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2. 만남 (1) >
".…이상 브리핑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두컴컴한 육가공 공장 안. 그곳에서 포레스트가 소켓을 끄며 말했다.
소켓은 헤임달에 의뢰해 받은 물건으로, 조 일행의 활약상이 담겨있었다.
단 3명으로 창고를 습격해, 팔십여 명이나 되는 갱단을 압살하는 장면이 말이다.
"......."
"......."
"......."
"......."
포레스트 맞은편 기다란 테이블에 앉은 23명의 사람은 모두 침묵했다.
이들은 크라임 펌의 이사 혹은 그 대리인으로, 란다 뒷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들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긴장감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터였으나,
포레스트는 연륜과 성과를 바탕으로 기죽지 않고 여유롭게 그들을 상대했다.
크라임 펌에서도 껄끄러워하던 문제를 흑마법사 단 세 명으로 해결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뒷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들은 다들 뭐라 쉽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포레스트는 본능적으로 만족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거래가 마음에 들면 포커페이스를 유지해 반응을 숨기고, 마음에 안 들면 무자비하게 헐뜯어 후려치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그렇기에 포레스트도 먼저 입을 열지 않고 침묵해 그들의 방식대로 협상에 응해줬다.
잠시 후, 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큰 코에 큰 귀를 가진 남자로, 이곳 W구역의 이사였다.
겉으로는 육류가공업체와 세탁공장을 운영하는 건실한 사업가지만, 주 본업은 돈세탁이었다. 근래에는 도박 사업에도 투자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질문 하나 해도 되겠소?”
"편히 말씀해주시죠.”
"왜 세 명만 파견한 것이오? 아, 그러니까. 대단하긴 해. 단 3명으로 갱단 하나를 말아먹었으니…. 그렇지만 저 3명으로 삼백 명이 넘는 파이터 크루를 대변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아닌 말로 3명만 뛰어난 거고 나머지는 별 볼 일 없을 수 있었으니.
이런 더러운 거래 방식은 뒷세계에서 횡횡했기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우선 질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훌륭하신 질문입니다.”
포레스트는 능숙하게 고객의 비위를 맞춰줬다. 이것도 서비스업이었으니.
하지만, 특수한 서비스업. 포레스트는 곧바로 고객의 의견을 매섭게 반박했다.
"다만, 몇 가지 정정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우선, 파이터 크루의 멤버는 300명 이상이 아닌 288명입니다. 요리사 시절 때는 300명이 넘었지만, 소란을 겪는 와중 줄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웃었다.
"두 번째는 3명만 파견한 이유에 관해서입니다. 저 위험한 곳에 단 3명만 파견한 이유는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게 가장 적당한 인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적당한 인원이라고요? 3명이?”
다른 이사가 물었다.
여성으로 날카로운 눈매에 붉은 양복, 쇼트커트가 특징이었다.
"예, 그렇습니다. 현재 크라임 펌에는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친구들이 필요한 거지, 우르르 몰려가 다 때려 부수는 왈패를 원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단, 3명만 보낸 것뿐입니다. 비용을 아낄 수 있고, 움직이기 편하며, 쓸데없는 시선도 덜 받지요.”
합리적인 발언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소수 병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가장 깔끔한 법이었으니.
"나도 질문있소….. 그렇다면 파이터 크루의 평균 실력이 방금 영상에서 나온 3명 수준이라는 것이오?”
"그건 아닙니다. 저 친구들은 새로 개편한 파이터 크루의 간부들로, 상위권 실력자입니다. 저 정도 실력을 가진 친구들은 저들을 포함해 서른여섯 명뿐입니다.”
"한자리 수까지..…. 숫자가 구체적이구려.”
"일을 맡은 사람으로 최선을 다하려는 것뿐입니다. 관리해야 하는 사람 수와 상세 정보도 모르고 어찌 일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이사들 중 몇몇이 희미한 감탄, 만족을 빛을 빛냈다.
"그 말은 즉 파이터 크루 멤버를 전부 알고 있다는 거요?”
