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 이해해 보려는 자 (1) >
쉬이이이.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 말과 함께 올리버는 조용히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스륵스르륵. 탁. 찌익....... 스륵스르륵. 탁. 찌익.......
종이를 매만지는 규칙적인 소리와 함께 편지 봉투를 찢는 소리가 하수도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 사이 두 드루이드는 올리버의 부탁대로 가만히 선 채 기다렸다.
참으로 어이없는 광경이라 할 수 있었다.
목표물의 부탁대로 기다려주는 습격자라니……. 아니,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두 드루이드는 올리버가 부탁하는 그 찰나,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존재감을 느꼈다.
수련생 시절 처음 자연과 교감했을 때 느졌던 그런 존재감을 말이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었다. 아니, 착각이어야만 했다.
거대한 자연과 맞먹는 존재감을 가진 인간이라니……. 그런 게 있어서는 안 되지 않은가?
실제로 하수도의 툭 튀어나온 부분에 걸터앉아 편지를 읽고 있는 지금은 아까 전 느꼈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착각이었다. 분명, 착각이어야 했는데,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왜 쥐들이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싶어하냐는 거였다.
“하아……."
짧고도 긴 침묵이 지난 후, 올리버는 읽은 편지를 고이 접어 제각기 편지 봉투에 넝은 다음 도로 품 안에 넣었다.
마치 보물처럼 조심히 말이다.
그리고는 숨을 깊게 들이쉬다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쥐들이 부들부들 낮게 울어댔다.
찌익....... 찌이.......
“두 분 성함이 어찌 되시죠?”
올리버가 공손히 서서 두 드루이드에게 물었다.
드루이드는 아까 전 느낀 압도적인 존재감을 떨쳐내지 못해 주먹을 내지르는 대신 대답했다.
“난 테디……. 이 녀석은 댄이다.”
“테디 씨와 댄 씨…….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혹시, 두 분이 가난한 형제들을 습격하신 겁니까?”
“……그래.”
“왜 습격한 건지 여쭤볼 수 있을까요? 셰이머스 님께서 시키셨습니까?”
“아니……. 우리 의지야.”
"음……. 명령도 아닌데 왜 습격하신 거죠? 딱히 이득 볼 건 없는 것 같은데요?”
드루이드의 촉이 입을 다물라고 테디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테디는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겁먹은 줄 알 테니까. 드루이드인 자신들이. 용납할 수 없었다.
“……얻는게 왜 없어. 분풀이가 되는데.”
"분풀이요?”
“그래……. 웬 비렁뱅이 새끼들에게 발목이 물렸는데, 분풀이라도 해야지. 뭐, 불만 있어?”
“음……. 아뇨, 솔직히 그 뜻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감히 따질 일은 아닌 것 같네요. 각자의 사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요."
“생각보다 태도가 괜찮군.”
“그러니 저도 제 일을 해야겠습니다. 셰이머스 님 어디 계시는지 아시죠?”
“우리가 이야기할 것 같나?”
“저한테 대답 안 하셔도 됩니다. 아서 씨께서 알아내실 테니까요. 저랑 같이 좀 가주시죠.”
“드루이드 몇 명 이겼다고 우쭐대긴一!!”
테디가 희미하게 남은 압도감과 공포를 털어버리곤 올리버를 향해 돌진했다.
근거리 전투라면 누구보다 자신 있었기에 말이다.
아까 전 잠시 제압당하긴 했지만, 상대는 콩 도둑이었으니 예외였다.
무엇보다 눈앞의 데이브라는 놈 현재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즉, 한 대만 제대로 갈기만 끝장낼 수 있다는 이야기. 이 기회를 날릴 수 없었다.
‘그럼, 적 전력을 크게 꺾을 수 있고, 사장님 일에도-’
—[타겟팅(Targeting.)]
드루이드 테디가 달려드는 사이 올리버는 순식간에 감정을 추출, 흑마법을 발동시켰다.
