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 채비 (2) >
똑. 똑.
올리버가 문을 두들겼다.
잠시 후, 문 너머로 무뚝뚝한 음성이 들렸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올리버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교수연구실에 앉은 케빈을 볼 수 있었다.
평소 그는 서류정리를 하거나, 다음 수업 준비를 하느라 늘 바빴는데, 오늘은 일이 평소보다 빨리 끝났는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옆에 쌓인 서류를 보니 다 처리하신 것 같긴 한데 신기하네.’
일을 미루진 않지만, 서둘러 처리하지도 않는 케빈의 일 처리 방식을 아는 올리버가 의문을 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잘 마무리하고 왔나?”
"예?”
“<마법 전투 기초> 말이야.”
“아……. 예. 말씀드렸고, 잘 끝난 것 같습니다. 크게 실망하거나, 아쉬워하는 분들은 없었습니다.”
“그게 좋은 건지는 의문이군.”
그건 올리버도 동감이었다.
반응이 없다는 것은 올리버가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는 것이었으니……. 아니, 그 이전에 수업 자체에 의욕이나 애착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썩 좋지 못했다. 차라리 화라도 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
“펠릭스에겐 네 교육 방식을 썼나?”
"예, 아주 조금만 도와드렸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지?”
"음……. 늘 걸리는 돌부리가 어디 있는지 짚어준 정도입니다. 아마, 조금만 연습하면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순차적 마력 흐름을 무난하게 쓸 수 있을 겁니다.”
순차적 마력 흐름.
마탑의 정식 등록된 훈련법은 아닌 케빈이 자체적으로 개발한 일종의 마력 체조라 할 수 있었다.
일정한 패턴과 속도에 맞춰 마력 흐름을 운용하는 방식으로, 안정적인 마력 운영과 마력의 극대화보다 민첩성과 유연함을 강조했다.
이를 기초로 마법의 빠른 시전과 유연한 변화를 끌어내 마법 전투의 효율성을 극대화하였는데, 별거 아닌 듯했지만, 난이도가 꽤 있는 지 현재 올리버와 같이 훈련하는 학생들은 완벽하게 구현하진 못했다.
"그거 궁금하군. 나중에 확인해봐야겠어.”
“직접 확인하실 겁니까?”
"일단은 너 대신 대리로 올 사람에게 부탁해야지. 나도 바쁘니.”
"음....... 교수님. 괜찮으시다면, 저 대신 대리로 오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신경 쓰이나?”
케빈이 양손을 깍지 끼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편하게 기대는 자세 같았지만 상당한 압박감을 유발했다.
올리버는 느끼지 못했지만 말이다.
"예."
"신경 쓰이면 이런 식으로 휴가를 내면 안 됐지.”
"그건 죄송합니다.”
올리버는 사과할 뿐.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사정이 있긴 했지만, 결국, 핑계였으니.
마탑 업무나 학생들과의 약속보다, 이번 임무와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대가에 더 큰 매력을 느낀 것뿐이었다.
케빈이 뭐라 비난해도 올리버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핑계 대지 않는 점은 마음에 드네……. 많이 급한 일인가? 그 개인 사정이라는 거?”
"아…….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소지가 다분하긴 합니다.”
"구체적으로 뭔지 말해 줄 수 있나?”
“음……. 아뇨.”
“어차피, 알려고 하면 알 수 있어.”
허세가 아닌 진짜였다. 란다의 양지와 음지는 구분되어 있지만,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마탑 교수 정도가 하고자 한다면, 뒷골목 해결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올리버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제 입으로 이야기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해결사로서 최소한 지켜야 하는 규칙을 생각하며 올리버가 대답했다. 케빈이 알아낼 수 있지만, 최소한 자신의 입을 통해서는 안 됐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지금은 지금 일에 집중하지.”
케빈이 말을 마치며 옆의 서류 더미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교수 개인 직원 휴가신청서로, 이미, 교수 서명란에 케빈의 사인이 적혀 있었다.
올리버는 감사 인사를 하며 다가가 책상 위에 놓인 교수 개인 직원 휴가신청서에 손을 뻗었다.
“개인 사유로, 휴가를 써도 급료의 80퍼센트가 나오는 건 대단한 것 같네요.”
"다들 마탑 생활에 불만을 품으면서도 떠나지 않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올리버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 생활이 팍팍하긴 해도 안전망이 없는 란다에 비하면 확실히 살기 좋았다.
‘규모가 커 오가는 돈이나, 권한도 크고.’
아직 직원 수준이긴 했지만, 마탑의 규모와 이곳에서 운용되는 돈의 흐름을 간접적으로 느끼는 올리버가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멀린은 마탑 내에서도 서열이 아주 높은 듯했는데, 어째서 직접 어디론가 떠났는지 말이다.
그냥 다른 사람을 시키면 될 텐데 말이다.
