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이해해 보려는 자 (4) >
숲에 일어난 화재(火災)를 모조리 흡수한 화염의 귀부인.
그녀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공격하려는 찰나, 꺼지는 성냥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올리버를 보고 말이다.
"......."
"......."
"......."
"......."
모두가 침묵했다.
올리 버는 물론, 불의 귀부인을 소환한 드루이드까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었기에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하나 더 있었다.
왜 불의 정령이 올리버를 보자마자 놀라는 것도 모자라 공포와 경외심까지 품었냐는 거였다.
‘음……. 그러고 보니 샐러맨더도 그랬지.’
올리버가 잠시 잊었던 과거 일을 기억했다.
시외(市外) 임무로 케빈과 처음 만났을 때를. 여러 번 죽을 뻔했지만, 특히, 마지막 샐러맨더를 이용한 공격은 특히 위험했었다.
범위는 상대적으로 좁았지만, 화력이 그 이상이었기에.
‘심지어 난 방어도 제대로 못 한 상태였고. 그럼에도 살아남은 건 지금처럼 정령이 공포를 느끼는 틈을 타 반격을 가한 덕분……. 내가 왜 이제야 이걸 신경 쓴 거지?’
가만 생각해보면 꽤 이상한 일이었다. 왜 자신은 이걸 신경 쓰지 않은 걸까.
뭐, 그래 봤자 그리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나중에 어르신께 한번 여쭤보자.’
올리버는 해당 문제에 결론을 내린 뒤 맞은편 드루이드들을 봤다.
숫자는 총 여섯. 그들은 올리버와 마찬가지로 지금 상황에 의아해하고 있었다.
아니, 의아해한다기보다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매우 믿기지 않고, 인정할 수 없는 부조리를 느끼며 말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드루이드들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과 교감하기 위해 수련만 해온 존재.
대부분 두 번 다시 없을 소중한 유년 시절과 속세의 모든 인연을 포기한 대가로 손에 넣은 힘이었다.
그 덕분에 위대한 자연의 힘을 육체에 담고, 자연을 다루며, 정령과 세계수와 소통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노력 끝에 소환한 정령이 웬 흑마법사를 보자마자 일방적으로 소통을 끊어버리곤 사라졌다?
단순히 총탄이 걸리거나, 마법이 실패한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건 일종의 배신이었다.
자신의 소중한 유년 시절의 노력, 어쩌면 인생에 대한 배신.
그렇기에 드루이드들은 올리버에게 단순한 적 이상의 적의와 증오심을 내보였다.
“네놈……! 무슨 짓을 한 거냐!!”
정령 소환에 실패한 드루이드들은 제각기 자연의 힘으로 육체를 강화, 손에는 거대한 나무망치와 창을 들고 올리버를 향해 돌진해 왔다.
그 기세가 몹시도 사나웠다.
올리버는 그런 그들을 보며 말했다.
“헝거……. 부탁드려요.”
올리버의 부탁과 함께 숲에서 화염으로 이뤄진 거대하고 추악한 남자가 나무를 불태우고 부수며 등장했다.
적잖은 사람을 먹었는지, 덩치가 더 커진 헝거는 비대해진 크기에 어울리지 않은 날렵한 움직임으로 드루이드를 낚아채 허공에 던지고는 귀까지 찢어진 거대한 입으로 단숨에 삼켰다.
"아악……!! 아아악……! ……!!!”
헝거의 손아귀에 붙잡혀 전신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드루이드는 입안에 들어가자 비명마저 지를 자유를 박탈당하며, 헝거의 뱃속에 들어가 살아있는 장작이 되었다.
“으아아아아아악!!!”
동료가 눈앞에서 끔찍하게 죽는 모습을 지켜본 드루이드들이 격분하며 소리쳤다.
거듭되는 충격적인 상황에 마음이 구석으로 몰린 것.
드루이드들이 힘을 합쳐 거대한 나무 기둥을 땅에서 솟구치게 해 헝거를 가격했다.
쿠웅——!!!
처음 헝거가 돌진했을 때 당했던 것과 같은 기술.
차이가 있다면 처음에는 헝거가 나자빠졌으나, 이번에는 아니라는 거였다.
헝거의 앙상한 가슴은 놀랍게도 드루이드들이 만든 나무 기둥을 받아냈다.
힘이 더 강해진 것. 올리버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먹어치우면 헝거도 더 강해지는구나.’
확실하진 않지만, 올리버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당장 차이점이라면 드루이드를 비롯한 사람을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차이였으니까.
드루이드가 힘을 합친 공격을 견디자 헝거는 양손으로 기둥을 붙잡아 힘을 줬다.
기이이이익...…!!
자연의 힘이 깃든 나무 기둥은 헝거의 불길에 점점 타들어 가 약해졌고 이내 으스러졌다.
헝거는 그대로 여세를 몰아 길쭉하고 앙상한 팔을 휘둘러 드루이드들을 공격했다.