"예, 숫자와 특기, 능력, 성향 전부 상세히 파악하고 있습니다.”
포레스트의 말은 허세가 아닌 사실이었다.
올리버가 파이터 크루를 훈련시킬 때마다 포레스트 역시 같이 방문해 그들에 대한 신상정보를 확보했으며, 중개인과 해결사로서의 최소한의 관계를 구축했다.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지만, 포레스트의 인내와 노력이 이를 가능케 해줬다.
"좋소. 다시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포레스트 씨..…. 그렇다면 상위권이 아닌 이들은 어떻소? 36명을 제외한 252명의 파이터 크루원들은 말이오.”
"그들은 단독으로 임무를 맡기 부족합니다. 단, 충분한 팀원을 꾸린다면 간부 못지않은 전력은 될 수 있습니다.”
"증거 있소?”
땅달막하고 심술궂어 보이는 남자가 물었다.
"죄송하지만 당장은 없습니다. 실전을 통한 능력 입증을 원하시는 걸 텐데 현재는 이거 하나뿐입니다. 시간이 촉박해 이 이상은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포레스트의 대답에 심술궂어 보이는 사내가 화를 내려고 하였으나, 상대적으로 젊은 남성이 끼어들어 말렸다.
그는 R구역의 이사이자, 고든 굿하트의 아들인, 고드릭 굿하트였다.
아버지를 뒤를 이어 조직과 이사직을 물려 받은 크라임 펌의 젊은 피.
물론, 젊은 피라 해도, 아버지를 닮은 무뚝뚝한 표정과 노안 탓에 그리 젊어 보이진 않았지만.…. 어쨌건 그가 말했다.
"너무 빡빡하게 그러지 마시죠…. 뭐가 되었든 촉박한 일정에 맞춰 성과를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차후 문제가 생기면 그때 가서 논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현재 이사 중 하나가 옹호하자 투정 부리던 목소리는 쏙 들어갔다.
애당초 진짜 문제가 있어 걸고넘어진 거라기보다는 기 싸움에 더 가까웠으니.
얼추 상황이 정리되자 슬슬 마지막 질문이 나왔다.
놀랍게도 마지막 질문은 R구역의 이사 고드릭 굿하트가 했다.
"란다의 역사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데, X구역의 조직과 크라임 펌이 본격적으로 협력한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신뢰라는 연결 고리가 약해 조금의 압력만 가해져도 끊어지고 마니까요.”
엄연한 사실.
"그들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일이 잘못되면 중개인 역할을 맡으신 포레스트 씨가 가장 큰 피해를 볼 텐데요.”
어찌 보면 협박, 어찌 보면 걱정인 발언에 포레스트가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안심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저보다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게 낫겠군요..... 잠시 도와줄 수 있겠나?”
포레스트가 누군가를 불렀다.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구경하고 있던 올리버였다.
올리버의 등장에 이사와 대리인 그 외 경호원들이 웅성거렸다.
이 반응이 이제 란다에서 올리버의 위치라 할 수 있었다.
혼자서 인육 요리사의 제자를 쓰러뜨리고, 파이터 크루를 굴복시키며, 크라임 펌에 당돌한 제안까지 했으니.
심지어 소문에 따르면 현재 마법주 사업으로 급격히 세를 키운 킴벨 패밀리도 저 해결사의 덕을 많이 봤다고 했다.
공기가 동요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들. 데이브라고 합니다. 만나 봬서 반갑습니다.”
올리버가 포레스트가 서 있던 자리로 와 차분히 인사했다.
젊은 해결사는 예의가 꽤 발랐는데, 그럼에도 이사들은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이득을 꽤 하는 야심가나, 두려움에서 비롯한 겁쟁이의 예의와는 아주 달랐기 때문이었다.
보통 크라임 펌 이사들에게 표하는 존경은 이익과 두려움에 기인 됐는데 말이다.