실제로 멀린은 그런 사람이 많다고 했고.
설마, 멀린이 직접 움직여야 할 만큼 크거나 중요한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었다.
자신과 상관없지 만, 올리버는 궁금해졌다.
“교수님. 어르신이 오늘 어딘가로 떠나셨다고 하던데, 실례가 안 된다면 어디 가셨는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설마, 그분이 나한테 어디 갈지 일일이 보고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케빈이 어이없는 감정을 빛내며 되물었다.
질문은 들은 올리버는 반사적으로 평소 멀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음……. 아뇨.”
"정답이야.”
대답을 들은 올리버는 휴가신청서를 다시 작성했다.
서명란에 [제논 브라이트]라 사인하고, 사유에 [개인 사정] 이라 적었다.
마지막으로 기간을 작성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 끝부분은 공란으로 비웠다.
사실 하면 안 되는 행동이지만, 교수가 허락하면 불가능하진 않았다.
“좋아, 이건 내가 제출하지.”
케빈이 서류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의 눈은 날카롭게 서류를 훑어봤다.
"배려 감사합니다. 그럼, 저 먼저 퇴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고, 올리버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 밖으로 나갔다.
문고리를 잡자, 케빈이 갑자기 말했다.
"나와 안면이 있는 순수마력학파 마법사가 올 거야.”
"......예?"
"네 대리로 나올 사람 말이야. 종군 마법사고 실력도 괜찮은 마법사라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갔다 와."
케빈이 미세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친절과 배려로 말했다.
올리버는 다시 인사했다.
“배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복귀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올리버는 마탑에 정식으로 휴가를 신청해 여유 시간을 확보했다.
하지만 이름 그대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시간은 아니었다.
임무에 들어가기 전 준비하는 시간에 불과했으니.
우선, 올리버는 블랙마켓에 들려 주문한 총기와 기타 아이템을 수령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송장인형을 손봤다.
포레스트가 알아봐 준 셰이머스 부하들의 특성에 맞춰 대응할 수 있게끔 말이다.
올리버는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 좋아졌다고 생각했으나, 그와 별개로 방심할 생각은 없었다.
특히, 드루이드의 희귀한 힘을 겪어 봤기에.
'강력한 육체, 마법과 결이 다른 신비한 힘, 강력한 생명력.’
하나하나 부담스러웠지만, 특히, 다수이면 그 위험성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특히, 개인의 실력과 별개로 아차 하면 죽을 수 있는 이곳 바닥 특성상 그만한 준비가 필요했다.
간단한 개조를 마친 후, 올리버는 송장인형과 차일드와 함께 몇 가지 실험 겸 훈련에 들어갔다.
그동안 바빠 연습할 타이밍이 마땅치 않아 뒤로 미뤘는데, 때마침 기회가 온 것이었다.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올리버가 실험 겸 연습을 한 뒤 생각했다. 적의 의표를 찌를 수 있을 듯했다.
물론, 단순히 전투 준비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멀린이 준 서적도 한번 읽어봤다. [세계수 진화론]이란 책을 말이다.
멀린이 예상이라도 한 듯 건네준 이 책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고, 예상대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멀린의 타고난 지성 덕분인지, 올리버가 궁금해하던, 정보량 축적에 따른 세계수의 미래예측능력과 세계수에 관한 흥미로운 가설을 담고 있었다.
'세계수를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쌓이는 정보량으로 인해 인공적인 정신의지가 깃든다니..…. 놀라우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야. 여유만 되면 이것만 연구해보고 싶을 정도로.’
올리버가 멀린이 준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상당히 오래된 책 같음에도 내용은 상당히 파격적이며, 흥미를 유발했다. 거기다 그럴듯하기까지 했다.
아침 식사 대신 받기 미안해질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는 노릇. 올리버는 그 외에도 미리 처리해야 할 일을 처리하거나, 기타 다른 채비를 했다.
가령, 퍼스트가 하루 종일 만든 피의 영약을 에디스에게 미리 넘겨줬고, 포레스트를 찾아가 그가 따로 조사한 내용을 들었다.
의뢰인의 정보에만 의존할 순 없는 법이니.
앉아 있을 틈 없이 바쁘긴 했지만, 그래도 딱히 힘들거나,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이건 힘들고 어렵네.’
다섯 통의 편지를 보며 올리버가 생각했다.
로스번을 포함한 마텔 비밀 시험실에서 도와준 아이들이 보낸 편지였다.
편지는 여전히 동봉된 상태. 올리버는 이 편지를 뜯어 내용물을 읽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실제로, 그 욕구가 상당해 손이 약간씩 움직여 편지 봉투에 다가갔다.
스륵. 스륵. 스륵. 탁.
뱀처럼 기어가던 올리버의 손가락 끝에 편지가 닿았다.
