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ABC(1) >
딸랑-
레스토랑 문을 열자 종소리가 울리며 올리버를 반겨줬다.
신경 못 썼는데, 가만 보니 레스토랑을 새롭게 옮겼어도 종은 옛날 것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
뭐랄까……. 반가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오셨습니다. 데이브 씨. 늦은 밤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알은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예를 갖춰 반겨줬다.
얼굴을 맞댄 지 꽤 됐음에도 참으로 한결같았다.
“아뇨, 괜찮습니다. 포레스트 님께서 괜히 부르시는 게 아니실 테니까요……. 그보다 알 씨는 괜찮으십니까? 낮에도 일하시는 거로 아는데?”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급이 올랐고, 추가 수당도 받거든요. 팁도 많이 받고요.”
알이 자기 앞주머니를 톡톡 두들겼다.
“……농담이신가요?”
“절반 정도는요.”
미소 지으며 대답하는 알.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인사를 끝마치자 알은 자연스럽게 손을 가리키며 따라와 달라고 부탁했다.
“괜찮으시면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손님께서 기다리고 계셔서요.”
“아, 예, 바로 가죠.”
“감사합니다. 따라오십시오.”
올리버는 알의 안내를 따라 1층, 2층 홀을 지나 안쪽 별실이 있는 구간으로 따라갔다. 가는 중간 익숙한 감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손님은 누군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시(市) 내무부 소속 폴 카버 님입니다.”
***
알은 귓속말하듯 조심스럽게 말했고,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1층, 2층보다 더 우아하게 장식된 안쪽 별실에 들어서자 시(市) 공무원인 폴 카버를 볼 수 있었다.
과거 오염구역 청소와 시외(市外) 임무를 맡았을 때 상대했던, 시(市) 공무원 폴 카버를 말이다.
“이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하얀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카버가 올리버를 보자 인사했다.
그는 늦은 시간임에도 고기 파이를 먹고 있었고, 그 옆에 앉은 포레스트는 커피를 홀짝이며 올리버를 반겨줬다.
“늦은 시간 불러서 미안하네.”
“아뇨, 괜찮습니다. 나올 수 있어서 나온 거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포레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버 맞은편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올리버는 시키는 대로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카버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인사를 들은 카버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여느 때처럼 바쁘긴 하지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보다 반겨주셔서 고맙군요. 보통 해결사분들은 저희를 보면 인상을 찌푸리기 바쁜데요.”
“그렇습니까? 이유가 뭐죠?”
올리버가 진짜 궁금해 물었다. 포레스트가 이에 답했다.
“보통 시(市) 공무원이 오는 이유는 어려운 일을 맡기기 위해서거든.”
무례할 법한 대답이었지만, 카버는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
“예, 맞습니다. 시(市)는 보통 오염구역 청소처럼 귀찮고 더러운 일을 맡기기 위해 여러분을 찾아오죠……. 혹은, 그것보다 더 더럽고 위험한 일을 맡기기 위해서나요.”
뻔뻔하지만 시원시원한 태도. 올리버가 질문했다.
“오늘 찾아온 것도 그 때문입니까?”
“예. 그리고 후자에 가깝죠.”
후자라면 더 더럽고 위험한 일……. 어째 카버의 말과 감정 상태를 블 때 거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했다.
보통 시(市)에선 강제성을 띤 협력을 구했으니, 딱히 놀랍지는 않았지만.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카버는 반쯤 먹은 고기 파이를 놔두고 옆에 놓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올리버 쪽으로 넘겼다.
적당한 두께의 서류뭉치 위에는 라는 글자가 박혀있었다.
“혹시, 데이브 씨께선 ABC 투자 회사에 관해 들어보셨습니까?”
“예. 리프 론(leaf loan)을 운영하는 사업가 셰이머스와 란다의 여성 투자자 머틀 버뉴, 데이지 멀리건, 조던 데비키가 합쳐 세운 투자 회사 아닙니까?”
“정확합니다. 그럼, 회사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저 수백억대 투자금이 모였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조금 느리시군요. 이미 수천억대를 넘어 조 단위에 들어섰습니다.”
