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견문 (2) >
갑작스러운 마법 시합에 지루해하던 학생들은 모두 관심과 흥미로 눈을 빛냈다.
싸움 구경만큼 재밌는 것도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것도 아그니 소학파에서 이름이 난 수재 데릭 레드힐과 마탑의 이단적 존재인 케빈 던바 개인 직원의 대결이었으니.
사실 다들 아닌 척했지만, 현재 마탑의 관계자들은 군에서 복귀한 케빈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는 홍인(紅人)임에도 불구하고 마탑에 입학해 마스터 직위를 따낸 불편한 천재였으며, 그의 스승은 원소학파의 창시자이자,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아카이브 멀린이었으니.
그렇기에 마탑의 대다수는 그를 못마땅함에도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 여기 있는 학생 몇몇은 스승의 명으로 케빈의 정보나 약점을 캐기 위해 파견된 이들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첫 수업부터 이런 재밌는 일이 일어났으니. 참으로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양쪽 다 올라가라.”
마력으로 훈련실 지형을 조작해 경기장을 만든 케빈이 말했다.
웃옷을 벗고 장갑을 낀 아그니 학파의 수재 데릭 레드힐이 경기장에 올라섰고, 강철봉을 든 올리버가 마력 보충 포션을 마시며 올라섰다.
참고로 강철봉은 훈련실 비품으로 마력전도 강철로 만든 것이었다.
“..…정말 저 혼자 무기를 사용해도 되나요?”
"그 정도는 양보해줘야지 싸움이 성립되지. 그쪽이야말로 괜찮겠어? 자존심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행동인데. 마법 전투 도중에 다치는 사람이 꽤 많아.”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데릭은 우습다는 듯 피식거렸고, 주변의 학생들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은 데릭이 이긴다고 생각을 하며 올리버가 얼마나 버틸지 이야기를 나눴으나, 일부 몇몇은 그래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저러는 게 아니겠냐는 의견도 냈다.
올리버도 한편으론 걱정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하겠다고 대답하긴 했지만, 자신이 이런 식으로 눈에 띄어도 될지 의문이었기에.
그도 그럴 게 올리버는 흑마법사였고, 신분도 위장 신분이지 않은가?
하지만 한편으로는 케빈의 말도 납득이 갔다.
‘좋지 않지. 그래도 차라리 지금 조금 눈에 띄어주는 게 나아. 난 이 마탑에서 나름대로 주목을 받고 있거든.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런 와중에 갑자기 널 데려왔으니, 곧 너에 대해서도 궁금해할 거야. 그러니, 차라리 지금 네 실력을 보여줘 어느 정도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야.”
케빈의 말은 어느 정도 진심이었다.
’근데,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단 말이지.‘
경기장 앞으로 다가온 케빈을 보며 올리버가 생각했다.
"시합 시간은 5분. 한쪽이 항복하거나, 승패가 결정 났다고 판단되면 시합을 중단하겠다. 혹시, 질문 있나?”
"없습니다.”
"없습니다.”
"좋아, 그럼 시합.”
케빈이 그 말과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에 맞춰 경기장 주변에 고밀도의 마력 장벽이 형성되며 안과 밖을 격리했다.
그와 동시에 날아오는 화염탄.
올리버는 고개를 휙. 휙. 가볍게 움직여 피했다.
마력으로 만든 화염탄이 올리버를 맞추지 못하고 마력 장벽에 부딪혀 허무하게 사라졌다.
"오, 기본은 좀 하나 보네.”
화염탄을 순식간에 만들어 쏜 데릭이 손에 마력의 출력을 높이며 말했다. 손에 붙은 불이 더 크게 불타올랐다.
"얼마나 버틸지 보자고.”
***
"이게 뭐야…?”
데릭과 올리버의 시합을 구경하던 한 학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할 정도로 이 시합은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이걸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쪽은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다른 한쪽은 피하기만 하는데?
허나, 더 이상한 건 공격하는 쪽은 점점 초조해지는 데 반해, 피하기만 하는 쪽은 아주 여유가 넘친다는 거였다.
[플레임 샷(Flame Shot)]
[플레어 와이어(Flare Wire)]
[블레이즈(Blaze)]
쏟아지는 화염탄과 불타오르는 철사, 거대한 화염의 파도가 올리버를 덮치려고 했다.
