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문답 (1) >
“그래, 만나서 반갑네. 돈 준다는 이야기 듣고 찾아왔네.”
갑자기 나타난 남성이 연극배우처럼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극을 연기하듯 몸짓 하나하나가 정중하면서도 과시적이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을 본 적 없는 올리버는 어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는데, 때마침 포레스트가 나서주었다.
"데이브. 끼어들어 미안하네만, 스미스 씨는 또 누군가?”
“아…. 제가 사용하는 먹보주머니를 만들어주신 분입니다.”
"자네가 사용하는 먹보주머니라면, 사람 크기만 한 먹보주머니?”
"예, 그리고 저분은 그 스승님이시죠. 제가 만나 뵙고 싶다고 해 편지를 보냈는데, 이리 찾아와 주신 것 같습니다.”
올리버가 손을 뻗어 스미스의 스승을 가리켰다. 스승은 다시 한번 무대에 선 배우처럼 과장되게 인사했다. 아주 밝은 성격의 소유자 같았다.
상황을 얼추 파악한 포레스트는 잠시 생각하더니, 옷을 추스른 후 중개인 포레스트로 되돌아와 정중히 스미스의 스승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스미스 씨의 스승님….. 전 T구역 27번 거리에서 중개인 일을 하는 포레스트라고 합니다. 이리 만나 뵈어서 반갑습니다."
“나도 반갑소. 그리고 그대가 누군지도 알고 있소. 이번에 대박을 터트려 단숨에 란다의 유명인사가 된 포레스트 씨 아니오? 늘그막에 대박을 터트려 참으로 대단하고 부럽소. 역시 남자의 인생은 와인과 같소..…. 하지만 조심하시오. 사람들은 오래된 와인을 따려고 하는 법이거든.”
스미스의 스승은 예의와 무례를 섞어가며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음과 동시에 배우처럼 요란한 손짓을 했다.
조금만 정신을 놓아도 그의 페이스에 휘말릴 듯한 말솜씨와 몸짓.
다행히 포레스트는 그런 것에 휘말릴 만큼 애송이가 아니었고, 올리버는….. 올리버였다.
"초면에 이리 칭찬해주시고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성함을 여쭤볼 수 있겠습니까? 누구누구 스승님이라고 부르긴 너무 길어서요.”
"아, 이런. 내 예의 좀 보게…. 이완 브렘너라고 하오. 온갖 기적의 물건을 만드는 뛰어난 장인인 동시에 콩과 소를 바꾸는 천재적인 협상가. 거기에 위대한 빚쟁이이며, 바다 건너 사막의 땅과 용이 날아다니는 동방, 심지어 쥐가 총을 쏘는 미친 세상과 거인이 사는 하늘나라에도 가본 위대한 방랑자요.”
허풍이 다분하다 못해 거짓으로 점철된 말에 포레스트는 순간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올리버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올리버는 이유가 달랐다. 약간의 거짓말은 있었으나, 이완의 말 대부분은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수많은 여인의 애인이며, 사랑의 전도사이고, 엄청나게 인기 많은 멋쟁이이기도 하오.”
"아, 저건 거짓말입니다.”
올리버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공기는 얼어붙고, 이완의 표정은 순간 구겨졌다.
"와우….. 기껏 도와줬건만 바로 명치를 세게 때리는군. 란다란 곳은 애미애비도 없는 소돔과 고모라 라더니, 아무래도 사실인가 보구만.”
올리버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했다. 그런 뒤 정신없는 머릿속을 정리했다.
궁금한 것도 많고 따져볼 것도 많았지만, 우선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감사 인사였다.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완 님에게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호오..…. 그래도 아주 예의가 없는 건 아니군. 하긴, 소돔에도 롯이 라는 의인이 있긴 했으니, 죄로 얼룩진 이 도시에도 예의 바른 인간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가만히 듣던 올리버가 경전 내용을 떠올리며 포레스트에게 물었다.
“소돔에 롯이라면 분명 자기 두 딸과-”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 자세히 따지지 말지.”
올리버는 포레스트가 말한 대로 말을 아꼈고, 이완은 계속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한번 발동이 걸리자 그의 혀는 계속해 움직여 귀를 어지럽게 하며, 손짓은 눈을 현혹시켰다. 아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차분하게 정신을 가다듬으며 기다리자 이완의 요란한 장광설은 점차 잦아들었으며, 정신 사나운 손짓도 이내 멈췄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포레스트가 예의를 갖춰 말했다.
