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 설득 (1) >
똑똑.
올리버가 문을 두들겼다.
문은 침묵했고, 올리버는 잠시 기다리다 다시 문을 두들겼다.
똑똑.
다시 침묵하는 문. 올리버는 똑같이 기다리다가 다시 문을 두들겼다.
그러기는 수차례.
결국, 무기력과 짜증, 불행, 자기 연민에 눌려 있던 데릭이 분노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벌컥 열었다.
“아, 됐으니……!”
깔끔하던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머리와 짧게 자란 수염을 기른 데릭이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올리버를 보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이라는 듯이……. 누군가 만나기로 한 사람이라도 있나 싶었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올리버는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데릭 씨.”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데릭은 잠시 침묵하다 눈을 비비곤 입을 열었다.
“……도대체 네가 여기 왜 온 거야?”
데릭이 굳은 머리를 간신히 굴리며 질문했다.
그렇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올리버와 데릭이 만날 일이라고는 거의 없었으니까.
"교수님 말씀을 전하러 왔습니다.”
“……케빈 교수?”
“예, 수업 빠진 횟수가 너무 많다고요. 원래 대로라면 낙제지만, 지금부터라도 나와 기말시험을 치르면 참작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케빈이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눈으로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머리에도 영향을 주고 있었다.
“……거짓말하지 마.”
“예?”
“거짓말하지 말라고 그랬어.”
“거짓말 아닙니다.”
올리버의 말은 사실이었다.
올리버가 데릭을 만나 다시 수업에 나올 수 있게 조치하겠다고 하자, 케빈은 해당 혜택을 줬다.
타인을 설득하려면 최소한의 협상 카드는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죠?”
“왜냐면 그 교수는 우릴 싫어하니까. 그런데, 자기 직원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 그런 혜택까지? 말이 안 되잖아?”
“엄격하긴 하시지만, 여러분을 싫어하진 않……. 약간 싫어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올리버가 케빈의 평소 감정을 떠올리곤 말을 수정했다.
진실이었지만,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증거로 데릭은 어이없는 감정을 빛냈으며, 그와 함께 혹시나 하는 감정과 두려움이란 감정을 동시에 빛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그 감정이 살짝 고개를 내밀자 데릭의 불에 덴 사람처럼 움츠러들어 의지가 꺾였다.
“……어쨌건 난 관심이 없어. 이만 가봐.”
무기력하게 문을 닫으려는 데릭.
그런 데릭을 향해 올리버가 저도 모르게 질문했다. 너무 궁금해서 말이다.
"뭐가 그리 두려우신 거죠?”
올리버가 무심코 뱉은 말은 날카롭게 날아가 데릭의 아픈 부분을 찔렀다.
꽤 아팠는지 데릭은 노기를 뿜으며 문을 닫다 말고, 벌컥 열어 올리버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키와 체격이 되기에 꽤 위압적이었지만, 올리버에겐 딱히 효과가 없었다.
“지금 뭐라고 그랬어?”
“뭐가 그리 두려우신 거냐고 물었습니다.”
데릭의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올리버는 담담히 질문했다.
“불쾌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정말 이해가 안 돼서요.”
“……뭐가?”
“데릭 씨께선 제가 알기로 교수님 수업을 듣는 동안 실력이 아주 많이 향상되셨는데, 갑자기 이토록 소극적으로 변한 이유가 뭔지 이해가 안 돼서요……. 나름 대단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지?”
“가끔 교수님 수업에서 데릭 씨의 모습을 보고, 케빈 교수님 학생 평가를 봐서 약간은 안다고 생각합니다……. 데릭 님의 실력 향상이 꾸준한 게 적혀 있었거든요.”
이 역시 사실이었다.
데릭이 케빈을 좋아하지 않듯, 케빈 역시 데릭에게 그렇다 할 호감을 품지 않았지만, 그와 별개로 케빈의 능력과 재능, 의지는 높이 평가했다.