올리버의 손과 테디의 가슴에 제각기 다트판이 맺혔고, 두 다트판은 거부라는 감정을 원천 삼아 서로를 밀어냈다.
———쾅!!
초인적인 육체를 가진 테디는 올리버의 흑마법에 밀려나는 것도 모자라 반대편 벽에 처박혔다.
너무나도 무력하게 말이다.
테디에게 있어 그리 치명적인 공격은 아니었으나 올리버의 공격 역시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올리버는 타켓팅에 깃든 감정을 조절해 거부 감정을 줄이고, 집착 감정에 더 많은 힘을 부여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트판이 자석처럼 서로 끌어당겼다.
벽에 처박혀 불안정한 자세가 된 테디를 말이다.
“애들아, 물어!”
테디의 파트너 댄이 흉악한 하수도 쥐들에게 명령했다.
셰이머스에게 고용되기 전 갱들과 함께 일할 때부터 같이 일해온 자신의 친구들에게 말이다.
총알이 빗발치고, 폭탄이 터지는 환경에서도 맞서 싸운 용감한 친구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한 명의 흑마법사에게 겁을 집어먹어 자신의 부탁을 외면했다.
[블랙 슈트(Black Suit)]
[블랙 아머(Black Armor)]
올리버는 타겟팅을 시전하면서도 손에 블랙 슈트와 블랙 아머를 건틀릿처럼 둘러 그대로 끌려오는 테디를 후려쳤다.
쾅——!!!
하수도 전체가 울리는 굉음과 함께 드루이드 테디가 바닥에 처박혔다.
분명, 양팔로 얼굴을 방어했음에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두 팔이 부서지고, 얼굴이 뭉개지는 결과만 초래할 뿐이었다.
하수도 내 울려 퍼진 진동이 가라앉고, 굉음이 잦아들자 차가운 침묵이 찾아왔다.
아주 차가운 침묵이 말이다.
뚜벅. 뚜벅. 뚜벅.
올리버가 드루이드 댄 앞에 섰다.
댄은 몸이 굳은 채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댄 역시 테디 못지않게 호전적인 자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시 부탁드리는데 저와 함께 가주실 수 없겠습니까? 손이 모자라 두 명을 들고 갈 수 없어서요. 그럼……."
올리버가 말끝을 흐렸으나, 댄은 그 어떠한 협박보다 큰 공포를 느꼈다.
마치 형용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불길한 무엇인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 압박감에 댄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올리버는 감사를 표하며, 테디의 발목을 잡아 질질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아.”
올리버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공포로 얼어붙은 쥐들을 봤다.
쥐는 처음 그대로 부들부들 떤 채 제자리에 서 있었다. 올리버가 시키는 대로.
올리버는 감정을 추출해 쥐들에게 두 가지 흑마법을 걸었다.
[이터널 패믄(Eternal Famine)]
[카니발리즘(Cannibalism)]
악의적인 검은빛을 띤 흑마법은 쥐들을 뒤덮었으며, 올리버는 그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올리버가 사라지자 굶주림에 시달리는 쥐들은 서로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
“자네 왔나……."
포레스트 레스토랑 지하에 마련된 중개인 사무실,
그곳에서 여러 대의 대형 통신장치를 붙잡고 진땀을 빼고 있던 포레스트가 올리버를 맞이해줬다.
그는 매우 피로해 보였으나, 그와 별개로 흐트러진 옷을 추슬렀다. 늘 최상의 모습을 보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자네가 갑자기 어디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급한 볼일이 생겼거든요.”
“그리고 방금 자네가 드루이드 둘을 붙잡아, 카버에게 넘겨주고 떠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네.”
“급한 볼일을 끝냈거든요.”
“그럼, 여기 온 이유가 뭔지 물어봐도 되나?”
