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몸 누일 공간 (1) >
야렐리 아이스아이.
처음 올리버가 마탑에 왔을 때 길을 알려주고, 이후 케빈의 수업 일정을 묻기 위해 온 사람이었다.
몸에 지닌 양질의 마력을 통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짐작했으나, 케빈의 설명을 들으니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실력만 좋은 것을 넘어 탄탄한 배경까지 가진 사람이었다.
‘마법 명문가인 아이스아이 가문의 직계혈통에, 현 스카디 학파 원마스터(One Master)의 손녀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지. 거기에 마법 실력은 교수급이라 봐도 무방했고.’
교수급이라면 군에 종사해도 무방한 종군마법사 수준. 젊은 나이에 실로 대단했다.
실제로 케빈이 말하길 야렐리 본인만 원한다면 학년을 초월해 조기 졸업도 가능할 만큼 그녀의 실력은 출중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은 건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그녀의 성품 탓이었고.
물론 그렇다고 학생 수준 교육에 만족하는 건 아니라 했다. 집안의 인맥과 다른 교수들의 연구를 도우며 학생 이상의 지식을 쌓는 등 자기 개발에 열심이라 하였다.
어쨌건, 요점은 그런 그녀가 케빈의 수업에 신청했다는 것.
당연히 소문은 퍼졌고, 그로 인해 다른 학생들도 케빈의 수업을 신청해 바빠졌다고 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케빈의 반응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진심으로 원치 않은 듯 불만을 품었지만, 그렇다고 도망치거나, 요령을 피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의 감정과 별개로 그를 뛰어넘는 의무감과 야심으로 불만을 억제해 자신이 소임을 다하려고 했다.
나쁘지 않았다.
속이 복잡해 올리버가 그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었으나,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그 태도가 썩 보기 좋았다.
올리버도 그런 그의 모습을 본받기 위해 케빈이 말한 조건대로 서류를 빠르게 정리해 나갔다.
학년, 소속 소학파, 성적 등등 각 기준에 맞춰 알아보기 쉽게 말이다.
그중 원소학파가 아닌 타 학파의 학생들도 보였다.
올리버는 메모에 따라 타 학파 학생 서류에 표시를 따로 남겨 놓치는 일이 없도록 했다.
공간 학파, 모이라이 학파, 생명 학파, 순수 마력 학파 등등.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마치니, 시간은 대략 12시 30분쯤.
올리버는 챙겨 온 빵과 쨈, 사과, 우유로 가볍게 식사한 후,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케빈에게 정리한 서류를 가져다줬다.
그는 갑작스러운 일정으로 인해 바빠 보였으나, 올리버가 정리한 서류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의외, 놀람, 만족 등의 감정을 빛내며 말이다.
아무래도 포레스트에게서 배운 서류 정리가 헛수고가 아닌 듯했다.
기쁘기 그지없었다.
"쓸만하군.”
"말씀 감사합니다. 더 시킬 일은 없으십니까?”
“……수업 내용을 구성하기 위한 자료가 필요한데, 도서관에서 이 목록에 적힌 책을 빌려올 수 있겠어?”
올리버의 일솜씨를 본 케빈이 잠시 고민하더니 추가 업무를 부탁했다. 올리버는 기쁘게 수락했다.
마탑 취직, 휴가 등 공짜로 이런저런 혜택을 보는 게 마냥 마음 편치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나마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다 싶었다.
뭣보다 일을 돕는 것 자체가 올리버에게 충분히 도움이 됐고.
설명하기 힘들지만, 케빈의 일을 도움으로 마탑의 구성과 흐름을 협소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원래는 도서관을 이용하며, 수업을 듣기 위해 마탑에 취직한 것이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았다.
단순히 마법이라는 한정적 학문을 넘어 더 넓게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으니.
여하튼 아주 즐거웠다.
그렇기에 올리버는 지금 하는 일에 짧지만,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지체 없이 도서관으로 향했다.
***
“오.......”
직원신분증을 대자 자연스럽게 열리는 문.
올리버는 그 문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어찌나 감탄했는지 열린 문 사이로 바로 들어가는 대신 그 자리에 서서 저도 모르게 자동문의 원리를 관찰하고 파악했다.
도서관 자동문은 타워와 연결된 세계수 덕분인 것으로 추측됐다.
자세한 원리를 파악할 수 없었으나, 해당 세계수에 마법을 걸어 일종의 시스템을 부여한 거 같았다.
특정한 마력 패턴을 입력할 시 문이 열리게끔 하는.
가게에서 돈을 주면 물건을 받는 것과 근본적으로 같은 이치였다.
올리버는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문 앞에 있는 세계수 줄기에 직원신분증을 다시 한번 가져다 댔다.
신분증에 흐르는 마력과 세계수의 마력이 퍼즐처럼 맞물려 반응, 다시 문이 열렸다.
"흠, 흠….!”