“저도 훌륭하다고 생각하고요.”
올리버가 데릭과의 대련을 떠올리며 말했다.
싸움을 구경한 사람들은 그저 압도적인 실력 차이만 기억했지만, 올리버는 데릭의 실력 향상과 끝까지 싸우는 의지를 기억했다.
실로 대단한 것이기에.
허나, 데릭은 아직 머금고 있는 부정적 감정 탓인지 올리버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삐뜰어지게 이해하려 노력했다.
왜 스스로 괴로운 일을 하는지 의문이었다.
“네가 날 평가할 급이라고 생각하나……?!”
"......."
"나랑 비등하게 싸우고, 마운틴 페이스 일도 해결했다고 말이야? 응?”
“……아뇨, 전 제가 누굴 평가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요. 혹여,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요즘 도는 소문을 듣자 하니 그런 게 아닌 거 같은데?”
“소문요?”
“그래, 네가 보통 놈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계속 돌고 있어. 그도 그럴 게 케빈 교수가 데려왔으니.”
“케빈 교수님이 데려온 게 그리 대단한 건가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케빈이 어떻게 마탑의 정식 마법사로 인정받았는지 몰라? 누가 스승인지도 모르고? …...그런 것도 모르는 주제 어떻게 직원으로 채용된 거야?”
갑자기 데릭이 올리버의 민감한 부분을 푹 찌르며 질문했다.
현재, 올리버로서는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들이었다.
나름대로 이야기를 짜긴 했지만, 애당초 거짓말이라는 게 한번 시작하면 거듭해야 하는 거라 말 자체를 안 하는 것이 상책.
올리버가 케빈의 핑계를 대며 대답을 피하려는 찰나, 데릭이 먹이를 노리는 사냥꾼처럼 말을 끊었다.
“대답 안 하려는 거 아니까. 굳이 안 해도 돼. 대신, 이 질문에 대답해 봐. 네가 펠릭스 실력을 향상해 줬다고 하던데, 그것과 상관있는 거야?”
오…….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올리버가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만 골라 했다.
화를 살짝 돋운 것만으로 이토록 머리가 팽팽 돌아가다니……. 감탄스러웠다.
“저는 잘 모르는 문제입니다.”
“너가 펠릭스를 많이 도와줬다는 것 들었어.”
“교수님께 받은 일을 한 것뿐입니다. 전 교수 개인 직원이니까요. 지금 데릭 씨를 찾아온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네가 솔직해지면 도움이 될지도?”
상황을 피하려고만 하던 데릭이 처음으로 제안했다. 실제로 그의 감정에서 오기(激氣)와 함께 의욕이 불타올랐다.
미세하지만, 분명, 타오르는 작은 불씨.
올리버는 이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음…….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뭘?”
“데릭 씨께선 제게 궁금한게 있고, 전 제 일을 하고 싶으니. 대련해서 이기는 쪽이 원하는 걸 들어주는 건 어떻습니까? 데릭 씨가 이기면 제가 뭐든지 대답해 주고, 제가 이기면 데릭 씨는 다시 수업에 나오는 거죠.”
합리적인 제안에 데릭의 표정에 노기가 깃들며, 가슴속에는 타오르던 불씨는 서서히 커졌다. 좋은 일이었다.
“지금 나 따위는 가볍게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거야?”
“아뇨, 누군가 무조건 이긴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데릭 씨가 절 이길 가능성이 있고, 저도 데릭 씨를 이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이죠…… 어떡하시겠습니까? ”
“……기다려 칼을 가져올 테니.”
***
원소학파 타워 마법 전투 훈련실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리를 좁힌 올리버가 데릭의 다리에 발차기를 먹인 것.
경쾌한 소리와 함께 데릭이 통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큭......!"
당혹, 충격, 분노.
데릭의 표정에는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그중에는 투지도 있었다. 지고 싶지 않다는 투지 말이다.
