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견문 (1) >
스미스가 자신의 스승에게 편지를 보낸 후 시간은 계속해 흘렀다.
스미스는 올리버에게서 받은 개업선물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인지, 딘클리지의 체육관 회원들에게 흑마법 아이템을 팔며 새로운 터전에 적응해갔고,
파이터 크루 사람들 역시 하나둘 가공된 감정이 아닌 평범한 감정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특히, 조를 비롯한 간부들은 자신들이 집중적으로 수련해야 할 흑마법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구체적인 전투 스타일을 갖춰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포레스트는 이 정도면 순조롭다고 했다.
조만간 있을 크라임 펌과의 회담에서도 좋은 결과를 낼 정도로 말이다.
'물론, 보여줘야 믿는 사람들도 있으니 테스트는 치러야겠지만.’
테스트. 처음 듣는 이야기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한 건 아니었다.
크라임 펌과 파이터 크루의 계약이 정식으로 체결되면 파이터 크루는 무력을, 크라임 펌은 적잖은 금액을 지급해야 했으니.
제품의 성능을 확인해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욕구이자, 권리였다.
문제 될 건 전혀 없었다. 올리버가 해야 할 일 역시 변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 파이터 크루 멤버들에게 흑마법을 가르치는 것.
아, 물론 그것만 신경 써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상 수업을 마친다.”
벽을 가득 메운 칠판. 그리고 그 칠판을 가득 메운 각종 술식과 마법 이론을 써 내린 케빈이 손에 묻은 분필 가루를 털어내며 말했다.
분명, 귀동냥으로 듣길 학기 첫 수업은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끝낸다고 하였는데, 케빈은 그리할 생각이 전혀 없는지, 형식적인 자기 소개를 하곤 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그것도 꽤 빡빡하게.
덕분에 필기도구도 챙겨 오지 못한 소수의 학생은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고, 필기도구를 챙겨 온 성실한 학생들도 따라가기 급급했다.
눈에 신경을 집중 안 해도 그들이 느낀 당혹감과 후회를 엿볼 수 있었다.
들릴 듯 말 듯 낮게 울리는 불평불만들이 그 증거.
개중에 케빈의 피부색을 언급하며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도 있었다. 물론 절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말했지만.
올리버는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케빈의 수업 내용이 빡빡한 건 맞았지만, 올리버가 들어본 강의 중 가장 훌륭했다.
최소한 조셉과 멀린에 비해서는 말이다.
흑마법 스승인 조셉은 수업 자체를 잘 해주지 않았을 뿐더러, 늘 최소한의 지식 이상은 가르쳐주지 않았고,
멀린의 경우에는 자신이 수업을 주도하지 않고, 올리버의 자습을 바탕으로 그 빈틈만 메꿔줄 뿐이었다.
그에 반해 케빈의 [화염 마법 개론과 기초] 강의는 빡빡할지언정 군살을 빼고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줘 효율적인 동시에, 일정 부분을 다각도로 보게 해줘 지식의 범위를 높여줬다.
가령, 원소학파의 모든 마법이 하나의 기초 술식을 바탕으로 하는 점을 짚어줘 기초의 중요함을 설파하는가 하면,
이점을 이용해 다른 성질의 원소마법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는 거였다.
말하는 당사자부터가 화염 마법과 대지 마법을 사용했으니 상당히 설득력 높은 이론이었다.
‘거기에 순수마력 학파 마법도.’
과거 케빈과의 전투를 떠올리며 올리버가 생각했다.
그는 거대한 돌기둥을 매개로 거대한 마력망을 형성해 외부와 내부를 분리한 적 있었다.
그건 순수마력 학파의 기술이 가미된 것.
문득, 케빈은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마법을 다루는 건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멀린의 제자라 그런 걸지도.
어쨌건, 케빈은 술식을 기초로 다양한 성질의 마법을 알려주며, 기초적인 적용법을 칠판에 적어 친절히 알려주었다.
하나하나 흥미로워 불평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건만, 이상하게도 학생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케빈도 이 점을 인지한 것 같았고.
복도를 걸으며 그가 물었다.
