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0. 타고난 협상가 (1) >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J구역의 복합문화시설 사파이어의 한 객실.
그곳에 올리버와 에디스 단둘이 들어와 대화를 나눴다.
“딱히 좋아서 만나준 건 아니니 감사하지 마.”
에디스가 뒤뚱뒤뚱 걸어 소파 위에 앉았다.
그는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는지 얕게 헐떡였다.
“주변의 눈 때문에 만나 준 거니까.”
“에디스 님께서도 주변의 눈을 의식하십니까?”
벨트를 풀어헤치는 에디스를 보며 올리버가 물었다. 그의 뱃살은 크림처럼 흘러내려 허벅지 위에 내려앉았다.
“하……! 세월이 많이 흐르긴 했구만. 매음굴에 와서 일이나 받던 해결사 나부랭이가 말대답하는 거 보니 말이야.”
“아,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딱히, 모욕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에디스 님은 늘 당당하셔서 남들 눈은 신경 안 쓰실 줄 알았거든요.
올리버는 행여 오해를 살까 싶어 말했다.
에디스는 날카로운 안광을 내뿜으며, 올리버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은 마력이 없는 평범한 눈이었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깃들어 있었다.
“……이봐.”
“예, 에디스 님.”
“저기 술 좀 가져와 봐. 목마르군.”
에디스는 탁자 위에 올려진 술병을 가리켰고, 올리버는 에디스의 요구에 따라 술병과 잔을 가져와 따라줬다.
에디스가 술을 마신 뒤 입을 열었다.
“너도 한잔 마셔. 나 혼자 마시면 불공평하니까.”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이곤 마력을 사용해 저 멀리 탁자 위에 있던 잔을 가져와 술을 따라 마셨다.
에디스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놀랍군. 희귀 케이스인 건 알았지만, 그렇게 마력을 잘 다룰 줄은 몰랐는데?”
“아, 연습 좀 했습니다.”
“연습 좀 했다라……. 마력이라는 게 그 정도로 쉽게 다뤄지는 물건인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군.”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야. 그냥 사실을 이야기한 거지……. 난 또 무슨 기인이라도 만나 마력을 다루는 법이라도 배운 줄 알았어.”
훅 치고 들어오는 에디스의 발언.
올리버는 겉으로 내색지 않았지만 흠칫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볼 게 뭐 있나? 마력을 다루는 게 그만큼 어려워 그러는 거지. 마력이 있어도 마력을 못 다뤄 마법사가 못 되는 인간이 한 트럭이거든."
“아, 그렇군요.”
“……또, 네 지식수준이 상당한 것도 신경 쓰이고.”
“지식수준요?”
“그래, 마법사와 네가 왜 싸웠는지 들었거든. 화력 발전은 끝물이고, 순수마력 학파의 발전 방식이 더 나을 거라고 모욕했다면서? 얼굴에 침을 뱉고."
“아……. 모욕할 의도는 아니었고, 침을 뱉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순수마력 학파가 더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의견을 냈을 뿐입니다. 화력 발전도 성장의 여지는 있지만, 한 50년 정도가 지나면-”
"-바로 그 부분이야.”
에디스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지적했다.
“그 말은 지식수준이 받쳐주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말이거든. 그리고 그 정도 전문 지식을 쌓는 건 절대 쉬운 게 아니고. 마탑 놈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꽁꽁 싸매거든……. 그래서 기인이라도 만난 줄 알았지. 흑마법사에게도 마법을 가르쳐주는 정신 나간 기인을 말이야.”
오……. 올리버는 에디스의 영민함에 감탄했다.
약간의 오차는 있지만, 그는 몇 개의 퍼즐로 올리버의 대략적인 상황을 전부 파악했다.
어찌 보면 감정을 꿰뚫어 보는 흑마법사의 눈보다 더 대단했다.
역시, 란다에서 괜히 자수성가한 게 아니었다.
“말하고 나니까 궁금하군. 마력이야 독학했다지만, 그런 지식은 어떻게 익힌 거지?”
“음……. 일하는 과정에서 마법사분들을 죽이고, 노획한 그분들 책과 연구 일지를 읽어서요?”
“호오……. 좀 억지지만,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군. 괜찮은 대답이야. 그 대답으로 밀고가.”
에디스는 올리버의 말을 믿지 않지만, 그와 별개로 추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올리버의 변명을 지지해주기까지 했다.