긍정적인 감정보단 부정적인 감정에 기반한 투지였지만, 뭐가 됐건 무력하게 시간을 보낸 데릭은 조금씩 조금씩 생기를 얻고 있었다.
“빌어먹을一!!”
데릭이 다리의 통증을 이겨내며 올리버를 향해 장검을 휘둘렀다.
보통 이런 큰 칼이 포물선을 그리며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지만, 올리버는 그러는 대신 톤파에 마력을 담아 방패처럼 막은 다음 반대쪽 주먹을 내질렀다.
깡一!
데릭은 톤파에 막힌 장검을 재빠르게 회수해 올리버의 공격을 막았다.
놀라운 반사신경.
그러나 올리버도 지지 않고 셰이머스와 던칸의 싸움을 떠올리며 한쪽 손의 톤파를 빙글 돌려 고쳐 잡아 갈고리처럼 데릭의 장검에 걸어 홱 하고 잡아당겼다.
칼을 빼앗을 속셈. 허나, 이는 실수인 듯했다.
저항하는 맛이 없고, 칼날이 그대로 딸려오는 것 아닌가?
올리버는 반대쪽 톤파로 딸려오는 장검을 다급히 막았다.
깡一!
다시 한번 쇠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 찰나, 데릭의 감정이 밝게 빛났다.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와중 기회를 포착한 것.
그는 올리버의 불안전한 힘의 균형을 꿰뚫어 보고는 팔뚝에 힘을 줘 있는 힘껏 장검을 당겨 올리버의 톤파 하나를 빼앗아 그대로 뒤로 던졌다.
허공에 날아가 바닥에 떨어진 톤파.
지금까지 주도권을 빼앗겨 그렇다 할 마법도 못 쓴 채 끌려다니던 데릭이 드디어 주도권을 가져온 거였다.
짧지만 영원과도 같은 시간.
올리버는 데릭이 무엇을 할지 지켜봤다.
데릭은 바로 파고드는 대신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장검에 불을 붙이려 했다.
특기인 화염마법을 쓰려는 것.
“제 생각에는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올리버가 그리 말하고는 데릭 뒤로 날아간 톤파에 마력실을 연결, 그대로 잡아당겼다.
마력으로 이뤄진 실은 그냥 날아오는 게 아닌, 술사가 원하는 루트를 따라 되돌아왔고 덕분에 마력이 응축돼 불이 발현하려는 데릭의 장검 날에 부딪혔다.
깡——!!
올리버의 톤파와 데릭의 장검이 다시 한번 맞부딪혔으며, 그 충격으로 인해 시전 중이던 마법이 불발되었다.
공중으로 흩어지는 불길과 마력.
데릭은 당황했고, 올리버는 그 틈에 다시 거리를 좁혔다.
양손에 톤파를 방패처럼 들고.
촤좌좌작—!!
데릭은 당황하는 와중에도 올리버가 거리를 좁히자 곧바로 장검을 내질렀고, 올리버는 양손의 톤파로 방패를 형성해 부드럽게 흘려 넘겨 거리를 더욱 좁혔다.
그리고는 톤파 손잡이로 데릭의 목에 건 채, 한쪽 다리를 걷어차며 데릭을 자빠트렸다.
균형을 잃으면 쓰러진 데릭.
그는 쓸모없게 된 장검을 곧바로 버리며 허리 뒤쪽의 단검을 꺼내 올리버를 향해 찔러 넣었으나, 이 역시 올리버가 감정을 보고 대비한 직후라 아무 소용없었다.
칵!!
올리버가 톤파를 도끼처럼 거꾸로 쥔 채 휘두르자 단검이 무력하게 부서져 데릭의 손에서 벗어났으며, 비무장이 된 데릭의 목에 다른 톤파가 올려졌다.
누가 봐도 결판이 난 상황.
내기와 별개로, 자존심이 상하고, 분해야 했건만, 데릭은 그러지 않고 오히려 개운함을 빛냈다.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
“무엇이 말쏨이죠?”