"이완 님. 저도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질문이 있는 것 같구려. 이 도시 사람들은 부모.자식 간에도 서로를 의심하니 당연한 거지만..…. 궁금한 게 있으시면 말해보시오.”
유쾌하지만 상대를 압박하는 이완. 그러나 포레스트 역시 주눅 들지 않았다.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니 타지에 있다가 방금 란다에 오신 거 같은데, 어떻게 저희를 찾으셨습니까?”
포레스트가 은은한 의심을 빛냈다.
사실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크라임 펌과 정식 계약을 맺고, 개발 반대 위원회로부터 습격을 받은 이 타이밍에 이완이 딱 나타나 도와주는 것은 너무 형편 좋은 이야기였으니.
심지어 방금 개발 반대 위원회와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것도 확인했다.
중개인으로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포레스트의 부탁에 이완은 즐거우면서도 만족스러워하는 감정을 빛냈다.
“음….. 그쪽 입장상 못 할 질문은 아니지. 뭐, 좋소. 대답해 드리겠소. 대신, 조건이 하나 있소. 아주 중요한 조건이지.”
"무엇이신지요?”
“내 대답이 납득되면 맛있는 술이랑 아름다운 아가씨가 있는 곳에 데려가 주시오. 시커먼 남자들이랑 시커먼 도로 위에서 이러는 게 좀 싫거든.”
포레스트가 올리버와 이완, 알, 주변 풍경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동의합니다. 그럼, 란다의 신사들이 대화 나누기 좋은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짝-! 짝-!
이완이 힘차게 손뼉을 두들기며 진실한 기쁨을 빛냈다.
“거참 마음에 드는군.”
***
시간이 지난 후, 개발 반대 위원회에 습격받은 도로 위에 세 대의 자동차가 도착했다.
모두 중개인과 거래하는 업체에서 부른 것으로, 한 대는 리무진, 다른 한 대는 일반 택시, 또 다른 한 대는 거대한 트럭이었다.
포레스트는 차를 끌고 나온 각 사람들에게 적잖은 팁을 쥐여주며 정중히 할 일에 대해 이야기 해줬다.
우선 일반 택시의 경우에는 오늘 많은 일을 겪은 알을 태워 숙소로 보내게 했고, 트럭 운전수는 보조 기계 장치를 이용해 부서진 포레스트의 빈티지 차량을 수거하게 했다.
"내 새끼가 이렇게 갈 줄이야. 정말 슬프군….. 자, 타시겠습니까?”
포레스트가 리무진 뒷좌석을 열며 물었다.
이완은 어깨를 으쓱하곤 함박웃음을 지으며 차에 탔고, 그다음에는 올리버 마지막에는 포레스트가 탔다.
차 안은 올리버가 봐온 차량 중 가장 고급스러웠는데, 놀랍게도 작은 테이블 위로 술병과 잔이 준비되어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완은 이런 차량에 몇 번 타본 듯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더니, 그것도 모자라 시가 박스에서 시가를 꺼내 자연스럽게 피웠다는 거였다.
그가 담배 연기를 뻑뻑 뿜으며 물었다.
"좋은 담배군. 이런 디테일로 수준을 알 수 있지. 좋은 곳과 거래하시는구려.”
“칭찬 감사합니다.”
“어디 가는 건지 물어볼 수 있겠소?”
“O구역 66번 거리로 갑니다.”
"아, 란다의 즐거움 중 하나지. 예전에 자주 들르곤 했소. 지금은 기쁨의 거리로 불리고 있다지?”
"잘 아시는군요.”
“내가 원래 아는 게 많다오. 근데, 요즘에도 괜찮은 가게가 있나?”
"예, 지인이 운영하는 가게인데, 꽤 괜찮은 가게입니다. 비싸지만, 대화 나누기도 좋고요.”
천사의 집..…. 아무래도 포레스트가 말하는 가게는 천사의 집을 이야기하는 거 같았다.
물어서 확인할 수 있겠지만, 올리버는 그보다 더 궁금한 게 있어, 그 질문을 뒤로 미루며 이완을 봤다.
"이완 님. 실례가 안 된다면 다시 한번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뭘.…? 아!”
이완은 기억났다는 듯 자기 망토 안을 뒤적거렸다.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건 더더욱 아니고.”