“캬캬캬캬햐햐햐햐햐햐햐햐ㅡ!!”
사납게 날뛰며 팔과 다리를 휘두르는 헝거.
짐승에 가까운 몸부림에 불과했으나, 거대한 크기와 악의적인 열기가 합쳐지자 그것만으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올리버가 헝거를 도와 드루이드들을 상대하려 할 때, 기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숲 안쪽에서 무엇인가가 아주 빠르게 달려왔다.
아주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느낌. 개발 반대 위원회 사람이었다.
쉬이이익……! 타다다다닥!! 타닥……쾅!!
온몸에 붕대를 두르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는 두 눈으로도 믿기지 않는 속도로 달려와 나무 사이를 도약 헝거를 향해 돌진했다.
집채만 한 살아있는 불덩어리에 말이다.
"엉......?"
헝거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장 정신을 차려 날아오는 붕대 사내를 향해 입을 쫘악 벌렸다.
삼키려는 것.
펑一!!
놀랍게도 갑자기 나타난 붕대 사내는 고기로 만든 듯한 길쭉한 쿼터스태프를 휘둘러 충격파와 함께 헝거의 입을 꿰뚫고 나왔다.
꽤 놀라웠다.
드루이드 다수와도 싸울 수 있는 헝거를 단신의 힘만으로 이겨내다니.
입이 앞에서 뒤로 완전히 꿰뚫린 헝거는 용암과도 같은 피를 흘리며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헝거의 화염에 그렇다 할 피해를 보지 않은 붕대 사내는 쿼터스테프를 현란하게 휘두르더니 다시 내달려 헝거의 양쪽 발목을 부수고, 허리를 양단시키는 신기(神技)를 부렸다.
란다의 웬만한 초인들도 흉내 내지 못할 기술.
연이어지는 충격파가 헝거를 산산조각냈으며, 그 모습에 넋이 빠진 드루이드를 향해 쿼터스태프를 든 붕대 사내가 말했다.
“너희 대장이 부른다.”
다른 개발 반대 위원회 사람들과 달리 그의 음색은 자연스러웠다.
드루이드들이 정신 차리며 셰이머스가 있는 숲 중앙으로 일제히 도망쳤다.
그리고 도망치는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흑마법사의 눈을 집중해 주변을 살펴보자 살아남은 드루이드들은 무슨 속셈인지 숲 안쪽 셰이머스가 있는 곳으로 퇴각했고, 그 빈자리는 개발 반대 위원회 사람들이 채우고 있었다.
놀랍게도 드루이드들이 빠졌음에도 개발 반대 위원회는 뛰어난 신체 능력을 앞세워 뒤따라오던 반(反) 셰이머스 연합을 막아냈다.
-타닥!!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쿼터스태프를 든 붕대 사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물은 올리버가 아닌 이쪽으로 달려오는 거인화한 좀비들로, 극한으로 육체를 강화하고, 각질 갑옷을 입은 좀비 3구는 공기를 찢는 충격파와 함께 물풍선처럼 산산이 터져나갔다.
단순하면서도 압도적인 힘.
심지어 속도까지 빨라 채 반응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올리버 앞으로 접근해 왔다.
붕대 사내가 올리버의 머리를 향해 쿼터스태프를 높이 치켜들었다.
***
“후……. 이걸로 한숨 돌렸군.”
셰이머스가 양손으로 녹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내리친 검은 번개를 시작으로, 갑자기 전세가 불리하게 흘러갔다.
ABC 창설 전부터 준비한 주술은 반파(半破)되고, 괴물 같은 좀비 떼와 불로 만들어진 괴물이 출현해 방어선을 허무하리만치 쉽게 뚫어버렸다.
덕분에 숲을 둘러싼 천여 명의 병력은 자극을 받아 미친 듯이 밀고 들어왔고.
제아무리 주술로 숲을 보호하고, 드루이드들이 있다 해도 막는 데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그런데,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부른 개발 반대 위원회가 자청해 병력을 내어줘 방패 노릇을 해준다니.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진 않아. 알 수 없는 행운과 불행은 본질적으로 같은 거니까.’
그렇다고 거절할 여건도 아니기에 셰이머스는 ‘원로’라는 놈의 제안대로 병력을 불러 드루이드들을 모두 이곳으로 집결시켰다.
‘다행히 개발 반대 위원회 놈들이 잘해주고 있군. 우리가 빠졌음에도 이 정도로 버텨주다니.’
셰이머스가 숲 곳곳에 걸어둔 주술로 숲을 살피며 생각했다.
온몸에 붕대를 두른 개발 반대 위원회는 하나같이 인간을 초월한 괴력과 회복력, 촉수와 같은 기이한 신체 특성을 이용해 천 명이 넘는 시(市) 병력을 막아내고 있었다.
