을 옆으로 쳐 궤도를 틀었다.
마력으로 보호했음에도 손바닥을 아릴 정도로 꽤 아팠다. 복싱 챔피언이라는 게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호오……."
다시 주먹을 휘두르려던 테렌스는 방어 자세를 잡은 올리버를 보더니, 조용히 감탄사를 흘리곤 자세를 풀었다.
그는 만족하는 감정을 다시 빛내며 올리버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소문요?”
“그래. 소문. 케빈이 전쟁터에서 용병 혹은 실험체를 주어왔다고 하던데 아주 헛소문이 아닌가 봐?”
음……. 올리버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데릭이 비슷한 소리를 하긴 했지만, 그냥 넘겼는데, 어째 더 이상 그냥 넘길 게 아닌 듯했다.
"..…아니야?”
“……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케빈 제자야?”
테렌스가 쉽사리 의심을 거두지 않으며 다가와 꼬치꼬치 캐물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악의는 없다는 거였다.
"왜 궁금하신 건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그냥 신기해서. 케빈 녀석이 누굴 데리고 다닌다는 게. 앞서 말했듯이, 휴가중에 이런 귀찮은 일을 맡은 것도 그거 때문이거든.”
“그런 이유로 휴가 기간 중 날 도와준 거면 불쌍하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군.”
바깥쪽 복도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다름 아닌 케빈이었다.
“오, 기척 좀 내고 다니지?”
“남의 직원한테 다짜고짜 주먹질하는 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
“피할 줄 알고 휘두른 거거든.”
“못 피했으면?”
“안타까운 사고인 거지……. 좋아, 알았어, 사과할게. 이봐, 제논. 다짜고짜 주먹질한 거 미안해. 날 용서해 줄 수 있을까?”
“궁금하시면 그럴 수도 있죠.”
“오호홋. 이 친구도 만만치 않게 또라인데?”
테렌스가 올리버의 반응에 진심으로 웃었다.
물론, 케빈은 웃지 않았지만. 테렌스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올리버가 대뜸 물었다.
“두 분 친하신가요?”
“아니.”
“맞아.”
정반대의 대답을 내놓는 케빈과 테렌스.
테렌스는 특유의 쾌활한 말투로 말했다.
“이봐……. 너무 하잖아? 같이 사선을 넘은 전우인데.”
“혹시, 내 부탁으로 마탑에 온 이유가 날 성질을 긁기 위해서야?”
“그것도 있긴 하지.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맞지도 않는 교수 노릇은 그만두고, 적성에 맞는 군인 노릇이나 하자고 꼬드기러 온 거야. 어때 생각 있어?”
“군인 노릇이라면 의무 복무만으로 충분해.”
"그러면 어쩔 수 없고. 큰아버지께서 널 많이 탐내던데……. 농담이 아니라 네가 원하는 보직의 황금라인에 넣어줄 수도 있어.”
“됐어. 체스말 노릇할 생각은 없어,”
케빈은 생각보다 단호하게 반응했고, 유쾌하게 이야기하던 테렌스도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올리버가 잘 모르는 내용이었지만, 둘의 감정 상태를 보았을 때 꽤 진지한 이야기인 듯했다.
“뭐, 이해해……. 장난은 이쯤에서 하고, 이것만 건네고 가지.”
테렌스가 품 안에서 파일을 꺼내 올리버에게 내밀었다.
올리버가 파일을 건네받으며 물었다.
“이건 무엇이죠?”
“내가 맡을 동안 학생들 상태를 체크한 거. 체력, 마력, 마법 수준 및 개선점. 솔직히 말해 썩 좋은 수준은 아니더구만.”
올리버가 그 말에 파일을 훑어봤다. 파일에는 테렌스의 말처럼 학생들에 대한 평가가 있었으며, 이를 위한 개선점이 있었다.
케빈의 것과 규격이 같았지만, 질 자체는 이쪽이 약간 더 우수했다.
"당연하지. 이 녀석이 우리한테서 배운 건데.”
테렌스가 케빈의 어깨에 친근하게 손을 올렸다. 케빈은 냉담히 반응했다.
“손 치워.”
“알았어.”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올리버는 파일을 빠르게 훑어봤다. 썩 괜찮아 보였다.
“음……. 혹시, 저도 배울 수 있나요? 이런 훈련평가나 훈련법이요.”
“군에 입대하면 가르쳐주지.”
테렌스가 능숙하게 품 안에서 포스터를 꺼내며 말했다.
포스터에는 중절모를 쓴 뚱뚱한 신사가 앞을 향해 검지를 가리키며, [국가가 그대를 원한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꽤 인상 깊은 광고였다.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달까?
그때, 케빈은 올리버가 쥔 포스터를 가져가 고이 접으며 말했다.
“아니면 그냥 순수마력학파 도서관에서 군사훈련 책을 읽는 방법도 있지.”
"물론,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 그래도 직접 배우는 게 훨씬 나을 거야. 멋진 군복을 입고 싶으면 이쪽에 연락하라고."
테렌스가 다시 포스터를 건네줬다.
그런 테렌스에게 케빈은 눈치를 줬고, 테렌스는 히죽 웃으며 물러났다.
테렌스가 떠난 뒤 모습을 보며 올리버가 질문했다.
“친구분입니까?”
“그냥 군 복무 중 얼굴 몇 번 마주친 사이야.”
“아……. 그렇군요. 교수님께 많이 우호적이라 친구분인 줄 알았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그보다 슬슬 움직일 준비나 해.”
“움직일 준비요?”
“그래, 곧 [마법 전투 기초] 수업이잖아? 이제 네가 다시 맡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