포레스트가 질문했다. 임무를 내팽개친 해결사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평소 올리버답지 않은 태도와 지금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걱정한 것에 더 가까웠다.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올리버가 포레스트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포레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올리버는 의자 위에 앉았다.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올리버는 평소에 늘 똑바로 앉았건만 지금은 많이 피곤한 듯 다소 늘어져 있었다.
“……괜찮나?”
포레스트가 물었다.
“예……. 그냥 이번 일이 생각보다 길어져, 피곤한 것 같습니다. 그보다 이곳 사무실도 옛날 레스토랑과 크기만 다르지 비슷하네요?”
“전에도 말했지만, 일하는 공간은 익숙하게 좋거든……. 혹시, 할 말 있나?”
“정확히는 부탁할 게 있습니다…….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보증 서달라는 것만 아니면 다 들어주지.”
심상치 않은 올리버의 상태를 걱정한 포레스트가 농담을 섞어 가며 대답했다.
다행히 반응은 좋았다.
“농담하신 겁니까?”
“그렇네.”
“음……. 재밌는 거 같습니다. 부럽네요.”
“원한다면 유머집이라도 만들어주지. 그러니, 부탁할 게 있으면 말해보게. 만약, 이번 임무에 빠지고 싶으면-"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저……. 지금 들을 수 있을까요?”
“무엇을?”
“포레스트 님과 캔트 님 과거 이야기요. 임무가 끝난 후 듣기로 했는데, 갑자기 너무 궁금해서요.”
올리버는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물었지만, 포레스트는 아주 미세한 올리버의 변화를 알아차렸다.
그렇기에 화내는 대신 크리스털 잔에 술을 두 잔 따라 한 잔을 올리버 쪽으로 내밀었다.
“아직 생각을 정리 중인데, 어느 부분을 듣고 싶나?”
“처음부터 끝까지요?”
포레스트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럼, 내 젊은 시절부터 이야기해야겠군. 내가 젊었을 적에 무엇을 했을 거 같나?”
"음...... 레스토랑 일을 하셨습니까?”
"맞아, 인근에 이름이 알려진 꽤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일했지. 웨이터로."
“알 씨처럼 말씀입니까?”
“그래, 손님들 모자와 외투를 예의 바르게 받아주고, 음식을 가져다줘 팁을 받는 웨이터. 그 전에는 접시닦이였으니까. 좀 나았다고 할 수 있지....… 그래도 만족이 안 됐지만.”
“그렇습니까?”
“팁이 나쁘진 않았지만, 나와 비교도 할 수 없는 부유한 손님들을 계속 본다는 게 생각보다 고욕이었거든. 하는 것도 없이 무게만 잡고 서 있는 가게 주인이 나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도 싫었고. 뭣보다 전망이 없었어.”
“전망이라니요?”
“웨이터 팁이 아무리 좋아도, 그걸로 집세살이를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지 않았거든. 난 품위 있게 늙고 싶어서 말이야. 결국, 고민 끝에 난 가게 단골인 중개인과 거래하기 시작했어. 내가 레스토랑에서 보고 들은 걸 그에게 이야기해주기로, 대신, 그는 내게 약간의 돈과 중개인 일을 가르쳐줬지. 나쁘지 않은 거래였어. 당시 레스토랑에는 여러 사업 이야기가 오갔거든.”
“그렇게 중개인 일을 시작하셨군요.”
"그리고 그때 캔트를 만났지. 그는 중개인과 막 거래를 튼 애송이 해결사였거든."
"아......."
“그때 우리 둘 다 별 볼 일 없는 애송이였고, 그런 주제 돈 욕심은 많아 의기투합했지. 도움을 받던, 중개인을 중심으로……. 시간은 흘렀고 난 어느새 중개인 못지않게 이 바닥의 생리를 알게 됐고, 나름의 수완이 생겼어. 캔트도 초인은 아니지만, 일머리가 있는 해결사가 됐고.”
“이후, 어떻게 하셨죠?”
