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함정 (2) >
"어……. 잘 안 풀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올리버가 폭탄과 총알 세례를 맞고도 멀쩡한 오거맨을 보며 말했다.
핑크맨들이 오른쪽에 나타난 적들을 상대하는 사이 올리버도 반대쪽 적들을 똑같이 상대했지만, 그 양상은 다르게 흘러갔다.
올리버 쪽으로 온 갱들은 머릿수도 적고, 무장도 트렌치 클럽, 삽, 망치 등 빈약했지만, 다수의 돌연변이를 보유하고 있었다.
바지만 입은 사족보행 하운드.
키가 3미터가 넘는 오거맨.
올리버는 그들의 무장상태를 보고 최대한 끌어들인 다음 일제히 화력을 퍼부어 물리칠 생각을 했지만, 늘 그렇듯 일은 생각대로 흘러 가지 않았다.
갱 중 하나가 오거맨에게 뭐라 말하며 단독으로 돌격시킨 것이었다.
‘저 잡놈이 우리 물건을 훔치고 있어! 네 엄마도 욕했고! 가서 조져버려!’
오거맨은 올리버를 빤히 보더니 그 말을 믿는 듯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속도가 붙을수록 발소리는 커졌고, 땅도 조금씩 흔들렸다.
신체 능력이 뛰어난 대신 지능이 낮아 선봉에서 부려먹는다던데, 아무래도 사실인듯했다.
덕분에 애써 설치한 그러지 트랩(Grudge Trap)이 오거맨 하나만을 위해 발동됐다.
쿠아아아앙!!
검은 용암이 폭발하듯 그러지 트랩(Grudge Trap)이 위로 솟구치며 폭발했다.
웬만한 사람은 하반신을 날릴 수도 있는 위력이었건만 오거맨은 주저앉을 뿐이었다.
아픈 듯 비명은 질렀지만, 딱 그 정도.
왜 조나단이 가급적 마주쳐선 안 되는 골치 아픈 괴물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것 치고는 그리 호전적인 것 같지는 않지만.’
다리의 고통으로 오거맨이 주춤하는 사이 갱들은 두 번째 돌연변이 하운드를 풀었다.
목에 메인 쇠사슬이 풀리자 그들은 놀라운 속도로 달려와 올리버의 목을 노렸다.
순식간에 접근해 근접전에 취약한 흑마법사를 제압하겠다는 속셈.
다행히, 올리버는 충분히 반응할 수 있었고, 그러지 트랩 말고도 준비한 게 많아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미니언’
올리버의 부름에 따라 길 구석에 대기하고 있던 미니언들이 순식간에 접근 폭발해 오거맨과 하운드를 동시에 타격했다.
폭발 소리와 함께 일어나는 흙먼지.
뒤이어 다른 미니언들이 튀어나와 증오의 탄환을 토해 적들을 사살했으며, 올리버도 합세해 증오의 탄환을 난사했다.
빠른 다리와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하운드는 자신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그대로 허무하게 죽어갔다.
그도 그럴 게 폭탄에 휩쓸리고, 무차별적인 집중 사격을 받았으니.
그러나 놀랍게도 오거맨은 처음 그러지 트랩에 당했을 때처럼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찰과상만 입을 뿐 멀쩡히 일어섰다.
달라진 점이라면 아까 전보다 훨씬 빡쳤다는 거고.
저 뒤에서 Y구역 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량한 잔재주나 믿고 온 것 같은데, 여기서 그딴 건 안 통해! 행복아 죽여버려!”
"우어어어엉!!”
행복이라고 불리는 오거맨이 둔하면서도, 육중한 고함을 지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반대쪽 길목을 지키는 핑크맨들이 도우려고 했지만, 올리버는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 제자리를 지켜 달라고 부탁했다.
오거맨이 생각 이상으로 강한 것은 맞지만, 전선을 흩트리는 게 더 위험했다.