아닌 듯하면서도 배려심이 꽤 깊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잡설은 충분히 나눴으니, 날 보자고 한 연유나 들어볼까? 재밌는 이야기면 좋겠는데.”
"아, 맞다……. 에디스 님께 거래를 제안하고 싶어 이리 만남을 청했습니다.”
“거래?”
“예."
“크하하하하핫-!!”
올리버의 대답을 들은 에디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을 무안하게 만드는 악의적인 웃음이었건만, 올리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에디스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 웃어서 미안하군……. 사실 안 미안해. 웃긴 이야기니까. 대답해봐. 나와 무엇을 거래할 생각이지? 폭력 외에는 내세울 게 없는 인간 백정이. 아니면 뭐? 무슨 비약이라도 팔려는 건가?”
“오,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이 망할 도시에는 그런 약쟁이들이 돌멩이처럼 넘치니 그렇지. 길바닥 흑마법사부터, 생명학파까지. 전부 내 돈을 탐내. 그때마다 난 다 꺼지라 소리치고.”
"이유가 있습니까?”
“왜냐면 난 이미 거래처가 있으니까. 실망이야, 그래도 너는 재밌는 놈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실망시켜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더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뭔데? 대답할 가치도 없는 거면 난 바로 이 방을 나갈 거야.”
“혹시, 그 거래처에서 구입하는 약이 피의 영약입니까?”
피의 영약.
올리버가 그 단어를 이야기하자 에디스는 겉으로 내색지 않았지만, 크게 동요했다.
마치, 은밀한 비밀을 들킨 것처럼.
그럼에도 그는 차분함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며 현재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이런 점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 질문은 이미 내가 피의 영약 복용자라는 걸 알고 있다는 거지?”
솔직히 인정하는 에디스의 모습에 올리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하는 건 아니고 그냥 예상했습니다.”
"상관없어. 확신이든 예상이든 그게 그거니까. 피의 영약은 그 정체를 알기도 쉽지 않을 만큼 귀한 약이거든……. 어떻게 피의 영약에 대해 알게 됐지? 개나 소나 알 수 있는 물건이 아닌데 말이야.”
“음……. 그건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호……. 거절인가?”
“예, 이건 거래니까요.”
올리버의 대답에 에디스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다시 한번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아……. 그거 맞는 말이군. 맞는 말이야. 거래는 동등한 사람끼리 하는 거고, 동등한 사람은 서로 대답을 강요할 수 없지. 이거 한 방 먹었구만.”
“아, 그런 뜻은 아닙니다. 전 에디스 님을 존경합니다.”
“되지도 않는 아부는 그만하고, 내게 무슨 거래를 제안하러 온 거지? 난 그게 더 궁금한데.”
“……제가 알기로 에디스 님이 보유한 피의 영약이 슬슬 부족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맞습니까?”
“맞아, 이젠 놀랍지도 않구만…….”
에디스는 부정하지 않고 솔직히 인정했다.
이미, 올리버가 다 알고 있다는 걸 확신한 상태였다.
“갑자기 약이 구해지지 않아 요즘 고생하고 있거든. 덕분에 약을 쪼개 먹느라 잔병치레도 하고, 내 마누라와 자식새끼들은 다시 내가 뒤질거란 희망을 품고 있지……. 혹시, 그거 너랑 관계있나?”
올리버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바토리와 관련된 것은 마탑의 교수 직원 ‘제논 브라이트’였지, T구역의 해결사 ‘데이브’가 아니었다.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뭐,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그게 왜?”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제가 그 피의 영약을 지급해드릴 수 있을 거 같은데, 혹시 저와 거래하실 생각 있으십니까?”
“흐음…….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으니, 되려 차분해지는구만.”
“믿기시지 않겠지만-”
“-아냐, 말 자체가 놀랍긴 해도, 안 믿는 건 아니야. 다른 놈이라면 개소리라고 무시했을 텐데, 너니까 이상하게 믿음이 생기네.”
진심. 올리버가 답했다.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지 마. 널 믿는 게 아니라, 내 판단을 믿는 거니……. 그보다 난 네가 나한테 뭘 원하는지 신경 쓰이는구만, 이렇게 따로 불러 거래를 제안 하는 걸 보니 돈 이상의 것을 원하는 거 같은데.”
“아, 맞습니다. 역시 똑똑하시군요.”