보통 잘 놀라는 편이 아닌 올리버였지만, ‘조’라는 단위를 듣고 멈칫했다.
근래, 돈을 만진 올리버조차 가늠이 되지 않는 액수였다.
‘1억이 몇 개 모여야, 1조가 되는 거지?’
올리버가 조라는 숫자를 이해하기 위해 자신이 느끼는 가장 큰 단위와 비교해 봤다.
란다에선 억이란 돈도 평생 못 만지고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였지만, 조는 그 억이 1만 개 있어야 성립되는 숫자였다.
가히, 충격적인 숫자라 할 수 있었다.
“아무 말씀도 없으시군요.”
“아아……. 죄송합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요.”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조라는 돈은 사실 일반적으로 나와서는 안 되는 단위이지요. 저금리 은행에 넣어둬도 1년에 최소 100억은 이자로 찍히는 액수니까요.”
“뭔가, 현실성이 없는 숫자네요.”
“정상적인 반응이니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ABC는 돈을 어떻게 모은 거죠? 제가 좀 예전에 보긴 했어도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진 않았는데요?”
올리버가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물었다. 돈이라는 게 이렇게 단기간 내에 모을 수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란다에 돈이 넘치다 못해 요동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 있습니까?”
“예.”
“그 요동치는 돈을 다 쓸어 담으면 가능합니다.”
그것도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시(市) 공무원 카버는 그 방법에 관해 바로 설명해줬다.
중요한 것은 홍보와 현혹이라 했다.
“홍보와 현혹요?”
"예, 셰이머스는 ABC를 설립하자마자 쇼(Show)와 돈을 이용해 모든 신문사가 ABC를 다루게끔 해 엄청난 광고 효과를 누렸습니다. 어떤 사람이 세웠는지, 어떤 사람들이 투자했는지를요.”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이라면 문제없는 것 아닙니까? ……아니면, 기사가 가짜입니까?”
“그럼, 좋겠지만, 아닙니다. 기사 내용은 전부 사실입니다. 투자자, 투자금, 수익 모두요……. 덕분에 설립한 지 일주일도 안 돼, 천여 명의 사람들이 돈을 맡겼습니다. 계층도 다양하고요. 일반 노동자부터 자영업자, 전문직, 사업가 종사가, 은행 기관까지도요.”
“대단하네요……. 근데, 천 명 늘었다고 1조란 돈을 모을 수 있나요?”
“이후, 차례대로 이름 있는 거부들이 돈을 맡기고, 그때마다 시민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들어 돈을 맡겼습니다. 현재는 그 수가 1만 명을 훌쩍 넘겼고요. 원하신다면 서류를 확인해보시죠.”
올리버는 시키는 대로 서류를 확인해 봤다.
카버가 말한 페이지에 날짜와 투자자 수, 투자금 등 투자기록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름이 있는 부유층은 카버의 말대로 일정한 간격을 둔 채 투자를 했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흡사, 언덕에서 구르는 눈덩이와 같았다.
"심지어 란다 사람뿐 아니라 그 외에서도 투자를 받고 있습니다. 에이전트를 통해 주변 소도시는 물론 왕국 수도와 저기 노스랜드까지.”
올리버는 서류를 다시 넘겼다. 카버의 말대로 셰이머스의 투자 흐름이 깔끔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흡사, 거미줄이 촘촘하고 체계적이었다.
조라는 현실성이 없는 숫자가 어떻게 모였는지 조금씩 감이 잡혔다.
‘그래도 현실성이 없지만.’
팔랑. 팔랑. 팔랑…….
올리버는 빠르게 서류를 훑으며 질문했다.
“……조사가 아주 잘 되어있군요. 근데, 이 이야기의 요점을 잘 모르겠습니다. 왜 ABC 투자 회사를 제게 말씀하시는 거죠?”
“왜냐면 의뢰할 일이 이 말도 안 되는 회사의 뒤를 캐는 거기 때문입니다.”
“……? 왜 말이 안 된다고 하시는 거죠?”
“말 그대로, 말이 안 되는 회사이기 때문입니다.”
***
시(市) 공무원 폴 카버가 확언하며, 그 이유를 설명해줬다.