[바인 쉐도우(Vine Shadow)]
코앞까지 다가온 오거맨이 무엇인가에 걸려 앞으로 넘어졌다.
"크엉?” 소릴 내며 자기 발을 보자 한쪽 발을 묶은 그림자 촉수를 발견했다.
그림자 촉수는 끈끈이주걱처럼 넘어진 오거맨에게 엉겨 붙었고, 반대쪽 다리와 땅에 닿은 몸통, 팔까지 기어오르며 꾸물꾸물 점차 강하게 그를 구속했다.
기분 나쁜지 오거맨은 당황하며 발버둥 쳤지만, 촉수는 더 강하게 조여들 뿐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대로 그림자 촉수를 조여 살해했겠지만, 오거맨의 질긴 피부와 두꺼운 지방, 근육층 때문에 그건 힘들었다.
기껏해야 발목이나 잡는 게 전부.
그것도 아차 하면 오거맨이 힘으로 풀 것 같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올리버는 그림자 촉수에 신경 쓰면서도 검지손가락 끝에 감정을 모아, 집중, 응축시켰다.
‘더….. 더….. 더…..'
해잇 불릿이 이정도로 압축시키다니. 던칸을 상대하고 나서 처음 쓰는 거려나?
올리버는 해잇 불릿을 준비하며 저 뒤쪽에 있는 갱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오거맨이 그림자에 붙잡혀 허우적대는 모습에 당황했는지, 그 자리에 꼼짝없이 서 있었다.
올리버는 그 모습을 보며 차분히 해잇 불릿을 마저 응축한 후 오거맨에게 겨눴다.
“크으으으으응!!"
오거맨이 자세를 가다듬더니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양팔로 땅을 짚고는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림자에 담긴 감정이 급격하게 소모되며, 그림자 촉수가 조금씩 찢어졌다.
뚜둑. 뚜둑.…!
이대로 별다른 조치를 안 하면 자력으로 빠져나올 기세. 정말 대단했다.
"정말 진심으로 대단하십니다.”
"크엉?”
올리버의 칭찬에 헉헉거리는 오거맨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함께 오거맨은 자신을 향해 검지손가락을 겨눈 올리버와 눈이 마주쳤다.
"죄송합니다.”
퉁一!!!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림자 촉수에 저항하던 오거맨이 땅 위로 털썩 엎어졌다.
그의 머리에는 커다란 구멍과 함께, 검은빛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올리버는 얼굴과 몸에 묻은 오거맨의 피를 닦아냈다.
올리버와 함께 창고 밖을 지키던 핑크맨 둘은 충격, 놀라움, 두려움과 같은 감정을 빛내며 그 광경을 말없이 바라봤다.
“……혹시,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아니. 그게-”
[-물건 전부 회수 완료. 바로 올라간다.]
타이밍 좋게 조나단이 일을 끝마치며, 폐신전 밖으로 나왔다.
물건을 회수한 그는 경매품을 챙길 동안 바깥을 지켜준 올리버와 팀원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고마워, 수고했다. 데이브 씨도 고맙..…. 저건 뭐야?”
조나단이 인사를 하다 말고 쓰러진 오거맨을 보며 반사적으로 물었다.
정말 놀란 눈치. 그는 재빠르게 시선을 움직여 자기 팀원과 올리버를 번갈아 보더니 단숨에 상황을 파악했다.
“….혹시, 데이브 씨가 잡으셨습니까?”
"예, 제 쪽으로 나타나서요.”
"와우….. 대박이구만! 혼자서 오거맨을 잡다니. 팀장이 불렀을 때 뭔가 있겠구나 싶었지만, 빌어먹을 더 대박이군..…! 혹시 핑크맨 들어올 생각 없나?”
묵직한 마법 가방을 멘 베어가 호쾌하게 물었다.
음험한 속셈 없이 순수한 감탄과 인정에서 나오는 제의.
올리버는 정중히 거절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죄송합니다."