왜 란다에서 가장 깡패인 시(市)에서 이들을 토벌하지 못했는지 알 거 같았다.
천문학적인 거금을 주고 고용한 보람이 있었다.
‘어차피 우리가 번 돈과 앞으로 벌 돈에 비하면 별거 아니지만.’
셰이머스는 복잡한 생각을 한쪽으로 치워버리며 당장 중요한 눈앞의 일에 집중했다.
다름 아닌 개발 반대 위원회가 준비 중인 공간 이동 의식으로, 온몸에 거적때기와 붕대를 두른 이들이 갓 죽인 신선한 시체로 제단을 쌓아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란다에서 심심치 않게 행해지는 사이비 종교 의식과 비슷했는데, 차이가 있다면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거였다.
그 증거로 켜켜이 쌓인 시체 제단은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뭉쳐 새로운 생명처럼 고동치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마법과 흑마법 심지어 자연의 힘, 성법과도 다른 힘을 뿜었다.
그래도 굳이 비교하자면 흑마법 혹은 성법과 비슷했다.
“웃기는군……."
셰이머스가 웃었다. 흑마법과 비슷하면서도 성법과도 비슷하다니. 신앙심이라고 쥐뿔도 없는 셰이머스마저 불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불경하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저 의식만 끝나면 셰이머스가 원하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문제는 그때까지 버틸 수 있냐는 거지. 또, 저걸 제때 옮길 수 있냐는 거고.’
셰이머스가 세계수를 둘러싼 네 명의 드루이드를 보며 생각했다.
그들은 드루이드의 자존심도 내려놓고, 마법사의 천박한 기계장치를 동원해 세계수에 억지로 묶어놓은 이브(Eva)를 통나무 형태로 자른 세계수에 옮기려고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브는 드루이드 노력에도 불구하고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세계수 주제에…….'
셰이머스가 바쁜 와중에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이브를 보며 생각했다.
“어때?”
“죄송합니다. 사장님…….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얼굴에 나뭇가지 문신을 한 여성 드루이드가 부탁했다.
세계수 다루는 실력만 보면 셰이머스와 맞먹는 실력자였다.
“그거 아까 전에도 들은 것 같은데?”
“정말 죄송합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저항이 더 거세졌습니다. 일단, 강제로 이브를 동면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셰이머스가 주술을 통해 숲 전체의 상황을 지켜봤다.
개발 반대 위원회가 잘 버텨주고 있었지만, 수 역시 힘. 점점 적들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뭐든 좋아. 일단, 무조건 이브를 저 세계수로 옮겨놔. 정 안되면 약간 다쳐도 상관없다. 잃어버릴 바에는 차라리 망가진 게 나으니까.
셰이머스가 통나무 형태로 자른 세계수를 가리키며 명했고, 여성 드루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뛰어난 실력만큼 이브의 가치를 알았기에.
그러는 사이 개발 반대 위원회의 공간 이동 의식은 절정에 다다랐고, 드루이드들은 하나둘 복귀했다.
개중에 듀간도 있었다.
데이브를 막으러 간 듀간이 말이다.
그는 동료 드루이드를 열 명 이상 끌고 나갔는데, 돌아온 건 고작 넷뿐이었다.
‘데이브 녀석 원래 이렇게 강했나?’
셰이머스가 의문을 가졌다. 그도 그럴 게 한 명을 상대하는 것보다 둘을 상대하는 게 더 힘든 것은 상식이었으니.
일반인을 초월한 초인들의 싸움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아니, 한 대만 잘못 맞아도 골로 갈 수 있는 초인들의 경우 더 심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수의 드루이드를 전멸 직전까지 몰고 가다니.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마, 말이 안 됩니다. 사장님.”
듀간이 척 봐도 심상치 않은 상태로 말했다.
“뭐가 말이 안 돼?”
“데, 데이브. 그 흑마법사 뭔가 이상합니다. 정령이 그 녀석을 보자마자 도망쳤습니다.”
“정령이 도망쳐?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셰이머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정령은 위대한 자연을 구성하는 하나의 존재. 한낱 인간 따위를 보고 도망치는 건 말이 안 됐다.
그건 일종의 배신이기도 했다.
자연을 수호하기 위해 인생을 통째로 바친 우리 드루이드에 대한 배신 말이다.
듀간이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하는 도중 무엇인가 또 빠르게 이쪽으로 접근해 왔다.
적인가 싶었지만, 다행히 아니었다.
이번에 셰이머스를 책임지고 도와준 개발 반대 위원회의 원로였다.
그는 드루이드가 봐도 놀라운 속도로 이동해 이쪽으로 순식간에 도착했다.
분명, 듀간을 돕고 데이브를 해치우기 위해 갔는데 말이다.
셰이머스가 그를 보며 질문했다.
“벌써 끝장내고 온 거요?”
“아니……. 계약은 여기서 끝이다.”
개발 반대 위원회의 원로가 일방적으로 통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