"학생들 반응은 어땠어? 수업 말이야.”
올리버는 솔직히 대답했다.
"좋게 보지 않는 분들이 좀 계셨습니다. 한 절반 정도요.”
"오, 대단하네. 절반밖에 안 그렇다니.”
"예?”
의외의 대답에 올리버가 되물었다.
"대단하다고,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게. 더 있을 줄 알았거든.”
올리버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자, 케빈이 추가로 설명해줬다.
"마탑도 나름대로 역사가 쌓이고, 규모도 커져 군살이 붙을 수밖에 없거든. 이곳에서 진짜 실력을 쌓으려는 놈들보다 성적과 이름값만 얻어가려는 놈들도 많아.”
아..….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멀린이 이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높이는 가르침을 받으려는 놈보다 학점을 잘 받아 성적 관리하려는 놈들이 더 많아지는 추세지. 진정한 교육이 아닌, 그저 성적 쌓기용. 마탑의 거대화와 관료주의의 폐해지. 인원수가 부족해지면 폐강할 생각이었는데,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겠군. 수업 예산은 조금 깎이겠지만.”
케빈의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열심히 가르치려고 했으나 따라올 자가 없으면 기꺼이 다 버릴 생각이었다. 성실하고, 동시에 엄했다.
"넌 어땠나? 내 수업?”
"저 말씀입니까?”
"그래, 여기서 일하는 이유가 수업을 듣기 위해서잖아?”
맞는 말이었다. 마탑의 도서관 사용과 수업 청강이 올리버가 마탑에 들어온 가장 큰 이유였다
실제로도 이미 다른 수업에 찾아가 일을 도와주는 대가로 청강을 하고 있었다.
물론, 쫓겨나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개인적으로 흥미로웠습니다. 교수님의 강의요. 원소마법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기본 술식을 토대로 마법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방식은 아주 감탄스러웠습니다.”
이미 자유자재로 마법의 성질을 변형하는 올리버였지만, 그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올리버가 다른 성질의 마법을 다룬 것은 보고 그대로 흉내 내 사용한 것에 불과했다.
즉, 중간과정이 없다는 것.
감각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머릿속으로 정립된 것은 아니었기에 이런 사실을 아는 것 자체가 올리버에게 있어 큰 배움이며 기쁨이었다.
"좋은 태도야. 재능만 믿고 안주하는 건 진정한 천재가 아니야. 재능을 갈고닦는 게 진짜지.…. 앞으로 수업 내용을 공유할 테니, 미리 공부하고, 필요한 준비물을 준비해둬.”
"예, 알겠습니다….. 교수님. 말씀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제가 다음 수업을 준비하러 가도 괜찮겠습니까?”
"다음 수업? 아..…. 마법 전투 기초.”
"예, 2시간 뒤면 시작인데, 미리 테스트용 샌드백을 설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는 작업이라서요."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고, 올리버는 감사를 표하며 바로 수업 준비를 위해 움직였다.
***
끼릭끼릭끼릭.
올리버는 비품관리실에서 받아 온 마법 샌드백을 바닥에 설치했다.
나사를 조여 마력 샌드백을 고정한 후 올리버는 샌드백 하단부에 나 있는 선을 가져와 훈련장 구석에 배치된 코드에 끼웠다.
원소학파 타워 전체에 마력을 공급하는 공급망 중 하나로, 연결을 마치자마자 줄을 타고 마력이 샌드백에 공급되는 게 두 눈에 보였다. 올리버는 작동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샌드백을 작동시켰다.
그러자 줄을 타고 공급된 마력이 지정된 술식에 맞춰 움직이더니, 이윽고 사람 모형의 더미로 마력이 구체적인 형태를 이뤘다.
다시 봐도 참으로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다.
그냥 평범한 샌드백을 써도 될 텐데, 조금이라도 더 효과적인 훈련을 위해 이런 걸 만들다니.
고작 마력으로 작동하는 물건에 과한 표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미 이 샌드백의 성능을 본 올리버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케빈의 수업이 없는 날, 다른 교수의 수업을 찾아다녀 잡일을 도와주어 이 샌드백의 구체적인 용도를 알 수 있었는데,
단순히 마력으로 이뤄진 더미가 아닌 실제 공격의 피해를 재현하는 엄청난 물건이었다.