이대로 당겨 봉투를 찢을 수 있었으나, 올리버는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누군가 본다면 대체 편지 하나로 뭐 하는 짓이냐고 미간을 찌푸릴 모습이었지만, 올리버도 어쩔 수 없었다.
로스번 일행을 도와주고, 편지를 가져다준 멀린의 말이 있었기에.
'왜 바로 읽지 말라고 하신 걸까?’
올리버가 의문을 가지며 편지를 줄 때를 멀린의 모습을 떠올렸다.
로스번 일행이 보내준 편지를 건네받자 올리버는 바로 편지를 뜯으려 했지만, 멀린은 이를 막았다.
‘아직 뜯지 마. 바로 읽으라고 건네준 거 아니니까.’
올리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편지를 건네줘 놓고 읽지 말라니. 이를 말하자 멀린이 다시 설명했다.
‘나도 읽고 싶어 그렇지. 귀여운 애들이 꼭 좀 전해달라 부탁해서 건네줬지만, 나도 첫 번째로 읽고 싶거든……. 그러니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먼저 읽지 마.’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올리버에게 보낸 건데, 자기도 읽고 싶다니.
이에 관해 올리버가 다시 한번 따졌지만, 멀린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저 애들 편지를 가져다준 수고 비용으로 그러한 권리를 요구할 뿐이었다.
‘그리고 난 거절하지 못했지.’
올리버가 편지를 살펴보며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로스번과 다른 아이들이 편지를 쓸 만큼 여유로워진 건 전부 멀린 덕분이었으니까.
‘마텔에서 무사히 나오고, 거처까지 알아봐 주셨지…….'
심지어 멀린의 요구가 억지 같았지만, 사실 아주 그렇지도 않았다.
애당초 멀린이 아니면 편지를 받을 방법도 없었고, 또, 아예 넘겨주지 않는 방법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멀린은 아이들과 올리버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우체부 노릇을 해줬다.
일단,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에 올리버는 만족하기로 했다.
‘근데, 난 왜 이 편지를 이렇게 읽고 싶은 걸까?’
올리버는 자신이 느끼는 생소함에 의문을 가졌다.
어쩌면 멀린의 말 때문일지도…….
과거 멀린은 로스번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이 원소학파 지부에 적응하기 힘들 거라고 했다.
생명학파의 비밀 실험으로 신체가 개조당해 마력을 운용할 수 있는 몸이 됐다고 하나, 다른 아이들에 비해 두 배나 늦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잘 적응하고 있다고 했지. 기적처럼.’
멀린이 했던 말을 다시 상기했다.
분명, 그는 로스번을 비롯한 아이들이 잘 적응해가고 있다고 했다.
두터운 마력 벽 탓에 진심인지 거짓인지 파악할 수 없었으나, 올리버는 본능적으로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멀린이 그런 장난을 치지 않을 걸 알기에.
참으로 대단했다.
로스번을 포함한 아이들 모두가 말이다.
큰일을 겪고, 낯선 환경에 놓였음에도 그곳 생활에 잘 적응한 것도 모자라 편지까지 써주다니. 진심으로 대단했다.
로스번이 약속을 지킨 거였다.
‘꼭……. 꼭 다시 만나요.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찾아뵐게요.’
잊고 있었던 로스번의 외침이 귓가에 울렸다.
분명 헤어지고 난 후, 신경 쓰지 않았는데..…. 이후부터는 저분들의 몫이라고.
그런데 이리 편지를 받자 바로 어제 있었던 것처럼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참으로 기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캔트를 다시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
"그래, 참자, 참어.”
올리버가 고심 끝에 편지를 한데 모아 품 안에 도로 넣었다.
이래저래 멀린과의 약속을 지켜야 할 것 같았다.
애당초 약속을 한 조건으로 자신이 편지를 가지고 있겠다고 한 거였으니.
‘뭣보다 정말 못 참겠다 싶을 때는 읽어도 좋다고 했고.’
이상한 조건이었지만, 멀린은 그런 조건을 걸었고, 올리버는 이를 수락하며 하루에 수차례 자신에게 자문했다.
참을 수 있겠는지 없겠는지.
'아직은 참을만하네..... 차라리 정말 못 참겠으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
올리버는 새삼 자신이 얼마나 호기심에 약한지 깨달았다.
아픈 것도, 추운 것도, 배고픈 것도 견딜만했지만, 궁금한 건 참기 어려웠다.
차라리 알 수 없는 거면 잠시 단념하겠지만, 그건 또 아니니.
"차라리 다른 데 집중할 데가 있었으면……."
올리버는 생각했고, 그 소원은 이뤄졌다. 띡. 띡. 띡. 때마침 올리버의 품 안에서 호출기가 울린 거였다.
포레스트를 통해 받은 폴 카버의 호출기로, 직사각형 화면에 특정 주소가 출력됐다.
올리버는 곧바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