그러나 눈앞의 젊은 해결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는 특별히 이익을 꾀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즉, 평소의 태도. 다른 의뢰인을 대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실을 구체적이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느낀 이사들은 호기심과 당혹, 불쾌함 등 제각기 다른 감정을 빛내며 눈앞의 젊은 흑마법사를 봤다.
이익도 두려움도 없이 스스로 존경을 표하는 흑마법사라니. 재밌지 않은가?
"그쪽이 데이브요?”
"예.”
"고든에게서 듣길 만약 파이터 크루가 약속을 어기면 그쪽이 책임지고 죽여주겠다고 했는데, 그거 진심이요?”
모두의 눈이 매섭게 빛냈다. 젊은 흑마법사가 자신들에게 거짓말을 한 건지, 아니면 허풍을 부린 건지 알기 위해. 올리버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예, 약속을 어기면요.”
"혼자서 288명의 사람을 죽이겠다는 말이오?”
"예, 약속을 어기면요.”
기계적인 대답.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그렇기에 저 남자가 진심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았다.
흑마법사와 같이 감정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뒷세계에서 살아남은 안목과 감이 그렇다고 알려주었다.
믿기지 않았다. 288명의 사람을 죽이겠다는 대답을 저리 담담히 말하다니.
크라임 펌도 살인을 하나의 업으로 삼고 있지만 이건 같은 차원이 아니었다.
기묘하게 변한 기류를 읽은 건지 올리버는 변명하듯 말했다.
"약속을 어기면 죽이겠다는 겁니다…안 어기면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음.… 따지는 건 아닌데, 288명의 해결사 모두 당신 교육을 받아서 나름 강해진 상태에, 또 앞으로 강해질 텐데, 그런데도 해치울 수 있나? 따지는 건 아니고 진짜 궁금해서.”
이사 대리로 나온 한 젊은이가 올리버의 반응을 보기 위해 일부러 도발하며 말했다.
하지만, 젊은 흑마법사는 발끈하긴커녕 더 충격적인 대답을 했다.
"음.….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도 몇 가지 방법을 생각한 게 있습니다.”
"방법?”
"예, 혹시 모르니까 준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요.”
공기가 무거워졌다.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나?”
"음.… 질병-약화계열 흑마법을 X구역에 살포하는 방법도 있고, 아니면 다른 분들을 한 명씩 죽여 송장인형으로 가공해 부족한 머릿 수를 채우는 방법이 있습니다.”
모두 침묵했다. 저 흉흉한 방법이 허세가 아닌 진심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안 것이다.
다시 한번 싸해지는 분위기. 올리버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러니까 파이터 크루 분들은 크라임 펌과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겁니다..…. 물론, 크라임 펌 이사님들도 약속을 지켜주시리라 믿고요. 혹시, 다른 질문 있습니까?”
질문은 없었다.
***
크라임 펌과 파이터 크루의 계약은 다행히도 무사히 체결됐다.
이로써 파이터 크루는 더 이상 크라임 펌과 싸울 위험이 사라졌고, 동시에 안정적인 일자리도 생겼다.
"그런데, 제가 계속해 흑마법을 가르쳐줘야 하나요?”
포레스트의 차량에 합석한 올리버가 포레스트에게 물었다.
그는 서류를 다시 한번 살펴보며 대답했다.
"아니, 자네가 가르치는 건 크라임 펌이 만족하는 수준까지니, 더 이상은 그럴 필요는 없지….. 혹시, 이사님이 한 말 때문인가?"
올리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약을 체결 후, 한 이사가 올리버에게 다가와 계속 파이터 크루에게 흑마법을 가르쳐주겠다면 거기에 맞게 고액의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마땅한 대답이 없던 올리버는 생각해보겠다고만 말하였다.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정말 파이터 크루를 가르쳐 주길 원한다기보다는 자넬 묶어둘 생각에서 한 말일 테니."
"절요?”
"그래, 그런 연결고리를 만들어 두면 나중에 일 맡기기 훨씬 쉽거든.”
"아.…. 그렇군요.”
올리버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런데 포레스트가 감정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더니 그가 대뜸 입을 열었다.
"자네는 강하네.”
