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 초대받은 연구소 (2) >
[시, 실망시켜 미안하오. 마더 바토리. 교수 대리로 온 떨거지라 크게 신경 안 썼는데, 놈이 무슨 수를 쓴 건지….. 정말, 미안하오.]
수화기 너머로 불안해하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남자의 목소리로 위엄을 지키려고 무던히 애썼지만, 그럼에도 초조함을 숨기진 못했다.
하-! 남자들이란….. 마더 바토리는 경멸감을 숨기지 않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홀 씨. 그럴 수도 있죠. 사람이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이, 이해해줘서 고맙소. 진심이오.”
"다만, 최근 물량이 부족한 관계로 저 역시 홀 씨께 실수할 거 같은데.…. 이해하시죠?”
"무, 뭐?! 잠깐 그게 무슨 말이오…? 마더 바토리?! 마더 바토리!!”
수화기 너머로 애절하다 못해 천박한 고함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마더 바토리는 가볍게 무시하곤 자신의 딸에게 수화기를 건넸다.
딸은 수화기를 받자마자 통신장치에 올려 끊어버렸다.
뚝하는 소리와 함께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소음이 사라지며 주변에 고요함이 퍼졌다.
만족스러웠다.
마더 바토리는 뜨뜻한 피로 채운 욕조에 몸을 담그며 참으로 추하다는 생각을 했다.
다 크다 못해 늙은 남자가 어린애처럼 떼를 쓰다니.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삼백 년간 늙은이들이 얼마나 생에 집착하는지 수도 없이 봐왔으니.
늙으면 지혜로워지고 생에 초연한 듯했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사람이란 늙을수록 어리석어지며, 생에 집착했다. 갓 태어난 핏덩어리들보다 더 말이다.
"흥....."
마더 바토리는 욕조에서 일어났다. 그와 함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대리석 같은 피부가 드러났다.
이질감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우윳빛 피부는 잡티 하나 찾을 수 없었고,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와 어우러져 소름 끼치면서도 매혹적인 자태를 뽐냈다.
“내 딸들아.”
인두겁을 뒤집어쓴 사십 명 남짓의 여성들과 혈마법으로 탄생시킨 피노예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피를 매개로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좀비들.
찰박. 찰박.
마더 바토리가 피 욕조에서 나왔다.
그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피와 몸 주변에 남은 피가 생명을 얻은 듯 움직이며, 붉은색 드레스로 변했다.
"보아하니, 비비안 혼자서 손님을 데려오기 힘든 것 같구나.…. 엄마를 위해 자매를 도와서 손님을 데려와 줄 수 있겠니?”
"알겠습니다. 어머니.”
인두겁을 뒤집어쓴 사십 명의 남짓의 딸들이 일제히 대답하며 기형적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사라졌다.
피노예들도. 모두가 사라진 후 마더 바토리는 고개를 돌려 영상 속에 나온 두 남자를 바라봤다.
어둠 속 기습에도 선전하는 두 남자를.
***
팍-! 소리와 함께 꺼진 전구.
그로 인해 안 그래도 어두웠던 연구실 복도는 완전한 어둠에 삼켜졌다.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방에서 다가오는 살기와 짐승 소리뿐.
보통 사람이라면 혼란에 빠져 대응도 못 하고 당할 기습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말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바다는 일렁이며, 짐승 소리와 쇳소리가 뒤섞여 울리더니, 이윽고 불붙는 소리가 났다.
공기를 태우는 강렬한 소리가 말이다.
화르르르륵一!!
그와 함께 어둠이 걷히며 그 빈자리를 흉흉한 붉은빛이 차지했다.
윌레스가 축소마법으로 숨긴 장검을 꺼내 불을 붙인 것.
강렬한 화염은 그 존재만으로 상대의 눈을 멀게 했고, 적을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그것이 부수적인 것뿐, 끝이 아니었다.
화염의 진짜 위력은 윌레스가 칼날을 휘두르는 순간 발현됐다.
불붙은 칼날이 살아있는 좀비는 베자, 좀비는 버터처럼 토막 나는 동시에 재가 됐다. 압축된 화력에 순식간에 불타버린 것.
아직까지 마법사의 평균 수준을 파악하지 못한 올리버였지만, 저게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사람의 육체를 순식간에 재로 만드는 엄청난 화력을 내고, 그와 동시에 화력을 칼날 주변으로 한정시키다니 .
방대한 마력량과 뛰어난 마력 통제 능력 모두를 갖춰져야지만 가능한 기술이었다.
개인 생각이지만, 케빈과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마법 실력 못지않게 대단한 것이 더 있었다. 바로, 전투 센스와 검술 실력으로.
보통의 마법사라면 화염을 통제하는 것만으로 벅찰 텐데, 윌레스는 그와 동시에 몸 전체에서 마력을 뿜어 적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놀라운 검술 실력을 발휘해 적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했다.