“너……, 교수가 종군마법사 시절 주워온 용병이나, 실험체라는 소문이 말이야.”
느닷없는 말에 올리버가 고개를 갸웃댔다.
‘응? 아니지……. 틀린 말은 아닌가? 교수님과 처음 만난 게 종군마법사 시절이었고, 난 해결사 일하는 도중이었으니까.’
완벽하진 않지만, 미묘하게 일치하는 이야기.
데릭이 이어 말했다.
“그게 아니면 이렇게 강한 게 말이 안 되잖아? 어디 졸부 집 도련님이라는 건 더 말이 안 되고.”
“졸부 집은 또 무슨 말이죠?”
“교수 직원인 주제 휴가를 그렇게 써대는 건 돈 내고 들어온 녀석들밖에 없거든.”
“아……."
"너 정체가 뭐냐?”
데릭이 질문했으나, 올리버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내기는 제가 이긴 것 같습니다만?”
데릭이 고개를 저었다.
“이봐, 마법사들 시합에서 심판이 없으면 어떻게 결판이 나는지 알아?”
“아뇨?”
“한쪽이 항복하거나, 전부 불능에 빠지는 거야!”
데릭이 소리치며 몸에 내재 된 마력을 폭발, 온몸에 화염을 뿜으며 재빠르게 일어났다.
강력한 화력으로 올리버를 일단 멀리 떨어뜨린 다음 기회를—
—뻑!!
올리버가 간신히 자리를 피해 일어난 데릭의 옆구리에 톤파를 휘두르며 대답을 대신했다. 몸에 마력을 뿜어 데릭의 화력을 반감시켰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아,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통증으로 인해 불에 구워지는 오징어처럼 몸을 우그러뜨리는 데릭.
그는 다시 한번 투지를 불태우며 다시 마법을 쓰려 했지만, 올리버는 다시 마력이 뭉치는 근원을 톤파로 후려쳐 마법을 사전에 박살 내고, 데릭의 다리를 톤파로 후려쳤다.
퍽!!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부러지진 않았다. 부러진 것처럼 아플 뿐.
쉽지 않은 기술이었지만, 조셉 패밀리와 파이터 크루를 훈련시키는 와중에 해당 노하우를 습득하게 되었다.
큰 부상을 피하면서도 아프게 때리는 법을 말이다.
올리버는 기동력이 제압된 데릭의 등을 때렸고, 움찔대며 반격하려는 그의 어깨를 후려쳤으며, 회복한 옆구리를 다시 한번 때렸다.
데릭의 몸이 통증으로 인해 다시 오징어처럼 우그러들었다.
올리버는 데릭을 내려다보며 난감해했다. 항복할 성격은 아니라 기절을 시켜야 했는데, 어떻게 기절시킬지 몰라 말이다.
머리를 치면 자칫 죽을 수도 있었고……. 결국, 올리버는 고민 끝에 데릭이 항복할 때까지 때리기로 했다.
뻑! 퍽!! 빠각! 쾅! 퍼걱-!!
그렇게 한참을 때려 기력이 다했을 때쯤 데릭이 질문했다.
“너……. 이 정도 실력을 갖췄으면서, 왜 숨기고 있었던 거지?”
“일단, 기절시킨 다음 말씀을……아……."
올리버가 데릭의 감정 상태를 보고 공격을 멈췄다. 더 이상 싸울 의지가 없었다.
공포나 고통에 의지가 꺾였다기보다는 뭔가 납득한 형태에 더 가까웠다.
“음……. 딱히, 숨긴 건 아닙니다. 그냥 제 입장과 역할에 맞게 행동한 거지요.”
"……이런 훈련도 익숙해 보이는데 많이 해봤나?”
“음……. 조금요?”
올리버가 고민 끝에 대답했다. 실제로 오늘 저녁에도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X구역의 파이터 크루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