“신세 지던 중개인에게서 독립해 우리 둘이 동업했지. 난 그동안 쌓은 인맥으로, 일을 찾아보는 중개인, 캔트는 뒷골목 인맥을 동원해 최소 비용으로 최대 수익을 내는 파트너 해결사. 그 당시에는 재개발 붐이 돌아 주로 철거민 퇴거나, 채무 회수, 청부 폭행, 방화, 청부 살인 같은 것을 주로 맡았어. 일이 쉬운 데 반해, 들어오는 돈은 쏠쏠했거든. 자네 수준에 비하면 하찮지만……. 좀 창피하구만.”
“하찮지도, 창피하게도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가?”
“제가 누굴 평가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거 고마운 말이군……. 어쨌건, 낮은 수준의 바닥에 있었지만, 나나 캔트는 원하는 걸 얻었어. 난 그럭저럭 품위 있는 노후를 보낼 자금을 모았고, 캔트는 마누라와 아들을 부양할 돈을 벌었지. 거기다 운 좋게도 시(市)에서 하던 큰 건에 얻어걸려 그 대가로 앞 구역에서 장사할 권리도 얻을 수 있게 됐지. 큰 행운이었어. 굴리는 돈 단위가 달라지거든.”
“근데, 왜 T구역에 계시는 거죠?”
“일이 좀 꼬였거든. 우리가 하던 일 중 하나가 더럽게 마무리돼. 한 놈이 보복하려고 왔어. 보안에 꽤 신경 쓰는 편이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방심했고, 이마에 총구가 겨눠지는 상황에 놓였지.”
“원하는 게 뭐였죠?”
“캔트에 대한 정보. 캔트로 가족을 잃은 녀석이었거든.”
"……대답해주셨습니까?”
그 순간 포레스트의 감정이 죄책감과 후회로 요동쳤다.
포레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마시곤 입을 열었다.
“살고 싶었거든……. 날 비난해도 할 말은 없지만 말이야.”
“딱히, 비난할 생각은 아닙니다. 포레스트 님께서 중개인과 해결사 관계에 관해 이미 수차례 말씀해주셨으니까요..... 이후 어떻게 됐습니까?”
"내 머리에 총구를 겨눈 복수자는 캔트의 한쪽 다리에 영구적인 장애를 남기고, 그의 아내와 아들을 빼앗았지. 자기가 당한 방식 그대로. 캔트는 사라졌고, 난 앞 구역으로 사업장을 옮기는 대신 T구역으로 넘어왔네.”
“죄책감 때문인가요?”
“글쎄, 난 처음에 그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말하고 나니까 아닌 거 같군. 그냥 캔트란 파트너를 잃고 자신감을 잃어 안전하게 장사할 수 있는 곳으로 온 것에 불과해. 즉, 그냥 겁나서 옮긴 거지.”
포레스트는 쓴웃음을 짓더니 술을 다시 들이켰다. 그의 감정은 죄책감과 후회,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의심과 함께 자기혐오를 빛냈다.
올리버는 그에 맞춰 잠시 생각해 보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삶이란 참 복잡한 거 같군요.”
“동감이네.”
“왜 이토록 복잡할까요?”
“약하기 때문이겠지. 약하면 유혹에……. 아니, 그냥 핑계네. 그냥 내가 개새끼라 그런 거지……. 이번 임무 이후 나와의 거래를 끊고 싶다면 말하게. 어차피 계약 기간은-”
"-저랑 끊고 싶으신 겁니까?”
올리버가 진지하게 질문했다.
어찌나 진지한지 포레스트도 움찔할 정도.
“그건……. 절대 아니지. 자네 같은 친구랑 일할 기회가 내 인생에 얼마나 있다고.”
“그럼, 됐습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올리버가 볼일을 마쳤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 이상으로 담담한 태도에 포레스트가 의문을 품었다.
“갑자기 왜 물어본 건지 알 수 있겠나?”
올리버는 쉽지 않은 질문을 들은 듯 허공에 몇 번 손짓하더니 간신히 대답했다.
“……이해해 보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