생명 학파와 마법공학 학파가 합작해 만든 것으로, 덕분에 마법의 구체적인 위력과 효과를 알아내며, 술사의 실력을 구체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설치 완료…..”
샌드백을 끄며 올리버가 말했다. 그리고선 다른 비품을 확인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구급키트와 소화기 정도였지만.
마법 전투 훈련은 실험 실습과 연금술 못지않게 사고가 많이나 늘 준비가 철저해야 했다.
"소화기는 새 걸로 받아 올까?”
올리버가 안에 든 마력량이 애매한 소화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비품관리실 사람들이 올리버를 좋아하지 않아서 가면 약간 눈치를 봐야 했지만, 준비는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누가 아는가? 첫날부터 무슨 사고가 날지.
그렇게 생각하던 중 감정이 다가오는 게 느껴지며 올리버가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훈련실로 들어온 야렐리 아이스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오셨습니까?”
올리버가 평범하게 인사했다.
***
야렐리가 도착하고, 몇 분이 지나자 다른 수강생들 역시 하나둘 들어왔다.
사람들의 종류는 꽤 다양했다. 육체적, 심리적으로.
양질의 마력을 지닌 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되는 자들도 있었고, 수업에 호기심을 가지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냥 불만인 사람도 있었다.
“젠장, 강의만 제때 넣었어도 이런 수업 안 와도 됐을 텐데.”
"좋게 생각해. 얼음공주도 여기 있는 걸 보니, 꽤 괜찮은 수업일지 누가 알아? 봐봐. 거기다 데릭 레드힐도 있네.”
올리버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야렐리와 데릭 레드힐이란 남자를 봤다.
우연의 일치인지 데릭 레드힐이란 사람 역시 올리버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도서관에서 올리버와 책을 두고 몇 마디 말을 나눈 적발 남성.
그는 전에 봤을 때처럼 의기양양한 감정과 함께 힘이 넘치는 마력을 몸 안에 품고 있었다.
야렐리와 함께 상당한 실력일 것으로 예상. 그리고 그런 자들 몇몇이 더 눈에 들어왔다.
단순히 수업을 듣는 것 외에 다른 속셈이 있는 거 같았지만 말이다.
끼익......
수업 시간 5분을 남기고 흑발에 붉은 피부를 가진 케빈이 들어왔다.
그와 함께 공기는 변했다.
이게 보통의 반응이었다. 일부 학생 몇몇은 케빈의 피부색을 언급하며, 교수로서의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막상 케빈을 직접 보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긴장하며 얼어붙었다.
케빈이 쌓은 높은 학식과 종군마법사로서의 풍부한 경험, 특유의 엄한 성품 등이 한데 어우러져 몸 밖으로 나와 주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이미 앞선 두 개의 수업에서 봤기에 올리버에겐 익숙한 광경이었다.
뚜벅. 뚜벅. 뚜벅.
탁 트인 마법 전투 훈련실. 케빈이 학생들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와 침묵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모두 만나서 반갑다. 원소학파의 마스터이자, 교수인 케빈 던바라 한다. 이번 학기 [마법 전투 기초]를 맡게 되었다.”
케빈은 다른 교수들과 달리 확성기를 쓰지 않고 목소리에 마력만 담아 말했다.
그럼에도 목소리는 더 선명하고, 육중해, 기분 좋은 긴장감을 유발했다.
"거두절미하고 바로 테스트부터 치르도록 하겠다. 우선 학생들의 수준을 파악하고 싶으니, 한 명씩 나와 소속 학파 혹은 소학파를 이야기하고 샌드백에 마법을 사용해라..…. 거기 손든 학생, 말해보게.”
"무슨 마법을 써야 합니까? 교수님.”
"좋은 질문이군. 각자 자신 있는 마법을 쓰면 된다. 그걸 바탕으로 각 수준에 맞는 교육을 진행할 예정이다.”