올리버는 그때마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공격을 피하거나, 마력을 주입한 강철봉으로 약한 부분을 휘둘러 상대의 화염을 무력화시켰다. 마치, 공격의 궤도와 약점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올리버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 몰랐지만, 해결사 일을 하며 쌓은 적잖은 강자와의 전투를 통해 올리버의 전투 능력 전반은 몰라보게 향상했다.
처음 란다로 왔을 때와 비교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수준 차이가 나는 사람의 공격은 빤히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본인만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을 뿐.
어쨌건 그렇기에 유효타가 들어간 것은 단 한 개도 없었고, 이 시합은 시합처럼 보이지 않았다.
시합이라기보다는 뭐라고 할까..…. 아, 그래, 좋게 말하면 스승이 제자를 상대해주는 것 같았고, 나쁘게 말하면 어른이 아이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당연한 걸지도.
마스터급인 케빈과 비등한 실력을 발휘한 올리버였으니.
아무리 천재, 수재 소리를 듣는다 해도 학생은 학생. 그 차이는 아이와 어른 수준이었다.
물론, 학생도 일정 이상의 마법을 못 쓴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뭐야? 엄청 강한 건가….?”
"그런 것 치고는 공격을 못 하고 있잖아?”
"안 하는 거 아니야?”
"어쩌면 데릭이 생각보다 그리 강한 게 아닐지도….”
시합이 길어짐에 따라 하나둘 새어 나오는 감상평.
애당초 공개 시합을 벌였을 때, 각오해야 했던 거지만,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데릭은 표정은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케빈의 태도를 보고 나름대로 실력이 있는 것을 예상했지만, 이건 너무 예상 밖이었다.
마법 대 마법으로 맞붙는 거라면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었다.
화염마법 특유의 화력이나 찍어누르거나, 기교로 불태우면 되니. 허나, 눈앞은 상대는 아예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대다수의 공격을 물처럼 흘려보냈으며, 피할 수 없는 공격은 약한 부분을 공격해 파훼해버렸다.
우연히 한번이 아닌 모든 공격을 말이다.
마치 허깨비를 상대하는 기분. 전혀 상대가 안….
그 순간 데릭은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존재가 감히 레드힐 가문의 소속이자, 마탑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자신의 발목을 잡다니.
이건 옳지 못했다.
그와 함께 자신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구경꾼들이 눈에 들어왔다. 개중에 야렐리도 있었다.
의심받고 있었다. 자신의 실력이, 그동안 쌓은 평판이. 그렇기에 보여줘야만 했다. 지금 이 모습을 상쇄할만한 힘을 말이다.
마탑에서는 평가가 곧 생명이었으니.
그렇기에 데릭은 다소 자존심이 상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마법을 추가해 쓰기로 했다.
공기 마법으로 산소의 농도를 조절, 거기에 화염 마법으로 더해 단숨에 고화력의 폭발을 내-
"-좋아 거기까지.”
케빈이 갑자기 난입했다.
그는 손가락을 튕기는 수인 한 번으로 고밀도의 마력 장벽을 해체함과 동시에 데릭이 조절 중이던 산소의 농도를 원래대로 돌려버렸다.
그러한 퍼포먼스는 시합에 집중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큰 인상을 심어줬다.
데릭 역시 예외는 아니었지만, 감정이 격해져 그런지 그는 케빈에게 따졌다.
"아직 시합이 안 끝났습니다. 교수님.”
“미안하지만 끝났네. 5분이 지났거든.”
케빈이 시합 시작과 동시에 작동시킨 시계를 보여줬다.
"하지만-”
"-나도 아그니 학파 출신이라 마법에 관한 열정은 누구보다 이해하지. 그렇다고 예의까지 없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어. 불은 규율에 통제되기에 비로소 불. 날뛰면 재해에 불과하지. 학생은 어느 쪽이지?”
케빈의 정론에 데릭은 물러섰다. 그리곤 올리버에게 예를 갖춰 인사하곤 경기장을 내려갔다. 올리버도 똑같이 인사하고 내려갔다.
경기장에 홀로 남은 케빈. 그는 입을 열었다.
"봤다시피 강력한 화력의 마법을 쓰는 쪽이 훨씬 유리하지. 제논은 데릭에게 제대로 된 공격 한 번을 못했으니.”