대부분 적들이 두 합을 겨루지 못하고 재로 변한 것이 그 증거.
조에게서 나름대로 근접 전투를 배웠기에 올리버는 저 검술이 얼마나 군더더기가 없고, 효율적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 덕분일까?
올리버는 톤파로 방어만 해도 적들이 하나둘 쓰러지며 전황이 유리하게 기울어졌다.
'그건 그렇고 이분들 신기하네. 도대체 뭐지? 이건 아무리 봐도 좀비인데?’
올리버가 목이 부러졌음에도 덤비는 적을 보며 생각했다.
흑마법의 기운에 잠식당했지만, 생명력이 산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있고, 감정 역시 희미하게 있어 조작계열 흑마법에 당한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제아무리 조작계열에 당했다 해도 인체구조는 거스를 수 없어 목이 부러지면 죽거나, 최소한 움직이지 못해야 마땅한데, 이들은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사납게 덤볐다.
이건 아무리 봐도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이미 죽은 시체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었다.
‘근데, 생명력과 감정이 있다. 뭐지? 신기해.’
올리버가 마력 사슬을 사용해 산채로 포획하려는 순간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던 레나가 움직였다.
단순한 안내역으로 위장하던 그녀는 몸 안에 숨겨놨던 대량의 마력을 폭발시켜 그 힘으로 올리버에게 단숨에 접근했다.
"일단, 너부터..…!”
[플래시(Flash)]
레나는 올리버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는 그 순간 올리버가 먼저 마법을 발동시켜 강렬한 빛을 발산했다.
그저 강렬한 빛으로 물리적 타격은 줄 수 없었으나, 시신경은 자극할 수 있었기에 방심한 레나는 뻗은 손을 회수해 자기 두 눈을 뒤늦게 가렸다.
“꺄아아아악! 내 눈….!”
“많이 눈부시나보구나….. 다행이다.”
마법을 쓰는 타이밍에 맞춰 눈을 가린 올리버가 솔직히 말했다.
딱히 악의가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레나는 그 말에 약이 올랐는지, 뜨지도 못한 눈으로 팔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이런 빌어먹을 놈이! 내 손으로一윽!!”
레나가 팔을 휘두르는 그때, 나머지 적들을 다 처리한 윌레스가 달려들었다.
눈을 비벼 시력을 약간 회복한 레나는 불타는 검을 들고 돌진해 오는 윌레스를 보곤 특유의 민첩한 움직임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로 인해 윌레스의 칼날은 레나를 몸통을 베지 못하고 허공을 아슬아슬하게 갈랐다. 아무런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크윽…!”
윌레스의 칼날이 레나의 팔을 벴다.
레나의 팔은 베인 단면도를 시작으로 불 타들어 갔으며, 레나는 마력을 집중시켜 강력한 화염에 저항해 불을 끄려고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크게 불타올랐다. 몸 전제를 삼킬 기세로 말이다.
레나는 꺼지지 않는 불을 보고 무엇인가를 깨달으며, 스스로 어깨 아랫부분을 뜯어내 화염을 몸에서 떨쳐냈다.
촤악-!
팔이 떨어짐과 동시에 뿜어지는 피. 그러나 피는 스스로 혈관 형태로 뭉쳐 새로운 팔을 형성하더니, 이윽고 뼈와 살을 생성했다.
상당히 진귀한 광경이었지만, 윌레스는 놀라지 않고 차분히 바라봤다.
“흑마법사치고는 눈치가 빠르네. 조금만 늦었어도 온몸이 불탔을 텐데.”
올리버는 윌레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윌레스가 사용하는 화염은 그냥 강력한 화염이 아니었다.
화력 역시 상당했지만, 그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화염이 불타는 원리였다.
일반적인 화염마법은 술사가 마력을 주입하는 형태를 취했건만, 윌레스가 사용하는 화염은 술식을 기형적으로 뒤틀어 스스로 마력을 흡수하게끔 설계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마력을 이용해 화염을 잠재우려해도 화염은 쉽사리 꺼지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더욱 불태운 거였다.
성질만 놓고 보면 불보다 독에 더 가까웠다.
‘아니면, 내 탐화(貪火)나. 어찌 됐건 대단하네.’
올리버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술사가 화염에 주입하는 것이 아닌, 화염이 스스로 연료를 빼앗게끔 설계한 이 술식은 얼핏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주체가 술사가 아닌 화염으로 설정되어 있어, 통제하기 훨씬 어려웠으며, 만약 술사의 능력 부족으로 화염이 통제에서 벗어나면 일반적인 화염 마법보다 몇 배는 더 위험했다.