학생들은 그 말에 호기심을 보였다.
학생을 수업에 맞추려는 게 아닌, 수업을 학생에 맞추겠다는 거였으니.
꽤나 이례적인 방식이었지만, 이게 가장 효과적인 교육법이라고 케빈은 주장했다.
실기가 대다수인 마법 전투 수업은 학생과 수업의 수준 차이가 심할 경우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하였으니.
즉, 이 첫 수업이 앞으로의 수업을 결정짓는 첫 단추.
구석에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던 올리버는 마법 가방에서 평가지를 꺼내 작성할 준비를 했다.
"저기 교수님.”
적발의 남성, 데릭 레드힐이 손을 들었다.
"그래, 학생. 첫 번째로 할 생각인가?”
"예, 다만 그전에 질문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질문이라….. 뭐지?”
"왜 저 사람이 평가 준비를 하는 거죠?”
데릭이 훈련실 구석에서 평가지와 펜을 든 올리버를 가리켰다.
다른 학생들이 데릭의 손가락을 따라 올리버를 봤다.
평가 준비를 하는 올리버를 보고 모두 눈살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빛냈다.
"무슨 문제 있나?”
"정식 마탑 소속도 아닌 사람이 저희를 평가한다는 게 잘 이해가 안 돼서요.”
"걱정 말게. 저 직원의 평가는 참고 자료로만 삼고, 나도 평가를 따로 내릴 테니.”
"죄송하지만, 교수님. 중요한 건 저 사람이 평가한다는 사실입니다.”
데릭의 감정에는 고고하면서도 오만한 자부심이 빛났다.
자신에게 자부심을 가진 사람을 적잖게 봐왔지만, 데릭의 경우에는 그 수준이 남달랐다.
올리버를 전혀 인정하지 못할 만큼.
흥미로운 점은 다른 이들 역시 그러한 감정에 동의의 뜻을 내비치며 수업에 불만을 표시했다는 거였다, 그 모습에 케빈의 차분한 감정은 아주 약간의 짜증이 빛났다.
"......소속 학파와 이름이 뭐지?”
"원소-아그니 소학파 소속 데릭 레드힐입니다. 교수님.”
데릭은 예의를 갖추되 당당하게 대답했다. 만약, 이로 인해 불이익을 본다 해도 기꺼이 감수할 의사를 내비쳤다.
자부심, 자기만족, 긍지, 자아도취와 같은 감정을 빛내며.
"그래, 데릭 학생. 저 직원이 자넬 평가하는 것에 왜 불만인지 구체적인 이유를 이야기할 수 있나? 합리적인 이유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정식 마탑 소속도 아니지 않습니까? 거기다 마력불생성증이고요. 수업에 관해 알아볼 때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웅성웅성. 학생들이 소리 냈다.
"정식 마탑 소속이 아니고, 마력불생성증인 게 문제인가?”
"저희를 평가하면 문제가 되죠. 자격이 없는 불량품에게 평가받는 건 다른 교수님들도 좋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불량품.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던칸이 죽기 전 자신은 불량품이 아니라고 말했다.
"난 이해가 안 되는군. 마법 전투 수업은 말 그대로 강해지기 위한 것. 그런데, 마탑 소속 여부와 마력불생성증이 뭐가 문제인가?”
“….교수님. 제가 잘못 이해한 게 아니면, 저 직원분이 마치 저희보다 강하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마탑에서 정식으로 훈련을 받은 저희보다요.”
"최소한 자네들이 쉽게 볼 사람은 아니지.”
“네?”
"강하다는 건 단순히 더 강한 마법을 쓰는 게 전부가 아니거든. 견문이 좁으면 으레 할 수 있는 착각이지.”
담담한 케빈의 말에 늘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던 데릭의 얼굴이 구겨졌다. 얼굴에 침이라도 맞은 듯 극도의 모욕감을 빛냈다.
"그럼, 견문이 좁은 제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확인할 수 있게 허락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합을 신청하는 건가?”
"예.”
데릭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케빈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구석의 올리버를 보며 물었다.
"제논. 해볼 생각 있나?”
"뭐..…. 일이라면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