올리버가 문 앞에서 계속해 알짱대자, 도서관 사서로 보이는 여성이 미간을 찌푸린 채 올리버를 노려봤다.
그녀의 감정에는 성가심, 불쾌함, 언짢음, 경멸, 무시, 얕봄 등 여러 부정적인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올리버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마탑에서 책 잡힐 행동을 하지 말라고 케빈이 저번에 말했건만, 그사이 까먹다니.….
올리버는 자동문을 지나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 사서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사과했다.
사서는 인사를 받아주지 않은 채 그대로 자기 자리에 돌아갈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한쪽에 앉아있던 학생들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뭐,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이곳에서 저런 자동문이 일상일 테니.
그렇지만 여태까지 저런 것은 본 적 없는 올리버에겐 신기할 따름이었다.
원리도 원리였지만, 세계수를 저런 식으로 활용하는 발상 자체는 아주 대단했다.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것과 손으로 여는 것.
솔직히 수고로움의 차이는 무의미했지만, 저 기술 자체는 엄청난 차이를 의미했다.
시간으로 따지면 백 년에서 이백 년 정도?
왜 시(市)가 마탑과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을 견제한다고 하는지 알 거 같았다.
규모라면 시(市)가 앞설 테지만, 보유한 기술력은 시(市)조차 위협을 느낄 수준이었다. 최소한 올리버가 느끼기로는 말이다.
“정말 재밌어…."
올리버는 낮게 중얼거리며 도서관을 둘러봤다.
멀린의 대저택에 있는 것과 비슷한 규모의 도서관은 마법으로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고 중이었으며, 구획 별로 방음(防音) 마법을 걸려 있어 이용자의 편리성을 확보해 주었다.
상당히 사치스러웠다.
‘아, 저기 있다.’
올리버가 한쪽에 비치된 거대한 기계 앞으로 갔다.
기계의 명칭은 ‘WAD-3’ 혹은 ‘와드3’로 모이라이 학파와 마법공학 학파가 합심해 만든 물건이었다.
마력만 사용료로 지불하면 위험 없이 세계수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기계 보조 장치로,
비록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몹시도 한정적이었지만, 넷 내비게이터가(Net Navigator) 아니더라도 세계수를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실로 대단한 물건이었다.
직접 보는 것도, 이용하는 것도 이번이 모두 처음.
하지만 올리버는 능숙하게 기계에 가동.조작해 케빈이 주문한 책을 찾았다.
동력인 마력은 몸에 미리 저장한 마력을 사용했고, 이용방법은 저번에 캐빈이 준 [시설 이용 규칙과 방법]에서 미리 숙지한 상태였기에 처음 사용하는 어색함만 빼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근데, 이상하네. 편리하긴 하지만, 꼭 사용자의 마력을 사용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나? 마석이나 마석 액화 연료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무슨 훈련의 일환인가?’
올리버는 와드3의 불편한 점에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필요한 서적의 위치를 메모해 곧바로 움직였다.
빌려야 할 책의 수량은 총 60권. 과목당 20권인 셈이었다.
다행히 모두 대여 가능한 상태.
올리버는 책을 담을 수 있는 카트를 챙긴 뒤 가까운 곳부터 접근했다.
“H-b012.”
“H-d020.”
“H-f121."
“J-a001.”
.
.
.
.
올리버는 적은 메모를 하나하나 옮으며 카트에 책을 담았다.
한 권, 두 권, 세 권 책이 서서히 쌓여갔다.
그러는 와중 올리버는 중간중간 다른 책을 훑어보며 다른 재밌는 게 없는지 살펴봤다.
아쉽게도 크게 눈에 띄는 게 없었는데, 그때,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드루이드의 자연교감 능력과 마법의 접목]이라는 책이었다.
‘드루이드라.’
올리버는 호기심이 동해 해당 서적에 손을 뻗었다.
탁! 탁!
올리버가 책을 짚자마자 누군가 한 박자 늦게 책에 손을 올렸다.
키가 큰 남성으로 붉은 머리카락에 하얀 피부가 돋보이는 자였다. 광고지에서 보던 전형적인 연합 왕국 귀족 느낌이랄까?
그가 올리버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이 책 좀 양보해줄 수 있을까? 때마침 필요한 거라서.”
그는 친절한 미소로 말했지만, 감정은 그 반대였다.
그는 이 책을 딱히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올리버에게서 무엇인가를 확인하려는 악의가 엿보였다.
‘흐음….'
올리버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이곤, 책에서 손을 땠다.
개인적으로 흥미가 동하긴 하지만, 당장 필요한 건 아니니. 뭣보다 지금은 일하는 중이었고.
생각보다 쉽게 양보해준 올리버를 보며 적발 남성이 미소 지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중요한 건 지금 맡은 일을 마저 하는 거였으니.
하지만 그건 올리버의 착각인 듯했다.