통제력을 잃은 화염이 술사까지 집어삼킬 수 있었으니. 즉, 살상력을 비약적으로 늘린 대신, 리스크 역시 그만큼 커지는 방식이었다.
‘저렇게까지 힘을 강화한 이유가 있나?’
올리버가 의문을 가진 사이, 팔이 새로 돋아난 레나가 윌레스에게 말했다.
“너도 보통 해결사가 아닌가 보다?”
“도마뱀 꼬리처럼 신체를 재생하는 걸 보니 너 역시 보통 흑마법사는 아닌가 보군.…. 피를 매개로라, 바토리 패밀리냐?”
바토리 패밀리. 올리버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으나, 윌레스의 감정 상태로 볼 때 쉬운 상대 같지는 않았다.
올리버는 대답을 듣기 위해 레나를 봤고, 레나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흑마법사라고 생각해?”
“아니, 악마에게 영혼을 판 더러운 흑마법사라고 생각하지. 소문은 들었는데, 이렇게 만날 줄이야. 반가워. 마법사들 연구자료를 훔치려고 기어들어 왔나?”
경멸감이 깃든 윌레스의 말에 레나는 비웃을 뿐이었다.
"킥. 킥.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라이트닝 체인(Lightning Chain)]”
레나가 능숙하다 할 정도로 빠르게 마력을 끌어모아 올리버와 윌레스에게 대량의 전격을 날렸다.
검푸른빛 번개가 파도처럼 올리버와 윌레스를 덮쳤지만, 그 기세와 달리 그렇다 할 피해를 주진 못했다.
윌레스는 칼날에 두른 화염마법을 앞세워 전격에 깃든 마력을 연료처럼 집어삼켰고, 올리버 역시 윌레스를 흉내 내 똑같은 방식으로 톤파에 주입한 마력으로 전격 마법을 집어삼켰기 때문이었다.
놀라는 윌레스.
순수한 마력이 깃든 톤파는 올리버의 의지에 따라 전격을 머금었으며, 그뿐 아니라 마력의 성질도 전기로 변했다.
올리버는 그 상태 그대로 톤파를 집어던졌다.
불시의 기습마저 실패한 레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톤파를 피했으나, 바닥에 부딪힌 톤파는 강렬한 스파크를 일으키며 주변에 광범위한 전기를 퍼트렸고,
이를 예상하지 못한 레나는 자신의 전격 마법에 당해 온몸에 화상을 입으며 몸이 경직됐다.
윌레스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접근하는 순간, 레나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깨지며 목걸이 안에 든 피가 허공에 뿌려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윌레스가 멈췄고, 그 사이 소량의 피를 매개로 살덩어리 풍선이 소환됐다.
마치 종기와 같은 살덩어리 풍선들이.
그것들은 부르르르 떨더니 퍽-! 퍽-! 터졌고, 그와 함께 대량의 피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철퍽철퍽 소리를 내며 바닥을 두껍게 덮은 빨간 혈액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피가 물기둥처럼 솟아오르며 그대로 두 명의 여성이 나타났다.
그들은 등장과 동시에 올리버와 윌레스에게 공격 마법을 날렸다.
올리버와 윌레스는 아까 전처럼 무난하게 막았지만, 상대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잠시 신경이 분산된 틈에 레나를 챙긴 그들은 물에 빠지듯, 피웅덩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올리버는 그 모습을 꽤나 인상 깊게 봤다. 마법과 흑마법이 기묘하게 섞인 아주 흥미로운 기교였기에.
파박!
레나가 동료들의 도움으로 사라지자 전구에 다시 불이 들어오며 주변이 밝아졌다.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윌레스에 의해 불타버린 적들의 잿더미와 피웅덩이뿐.
뭔가 정신이 없었지만, 꽤 재밌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친절하시네요. 다시 불을 켜주다니요.”
올리버가 톤파를 회수하고, 쓸만한 시체가 있는지 살펴보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시체는 전부 재가 되어 있었다.
"친절하다고 했나?”
"음….. 예. 다시 불을 켜줬으니까요?”
“방금 우리 죽이려고 했는데?”
"뭔가 사정이 있으니까 그런 것 아닐까요? 뭐가 됐건 지금은 불 켜줘서 고맙네요.”
올리버가 건질 시체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생명력과 감정을 머금은 좀비를 연구해보고 싶었는데 좀 아쉬웠다.
'뭐, 직접 물어보면 되니까.…. 바토리 패밀리라고 했던가?’
"윌 씨. 혹시, 질문하나 할 수 있겠습니까?”
“잘 됐군. 나도 하고 싶은 질문이 있는데, 서로 교환하면 되겠네.”
“저한테요? 뭐죠?”
윌레스가 몸을 돌려 올리버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살의를 품진 않았지만, 확신과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어떻게 흑마법사가 마탑 직원으로 위장 취직할 수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