학생들이 웅성댔다. 못한 건지 안 한 건지 서로 의견이 갈리던 중 케빈이 인위적으로 답을 내려줬다.
"하지만 쉽게 제압하진 못했지. 바로, 이게 최근의 전투 양상이다. 예로부터 마법사들의 주 역할은 화력이었지만, 거기에 대한 대응법이 생기고 있거든. 난 이번 수업에서 이 부분을 중점으로 가르칠 거다.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는 게 아닌 강해지는 것. 관심 있는 학생만 테스트를 치르도록….. 이제 한 명씩 나와라.”
***
굳이 눈에 띄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데?
뜨거운 차를 마시는 멀린이 창문 밖을 보며 물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눈과 돌산, 매서운 폭풍뿐이었다.
마력 포탈로 멀린의 대저택을 방문한 케빈이 대답했다.
“필요한 일이라 판단돼 그런 것이니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애당초 그 정도 권한은 현장 책임자인 제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그렇고말고. 따질 생각은 없네. 다만, 이유는 궁금하군.”
"아시다시피 전 스승님의 제자입니다. 다들 아닌 척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절 견제하고 있죠. 당연히 제 근처에 있는 사람도 주시할 겁니다.”
"하긴.…. 자넨 직원을 못 데리고 다녔던 것도 있지만, 안 데리고 다닌 거기도 하니.”
"그래서 적당히 데이브를 노출한 겁니다. 작정하고 뒷조사를 하기 전 눈에 띄는 걸 보여줘,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하게요. 제가 키운 제자, 혹은 전쟁터에서 주운 병사 같은 거로요.”
“….영리하군.”
"마탑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래야죠.”
멀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화된 마탑은 단순 교육기관이나 연구실을 넘어 하나의 정치판이 되었으니. 그 중심에 멀린도 있었기에 누구보다 잘 알았다.
"허허.…. 자네도 왕국 사람 다 됐군. 그래.”
“말씀이 과하십니다. 스승님.”
케빈이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멀린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제자의 날 선 대답에 화를 낼 법도 했지만, 멀린은 잠시 침묵하곤 사과했다.
"미안하네. 내 실언을 했어….. 그럼, 다른 이유도 알려주게. 자네가 단순히 그런 이유로 데이브를 드러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솔직히 다른 대응책도 있었을 텐데.”
케빈은 부정하지 않았다.
“..…녀석을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입니다.”
"제대로 관찰하기 위해서라고?”
"예. 전부터 느낀 거지만, 데이브란 그 녀석 아주 이상한 녀석이거든요.”
"나도 느끼네.”
"아뇨,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녀석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감정이 결여돼 있습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감정요. 더 강한 힘에서 오는 자신감과 여유.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우월감과 오만..…. 처음에는 애매했으나, 자기보다 한참 못한 도서관 사서나 다른 직원들을 상대하는 걸 보고 확신이 들었습니다. 놈은 심각하게 결여돼 있습니다.”
“힘에 구애받지 않고 사람을 대하는 거라면 좋은 거 아닌가?”
"그것도 정도라는 게 있죠.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땐 똑같이 싫은 감정을 가져야 하는 게 마땅한데, 녀석은 그런 것마저 없습니다. 그냥 성격이 물렁한 거라 볼 수 있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어떻게?”
"사고 구조가 보통 사람과 다릅니다. 뒤틀렸다고 할 정도로요. 얼핏 문제는 없어 보지만, 글쎄요..…. 스승님도 그러한 점 때문에 저에게 맡기신 것 아닙니까?”
케빈이 추측했고, 멀린은 침묵으로 동의의 뜻을 내비쳤다.
"그렇기에 일부러 노출 시킨 겁니다. 그럼, 여러 상황에 부닥칠 테고, 그만큼 자극이 가겠죠. 자극이 가는 만큼 다양한 반응이 나올 테고요. 실험의 기본이죠.”
"자네가 이렇게 날 열심히 도와줄 줄은 몰랐군.”
"저도 점점 녀석이 뭔지 궁금해지거든요. 가만 생각해보니 이상합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존재만으로 정령을 겁먹게 하는 게 말이 됩니까?”
“그걸 알기 위해 내가 이러고 있는거지. 내일부터 관찰해서 내게 정보를 주게.”
"아, 그건 힘들 거 같습니다.”
"왜?”
"또 휴가 신청했거든요. 일이 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