"왜? 우리가 이 바닥에서 가장 알아주는 곳인데? 너 정도면 팀장급까지 쉽게 오를걸? 정 안되면 나랑 팀장이 위에 건의해줄 수도 있어, 그럼, 조건도 최대한 맞춰 줄 거고.”
적극적인 베어를 조나단이 끼어들어 막았다.
“들어오고 싶었으면 먼저 말씀하시겠지. 우리가 왈가왈부할 게 아니니, 그만해.”
"아니, 자기 능력을 모르고 계속 좁은 우물에 지내겠다고 하니 답답해서 하는 말이지.”
"일단, 일이 먼저야. 시간은 이제 10분 남았어. 넉넉하지만 그렇다고 여유 부릴 순 없지. 특히 여기서는.”
베어도 동의하는지 "끙..…." 소리를 내며 반박하진 못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아쉽네. 저거 챙겨가면 목돈 좀 만질 수 있을 텐데.”
저거란, 다름 아닌 오거맨.
올리버도 아쉽긴 매한가지였다. 가급적 재료로 챙겨가고 싶었지만, 그러자니 저 거대한 덩치가 문제였다.
너무 커서 빅마우스도 삼키지 못할 정도.
토막 내면 품질은 떨어져도 어찌어찌 챙겨갈 수 있을 테지만, 그러자니 시간이 부족했다.
10분 안에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는데, 저 튼튼하고 거대한 시체를 손질하기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올리버 개인 용무 때문에 임무를 등한시할 수도 없지 않은가?
조나단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어쩔 수 없다며 임무에 집중하라고 팀원들에게 주의 주며 빠져나가자고 말했다.
"좋아, 그럼 이만 여기를-”
“-누구 마음대로?”
갑자기 끼어든 제3의 목소리. 모두 음원지(音源地)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전투 대형을 갖췄다.
어둠 속에 있는 남자는 그 모습을 보며 여유롭게 손뼉을 부딪쳤다.
짝.
짝.
짝.
박수 소리에서 여유와 비아냥, 승리에 대한 확신, 오만이 느껴졌다.
느닷없이 나타난 정체불명의 남자.
그러나 올리버는 이 남자에게서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몸 안에 어색하게 뭉쳐있는 생명력과 감정 같은 것 말이다.
올리버가 무심결에 물었다.
“..…혹시, 인육 요리사님 쪽 사람입니까?”
놀라는 조나단과 그 팀원들. 정체불명의 남자가 어둠 밖으로 나오며 대답했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이미 이겼다는 듯.
"호……. 머저리인 줄 알았는데, 아주 그렇지는 않은가 봐?”
"절 아시는지요?”
"얼굴 맞대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머저리들을 통해 봤거든.”
"머저리? ..…혹시, 경매장에 침입하신 분들 말씀하시는 건가요?”
“딩! 딩! 딩! 딩! 정답..…. 좀 쓸 만해졌나 싶었지만, 역시나 실패하고 말았지. 고기로 쓸 놈들을 받아들여선 안 됐어.”
고기? 올리버가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세 분 다 나름대로 뛰어나신 분들이셨습니다.”
"아, 정정.… 역시 머저리였구만. 그런 놈들을 변호해주다니.”
남자는 이를 씨익 보이며 웃었다. 대화가 더 길어지려는 찰나 조나단이 올리버를 말렸다.
"더 이상 대화하지 마세요. 시간 끌려는 겁니다.”
조나단이 그 말과 함께 전투복에 부착된 시계를 보여줬다.
대화 한 번으로 2분을 날려 먹었다.
"빨리 처리하고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잘못하면 이쪽으로 Y구역의 개떼가 몰려올 수 있습니다."
"누가 보내준대?”
"웃기고 앉았군!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모르겠지만, 혼자서 이 인원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혼자라니? 누가?”
남자가 뾰족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되물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몸에서 대량의 생명력과 감정을 뽑아낸 후 곧바로 흑마법을 다중 시전했다.