얼마 있지 않아 올리버는 그 말이 아무 근거 없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수 있었다.
카버는 펜과 종이를 끼내더니, 올리버의 눈앞에서 ABC가 앞으로 얼마나 많은 투자금을 모을 수 있을지 예상치를 작성했다.
숫자를 쓰는 모습과 속도를 보면 이미 수차례 계산해본 게 확실했다.
“이 흐름대로만 가면 지금 모인 돈 이상의 투자금 ABC에 몰릴 겁니다.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열 배까지도요.”
“……열 배면 10조요?”
말이 안 되는 액수에 올리버는 그답지 않게 경악했다. 그에 비해 카버는 차분했다.
“예, 인간의 탐욕과 광기란 그런 거니까요……. 하지만, 란다가 아무리 돈이 넘쳐도 결국 끝은 있는 법. 투자금은 서서히 줄기 시작할 겁니다.”
카버는 흰 종이 위에 점점 완만해지는 그래프를 그렸다.
“하지만, 그에 반해 ABC에서 지급해야 하는 투자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죠. 자기들도 그게 걱정됐는지 투자 상품을 세분화했지만, 결국, 시간문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할 겁니다.”
카버는 다시 횐 종이 위에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그래프를 그렸다.
두 그래프는 엄청난 간극과 불균형이 보였고, 이는 엄청난 불길함을 야기했다. 올리버조차 당황하게 할 정도로.
“아무리 변수를 줘도 결국에는 돈을 지급할 수 없는 순간이 옵니다. 심지어 최대한 편의를 봐줘도요.”
“제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ABC는 투자 회사니, 투사 수익금으로 그걸 지급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ABC는 절대 투자에 실패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투자에서 절대란 단어가 나오면 그건 절대 사기입니다.”
카버가 다시 한번 확언했다. 감정 상태를 봤을 때 그냥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세계수가 뭔지 저도 정확히 모르지만, 인간의 탐욕과 광기가 점철된 투자 시장에서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다는 건 헛소리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위대한 현자들조차 투자해서 큰 실패를 한 일화는 유명합니다. 그게 현실이고 역사죠……. 설마, 데이브 씨는 그런 헛소리를 믿으시는 겁니까?”
“저도 믿기 힘들지만, 제가 생각하지도 못한 능력을 갖춘 분들이 있는지 모르니까 함부로 예단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
카버는 어이없는 감정을 빛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는 와중 올리버가 입을 열었다. 아까 전부터 신경 쓰였던 게 하나 있었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 정도로 수상하다면 저 같은 해결사가 아닌, 시(市)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너무나도 맞는 말이라, 제가 할 말이 없군요. 데이브 씨 말씀이 옳지만,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아 여기 가져온 겁니다.”
올리버는 카버의 말에서 다시 한번 불길함을 느졌다.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 찾아오기 전, 이미, 몇몇 사람들이 셰이머스의 사업에 관해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수학자는 물론, 경제학자 심지어 모이라이 학파에서도 말이죠.”
모이라이 학파란, 세계수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파였다.
생명학파, 공간학파와 더불어 역사와 규모가 짧지만, 그 잠재 가능성과 성장세는 마탑에서도 손꼽는 강력한 학파.
“근데, 왜 시(市)에서는 조사하지 않죠?”
“셰이머스의 뒤를 봐주는 공무원들과 시의원들 때문에 제대로 된 조사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조사했지만, 건진 게 없고요. 특히, 세계수 문제는 시(市)에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아......."
“덕분에 대부분 조사는 흐지부지됐고, 셰이머스에게 돈을 받아먹은 공무원과 시의원들이 보호해줄 명분만 줬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시민들은 셰이머스에게 돈을 더 가져다 바치고요.”
“어차피 투자는 개인 선택이니, 놔두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개인 의지를 중요히 생각하는 올리버가 물었다.
투자로 돈을 얻으면 기쁜 일이고, 설사 잃는다 해도 자기 선택이니 나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카버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전 시(市) 공무원입니다. 눈앞에서 사기를 빤히 이뤄지는데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
"......라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고, 사기의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 규모를 계속 내버려 뒀다간 란다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