“아부는 됐다고 그랬어……. 내게 원하는 거나 말해봐.”
경계심을 세우는 에디스. 올리버가 말했다.
“대답을 마저 듣고 싶습니다.”
에디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의문을 빛냈다.
"대답이라니? 무슨 대답?”
“옛날 이곳에서 제가 에디스 님에게 여쭤보지 않았습니까? 제인 아가씨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말입니다……. 기억 안 나십니까?”
“……기억나. 그리고 넌 자발적인 대답을 듣는 게 좋다며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했지.”
“지금이 그 자발적인 순간이 아닐까 합니다.”
"너 미친놈이냐?”
“죄송합니다. 미치진 않았고,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에디스 님이 살아계실 때 대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아서요.”
“제정신이 아니구만. 그 대단한 약을 가지고 그따위 질문이나 하다니……. 너 그 약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 줄 아나?”
“가치는 모르고 효능은 대충 압니다. 남성에게는 건강과 정력을, 여성에게는 젊음의 축복을 주는 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대로 알고 있네. 그건 단순히 잘 드는 약이 아니야……. 남은 평생을 돈 문제에서 해방해주고, 누구에게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 주는 기적의 약이야. 그런데, 그런 약을 고작 내가 제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기 위해 쓰겠다고?”
“네."
몰리버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너무나도 단호해 에디스는 뭐라 따지지도 못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올리버는 보통 사람과 사고방식이 너무 다른 거 같았다.
무서울 정도로 말이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군. 정말로 말이야.”
“개인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돈도 좋긴 하지만, 돈은 다른 수단으로 벌 수 있는 데 반해, 제 궁금증은 에디스 님만 채워줄 수 있거든요.”
“내가 제인을 어찌 생각하는지 도대체 왜 알고 싶은 거지?”
“음…….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기묘한 감정이라서요?”
"뭐?"
올리버는 양손을 깍지 끼며 에디스를 바라봤다. 예술품을 감상하듯 두 눈이 기이하게 빛났다.
“제인을 향한 에디스 님의 감정은 참으로 기묘합니다. 처음에는 제인 아가씨를 좋아해 유산을 물려주려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더군요.”
“당연하지. 그년은 날 시체로 여기는 내 마누라와 자식새끼들의 코에 코뚜레를 하기 위한 미끼에-”
“-그래서 전 에디스 님이 제인 아가씨를 싫어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또 그게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좋다, 싫다를 떠나 아주 복잡한 감정이었습니다. 증오와 애정. 죄책감과 자부심 등 서로 반대되는 감정이 혼합되어 있더군요……. 제인 아가씨께 독설을 뱉은 것도 그거 때문이지요? 싫기도 하지만, 강하게 살아가라고?”
“이상한 소설이라도 읽었나 보군. 그따위-”
"-에디스 님. 질문에 답하지 않으셔도 되지만, 거짓말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슬프거든요.”
무례하게 말을 끊었음에도 에디스는 올리버의 기운에 압도돼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분명, 허술하고 물렁해 보이는 놈이었는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오싹함마저 느껴졌다.
투기판에서 살아온 자신조차 기가 죽을 만큼 말이다.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만약,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어떡할 생각이지?”
“……대답하지 않으실 건가요?”
“그럴까 생각 중이지.”
“음……. 그러면 곤란한데요. 사실, 거기까지 생각을 안 해봤거든요.”
“……너 진짜 미친 새끼냐?”
에디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지만, 사실이었다.
올리버는 에디스를 세 번이나 봤고, 그가 얼마나 생에 집착하는지 알고 있었다.
생명 연장을 위해 피로 만든 약을 먹는 게 그 증거.
그렇기에 에디스가 자신의 제안을 수락할 거라 생각했고, 그 반대 경우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거절하려고 했다.
좀 혼란스러웠다.
“음……. 확인차 여쭤보는 건데, 정말 이야기 안 하실 생각입니까?”
“내가 추하게 생에 집착하긴 해도, 자존심도 센 편이거든. 내 자식뻘 되는 애새끼가 협박한다고 씨불여줄 생각은 없어."
허세가 아닌 진심.
그는 자신의 자존심을 생명 이상으로 소중히 여겼고, 동시에 제인에 관한 감정을 이야기하기 싫어했다.
죽는 것보다 더 말이다. 각오가 아주 단단했다.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그냥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