"예?”
"자네는 강하다고. 내가 여태까지 거래해본 해결사 중.…. 아니, 내 어정쩡한 경력을 제외하더라도 란다에서 자넨 이제 강자에 속하네. 어쩌면 조금만 더 있으면 란다를 대표하는 존재가 될지도 모르지.”
"칭찬은 감사하지만, 너무 과하지 않습니까?”
"전혀. 자넨 퍼펫에게서 살아남았고, 인육 요리사의 제자들과도 싸워 이겼네, 심지어 단신으로 파이터 크루를 굴복시키고, 크라임 펌과도 협상했지. 일개 해결사의 신분으로. 이제 와 말하긴 뭣하지만 아주 대단한 거야. 자네는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올리버는 자신이 한 일에 딱히 자랑스러움이나 우월감을 느끼지 않았다.
뭐가 됐건 일이었을 뿐이니까.
"하지만 슬슬 그런 태도는 버리는 게 좋을 거야. 자기 능력에 도취하라는 게 아니야. 그저 자신의 가치와 위치를 파악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고 생각하라는 거지. 안 그랬다간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실컷 이용당할 테니.”
"포레스트 님이 도와주실 테니, 괜찮지 않을까요?”
올리버가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말했다. 실제로, 보수에 관한 문제는 올리버 대신 포레스트가 맡아줬고, 늘 만족할만한 성과를 가져다줬으니. 단순히 돈을 넘어 안전에 관한 것도.
그러나 포레스트의 반응은 달랐다.
"날 그리 믿어줘서 고맙지만, 썩 좋은 태도는 아니네.”
"예?”
"중개인에게 있어 신용은 재산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신용 이상의 이익만 보장해주면 팔 수도 있는 거거든. 중개인은 절대불변의 시스템이 아닌, 일개 장사꾼에 불과하네….. 또, 신용을 지킨다 해도 중개인이 무능해 피해를 줄 수도 있고. 그러니, 너무 누구한테 의지하는 태도는 좋지 않아. 란다에서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니.”
놀랍게도 이 말은 진심이었다. 과거에서 비슷한 조언을 했지만, 그때는 믿음을 주기 위한 타산적인 감정이 주류였던데, 반해, 지금은 올리버를 위하는 이타적인 감정이 주를 이뤘다.
아닌 말로, 지금 이러한 조언은 중개인이란 직업으로 볼 땐 썩 좋은 말이 아니었다.
자기도 너무 믿지 말라는 거였으니. 이익에 부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올리버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올리버가 걱정되기에.
그러자 문득 셰이머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포레스트를 너무 믿지 말라는.
"아, 맞다. 이거 받게.”
포레스트가 갑자기 옆에서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이건 뭐죠?”
"핑크맨 의뢰 경매 물품 회수 대금일세. 자네가 받기로 했던 책과 마법 아이템이야. 반응을 보아하니 잊었나 보군."
"아, 예......”
"안 이야기했으면 꼼짝없이 공으로 일할 뻔했군.”
"죄송합니다. 이제라도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하지.…. 물건 확인해보게.”
올리버가 물건을 확인하려다 말고 갑자기 멈췄다. 그 모습을 본 포레스트가 물었다.
"왜? 무슨 문제 있나?”
"아뇨, 문제는 아니고 뭐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뭐가 궁금하나?”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셰..…응?”
올리버가 말하다 말고 전방에서 무엇인가를 느끼며 앞을 봤다.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모순적인 존재를 말이다.
이윽고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한 존재가 비쳤다.
차를 몰던 알이 놀라며 핸들을 꺾으려고 했다.
"이건 뭔..…!!”
그것은 온몸에 붕대를 두른 사내로, 철판과 같은 거대한 대검을 들고 있었다.
그는 차가 달려옴에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설마......?”
설마는 사실이었다. 차량이 맞부딪히려는 순간 붕대남은 대검을 들더니 그대로 차량을 후려쳤고, 비상식적인 굉음을 내며 차량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오, 깜짝이야.”
올리버가 나지막이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