절그럭절그럭. 이완은 박제한 코, 밀집 인형, 핑크빛 물약 등 온갖 기괴한 기운을 뿜는 물건을 꺼내더니 이윽고 소리 냈다.
"아, 여기 찾았다.”
그것은 손이었다. 육포처럼 말라비틀어진 손.
색은 거무튀튀했으며, 손가락은 나뭇가지처럼 말라 조금만 잘못 만져도 부러질 것 같았다.
손목 부분에는 기분 나쁜 부적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으며, 손바닥에는 칼로 새겨진 흑마법진이 가득 있었다. 가장 압권인 것은 손등에 사람 눈알이 박혀 있었다는 거였다.
"아, 여기 있었군. 이정표.”
이정표. 이완은 자신이 꺼낸 흑마법 아이템을 이정표라고 불렀다.
소유주가 원하는 사람, 물건, 장소가 있는 곳을 가리켜 준다고 말이다.
올리버를 찾게 해준 것이 이 아이템 덕분.
말만 들으면 가히 엄청난 아이템이었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다시 봐도 애물단지야. 기능이 끝내주기는 하는데, 너무 멀리 있으면 무용지물이고, 그렇다고 작동을 잘하냐면 그건 또 아니거든. 자기 내킬 때만 일을 하니. 근데, 이번처럼 잘 작동할 때도 있어 버리기도 애매하지.”
이완이 말하길 흑마법 아이템은 흡사 살아있는 생물처럼 자기 의지가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능이 뛰어날수록 그러한 기질은 더욱 강해진다고 했고.
올리버도 거기에 동의했다. 대표적인 예시로 먹보주머니가 그러했으니.
크기가 커질수록 성능은 향상됐지만, 동시에 자의식이 강해져 저항도 심했으니. 주인을 살해해 삼킬 정도로.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근데, 좀 의외구만.”
이완이 올리버를 대뜸 보며 말했다. 너무 뜬금없어서 올리버가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이완 님.”
“아니, 내가 스미스 놈에게 들은 이야기랑 달라서 말이야. 궁금한 게 있으면 곧잘 질문하는 성격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내가 개발 반대 위원회랑 안면이 있는지, 또 자네가 애써 잡은 시체를 빼앗아 돌려줬는지 묻질 않아서. 이유가 안 궁금해? 듣기로는 송장인형을 다룬다곤 하던데 그럼 시체는 그냥 시체가 아닐 텐데.”
맞는 말이었다. 현재 올리버에게 있어 시체는 꽤나 중요한 노획물이었다. 시체가 강할수록, 귀할수록 더더욱.
"예, 맞습니다.”
"근데, 왜 안 물어보지? 혹시 내가 너무 강해 무섭나?”
"아뇨.”
"씨발, 내가 만만하다는 거야? 내가 누군 줄 알고!”
"아뇨, 아뇨. 전 이완 님이 만만하지 않고 대단한 분이라 생각합니다. 스미스 씨를 가르쳤으니까요….. 그저 물어볼 게 많아 차분히 기다리는 겁니다. 사실, 이완 님께 궁금한 게 많거든요. 원래는 최근에 노획한 흑마법 아이템에 관해서만 묻고 싶었는데, 갑자기 많이 생겼습니다.”
올리버의 말은 사실이었다. 요리사의 부하에게서 노획한 고기로 만들어진 흑마법 아이템에 관해서만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지금 그것 이상으로 이완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개발 반대 위원회에 대해서, 개발 반대 위원회와 어찌 안면이 있는지, 또, 퍼펫이 말한 시계가 움직인다는 이야기에 관해서도 묻고 싶었다.
왠지 눈앞의 남자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궁금한 게 많다라, 나쁜 건 아니지. 다만, 내 입을 여는 건 꽤 비싼데 감당할 수 있겠나? 여기 온 이유도 벗겨먹을 호구가 하나 있다고 해서 온 것인데.”
그 호구란 다름 아닌 올리버.
솔직히 올리버는 상관없었다. 호구라 불리던 말 건. 올리버의 관심사는 궁금증을 해소하는 거였으니.
올리버가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여는 찰나, 포레스트가 끼어들었다.
"최대한 맞춰 드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때마침, 가게도 도착했군요.”
포레스트가 자동차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에는 붉은 지붕에 고풍스러운 직사각형 건물이 비쳤다.
바로, 천사의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