60권의 책 중 59권을 챙기고 마지막 한 권을 책을 챙길 때 다시 한번 적발 남성과 마주쳤다.
이번 책 역시 딱 한 권 남은 상태.
그는 노렸다는 듯이 올리버가 빌리려는 책에 한 박자 늦게 손을 올렸다.
“이거 우연이네. 또 여기서 만나게 된다니. 양보해줄 수 있을까? 지금 필요해서.”
또다시 거짓말. 올리버가 대답했다.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고마.....뭐?”
적발 남성이 아까 전과 달라진 올리버의 대답에 놀라움과 불쾌감을 빛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아까 전에 양보한 책은 일과 전혀 관련이 없는 책인데, 반해, 지금 책은 케빈이 말한 목록에 포함된 서적이었다.
즉, 업무.
올리버는 이에 관해 정중히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지만, 적발 남성은 아무래도 들은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는 올리버를 얕보며, 싫어하였는데, 방금 전 대답으로 작지만 미약한 적대감마저 생겼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팔에 홱하고 힘을 줬다.
힘으로 빼앗을 요량.
문제는 책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거지패를 나온 이후 캔트가 시키는 대로 꾸준하게 운동해 기초 체력을 기르고, 근래, 딘클리지의 근육 트레이닝을 받은 덕분에 어느새 힘이 좀 붙은 것이었다.
오히려 힘을 주면 올리버가 빼앗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근데, 그래도 되나?’
올리버가 고민했다. 마탑에서 올리버의 신분은 일개 직원에 불과했지만, 상대는 학생.
심지어 외관과 넘치는 자신감으로 볼 때 배경이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즉, 마찰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
어떻게 해야 일을 마저 완수하며, 마찰을 피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적발 남성이 몸에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심하진 않고 약간만.
그는 그 상태 그대로 마력을 끌어올려 마법을 사용하려一
"-도서관에서 시끄럽게 뭘 하는 거죠?”
은빛 곱슬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쓴 여성이 커다란 가슴에 책을 한 아름 안은 채 말했다.
야렐리 아이스아이였다.
***
놀랍게도 적발 남성은 아렐리의 등장에 바로 사과하며 물러갔다.
그녀에 대한 호감과 어려움, 밉보이기 싫다는 감정 등이 복잡하게 섞여 나타난 행동.
자신감이 넘치던 그가 쉽게 물러서는 모습은 퍽 신기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올리버는 별다른 어려운 없이 마지막 책을 챙길 수 있었고, 올리버는 도와준 야렐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녀가 딱히 도와줄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도움을 받은 건 엄연히 사실이었으니.
그러나 그녀는 올리버의 인사를 거절했다. 겸손함이 아닌 올리버에 대한 반감으로 말이다.
"그냥 소란스러워서 온 것뿐이니. 감사할 필요 없어요.”
말은 예의 발랐으나, 어감은 차가웠다.
그녀는 그러곤 떠나려고 했다. 올리버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뭔가 있는지 멈칫하는 여성.
"뭐가요?”
"그냥..…. 절 못 마땅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아뇨, 전혀요.”
야렐리는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얼버무렸다. 상대하기도 싫다는 뜻.
올리버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감도 잡을 수 없지만, 이 이상 물어볼 방법도 없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뭐랄까? 휴가 좀 다녀온 사이 일이 좀 꼬인 것 같았다.
"흐음.…”
"제가 한마디 할까요?”
야렐리가 가려다 말고 멈칫하며 말했다. 한마디 해줘야겠다는 감정이 빛났다.
"예, 부디.”
"마탑은 이 란다를 장식하는 가장 중요한 시설이랍니다.”
"예, 들었습니다.”
"그런 중요한 곳이니만큼 마탑 부지를 밟는 게 꿈인 사람도 꽤 되고요. 여기서 당신이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특권이라는 거예요.”
“예,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동문을 이용하는 것처럼요.”
올리버가 진심을 담아 말했으나, 또 실수한 건지 여성의 미간은 좁혀졌다. 웃기지도 않은 말장난이라도 들은 듯.
그녀는 뭐라 한소리 하려다 말고, 짧게 한마디만 했다. 감정 낭비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디 도련님인지는 알 수 없지만, 특권을 누리는 동안에는 그만큼 자기 일 똑바로 하세요. 게으름 부리지 말고요. 젊어서 자기 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늙어서 몸 누일 공간조차 얻을 수 없어요.”
"......?"
"그럼 이만.”
야렐리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도서관을 나섰다.
바라보고 있던 올리버는 야렐리가 남기고 간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려 했으나, 역시나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집이라면 내일 사러 가는데.
"아, 대여라 그런가?”
***
"여기 사인만 하시면 3년 동안 이 집은 선생님 것이 됩니다.’
L구역의 부동산중개인이 서류를 내밀며 올리버에게 말했다.
올리버는 바로 사인하며 현금이 담긴 가방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