[리바이브(Revive)]
[오비디언스(Obedience)]
[버닝 라이프(Burning Life)]
[래이 더 파운데이션(Lay the Foundations)]
[머슬 업(Muscle Up)]
[스틸 본(Steel Bone)]
[퓨리(Fury)]
[엔도런스 스킨(Endurance Skin)]
손을 감싼 대량의 생명력과 감정은 주문에 맞춰 제각기 분리돼 주변에 널브러진 수십 구의 시체에 깃들었다.
주문에 맞춰 시체들이 되살아나며, 통제권을 획득, 주문을 견딜 수 있게 육체를 다지며, 그 위로 근력 강화, 뼈대 강화, 피부 강화 등 온갖 주문을 덧씌워졌다.
혼자서 수십 구의 시체를 살리는 것은 어렵고, 여러 질병계열 흑마법을 중복으로 거는 것도 쉬운 게 아니건만, 눈앞의 남자는 이를 여유롭게 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보인 오만한 태도가 합당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더 재밌는 거 보여줄까?”
[돌 메이킹(Doll Making)]
주문과 함께 올리버의 공격으로 산산조각난 시체 조각이 서로 합쳐져 거대한 시체 골렘이 됐다.
순식간에 상황이 뒤집힌 거였다.
"이런 썅!”
"크윽…!”
"대형 갖춰! 대형!”
핑크맨들이 갑자기 생긴 좀비 군대에 당황하면서도 지시에 따라 원형 대형을 짰다.
주변을 둘러싼 좀비 떼에 비하면 가련할 수준이었지만.
실제로 시체 골렘과 오거맨 좀비가 한 번만 팔을 휘둘러도 부서질 수준이었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 그럼 당장은 안 죽인다.”
남자가 투항을 권고했지만, 조나단은 포기하지 않고 질문해 정보를 모았다.
"조작계열 흑마법사? 인육 요리사는 질병계열인 걸로 알고 있는데.”
"편협한 시선이야. 하긴, 너희 수준에서는 그게 한계겠지. 뭐든 극에 다다르면 다 통한다고."
"그렇군. 근데 넌 극에 다다른 것 치곤 너무 멍청하군.”
그 말과 함께 남자의 머리 옆 허공에 보랏빛 마법진이 형성되더니, 총알이 날아와 박혔다.
보통 총알이 아닌, 마력이 머금어진 총알은 머리를 꿰뚫는 걸 넘어서 파괴했다.
턱 위를 산산이 말이다.
"조작계열 흑마법사는 능력과 상관없이 술사만 해치우면 별 게 아니지. 그래서 조작계열 흑마법사가 늘 숨어 있는 거고.”
머리가 박살난 남자를 향해 조나단이 말했다.
실로 효과적인 기습.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술사가 죽으면 좀비 역시 쓰러져야 마땅한데, 전부 제자리에 멀쩡히 서 있는 게 아닌가?
"크크크크크크크큭一! 역시, 멍청한 놈들 골려주는 건 재밌다니까. 고작 총알 한 발로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이거는요?”
올리버가 물었다. 그와 함께 저 멀리 있는 건물에서 새파란 섬광이 빛나더니, 무식하게 큰 마력 덩어리가 레이저처럼 날아와 남자를 강타했다.
지지지이이이이잉——!!!
어찌나 위력이 강한지 중간에 끼어 있던 오거맨 시체도 단숨에 날려버릴 정도.
레이저가 전방을 휩쓸며 땅을 불태우는가 싶더니 열에너지가 응축돼 폭발이 일어났다. 지이이이이이——쿠후훙웅웅!!
폭음과 함께 열기와 후폭풍이 일며, 폐허가 된 길목 앞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말이다.
모두가 경악하는 그때, 올리버가 두 발자국 앞으로 가며 말했다.
“..…이제 가면 될 것 같은데요.“